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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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이상이다. 동시에 희망이며 미래이다. 그것에 동의반복이거나 비슷한 말은 바로, ‘청춘’이다. 20대 청춘은 빛나는 시절이라지만 사실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는 안개의 시기다. 가능성이라는 희망의 언어가 청춘을 감싸지만 정작 그 가능성보다 불확실한 미래와 변화하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도 고민과 방황은 젊은 날의 특권이자 족쇄다. 청춘들은 자신이 세상에 나온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남들과 다르게 살 수 있는지, 부조리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되묻는다. 녹록치 않은 세상과 부딪치고 깨지면서 열정은 사그라지고 어느 날엔가 현실과 타협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의 청춘이나 젊음은 이유 없는-기성세대들의 몰이해에서 나온 단순한 평가가 대부분인-반항이거나, 방황하고 불안전하며, 치유 극복 불가능한 쾌락의 모습들로 그려진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자.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자신의 나이에서 완전하고 만족스런 삶의 모습을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가? 더군다나 스스로의 날개를 달지도 못하고, 또는 방향성을 깨닫지 못한 그들의 삶에 대해 어떤 근거로 방황이나 반항이나 불안정이란 단어를 붙일 수 있겠는가? 중요한 건 우리는 누구나 그 시기를 거쳤으며, 또 누구나 그 시기를 거쳐 우리가 된다는 것.

 

“청춘은 아름답다”는 식의 청춘예찬은 결코 식상해질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어떤 낯두껍을 하고 있어도 청춘은 한없이 투명에 가깝다. 누가 청춘을 비하해도 그건 진심이 아니다. 청춘은 그 이름만으로 가슴을 설레게 한다, 머리끝까지 피를 역류시키게 만든다, 식은 심장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것이 바로 청춘이라는 이유밖에 없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통해 숱한 경구로 장식된 ‘청춘’의 이름은 시대와 사회상을 반영하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어느 순간부터 일정 시기의 청춘을 특정한 말로 규정하고픈 욕망이 꿈틀거렸다. X세대, N세대, W세대, 등등 청춘은 시시각각 다른 닉네임을 얻기도 했다. 무한한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각종 문구는 카멜레온처럼 수시로 바뀌는 청춘의 빛깔을 대변한다.

 

그런데 그것들을 어떤 식으로든 규정짓거나 정의하는 것과 별개로 정체성은 청춘의 한 페이지에 빼곡하게 들어찬 화두다. 끊임없이 자신과 주변을 되묻는 과정은 통과의례이며 위태로운 외줄타기 또한 타당한 수순이다.

 

"여전히 삶이란 내게 정답표가 뜯겨나간 문제집과 비슷하다.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게 정말 맞는 것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151쪽)

 

나는 정답 비슷한 것도 본적이 없다. 사실은 그런 비슷한 생각도 해본 적이 없는 듯하다. 부끄럽지만 먼 앞날이나, 뭔가 대단한 것들을 고민하면서 살지 않았던 것 같다.

 

대학에 입학해서 첫 학기 중간고사를 볼 때였다. 당시 나는 장학금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그러기 위해서 좋은 성적이 필요했다. 논술형 필기시험에 자신이 있던 나였기에 첫 시험의 결과에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교수님께 직접 찾아가 채점 결과 반영이 궁금해서 정중하게 질문했다. 확인한 결과, 나의 답안지가 논리성이 떨어지고, 독창적인 나만의 생각이 아닌 전공 책에 있는 내용 위주로 써서 감점 처리가 되었던 것이었다. 답은 맞으나 그것을 도출하는 과정이 틀린 것이었다. 그 때에야 처음 알았다. 정답만 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 새삼스러운 진리를 나의 장학금과 바꾸고서야 알게 되었다.

 

사실 결과보다 그 과정이 기억에 더 뚜렷한 경우가 의외로 꽤 많다. 얼굴과 이름은 희미하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며 숨 막히게 애틋했던 순간들의 기억들과 수고들은 여전히 뚜렷할 수 있다. 무언가를 이루려 쏟아 부었던 어느 순간들이 사실은 삶의 거의 모두일 수 있다.

 

추억되지 않으면 청춘이 아니다. 청춘에 관한 이야기가 열에 아홉, 아련한 후일담의 형식을 입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랑이 진행된 시점과 추억되는 시점 사이, 그 시간적 이격에 의해 불처럼 뜨거웠던 감정은 무심히 휘발되고, 의식의 인화지에 남는 건 기갈난 현실에 의해 윤색된 과거의 빛나는 잔해들이다.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우는” 바로 그 청춘이 회고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이상은도 노래하지 않았나.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아마도 청춘의 흔적이 점점 희미해지고 직장인이 되었을 때 진짜 어른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어른이 되었고 어느 날 자신이 자라는 만큼 이 세상 어딘가에는 허물어지는 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제 아무리 견고한 것이거나 무거운 것이라도 모두 부서지거나 녹아내리거나 혹은 산산이 흩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이 시간의 침식 작용 앞에서 망연자실하거나 과거에 대한 그리움에 허기를 느낄 때, 우리는 그 때를 어른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른’은 무엇으로 살아야 한단 말인가? 이미 청춘의 꿈과 희망은 다 사라지고 그 어느 것에도 우리의 열정을 퍼부을 수 없는데 이제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나? 믿는 것이야말로 어리석다고 믿으며 그것도 아니면 여전히 돌이킬 수 없는 청춘의 열병에 몸살을 앓으면서 김연수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란 할 수 없는 일은 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일은 할 수 있는 존재다.”

