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 - 우리가 몰랐던 원자과학자들의 개인적 역사
로베르트 융크 지음, 이충호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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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945년 7월 16일 새벽 4시, 미국 뉴멕시코 주 앨라모고도 부근 사막. ‘카운트다운 제로’와 함께 불덩어리가 치솟으면서 거대한 인공 햇빛이 떠올랐다.

 

 

천 개의 태양의 빛이 하늘에서 일시에 폭발한다면,

그것은 전능한 자의 광채와 같으리라.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현장에서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의 전 과정을 지켜보던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의 책임자 오펜하이머(Oppenheimer)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가 읽었던 고대 인도의 경전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ītā)》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이제 이것과 똑같은 폭탄이 24일 후 일본의 한 도시 상공에서 투하될 것이었다. 미국 정부는 투항하지 않는 일본을 쓰러뜨리기 위해 이 ‘세계의 파괴자’를 내던질 계획이었다. 나가사키 주민들은 ‘팻맨(fat man)’라는 이름이 붙여진 원자폭탄이 터지면서 쏟아낼 비극의 태양을 맞게 될 운명이었다. 눈부신 섬광, 무시무시한 버섯구름과 함께 이날 이후 인류는 자신을 파멸시킬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되었다.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 원자력이 이렇듯 막대한 인류의 재앙을 초래할지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과거의 명저가 다시 태어났다.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은 원자핵의 실체를 밝히려는 과학자들의 지난한 여정과 원자폭탄이 만들어진 과정을 그린 논픽션이다. 이 책의 국역본은 1961년에 출간됐지만 절판되었다. 저자 로베르트 융크(Robert Jungk)는 과학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물리학자들의 ‘아름다운 시절’과 ‘고통스러운 시절’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그들의 삶과 업적을 흥미롭게 풀어냈다. 러더퍼드(Rutherford), 아인슈타인(Einstein), 하이젠베르크(Heisenberg), 닐스 보어(Niels Bohr) 등 여러 과학자가 원자력 연구에 나섰지만, 누구도 원자핵의 힘이 엄청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미지의 에너지를 발견한 기쁨을 느낌과 동시에 원자폭탄이 가져올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두려워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우라늄을 핵무기의 수준으로 농축하는 일이 당시 독일의 상황에서는 매우 무리라는 것을 알고서는 안심했다. 그는 원자력 연구의 방향이 ‘전쟁터’가 아닌 ‘연구소’로 향해지길 바랐다. 하지만 독일에서 히틀러(Hitler)가 권력을 잡으면서 물리학자 사이에 두려움은 더 커졌다. 하이젠베르크도 원자폭탄을 이용한 독일의 승리를 바라지 않았다. 한편 미국의 물리학자들은 히틀러가 틀림없이 원자폭탄을 개발해서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보어는 자신의 절친한 제자이자 동료인 하이젠베르크가 나치(Nazis) 정부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에 개입했다고 의심했다.

 

1941년 하이젠베르크는 보어가 있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강연하게 되었고, 자신의 내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보어를 만나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책은 이렇게 설명했다.

 

 

불행하게도 코펜하겐에서 하이젠베르크와 보어 사이에 중요한 면담은 처음부터 꼬이고 말았다. 보어는 하이젠베르크가 자신을 위해 열린 리셉션에서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옹호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사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사교계에서는, 특히 외국에서는, 개인적으로 말할 때와 다르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보어는 전체주의 정권하의 강압적 환경에서 터득한 이중적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중략]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물리학자들이 느끼는 강압적인 압력을 이해해달라고 호소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서서히 조심스럽게 대화의 방향을 원자폭탄 문제로 돌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상대방이 같은 행동을 하기로 동의한다면 그런 무기의 제조를 막기 위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것이라고 솔직하게 선언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두 사람이 과도하게 신중한 태도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바람에 결국 대화는 목표했던 것에서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 pp. 175)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의 발언을 통해 독일이 원자폭탄 제조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독일 물리학자들에 대한 보어의 불신은 미국 정부에 원자폭탄을 설계해야 한다는 확실한 명분을 주었다. 진주만을 공격당한 미국의 입장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종전을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원자폭탄을 선택했다.

