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어의 지느러미는 작다. 그래서 적이 다가오면 빨리 헤엄쳐서 도망칠 수 없다. 그 대신 적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몸을 서너 배로 부풀린다. 그래도 적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하면 몸에 테트로도톡신이라는 맹독 성분의 물질을 낸다. 복어의 독은 자기방어를 위한 생존방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복어의 독이 강할수록 맛이 좋다. 그런 위험천만한 맛이 얼마나 좋았으면 중국의 시인 소동파는 “사람이 한 번 죽는 것과 맞먹는 맛”이라고 극찬했을 정도이다.
고독도 마찬가지다. 이제 고독은 외로움과 쓸쓸함의 대명사가 아니다.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수동적 자기방어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 또는 자신, 더 나아가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고독함을 느끼지 않는다. 아니, 고독함을 느낄 수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 스마트폰에 집중하면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고, 혼자 고독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처럼 우리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적당한 양의 독은 약이 되지만 그 양이 지나치면 ‘중독’이 된다. 이것은 아름다운 고독이 아니다. 세상을 두려워해서 자신의 전부를 독에 던지게 되면 병적인 집착이 되어 옴짝달싹 못 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결국, 독 안에 든 쥐, 아니 고독 안에 든 은둔자인 것이다. 고독에 잘못 중독되면 자신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독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