 

김연수가 모은 청춘의 문장들은 청춘에 관한 예찬인지, 잃어버린 청춘에 대한 아쉬움 섞인 푸념인지 모호하다. 만듦새는 나쁘지 않다. 빛나는 청춘의 잔유물을 맹렬하게 기억하고 채워 넣는 김연수의 노력이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지나고 보면 그때가 ‘푸르고 싱싱한 순간’이었음을 안다. 그러나 젊음의 한때는 대부분 고통스럽다. 슬픔을 발로 차며 거리를 쏘다니고 저녁이면 쓸쓸한 어둠뿐이어서 늘 괴롭다. 아, 한심한 내 청춘. 세상은 절벽처럼 버티고 서 있는데 욕망은 웃자라서 갈 곳 몰라 서성인다.

 

그러나 김연수가 풀어낸 청춘의 다채로운 모습은 우리의 과거진행형이며 현재진행형이고 미래진행형이다. 청춘 특유의 설렘이 잊히는 순간은 가장 고통스럽다. 『청춘의 문장들』은 그 설렘을 일깨워준다. 그 젊음을 한없이 부러워하는 이들이 많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1968년 프랑스에서 학생운동이 극에 달했을 때, 학생들이 시가에 쳐놓은 바리케이드 안쪽에는 여러 낙서가 씌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Ten Days of Happiness’라는 글귀도 있었던 모양이다. 열흘 동안의 행복.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이다. 살아가거나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청춘의 세월은 행복하다. 청나라 사람 장호도 비슷한 글을 남겼다.

 

“꽃에 나비가 없을 수 없고, 산에 샘이 없어서는 안 된다. 돌에는 이끼가 있어야 제격이고, 물에는 물풀이 없을 수 없다. 교목엔 덩굴이 없어서는 안 되고 사람은 벽이 없어서는 안 된다.” (花不可以無蝶 山不可以無泉 石不可以無苔 水不可以無藻 喬木不可以無藤蘿 人不可以癖, 68쪽)

 

이때 ‘벽(癖)’이란 병적으로 어떤 대상에만 빠져 사는 것, 소위 ‘열흘 동안의 행복’을 구가하기 위해 어떠한 고통과 희생도 감수하는 것. 알고 보면 세상은 다 살게 되어 있다. ‘어른’들이 하는 말처럼 죽으란 법은 없다. 부와 명예도, 지복과 희망도 모두 한순간이지만 ‘벽’이 남아 그래도 이 세상을 살만하게 만든다.

 

우리는 안다. 비바람이 있기에 나무는 땅을 향해 뿌리를 더 깊이 박고, 가지는 태양을 향해 더 높이 뻗는다는 사실을. 힘든 방황일수록 그 끝에 깊은 통찰과 지혜가 따라온다는 진리를. 방황은 방황으로 끝이 아니라 성숙한 나 자신과의 만남으로 가는 과정이다.

 

‘내’가 ‘나’라는 사실조차 낯설었던 어린 시절을 지나 청춘의 그림을 그리는 시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내가 내 꿈을 꾸는 것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것. 청춘은 여러 빛깔의 홍역을 치르면서도 질긴 생명력을 보유한 채 여러 굴레를 넘나든다.

 

스무 살 즈음에 겪은 그 모든 것들이 화인처럼 맘속에 새겨져 있기에 스물에 모든 삶을 살았다고 우리는 믿게 된다. 그렇지만 삶은 스물 이후로도 한참 계속되었고, 여전히 그 삶은 진행 중이다. 스물에 겪었던 모든 일들이 되풀이 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 시절에 느꼈던 그대로의 삶이 지속되는 건 아니다. 더 깊어지고, 더 관대해졌으며, 더 충만해졌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것은 증명된다. 인생 스무 살은 계속되지만 결코 그때의 스무 살과 같을 수는 없다.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청춘의 시기에도 꿈, 이상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팍팍한 일상의 굴레가 수시로 젊음을 몰아세우는 한이 있어도 스스로 선택한 꿈의 색깔 앞에 꼬꾸라질 이유는 없어야 할 터이니. 이럴 때 공자의 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즐거워하되 음란하지 말며 슬프되 상심에 이르지 말자.” (樂而不淫 哀而不傷, 1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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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인문학 1 - 현실과 가상이 중첩하는 파타피직스의 세계 이미지 인문학 1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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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현실은 이미 현재와 잠재가 어지럽게 뒤섞인 혼합현실이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은 어느새 ‘현실가상’(real virtuality)이

되고 있다.

(109쪽)

 

 

 


 Scene #1  가상과 현실의 역전  

 

현대는 이미지의 시대이다. 이미지가 실체를 압도하고, 가상이 현실보다 더욱 진짜 같은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의 시대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가상현실을 진짜 현실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 가상의 이미지나 공간을 만드는 것으로 생각했다. 가상현실 공간하면 항상 떠올리게 되는 것이 영화 ‘매트릭스’에서의 공간이나 만화 ‘공각기동대’에서 전뇌(電腦)에 나타나는 현실과 구별되지 않는 가상의 세계이다.

 

여기서 가상의 세계는 디지털 매체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짜’의 세계로 간주된다. 가상현실의 성공여부는 디지털 매체를 이용하여 현실과 전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현실 같은 ‘가짜’를 얼마나 잘 만드는가에 달린 듯하다. 가상현실의 기술이 돌덩어리로 황금을 만드는 연금술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상현실이 현실과 똑같은 ‘가짜’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플라톤 이래로 철학자들은 참된 현실을 가상이라는 거짓의 침입으로부터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디지털 문명은 이 전통적 패러다임을 낡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오늘날 가상은 현실이 되고 있다. 사이버 공간의 아바타를 꾸미는 데에 현실의 돈을 지급하고, 거금으로 사이버 섬을 구입하여 사업을 구상한다. 누군가의 머릿속에 있던 상상이 밖으로 나와 현실이 된 것들이다. 결국 이미지와 실재의 관계가 역전돼 실재는 연기처럼 사라지고, 가상이 더욱 실재 같은 하이퍼리얼리티 현상이 벌어진다.