 

제2의 전운이 감돌기 전에 유럽의 물리학자들은 지적인 모험을 연구의 가장 큰 목적으로 삼았다. 그때야말로 학자들의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었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시절’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정치 세력 간에 대량파괴 무기를 만들기 위한 경쟁이 불붙으면서 이들이 쌓아 올린 연구 성과는 원자폭탄이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을 탄생시키는 데 활용됐다. 책은 역사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자신의 연구가 무기로 현실화하는 악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물리학자들의 고뇌와 시대적 아픔을 전달한다. 당시 과학자들이 지녔던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 과학기술의 새로운 도약을 향한 열정, 원자력의 힘에 대한 두려움 등은 가치의 우열을 가릴 틈 없이 하나의 용광로에 던져졌다. 원자폭탄은 어느 한 사람의 독창적 발명품이 아니라 혼돈의 시대가 만들어낸 현대과학의 총체였다. 이 책에 나오는 과학자들은 역사의 주인공이자 피해자였다. 혼돈의 시대는 과학자들을 연구실에서 불러냈고, 그들을 괴롭게 만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사는 냉정하다.

 

 

 

 

 

※ Trivia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이 점령한 코펜하겐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는 이 일을 기화로 자연스럽게 옛 스승이자 친구인 닐스 보어를 찾아갔다. (pp. 173)

 

→ ‘기화로’를 ‘기회로’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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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8-09-05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면담이 성공했다면 역사가 바뀔 수 있었을까요? 조금씩 어긋나면서 묵직하게 흐르는 역사를 보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사건이었는가 싶다가도, 그래도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바뀔 여지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들고 그렇습니다.
뭐든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선택의 변곡점에서 보다 나은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게 적절한 개입이 이루어질 절묘한 타이밍이요.
과학의 양면성은, 부작용이 두려워 멈추기에는 지적인 호기심이 못지 않게 강한 이들이 늘 안고 가야하는 딜레마인가 봅니다.

cyrus 2018-09-05 11:47   좋아요 0 | URL
서로 간의 오해를 불식시키면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면 핵무기 개발 시기가 미루어졌을 거예요. 그렇게 된다면 냉전 시기에 핵무기가 만들어졌을 수도 있어요. 하이젠베르크와 보어와의 대화가 성공한다고 해도 분명 어느 시기부터 핵무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

나비종 2018-09-05 11:57   좋아요 0 | URL
핵무기에 대해서는 제 생각도 cyrus님과 같습니다. 조금 늦어졌더라도 만들어졌겠죠?ㅡㅡ;
또, 일본이 아니었더라도 그 무기를 사용할 명분을 누군가는 만들어서 어딘가에서 한 번은 터졌을 거라는 것도. .
 

 

 

1853년 7월, 미국의 매튜 페리(Matthew Perry) 제독이 이끄는 네 척의 군함이 에도 만(현재의 도쿄 만)에 들어왔다. 페리는 해안을 봉쇄하며 통상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이듬해 일본과 미국은 화친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서양 따라잡기에 나선 일본은 개항 50년 뒤 열강의 일원으로,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에는 강대국으로 인정받았다.

 

 

 

 

 

 

 

 

 

 

 

 

 

 

 

 

 

 

 

* 스기타 겐파쿠, 마에노 료타쿠, 나카가와 준안 《해체신서》 (한길사, 2014)

* 이종각 《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 (서해문집, 2013)

 

 

 

 

 

 

 

 

 

 

 

 

 

 

 

 

* [품절] 이종찬 《난학의 세계사》 (알마, 2014)

* 타이먼 스크리치 《에도의 몸을 열다》 (그린비, 2008)

 

 

 

과연 무엇이 일본의 근대화를 만들었을까? 페리 제독의 강압적인 요구를 시작으로 일본이 근대 국가가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일본의 근대화는 오랫동안 누적된 도약이다.

 

일본 전국시대의 다이묘(大名: 대영주)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1549년 규슈(九州)에 상륙한 스페인의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 Xavier)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를 허용했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도 선교사들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출신의 선교사들은 비단 종교 활동만 한 것이 아니었다. 서양문물을 일본에 전해주는 역할도 했다. 일본은 선교 활동과 무역 활동을 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람들을 ‘남만인(南蠻人)’이라고 불렀다.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임진왜란은 끝났고, 일본은 그의 사후 권좌를 둘러싼 심한 권력 투쟁으로 들어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130년이나 계속된 전국 시대는 막을 내린다. 도쿠가와 가문의 막부(幕府)가 통치하는 에도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 후 일본은 약 2백 년 동안 평화를 누린다. 도쿠가와 막부는 예수회가 교황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세력으로 판단했고 1612년부터 기독교 선교 금지령을 내렸다.

