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3년 7월, 미국의 매튜 페리(Matthew Perry) 제독이 이끄는 네 척의 군함이 에도 만(현재의 도쿄 만)에 들어왔다. 페리는 해안을 봉쇄하며 통상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이듬해 일본과 미국은 화친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서양 따라잡기에 나선 일본은 개항 50년 뒤 열강의 일원으로,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에는 강대국으로 인정받았다.

 

 

 

 

 

 

 

 

 

 

 

 

 

 

 

 

 

 

 

* 스기타 겐파쿠, 마에노 료타쿠, 나카가와 준안 《해체신서》 (한길사, 2014)

* 이종각 《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 (서해문집, 2013)

 

 

 

 

 

 

 

 

 

 

 

 

 

 

 

 

* [품절] 이종찬 《난학의 세계사》 (알마, 2014)

* 타이먼 스크리치 《에도의 몸을 열다》 (그린비, 2008)

 

 

 

과연 무엇이 일본의 근대화를 만들었을까? 페리 제독의 강압적인 요구를 시작으로 일본이 근대 국가가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일본의 근대화는 오랫동안 누적된 도약이다.

 

일본 전국시대의 다이묘(大名: 대영주)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1549년 규슈(九州)에 상륙한 스페인의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 Xavier)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를 허용했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도 선교사들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출신의 선교사들은 비단 종교 활동만 한 것이 아니었다. 서양문물을 일본에 전해주는 역할도 했다. 일본은 선교 활동과 무역 활동을 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람들을 ‘남만인(南蠻人)’이라고 불렀다.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임진왜란은 끝났고, 일본은 그의 사후 권좌를 둘러싼 심한 권력 투쟁으로 들어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130년이나 계속된 전국 시대는 막을 내린다. 도쿠가와 가문의 막부(幕府)가 통치하는 에도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 후 일본은 약 2백 년 동안 평화를 누린다. 도쿠가와 막부는 예수회가 교황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세력으로 판단했고 1612년부터 기독교 선교 금지령을 내렸다.

 

도쿠가와 막부는 스페인과 포르투갈과의 교류를 끊으며 쇄국 정책을 취했고, 기독교 포교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네덜란드인들에게 나가사키의 인공 섬 데지마(出島) 거주를 허가했다. 네덜란드는 기독교 선교를 포기하는 대신, 무역을 허락받았다. 도쿠가와 막부는 데지마에 관리를 상주시켜 이곳을 통해 입수되는 정보를 바탕으로 군사기술, 의학, 과학 등 선진기술과 학문을 받아들이고,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일본은 이미 13세기부터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여 무역 시장에 뛰어들었고, 히데요시는 ‘주인선(朱印船)’ 정책을 실시하여 일정한 조건 하에 허가를 받은 대외 무역을 허용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일본은 네덜란드의 발전된 문명을 ‘난학(蘭學)으로 체계화하고, 이를 통해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난학의 형성에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에도 시대의 의사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다. 스기타는 직접 해부 현장을 참관하고, 나가사키의 역관(譯官)을 통해 네덜란드어 해부 서적을 입수한다. 스기타가 참고한 해부 서적은 독일의 의학자 요한 아담 쿨무스(Johann Adam Kulmus)가 1772년에 펴낸 <Anatomische Tabellen>를 네덜란드어로 번역한 ‘타팔렌 아나토미아(Tabulae Anatomicae)였다. 스기타는 네덜란드어를 배운 난학자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澤)와 네덜란드 의학에 관심이 많은 의사 나카가와 준안(中川淳庵)과 함께 그 해부서를 일본어로 번역할 것을 결심한다. 그들은 변변한 네덜란드어 사전도 없이 3년 만에 타팔렌 아나토미아를 《해체신서(解體新書)라는 이름으로 번역하는 데 성공한다.

 

 

 

 

 

 

 

 

 

 

 

 

 

 

 

 

 

* 가토 슈이치, 마루야마 마사오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 2000)

 

 

스기타는 만년에 난학의 발전과 《해체신서》의 탄생 과정을 적은 《난학사시(蘭學事始)를 발표한다. 《해체신서》의 번역을 본격적인 ‘난학의 탄생’으로 본다면, 《난학사시》는 ‘일본 근대화의 초석’이 된 책이라 할 수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난학사시》의 가치를 재발견하여 ‘탈아론(脫亞論)을 내세운다. 과거 일본의 번역은 중국 한자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체신서》는 일본식 한자로 번역한 책이었고, 《해체신서》 번역은 단순히 서양 문물의 수용 행위가 아닌, 중화주의에 대한 도전이자 부국강병을 위한 중대한 과제였다.

 

《난학사시》의 한국어 번역문은 《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서해문집, 2013)《난학의 세계사》 알마, 2014)에 수록되어 있다. 두 권의 책속에 있는 《난학사시》 번역문을 같이 읽으면 사소한 차이점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야마가타 번 의사인 야스토미 기세키란 사람이 에도 고지마치에 살고 있었다. 그는 나가사키에 유학을 가 ‘오란다[주] 25문자’를 배운 뒤, 그 문자와 ‘이로하 47문자(いろは, 일본어 가나 문자를 배열하는 순서)’를 비교한 표 같은 것을 가지고 돌아와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오란다어 책도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종각 옮김, 《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 pp. 211)

 

 

야마가타 번 의사였던 야스토미 기세키라는 사람이 고지마치에 살고 있었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유학하면서 알파벳 25자를 익히고 그 문자로 쓰인 《48문자 첫걸음》을 가지고 돌아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자신은 책도 읽을 수 있다고 떠벌리고 다녔기에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종찬 옮김, 《난학의 세계사》, pp. 40)

 

 

 

이로하(いろは)는 일본의 고유 음절문자 ‘가나’의 첫 세 글자를 뜻한다. 가나를 하나씩 배열하여 ‘ABC송’처럼 만든 노래가 있다. 그러므로 가나의 ‘이로하’는 영어의 ‘ABC’에 해당한다. 이로하 노래의 탄생 과정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1192)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시기에 나온 이로하 노래는 ‘가나 47글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ん’을 포함한 가나 48자로 채워진 이로하 노래는 메이지 시대 때 나왔다. 따라서 기타가 살았던 에도 시대에 널리 애송된 이로하 노래는 ‘가나 47글자’로 된 것이다. 《난학의 세계사》의 ‘48문자 첫걸음’은 오역이다.

 

 

[주] オランダ, 네덜란드의 일본어식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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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9-04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이 네델란드에 대해 우호적이라고 하더라구요 그 대표적인 게 17세기 네덜란드 거리를 재현한 테마파크인 후쿠오카에 있는 하우스텐보스죠! 졸업여행을 거기갔었는데 글을 보니 기억이 나네요 ㅎㅎ

cyrus 2018-09-04 13:08   좋아요 0 | URL
네덜란드를 잘 아는 나라는 일본 밖에 없을 거예요. ^^

2018-09-04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9-04 13:20   좋아요 0 | URL
고등학생 시절에 세계사를 공부한 적이 있어요. 제가 배운 세계사 교재에는 근대화의 시작점을 페리 제독의 등장으로 보고 있었어요. 난학에 대해서는 비중있게 설명하진 않았어요.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에 이미 동아시아 일대에서 무역을 시작했어요. 그 과정에서 동아시아에 진출한 서양의 무역 상인들을 만나면서 서양식 무기를 들여올 수 있었어요. 일본은 그 무기를 가지고 조선을 침략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