 

 

 Scene #2  파타피직스의 세계

 

사르트르의 말처럼 상상이란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상황을 전제하는 것이지만, 상상이 현재의 상황과 전혀 동떨어진 것은 아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은 상상이라 할지라도 상상은 언제나 현실의 상황과 맞물려있다.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기 위해 컵을 찾으려 하는 순간 눈앞에 있는 컵은 눈에 보이는 대로의 컵 이상이 아니다. 하지만 예술작품의 경우는 다르다. 눈앞에 보이는 물건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사물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실과는 다른 어떤 다른 상황이나 현실을 상상하게 만든다.

 

플라톤 이래로 현실과 가상의 문제는 예술 담론의 오래된 주제였지만 이 문제가 오늘날처럼 인구에 회자된 시대는 없었다. 누구나 알듯이 현실과 가상의 문제가 그 어느 때보다 화두가 되고 있는 까닭은 그것이 과거와 달리 단순히 예술적 담론의 영역을 넘어 직접적 현실의 테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제프리 쇼  「읽을 수 있는 도시」 연작, 1989~1991년

 

제프리 쇼의 <읽을 수 있는 도시>는 가상현실 예술의 고전이다. 이 작품의 관객은 인터페이스로 제공된 자전거를 타고 암스테르담이나 뉴욕 맨해튼의 인터페이스로 제공된 자전거를 타고 암스테르담이나 뉴욕 맨해튼의 구조를 재현한 가상의 도시를 탐험하게 된다. (중략) 이로써 자전거 여행은 도시공간을 탐험하는 것이자 데이터베이스를 탐색한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64쪽)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처음 우리의 일상에 들어왔을 때, 아날로그 매체와 구별되는 디지털의 특성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주위의 모든 것이 디지털화한 오늘날에 ‘디지털’은 딱히 새로울 것이 없는 일상이 되었다. 이미지를 텍스트로, 텍스트를 다시 이미지로 변환하는 디지털 기술은 일상으로 체험된다. 이제는 미디어가 의식을 지배한다. 전에는 텍스트를 통해 세상을 읽었다. 그러나 이제는 디자인에서 미감을 읽고, 게임에서 서사의 감각을 익히는 시대다. 문자의 자리에 사운드와 영상이 차지하고 있다.

 

'몰입기술'을 통해 현실의 주체는 가상의 세계에 입장한다. 우리가 잘 아는 '가상현실'이다. 또 영상인식, 위치추적 기술 등을 통해 현실공간에 가상의 좌표를 중첩시킴으로써 '증강현실'을 경험할 수도 있다. 이처럼 가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진 상태가 발생한다. 이를 파타피직스(Pataphisics)라 한다. 형이상학으로 번역하는 메타피직스(Metaphysics)의 패러디다. 파티피직스는 초(超)형이상학이다. 실은 온갖 우스꽝스러운 부조리로 가득한 사이비 철학을 말한다.

 

'파타피직스'는 가상과 현실이 중첩된 디지털 생활세계의 존재론적 특성이자, 동시에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디지털 대중의 인지적 특성이기도 하다. (10쪽)

 

여기서 진중권은 가상과 현실이 중첩되는 상태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파타피직스를 내세웠다. 과거에 창조성을 대표하는 것이 메타포(비유)의 능력이었다면 오늘날 창조성을 대표하는 것은 파타포(Pataphor)의 능력이다. 디지털 테크닉이 보편화된 파타피직스의 세계에서 ‘현실-가상’의 이분법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폐기된 도식이 되었다.

 

 

 Scene #3  상상이 개입되는 현실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특히 사진의 영역에서 현실과 가상의 테마는 그 어느 분야보다 뜨거운 감자다. 사진이 태어난 이후 그 새로운 매체의 존재 이유가 ‘현실의 객관적 재현’에 있었다면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더 이상 그러한 존재 근거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이미 ‘사진의 종언’이 현실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사진작가들은 그러나 저마다 다른 반응을 보인다.

 

 

 

 

 

이명호  「나무... #3」  2013년

 

(이명호) 작가는 현실의 사물을 가상의 세계에 등록시킨다. 현실의 사물을 가상의 세계 속에 옮겨놓는 ‘가상현실’ 체험은 디지털의 일상이다. 사진은 예로부터 2차원 평면에서 3차원 공간의 깊이를 만들어내는 원근법적 재현의 모범이었다. 하지만 나무 뒤의 차단막은 공간의 깊이를 가진 배경을 깊이 없는 평면으로 만들어버리고, 그 결과 그 앞의 나무마저 입체감을 잃어 거의 회화처럼 보이게 된다. 이는 현실의 사물이 가상에 등록될 때 평면적 이미지의 옷을 입는 것과 비슷하다. (90쪽)

 

여전히 사진의 객관적 기록성을 고수하는 작가가 있는 반면 일군의 작가들은 디지털 테크닉을 사진의 해방으로 받아들이면서 미디어아트의 영역으로 건너갔다. 사진매체를 통해 현실과 가상 사이에서 새로운 현실을 구축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단지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아닌 우리의 상상력 혹은 욕망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의 이 무미건조한 삶에 내일의 희망을 중첩시키면서 하루를 보낸다. 상상이 개입되지 않는 삶과 현실은 무의미하며 견딜 수 없다. 현실은 언제나 상상이 개입되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미디어는 양날을 지닌 칼처럼 우리의 현실에서 잔인할 정도로 욕망이 제거된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지만, 현실과 상상을 하나의 단일한 공간으로 중첩시킬 수도 있다. 미디어로서 사진은 디지털 사진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주로 우리의 상상력이 제거된 적나라한 현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사진을 더욱 더 그럴싸한 현실의 모습을 연출할 수 있다. 디지털 미디어의 등장을 통해서 현실과 가상이 겹쳐진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것이 더욱 용이해졌다.