 

도쿠가와 막부는 스페인과 포르투갈과의 교류를 끊으며 쇄국 정책을 취했고, 기독교 포교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네덜란드인들에게 나가사키의 인공 섬 데지마(出島) 거주를 허가했다. 네덜란드는 기독교 선교를 포기하는 대신, 무역을 허락받았다. 도쿠가와 막부는 데지마에 관리를 상주시켜 이곳을 통해 입수되는 정보를 바탕으로 군사기술, 의학, 과학 등 선진기술과 학문을 받아들이고,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일본은 이미 13세기부터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여 무역 시장에 뛰어들었고, 히데요시는 ‘주인선(朱印船)’ 정책을 실시하여 일정한 조건 하에 허가를 받은 대외 무역을 허용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일본은 네덜란드의 발전된 문명을 ‘난학(蘭學)으로 체계화하고, 이를 통해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난학의 형성에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에도 시대의 의사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다. 스기타는 직접 해부 현장을 참관하고, 나가사키의 역관(譯官)을 통해 네덜란드어 해부 서적을 입수한다. 스기타가 참고한 해부 서적은 독일의 의학자 요한 아담 쿨무스(Johann Adam Kulmus)가 1772년에 펴낸 <Anatomische Tabellen>를 네덜란드어로 번역한 ‘타팔렌 아나토미아(Tabulae Anatomicae)였다. 스기타는 네덜란드어를 배운 난학자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澤)와 네덜란드 의학에 관심이 많은 의사 나카가와 준안(中川淳庵)과 함께 그 해부서를 일본어로 번역할 것을 결심한다. 그들은 변변한 네덜란드어 사전도 없이 3년 만에 타팔렌 아나토미아를 《해체신서(解體新書)라는 이름으로 번역하는 데 성공한다.

 

 

 

 

 

 

 

 

 

 

 

 

 

 

 

 

 

* 가토 슈이치, 마루야마 마사오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 2000)

 

 

스기타는 만년에 난학의 발전과 《해체신서》의 탄생 과정을 적은 《난학사시(蘭學事始)를 발표한다. 《해체신서》의 번역을 본격적인 ‘난학의 탄생’으로 본다면, 《난학사시》는 ‘일본 근대화의 초석’이 된 책이라 할 수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난학사시》의 가치를 재발견하여 ‘탈아론(脫亞論)을 내세운다. 과거 일본의 번역은 중국 한자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체신서》는 일본식 한자로 번역한 책이었고, 《해체신서》 번역은 단순히 서양 문물의 수용 행위가 아닌, 중화주의에 대한 도전이자 부국강병을 위한 중대한 과제였다.

 

《난학사시》의 한국어 번역문은 《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서해문집, 2013)《난학의 세계사》 알마, 2014)에 수록되어 있다. 두 권의 책속에 있는 《난학사시》 번역문을 같이 읽으면 사소한 차이점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야마가타 번 의사인 야스토미 기세키란 사람이 에도 고지마치에 살고 있었다. 그는 나가사키에 유학을 가 ‘오란다[주] 25문자’를 배운 뒤, 그 문자와 ‘이로하 47문자(いろは, 일본어 가나 문자를 배열하는 순서)’를 비교한 표 같은 것을 가지고 돌아와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오란다어 책도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종각 옮김, 《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 pp. 211)

 

 

야마가타 번 의사였던 야스토미 기세키라는 사람이 고지마치에 살고 있었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유학하면서 알파벳 25자를 익히고 그 문자로 쓰인 《48문자 첫걸음》을 가지고 돌아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자신은 책도 읽을 수 있다고 떠벌리고 다녔기에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종찬 옮김, 《난학의 세계사》, pp. 40)

 

 

 

이로하(いろは)는 일본의 고유 음절문자 ‘가나’의 첫 세 글자를 뜻한다. 가나를 하나씩 배열하여 ‘ABC송’처럼 만든 노래가 있다. 그러므로 가나의 ‘이로하’는 영어의 ‘ABC’에 해당한다. 이로하 노래의 탄생 과정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1192)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시기에 나온 이로하 노래는 ‘가나 47글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ん’을 포함한 가나 48자로 채워진 이로하 노래는 메이지 시대 때 나왔다. 따라서 기타가 살았던 에도 시대에 널리 애송된 이로하 노래는 ‘가나 47글자’로 된 것이다. 《난학의 세계사》의 ‘48문자 첫걸음’은 오역이다.