 


 Scene #4  예술의 숙명은 가상과 현실의 간극 해소

 

미디어매체가 가상적인 지각을 가능하게 한다는 진중권의 지적은 가상현실과 관련 지어 볼 때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때 가상적이라는 말은 결코 말 그대로 ‘가상의’ 혹은 ‘가짜의’라는 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몸에 너무 배어 익숙해진 지각들로부터 추방된 지각들의 부활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가상'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세계 앞에서 기술적으로 실현해나가야 한다. 우리가 '기획'(Projekt)이 되는 것이다.

 

‘디지털 가상’은 우리 주위와 내부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공허의 밤을 밝혀주는 빛이다. 우리는 “그런 무(無)에 대항하기 위하여 그 무 속으로 자신을 투사(기획)하는 전조등”이다. (55쪽)

 

즉, 가상이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도 아니고 허구도 아닌 제3의 현실, 곧 중립적인 현실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예술가들이 작품을 통해서 보여준 가상현실은 바로 이러한 지각의 가능성과 맞닿아 있다. 예술이 미디어를 활용함으로써 관객과 작가의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이른바 ‘쌍방향성’인데, 이를 통해 관객은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존재, 나아가 작품의 공동 창작자로까지 등장한다. 예술가가 만든 가상이 진짜인지 가릴 필요가 무의미해진다. 가상과 현실이 중첩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미 현실이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미디어로 이루어진 중립적인 현실을 순응하는 판단중지인 셈이다.

 

가상과 현실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중첩된 제3의 현실은 미래의 예술 활동을 위해서도 너무나 매력적인 공간이다. 켜켜이 쌓여온 전통의 중압과 역사적 상상력의 한계를 뚫고 나갈 수 있는 것도 이 제3의 공간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원천적으로 디지털이란 낱말 자체는 불연속적으로 단절된 정보 처리 기술을 의미한다. 이 기술은 하나의 전체를 분할된 정보들의 종합으로 다룬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정보 처리 과정에서 조작과 변형을 가능하게 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미지는 오리지널과 외견상 분간할 수 없는 유사한 복제품을 생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래의 모습과는 무관한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디지털 이미지는 재현의 질서와 가상-현실 간의 경계를 해체시킨다. 모방에서 유래된 재현의 질서에서 벗어난 디지털 이미지는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그것은 실재와 허구를 넘나드는 환영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과 같다. 그 속에 자신의 고유한 예술적 존재를 정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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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단장하는 여자와 훔쳐보는 남자 - 서양미술사의 비밀을 누설하다
파스칼 보나푸 지음, 심영아 옮김 / 이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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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누드는 왜 불편한가  

 

인간의 벗은 몸은 논란거리다. 하지만 목욕탕의 전라와 수영장의 반라가 문제되지 않듯, 문제는 “알몸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또 얼마나 드러내고 감출 것인가. 영국의 미술사가 케네스 클라크는 ‘누드’(Nude)와 ‘네이키드’(Nakded)의 차이는 옷을 벗었다는 것에 대한 자의식의 유무라고 말했다. 네이키드는 ‘벗은’ 몸이고 누드는 몸 자체다. 그의 기준에 따른다면 말끔하게 차려 입은 두 남자 사이에서 침착하고 정숙한 자태로 벌거벗은 채 앉아 있는 여인이 등장하는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풀밭 위의 점식 식사」는 누드화고, 벌거벗은 모습을 들키고 부끄러워하는 여인이 등장하는 「수산나와 두 원로들」은 네이키드화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섹슈얼리티를 담아낸 수많은 미술 작품들이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관능미뿐만 아니라 에로틱한 상상, 신체의 변형이나 왜곡을 통한 변태적 성애를 대담하고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어 사실상 예술에 있어서 누드와 네이키드의 구별은 상당히 모호할 수밖에 없다.

 

여자 연예인들이 누드집을 낸다고 하면 사람들은 노골적인 성의 상품화를 기대하는 심리가 있다. 전통적인 윤리가 몸의 드러냄을 억압해 왔다. 따라서 이와 같은 기대심리를 합리화시킬 포장술이 필요하다. 바로 ‘예술’이다. 그렇다고 신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누드집이나 벌거벗은 여체를 그린 예술작품을 성의 상품화와 결부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금기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누드는 자유로운 자기표현이 될 수 있다.

 

예술 작품으로서의 누드가 관음증의 일종으로 비난을 받는 이유가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은 이성의 알몸을 좋아하는 엉큼한 본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몸을 보면 성적으로 흥분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누드를 무척 좋아한다. 특히 남자라면 벌거벗은 여자의 알몸을 그냥 안 보고 지나칠 수 있을까. 지금도 회자되는 호기심 가득한 영국의 양복점 직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창문으로 엿보는 행동 하나로 양복점 직원은 한순간에 관음증 환자가 되고 말았다.

 

 

 

 

 

 

존 콜리어  「고다이버 부인」  1898년

 

 

11세기 영국 코벤트리라는 도시를 다스리는 영주는 농민 수탈에 혈안이 돼있었다. 그러나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을 본 영주의 부인 고다이버는 남편에게 과중한 세금을 줄여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자 영주는 특별한 제안을 한다. 알몸으로 말에 올라 성 안을 한 바퀴 돌면 세금을 거두는 정책을 철회하는 것이다.

 

고다이버는 농민들을 구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사건은 곧 농민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코벤트리 주민들은 자신들을 위해 희생하는 영주 부인의 알몸을 볼 수 없다며 창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을 친 다음 그 누구도 내다보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알몸으로 말을 타고 가는 부인의 모습을 커튼 사이로 몰래 엿본 사람이 있었으니 톰이라는 양복점 직원이었다. 하늘도 노했는지 그는 나중에 장님이 되고 말았다는데 여기서 남몰래 엿보는 사람, 즉 관음증이 있는 사람을 피핑 톰(Peeping Tom)이라고 한다.

 

 


 Scene #2  욕망, 그림의 또 다른 이름    

 

사실 고금을 막론하고 명화는 온통 여체의 이미지다. 하지만 그림 속에 유달리 여자가 많다는 사실을 이상히 여기는 사람은 없다. 예전에도, 지금도 유명한 화가는 대부분 남자였으니까. 그림은 인간의 욕망과 닿아 있다. 욕망이야말로 그림의 또 다른 이름이다.

 

수많은 누드화를 봤을 미술사학자 파스칼 보나푸는 자신을 그동안 어두컴컴한 벽장 속에서 누드를 몰래 본 관음증 환자라고 커밍아웃(Coming out)했다.

 

"당신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따지고 보면 그림을 보는 행위는 관음증 환자의 행동과 다를 바가 없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림은 언제나 욕망과 맞물려 있었다." (8쪽)

 

그리스, 로마시대와 중세의 벗은 몸은 남녀를 불문하고 신화나 성서의 이야기를 차용해 교훈을 남기기 위한 표현의 수단이었다. 그림 속 누드는 인간이 아니라 성서나 신화속의 주인공, 즉 신의 모습인 것이다. 나체의 모델은 비너스, 아담, 이브, 제우스신, 아폴론 등이 자주 등장했다. 물론 당시도 성서나 신화의 이름으로 귀족들의 취향을 만족시켜 주기 위한 에로틱한 주제의 그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림을 보면서 음란한 생각을 해도 모두 용서받을 수 있었다. 성경 속 다윗과 밧세바의 불륜을 그린 한스 멤링의 「목욕하는 밧세바」를 주문한 사람이나 관람자는 한번쯤은 다윗처럼 음란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한스 멤링  「목욕하는 밧세바」  1485년경

 

 

이렇듯 화가는 매혹적인 여성의 모습을 통해 남자 관람객을 만족시켜주는 그림을 제작했다. 보는 이의 마음속에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인 역시 보는 이가 혹할 정도의 자태를 뽐내고 싶어 해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몸단장하는 여인의 모습은 오랜 시간 그림의 주제가 됐다.

 

누드화에서 여성은 피관찰자이며 관찰자는 남성이다. 여성은 그림 속의 여성을 통해 피 관찰자로서 판단되는 관습을 발견하며 보이지 않는 제3의 시선을 의식한 채 거울 앞에 앉아 몸단장을 한다. 한편 남자는 예술가로 관찰자로, 그리고 주체로 존재한다.

 

 

 

 

 

 

르누아르  「여인의 나신」  1876년

 

 

르누아르는 여성의 몸이 뿜어내는 매혹을 찬미하고 칭송하는 것에 자신의 예술혼을 쏟아 부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젊은 여인의 장밋빛 피부와 원활한 혈액순환을 짐작케 하는 피부’였다. 여성 누드는 그에게 단순히 예술의 기본이자 실험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장미를 그리면서도 여성의 누드를 위한 피부색을 연습하고 있다고 말할 만큼 이 주제에 대한 화가의 몰두는 대단했다. 노년의 르누아르는 류머티즘으로 붓을 쥐어야 할 손이 점점 굳어가고, 진통이 오는 고생을 겪었지만 핏줄처럼 펄떡대는 욕망을 멈출 수 없었다. 실제 그는 “여인을 그린 경우에는 그 가슴이나 등을 쓸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그림을 좋아한다”고 할 정도로 누드를 사랑했다.

 

 

 

 Scene #3  욕망이라는 이름의 샘

 

누드를 본다는 것의 즐거움은 오랫동안 남성성의 대표적인 표징이었다. 남성들에게 보편적으로 내재된 성적 특성인 ‘관음증’이라는 명분으로 길가는 여성의 신체 부위를 훑어보며 즐거워했고, 에로틱한 시선으로 감상해왔다. 근대 서양회화의 누드화에서도 여성은 오브제로서 보이는 광경이 되고 화가인 남성은 감상자가 된다. 예술 작품에 있어서도 이렇듯 본다는 것의 즐거움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선정적인, 관음증 환자의 시선으로 보는 그림 이야기가 아니다. 예술에 있어 최고의 질료이자 탐미의 대상이 인간의 육체라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여체의 그림을 보면서 야릇한 꿈을 꾼다. ‘관음증 환자’로 자처한 파스칼 보나푸는 이미 서문에서 우리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위선적인 독자가 될 필요가 없다. 그림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묵인하고 있었던 욕망을 끄집어 내 예술을 새롭게 보는 것이다.