 

 

[주] オランダ, 네덜란드의 일본어식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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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9-04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이 네델란드에 대해 우호적이라고 하더라구요 그 대표적인 게 17세기 네덜란드 거리를 재현한 테마파크인 후쿠오카에 있는 하우스텐보스죠! 졸업여행을 거기갔었는데 글을 보니 기억이 나네요 ㅎㅎ

cyrus 2018-09-04 13:08   좋아요 0 | URL
네덜란드를 잘 아는 나라는 일본 밖에 없을 거예요. ^^

2018-09-04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9-04 13:20   좋아요 0 | URL
고등학생 시절에 세계사를 공부한 적이 있어요. 제가 배운 세계사 교재에는 근대화의 시작점을 페리 제독의 등장으로 보고 있었어요. 난학에 대해서는 비중있게 설명하진 않았어요.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에 이미 동아시아 일대에서 무역을 시작했어요. 그 과정에서 동아시아에 진출한 서양의 무역 상인들을 만나면서 서양식 무기를 들여올 수 있었어요. 일본은 그 무기를 가지고 조선을 침략했죠.
 

 

 

 

 

 

 

 

이번 주부터 시작해서 3주 동안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나남, 2010)를 읽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2004년에 나온 2판이다. 2판의 부제목은 '앎의 의지'이다. 푸코는 성의 역사6권으로 펴낼 계획을 세웠다. 1976년에 1앎의 의지가 나왔고, 2쾌락의 활용(나남, 2018)3자기 배려(나남, 2004)[1]는 푸코 사후(1984)에 출간됐다. 푸코는 자신이 쓴 원고가 사후에 출판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고 한다. 푸코의 친필 원고는 그의 연인이었던 사회학자 다니엘 데페르(Daniel Defert)가 가지고 있었다. 그는 2012년에 푸코의 친필 원고를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했다. 학자들은 유족들의 동의를 얻어 친필 원고를 정리할 수 있었고, 올해 초에 4육체의 고백이 공개됐다.

    

 

 

 

 

 

 

 

 

 

 

 

 

 

* 미셸 푸코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나남출판, 2010)

     

 

성의 역사푸코의 말년을 대표하는 역작이다. ‘이성권력의 관계에 천착해 온 푸코의 작업을 이해하지 않은 채 성의 역사독서에 도전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앎의 의지성의 역사시리즈의 서문에 해당한다. 2백 쪽이 되지 않은 서문(2판 번역본은 177쪽이다)이라고 해서 얕보다간 큰코다친다.

    

 

 

 

 

 

 

 

 

 

 

 

 

 

 

 

 

 

 

 

 

 

 

 

 

 

 

 

* 하상복 푸코 & 하버마스 :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김영사, 2009)

* [절판] 요하나 옥살라 HOW TO READ 푸코(웅진지식하우스, 2008)

* 양운덕 미셸 푸코(살림, 2003)

* 피에르 빌루에 푸코 읽기(동문선, 2002)

    

  

푸코는 1981년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Libération)>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연구 작업을 자서전의 한 일부라고 말했다. 그는 동성애자였다. 푸코는 동성애가 정신병으로 분류되어, 병리학적 증상으로 제조되는 과정과 그 원인을 알려고 했다. 그에게 연구 작업은 자신의 온전한 삶을 찾아내 자기 역사로 새롭게 기록하는 일이었다. 푸코는 정신병을 바라보는 학계의 다양한 시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광기라는 개념을 규정하는 권력의 실체를 추적한다.

    

 

 

 

 

 

 

 

 

 

 

 

 

    

*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나남출판, 2003)

    

 

 

1961년에 발표된 푸코의 박사 학위 논문 광기의 역사(나남출판, 2003)광기가 정신병으로 분류되는 역사를 다룬 책이다. 근대는 미치광이를 이성이 상실된 자로 규정했다. 근대 이전에 살던 미치광이는 정신병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합리적 이성과 과학이 버무려진 계몽의 시대’, 즉 근대 사회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광기를 본격적으로 차별하고 탄압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푸코에 따르면 광기가 결정적으로 정신병으로 판정되기 시작한 것은 1656년에 세워진 대감호였다. 한센병(나병, 문둥병)이 사라진 후 환자 수용소는 정신병자들을 가둬놓는 대감호로 탈바꿈한다. ‘이성이 상실된 자는 인간이라 할 수 없다. 광기는 동물성을 상징하게 되고, 미치광이는 동물 또는 괴물로 취급받는다. 그리하여 미치광이는 정신병자라는 이름으로 추방되고, 축출되며, 격리되어, 감시되며 처벌을 받는다. 푸코는 광기를 탄압하는 주동자로 서구 사회의 이성을 지목한다. 인간의 이성을 중시해 온 인류는 관찰과 실험에 기초한 과학적 사고를 발전시키며 사회를 종교로부터 독립시켜나갔다. 그러나 자유사상, 평등 이념과 맥을 같이한 근대의 이성은 이성과 반대되는 존재를 배척했다. 푸코는 자유‘해방의 편에 섰던 이성 중심주의의 폭력성을 비판한다.