 

 

 

 

 

 

조반니 벨리니  「몸단장하는 젊은 여인」  1515년

 

특히 한걸음 더 나아가 ‘보는 남성, 보여주는 여성’의 구도 속에 숨겨진, 남성의 눈을 통해 여성성을 획득하고 싶은 여성의 내밀한 욕망을 읽어낸다. 시대에 따른 소품의 등장과 달라진 화장법을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더불어 그림을 통해 아름다움을 원하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마주한다. 여인을 바라보는 은밀한 시선뿐 아니라 자신의 몸을 단장하는 여인의 욕망 말이다.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한 과감한 포즈나 화장을 하지 않은 맨얼굴 등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여인의 마음을 읽는 일도 즐겁다. 여성의 시선으로 남성성이 보완되듯 남성성에 의해 여성이 만개할 수 있다. 그리고 남성 화가에 의해 창조된 아름다운 여성 이미지 속에 숨겨진 미적 에너지도 긍정적으로 보듬어 안는다.

 

‘외설’과 ‘음란’이라는 낙인이 찍히기 쉬울 정도로 대중과의 소통이 용이하지 않은 누드는 계속 그려질 것이다. 욕망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화가들은 여인의 곡선이 아름다워서 누드를 그리지 않을 것이다. 옷이라는 가면을 없앤 후 가장 본래적인 육체를 통한 감정을 그려내고자 한 것은 아닐까. 욕망이라는 이름의 감정의 샘을 표현하는 것이다. 누드모델을 두고 그림을 그리는 것 역시 감정표현을 위한 정지동작을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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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논어 - 시대를 초월한 삶의 교과서를 한글로 만나다 한글 사서 시리즈
신창호 지음 / 판미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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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논어』를 읽고 있다. 『논어』를 읽으면 겸손과 베풂을, 나쁠 때는 용기와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가끔 『논어』의 본의를 왜곡하면서 읽을까봐 조심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논어』는 동양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사랑받는 고전 중의 하나다. 그런 만큼 각종 해설서, 주석서, 입문서 등도 다양하게 나와 있는 편이다. 사람들은 『논어』 원전의 목차에 맞추어 일부를 조금씩 맛보거나 원전 전체의 해석서를 읽는 수밖에 없었다. 또는 아예 경제적인 입장에서, 경영자의 입장에서  등등 한쪽의 시각에 맞추어 잘리고 편집된 『논어』를 보았다. 전공자가 아닌 이상, 『논어』가 말하려고 하는 전체의 모습은 그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논어』는 공자가 생전에 쓴 것이 아니라 그가 죽은 뒤 제자들이 모여 편찬한 어록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공자에 담긴 이야기 20편은 어찌 보면 ‘수수께끼 모음집’ 같은 모호한 성격을 띠고 있다.  『논어』 전체를 관통하는 체계적인 구성 원리나 앞뒤 문장 간의 연관성도 부족하다. 심지어 앞쪽에서 말한 내용과 어긋나는 문장이 등장해 읽는 이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논어』는 일반인이 쉽게 도전하기엔 너무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어』는 지금도 널리 읽혀지는 고전이다. 인터넷 서점 웹사이트에 ‘논어’를 키워드로 입력하면 관련 내용물이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 시판되고 있는 『논어』 해석본만 해도 100여종 정도는 넘을 것이다. 그만큼 한국 사회가 『논어』를 재생산하고 소비하고, 수용한다는 방증이다.

 

고전은 잘 숙성된 음식처럼 음미할수록 깊은 맛이 난다. 논어를 읽은 중국의 정자(程子)라는 학자는 “17, 18세부터 논어를 읽었으니 당시에 이미 글뜻은 알았으나, 더욱 오래 읽고서야 의미심장한 줄을 깨달았다”고 한다. 공자와 그 제자와의 문답을 주로 하면서 공자의 발언과 행적을 통해 삶의 지혜가 되는 말들을 간결하고 함축성있게 싣고 있다.

 

『논어』를 쉽고 바르게 읽는 것이 중요하다. 번역과 해석을 둘러싼 논란이 없을 수 없다. 시대에 따라 해석과 평가가 달라지곤 한다. 책 속 공자의 사상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그가 권력자의 입장에서 민중을 억압했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인간관계의 회복을 강조한 그의 가르침이 사회적 요구와 맞아떨어지면서 재평가되고 있다.

 

『논어』를 읽으면 다양한 역자가 해석한 내용을 같이 보는 편이다. 처음에 한 권만 쭉 읽다가 가끔 이해가 안 되는 문장을 나오면 또 다른 역자의 『논어』를 읽어본다. A라는 학자는 『논어』의 어느 문장을 이렇게 해석했는데, 과연 B라는 학자는 이 문장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했는지 서로 비교를 하는 것이다. 『논어』를 바라보는 역자의 해석은 일반적으로 동일하면서도 약간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논어』의 핵심사상을 한마디로 정의되는 ‘인’(仁)은 그 뜻이 무척 다양하다. ‘어질다’, ‘사랑’, ‘사람 구실’, ‘사람다움’ 등으로 규정된다. ‘인’은 천 가지의 얼굴을 가진 한자라고 보면 된다. 지금까지 수많은『논어』 연구가들은 동양 사유와 일상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의 개념을 둘러싸고 의미와 기원을 검토하고 해석했다.