    

 

 

 

 

 

 

 

 

 

 

 

 

  

*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나남출판, 2016)

    

 

 

권력에 맛을 들인 근대인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힘을 휘두른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나남출판, 2016)에서 상세하게 보여준 것처럼 근대의 권력은 효율적으로 죄수를 통제해왔다. 개인은 공간적으로 구획돼 감시되고, 시간상으로 일과표에 의해 통제되면서 권력에 예속된다. 감옥, 군대, 병원, 학교는 만인을 감시하는 근대적 공간이다.

 

푸코가 성 담론을 통해 권력의 속성을 파헤치고자 펴낸 책이 바로 성의 역사. 섹스(sex)에 대해 말하도록(고백하도록) 부추기는 권력은 성 담론을 확산시킨다. 종교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근대 이전에 가톨릭 신자들은 자기 성찰의 목적으로 성욕에 대해서 고백했다. 17세기 이후에 부르주아 사회가 되면서 섹스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성의 장치가 작동되었다. 이 과정에서 생식을 위해서 필요한 섹스와 그렇지 않은 섹스(동성애, 사도마조히즘)를 분류하는 성 지식이 등장한다. 생식과 무관한 일탈적 성욕 또는 성행위는 교정 대상이 된다. 푸코는 성 담론이 형성된 근대를 증가의 시대로 보았으며 이때부터 성적 도착이 확립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근대사회가 섹스를 억압한 시대였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가설로 설정하여 비판한다. 푸코가 생각하는 근대사회의 섹슈얼리티는 성을 검열하고 억압하는 분위기에 대항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다. 권력이 만든 성의 장치는 성을 알고 싶고, 말하고 싶은 근대인의 욕망을 촉진했다. 감옥, 병원, 그리고 국가는 거대한 성의 장치이다. 성 담론 형성에 관여하는 의사, 정신의학자는 이성애혼인등의 기준에 어긋난 섹슈얼리티를 분류하는 지식-권력(pouvoir-savoir)을 가지고 있다. ‘지식-권력은 관찰과 감시가 은연중에 작동되는 사회를 만들어 개인의 생활과 섹슈얼리티를 극도로 제한한다. ‘지식-권력은 세상을 움직이는 은밀하고도 거대한 힘이다.

    

 

 

 

[] 알라딘에 성의 역사’ 3권을 검색하면 부제목이 자기에의 배려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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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어떻게 살아남을까
우에노 지즈코 지음, 박미옥 옮김 / 챕터하우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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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자유에 있다. 원하는 직업을 자유로이 선택하고, 사용자와의 교섭에 의해 노동조건을 협정하는 권리가 인정된다. 시장경제는 간혹 오류가 없는,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치장되곤 한다. 정부의 정책 실패 이후에는 시장의 논리를 무시한 탓이라는 진단이 내려진다. 이러한 진단은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이론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원래 신자유주의는 복지병과 생산성 저하로 몸살을 앓던 영국과 미국에서 1980년대에 대처리즘(Thatcherism),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등의 이름으로 등장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주요 내용은 규제 완화, 공기업의 민영화, 노동시장의 유연화, 정부지출 축소, 감세를 통한 기업경쟁력 제고, 산업구조조정 등이다.

 

경제적 및 정치적 자유가 신장된다 하더라도 먹고사는 것이 힘겹다면 인간다운 삶이라고 볼 수 없다. 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가난에 허덕이는 이른바 ‘노동하는 빈곤층’, 비정규직 문제는 오랫동안 계속 미뤄진 난제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전체 정규직 노동자의 절반을 훌쩍 뛰어넘은 지 오래다. 정규직들은 살아남기 위해 신자유주의의 허구적 차별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만, 비정규직을 무시하는 만큼 자신의 존엄성도 파괴된다.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상황은 공포 그 자체이다.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서는 숨 쉬는 자유조차 허락받지 못할 것처럼 지친 일상의 문화가 계속되고 있다.

 

노동시장으로 진입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증가는 질적 저하를 대가로 이루어진다는 것에 그 심각성이 있다. 신자유주의 노동시장은 바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양산을 통해 그 경쟁력을 확대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여성 노동의 대다수는 비정규직의 얼굴을 하고 있다. ‘노동의 유연화’가 여성 노동자들을 점점 더 조직적으로 주변부 노동예비군으로 이용한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국가는 재생산노동(가사, 양육)의 책임을 여성에게 일차적으로 부여하면서 여성 노동력을 비정규직의 형태로 노동시장에 흡수하려는 정책을 추진한다. 국가는 여성을 한낱 아이 낳는 기계로 본다.

 

그렇다면 이렇게 고통스러운 여성의 현실을 바꿔낼 희망적인 전략은 있는가?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를 위한 ‘젠더 평등 정책’이 답인가? 여성 노동이 존중되고 고용환경이 개선되는 노동정책. 참 좋은 정책이다.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여성 평등’으로 포장된 신자유주의 정치는 여성을 기만한다. 마치 붕어빵 속에 붕어가 없듯, ‘여성 평등’ 속에 ‘여성’이 없는 격이다. 여성 노동자들조차 신자유주의 전략에 포섭되는 이유는 젠더 평등 정책, 여성 할당제 등을 절호의 ‘기회’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페미니스트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上野 千鶴子)는 여성의 고용 참여를 환영하고, 페미니스트 못지않게 ‘여성 평등’을 내세우는 신자유주의 정권의 전략을 의심한다.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일본은 1985년에 ‘남녀고용기회균등법(균등법)을 제정했다. 1991년에 육아휴직법, 2001년에 가정폭력방지법이 만들어졌다. 우에노 지즈코는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일본 여성의 삶이 좋아졌는지 팍팍해졌는지 되돌아본다. 그녀가 내린 결론은 ‘Yes or No’다. 좋은 점이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선택을 강조한다. 여성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게 됐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선택지'는 다양해졌다. 그렇지만 정부가 이야기하는 여성의 의제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맞물려 이뤄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은 여성을 가족 내 보살핌의 일차적 책임자로 규정한다. 가족 중에서도 여성이 돌봄 노동 영역을 부담하고 있다. 여성의 재생산 노동에 대한 고려 없이 진행되는 젠더 평등 정책은 가부장적 성차별 구조를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신자유주의는 여성의 생산, 재생산 노동의 이중 부담과 희생을 강요하고 성적 불평등을 확대하고 있다. 그리고 정규직 여성 노동자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간의 양극화(여여 격차)가 고착하고 있다.

 

우에노는 ‘기이한 관계’라는 표현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여성 혐오 현상이 내셔널리즘과 뒤엉킨다고 지적한다.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 비기득권층으로 전락한 사람들(남성)이 내셔널리즘에 기대려 한다.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내부에 적을 만드는 전략으로 ‘여성 혐오’, ‘혐한’을 조성한다. 정치권에 향해야 할 일본인의 분노가 여성, 한국인에게 쏟아지고 있다. 우에노는 혐오를 부추기고 방관해온 고이즈미, 아베 정권을 비판한다. 신자유주의는 ‘성공한 여성’을 앞세워 성차별 해방 분위기 조성과 여성을 경제적 주변부로 몰아내는 ‘여성 빈곤화’를 동시에 달성한다. 그런데 내셔널리즘은 결혼하지 않는 ‘성공한 여성’과 페미니스트를 저출산 문제의 주범으로 몰아세워 공격한다.

 

우에노는 페미니즘이 대응하기 어려운 상대가 신자유주의라고 말한다. 신자유주의 장벽은 그렇게 견고할까? 신자유주의 사회의 여성 문제는 복합적인 원인이 중첩된 골치 아픈 문제이다. 그녀는 여성 친화적인 정책 추진에 속도를 내는 사회적 분위기가 페미니즘의 비약적 발전이라고 이야기하는 반응에 냉정한 시선을 던진다. 페미니즘이 대중화되는 과정이 신자유주의의 흐름과 겹치기 때문이다. 《여성은 어떻게 살아남을까》는 페미니즘의 대중화와 신자유주의 시대에 마주하는 일본 여성 문제의 현주소를 조명한다. 우에노는 이 책에서 ‘여여 격차’와 여성 분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페미니즘의 투쟁 방식을 지적하면서, 그 원인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진지하게 성찰한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페미니스트들은 지금 바닥을 향한 경쟁을 강요하는 비정규직화에 맞서 자신을 저항주체로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될, 힘겹지만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려운 도전에 직면한 가운데 페미니스트가 먼저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신자유주의의 벽을 무너뜨리게 될 작은 구멍을 뚫으려면 ‘연대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 인간은 연대를 통해 발전하고 인간다워진다. 연대는 거대한 장벽을 깨는 힘인 ‘집단성’과 ‘상호신뢰’를 회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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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3 15: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9-03 18:24   좋아요 1 | URL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현상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분석해야 하는데, 일부 남성들은 저출산과 비혼 문제의 원인을 무조건 여성 탓으로 돌립니다. 이런 적대적인 반응으로는 저출산 문제를 절대로 해결할 수 없어요. 여성이 아니라 사회에 분노해야 합니다.
 