 

다산 정약용의 『논어고금주』를 바탕으로 해석한 故 이을호 선생은 ‘인’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친애, 형과 아우 사이의 우애처럼 ‘두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사람의 길’이라고 소개했다. 반면 성백효 교수는 다산의 해석을 반박하는 입장이다. 인과 효제(孝弟)를 동일시한 다산을 비판하고 이를 각각 내면의 본성과 외면의 실천으로 구별한 주자의 『집주』를 높이 평가한다. 관점에 따라 『논어』를 바라보는 방식과 해석에 차이점이 있다. 그래서 『논어』를 한 번 완독했다고 해서 100% 이해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 많은 번역서들 사이에서 딱 한 권만 읽고 독파하는 방식은 오독할 위험성이 있다.

 

『논어』를 이제 막 열심히 읽기 시작했을 뿐이고, 동양사상의 전반적인 내용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초보자 수준이라서 괜히 공자 앞에서 『논어』라는 문자를 입에 담기가 조심스럽다. 시간을 내서라도 원문과 해석서를 같이 읽어 봐야 한다.

 

故 이을호 선생, 성백효 교수, 김원중 교수의 『논어』까지 세 권을 읽고 있다가 최근에 출간된 신창호 교수의 『한글논어』도 덤으로 읽기 시작했다. 한자 원문 위주로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자를 모르는 독자나 청소년들에게는 어렵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사실 고등학생 때 한창 한자를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을 때 겁 없이 독학으로『논어』한자 원문 중심으로 읽어보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참고한 책이 바로 성백효 교수의 『논어집주』였는데 작심삼일이 되고 말았다. 고등학생이라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입시 준비와 왕성한 호기심 때문에 한 우물을 깊게 파지 못하는 성격 탓에 무모한 도전으로 남게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논어』 읽기를 주저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이 바로 ‘한자’였다. 그 당시 교과목에도 ‘한문’이 있었고, 학교에서 실시하는 정기고사에서 만점을 놓치지 않을 정도였다. 한문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좀 더 다양한 한자를 익히고, 한문으로 된 문장을 풀이하는 법을 공부할 때 적당한 텍스트로 『논어』를 추천하셨기에 나름 심화학습을 시도해본 것이다. 한문 원전을 그대로 직역하고, 풍부한 분량의 역주까지 국한문 혼용체를 된 성백효 교수의 『논어』를 동양사상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일개 고등학생이 읽는다는 것은 맨 땅에 헤딩하는 격이다. 한자를 안다고 해서 한자로 된 『논어』를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읽다가 모르는 한자는 옥편을 찾아가면서 풀이했지만, 책을 읽어나가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당시 그렇게 여유롭게 한자 풀이를 하면서 『논어』를 읽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논어』가 번역이 잘 되었고, 공자 전문가가 공자 사상의 핵심을 제대로 짚어서 정리했더라도 일단 가독성이 떨어지면 독자는 부담이 생기고, 『논어』에 대한 흥미가 떨어질 수 있다. 동양사상에 입문하는 초보 독자라면 『논어』의 핵심 사상이 최대한 훼손되지 않으면서 우리말로 쉽게 풀이된 것을 읽으면 좋다.

 

신창호 교수의 『논어』는 일단 가독성이 좋다. 오래전부터 『논어』를 해석할 때 많이 사용된 텍스트인 주자의 『논어집주』를 한글로 풀이했으며 각각 문장에 대한 해설을 붙였다. 저자의 목표는 한글로 풀이된 『논어』를 통해 한국적으로 사유하려는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논어』의 주요 개념도 한자가 아닌 한글로 풀이했다. 성인군자(聖人君子)를 문장의 상황에 따라 ‘지도자’, ‘착한 사람’ 등으로 표현을 다르게 했고, ‘사’(士)를 기존의 ‘선비’라는 번역 대신에 ‘하급 관리’로 풀이했다. ‘인’은 ‘열린 마음’, ‘포용력’, ‘사랑’ 등으로 풀이했다. 한자 원문은 부록으로 따로 묶어 책 뒤편에 수록했다. 

 

故 이을호 선생도 경전의 한글화를 시도했는데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 다산의 『논어』해석을 따랐다. 주자의 해석을 따른 ‘한글로 된 『논어』’와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이을호 선생의 『한글논어』의 특징은 공자가 제자에게 직접 얘기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생동감 있게 문장을 풀이했다는 점이다. 또한 문장이 대체적으로 간결하다. 이을호 선생도 일반적인 『논어』역서처럼 각각 구절마다 ‘한자로 된 원문-풀이-해설’ 방식을 취하고 있는 반면 신창호 교수의 『한글논어』는 ‘풀이-해설’ 방식이다. 원문의 묘미를 느끼면서 읽고 싶은 독자라면 ‘선(先) 원문 후(後) 풀이’의 『논어』가 적합하지만, 한자를 잘 모르거나, 공자의 사상을 좀 더 가까이 알고 싶은 독자는 신창호 교수의『한글논어』를 읽는 것이 좋다.

 

특히 신창호 교수의『한글논어』는 책의 1부로 공자의 일생과 역사적 배경을 먼저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논어』를 좀 더 수월하게 읽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고 있다. 옥편을 찾아가면서 『논어』를 번거롭게 읽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다. 신창호 교수의『한글논어』도 가독성이 좋은데 이전까지 풀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논어』해석의 차별성을 두면서도 일상적인 언어로 쓰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논어』의 첫 문장 ‘학이’(學而)의 유명한 문장을 풀이한 것을 비교해본다.