 

 

사드 후작(Marquis de Sade)은 역사상 가장 논쟁적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사후 100년이 넘도록 금기와 저주의 대상이었다. 100년 뒤엔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 ‘역사상 최고의 반항아’란 찬사를 받으며 부활했다.

 

 

 

 

 

 

 

 

 

 

 

 

 

 

 

 

 

* 사드 《사드 전집 1 :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워크룸프레스, 2014)

* 사드 《악덕의 번영》(동서문화사, 2011)

 

 

 

 

 

 

 

 

 

 

 

 

 

 

 

 

* [품절] 존 필립스 《HOW TO READ 사드》(웅진지식하우스, 2015)

* [절판] 에스텔라 V. 웰든 《사도마조히즘》(이제이북스, 2006)

* [절판] 스튜어드 후드 《사드》(김영사, 2005)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는 1909년에 사드의 주요 작품을 선집으로 묶어 출간했다. 이 선집에 아폴리네르의 해설이 있는데, 사드 사후 200주기에 맞춰 나온 《사드 전집 1 :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워크룸프레스, 2014)에 수록되어 있다. 1955년, 프랑스 파리 법원이 사드의 작품 네 권을 압수하여 파기하라고 판결하기 직전에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사드를 화형시켜야 하는가(Faut-il brûler Sade?)[주1]라는 에세이를 발표했다. 그녀는 사드를 ‘정신분석학의 선구자’로 칭송했고, 사드의 잔혹한 에로티시즘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살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이라고 옹호했다. 보부아르의 글은 《악덕의 번영》(동서문화사, 2011)에 수록되어 있는데 번역이 썩 만족스럽지 않다. 영국의 페미니스트 작가 안젤라 카터(Angela Carter)는 자신의 책 <사드적인 여자(The Sadian Woman)>에서 사드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 《악덕의 번영》의 주인공 쥘리에트(Juliette)[주2] ―을 새로운 시선으로 접근했다.

 

 

 사드 자신은 여성의 성교할 수 있는 권리를 명백히 선언한다. 그는 여성들에게 할 수 있는 한 적극적으로 성교하라고 권장한다. 그리하여 여성들은 지금까지 사용되지 않았던 거대한 성적 에너지로 무장하여 자신들의 방식을 역사와 성교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주3]

 

 

카터의 주장에 따르면 사드는 여성의 개인적인 성적 경험을 여성의 삶뿐만 아니라 세상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가장 중요한 ‘정치적 영역’으로 본 것이다. <사드적인 여자>는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고, 생각보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카터의 책이다. 비록 일부분이지만, 사드를 옹호하는 카터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는 2차 문헌은 《사드》(김영사, 2005),《사도마조히즘》(이제이북스, 2006), 《HOW TO READ 사드》(웅진지식하우스, 2008)다.

 

 

 

 

 

 

 

 

 

 

 

 

 

 

 

 

 

 

* 게일 루빈 《일탈 : 게일 루빈 선집》(현실문화, 2015)

* [절판] 안드레아 드워킨 《포르노그래피 : 여자를 소유하는 남자들》(동문선, 1996)

 

 

 

그러나 사드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소수에 불과하다. 일반인에겐 사드는 그저 가까이 해선 안 될 ‘위험인물’일 뿐이다. 보부아르와 안젤라 카터 같은 페미니스트들이 사드를 호의적으로 본다고 해서 여성의 신체를 성적 대상화한 온갖 직설적인 사드의 표현들이 가려지는 건 아니다. ‘반포르노 운동’에 앞장 선 안드레아 드워킨(Andrea Dworkin)은 사드가 남성(지식인)들이 만들어 낸 ‘강간 신화’에 의해서 과장된 평가를 받았다고 비판했다. 반포르노 운동을 이끈 페미니스트들은 포르노 영화 속에 묘사된 사도마조히즘을 근거로 사도마조히스트들을 공격했다. 레즈비언 사도마조히즘 그룹을 만든 게일 루빈(Gayle Rubin)은 포르노그래피와 사도마조히즘이 정치적 검열의 표적으로 삼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냈다. 《일탈 : 게일 루빈 선집》(현실문화, 2015)에 포르노그래피를 옹호하는 루빈의 글(『오도된, 위험한, 그리고 잘못된 : 반포르노그래피 정치에 대한 분석』)이 수록되어 있다. 과거 1970년대 여성운동을 회상한 글인 『과거가 된 혈전』에서 루빈은 포르노그래피와 사도마조히즘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반포르노 페미니스트들에게 공격당했던 살벌한 경험을 털어놓는다.

 

 

 

 

 

 

 

 

 

 

 

 

 

 

 

 

 

 

 

 

 

 

 

 

 

 

 

 

 

 

 

 

 

 

 

* 에드거 앨런 포 《검은 고양이》 (민음사, 2017)

* 에드거 앨런 포 《에드거 앨런 포 소설 전집 2 : 공포 편》 (코너스톤, 2015)

* 에드거 앨런 포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민음사, 2013)

* 에드거 앨런 포, 마이클 코넬리 엮음 《더 레이븐 : 에드거 앨런 포의 그림자》 (RHK, 2012)

 

 

 

《악덕의 번영》 번역본의 문제점에 대해서 몇 마디 지적하겠다. 첫 번째 각주에 후술하겠지만, ‘사드를 화형시켜야 하는가’는 번역 투 문장이다. 《악덕의 번영》 47쪽에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단편소설의 제목 ‘The Pit and the Pendulum’이 나온다. 이 작품은 ‘구덩이와 추(《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함정과 진자(《에드거 앨런 포 소설 전집 2 : 공포 편》, 《더 레이븐 : 에드거 앨런 포의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악덕의 번영》에서는 ‘우물과 진자시계’로 엉뚱하게 번역했다. 소설을 보면 알겠지만, ‘진자’는 시계추가 아니다.

 

72쪽 다섯 번째 주석에 연도 오류가 있다.

 

 

 1972년 6월 25일, 사드는 라투르라는 하인을 데리고 마르세유로 돈을 받으러 갔다가 (…)

 

 

주석의 글자 크기가 깨알과 같이 작아서 오자를 그냥 지나치기 쉽다. 1972년을 ‘1772년’으로 고쳐야 한다.

 

85~86쪽 33번째 주석에 잘못된 인명 표기가 있다.

 

 

 《소돔 120일》은 바스티유에서 분실되어 20세기가 되어 베를린의 정신과 의사 이반 프로흐 박사가 오이겐 뒤랭(Eugène Dühren)이라는 필명으로 과학적 주석을 달아 원문과 함께 편집한 것이 1904년에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180부 한정으로 출판되었다.

 

 

‘이반 프로흐’가 아니라 ‘이반 블로흐(Iwan Bloch)라고 써야 한다. ‘Bloch’를 ‘프로흐’로 발음하는 것이 맞으면, 영화 《싸이코》의 원작자(Robert Bloch)는 ‘로버트 플록’으로, 《희망의 원리》를 쓴 독일의 철학자(Ernst Bloch)는 ‘에른스트 프로흐’로 읽어야 한다.

 

 

 

 

 

[주1] ‘화형시키다’는 번역 투 문장이다. ‘사드를 화형에 처해야 하는가?’라고 쓰는 게 맞다. 《악덕의 번영》에는 ‘사드를 화형시켜야 하는가’라고 되어 있다. 유일하게 보부아르의 글이 수록된 《악덕의 번영》의 출판사는 번역 문제로 악명 높은 ‘동서문화사’다.

 

[주2] ‘악덕의 번영’은 국역본 제목이며, 원제는 ‘Histoire de Juliette ou les prosperites du vice(쥘리에트 이야기 또는 악덕의 번영)’이다. 다른 책에서는 이 작품을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쥘리에트’로 언급된다.

 

[주3] 안젤라 카터, <The Sadian Woman>, 1979. (에스텔라 V. 웰든 저, 최정우 옮김, 《사도마조히즘》, 이제이북스, 2006, pp.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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