 

선생 “배우는 족족 내 것을 만들면 기쁘지 않을까! 벗들이 먼 데서 찾아와 주면 반갑지 않을까! 남들이 몰라주더라도 부루퉁하지 않는다면 참된 인간이 아닐까!” (이을호 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동지(同志)가 먼 지방으로부터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면 군자(君子)가 아니겠는가. (성백효 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않은가?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 (김원중 역)

 

공자는 배움을 통해 성취하려는 삶의 전모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삶에 필요한 기예를 배우고 익혀라. 그것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을 알아주고 함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올 때, 이보다 반가운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남들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자신의 자리에서 역할과 기능을 충실히 해 나갈 때, 참된 사람은 그 진면목이 드러나리라!” (신창호 역)

 

『논어』는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계속 재해석되고 번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동양철학이나 관련 경전을 오랫동안 연구하고, 읽은 사람이 여러 명이 모이면 『논어』를 읽고 난 뒤의 소견과 해석에 제각각 차이가 있을 것이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역자의 해석이 지나치면 공자의 사상이 왜곡될 수도 있다.

 

하지만 『논어』의 문장 해석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데 집착한다면 배움의 단계가 무너지고, 다른 사람과 연대하는 신뢰가 사라진다.

 

“공자가 말하였다. 함께 배울 수는 있어도 똑같이 길을 갈 수는 없다. 함께 길을 갈 수는 있어도 똑같이 설 수는 없다. 함께 설 수는 있을지라도 똑같이 법도에 맞게 실천할 수는 없다.” (자한(子罕)편 중에서, 252쪽)

 

『논어』는 언어에 갇힌 낡은 지식 모음집이 아니다. 일상적인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윤리적 지침서이다. 신창호 교수는 서문에서 『논어』를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일상의 미학, 삶의 예술’이라고 밝혔다. 『한글논어』가 필요한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누구나 읽는 고전, 죽기 전에 한 번쯤은 꼭 읽어봐야 할 책이 단지 ‘어렵다’는 인식 때문에 책 속에 있는 그 훌륭한 지식이 모든 사람에게 공유되지 못한다면 일상과 동떨어진 학문을 집대성한 책이 되고 만다. 『논어』에 관한 오해 중 하나가 바로 ‘유교 경전’에서 느껴지는 근엄한 분위기다. 『논어』를 읽기 전에 왠지 증조할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어 공손하게 앉아 있는 것처럼 읽어야하는 느낌이 든다. 이러한 선입견 때문에 요즘 같은 시대에 『논어』읽기의 중요성을 간과하게 된다. 어른들 말씀이 잔소리처럼 여겨지고 귀담아 듣지 않으려는 젊은 세대처럼 말이다 . 하지만 어른들 말씀에 틀린 말이 없는 것처럼  『논어』는 우리의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본적 인간관계를 가르쳐주고 있다. 오래 읽다 보면 일상생활 속에서 뜻밖에도 자주  『논어』속의 구절들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우연한 만안남을 통해 읽었던 구절을 상시키시는 것. 이것이 바로 ‘일상의 미학, 삶의 예술’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닐까.

 

그때나 지금이나 삶의 본질이 바뀐 건 아니다. 따라서 공자의 일상적 삶의 생각을 전하고 있는 『논어』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증조할아버지의 꾸지람과 잔소리에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덕담을 전하는 것이다. 『논어』도 그렇다. 그 안에는 꼭 알아야 할 삶의 윤리와 일상의 지혜가 있다. 자꾸 생각하려는 두뇌에 힘을 빼고 읽는다면 『논어』가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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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2015-02-02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어 서평을 찾아보다가 cyrus님 서재에 또 왔네요.
저도 성백효 <논어집주> 읽다가 멘붕 왔었기 때문에 공감하며 읽었습니다.ㅋㅋㅋ
참 좋은 서평입니다.

cyrus 2015-02-02 21:17   좋아요 0 | URL
제가 논어를 읽은 지 얼마 안 됐고, 꾸준히 열독하지 않아서 깊이 알지 못합니다. 뭣도 모르고 자비로 <논어집주>를 사서 읽었는데 한자가 너무나 많아서 결국 중고서점에 팔았습니다. 아예 보지도 않는 책을 계속 책장에 방치해둘 수가 없더라고요. ^^;;
 

 

 

 

 

 

 

 

 

 

 

 

 

 

 

 

 

 

복어의 지느러미는 작다. 그래서 적이 다가오면 빨리 헤엄쳐서 도망칠 수 없다. 그 대신 적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몸을 서너 배로 부풀린다. 그래도 적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하면 몸에 테트로도톡신이라는 맹독 성분의 물질을 낸다. 복어의 독은 자기방어를 위한 생존방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복어의 독이 강할수록 맛이 좋다. 그런 위험천만한 맛이 얼마나 좋았으면 중국의 시인 소동파는 “사람이 한 번 죽는 것과 맞먹는 맛”이라고 극찬했을 정도이다.

 

고독도 마찬가지다. 이제 고독은 외로움과 쓸쓸함의 대명사가 아니다.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수동적 자기방어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 또는 자신, 더 나아가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고독함을 느끼지 않는다. 아니, 고독함을 느낄 수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 스마트폰에 집중하면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고, 혼자 고독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처럼 우리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적당한 양의 독은 약이 되지만 그 양이 지나치면 ‘중독’이 된다. 이것은 아름다운 고독이 아니다. 세상을 두려워해서 자신의 전부를 독에 던지게 되면 병적인 집착이 되어 옴짝달싹 못 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결국, 독 안에 든 쥐, 아니 고독 안에 든 은둔자인 것이다. 고독에 잘못 중독되면 자신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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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6-27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난 글쓰기를 하시네요 ㅎ
잘 지내시죠? 고독에 대한 것 왠지 저에게도 참 맞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갑니다 ㅠ

cyrus 2014-06-27 12:41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루쉰님. 저는 평소대로 생각날 때마다 글을 쓰는데요. 엄청난 일은 아닙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