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가장 궁극적인 철학적 혹은 종교적 질문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의 정체성을 묻는 것이다. 나의 정체성을 알려면 그 ‘나’라는 존재 속에 채워진 내용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 내용은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치부를 포함한다. 이렇게 시간을 중심으로 나의 정체성을 묻는 실마리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고백록》을 통해서 했던 작업이다.

 

 

 

 

 

 

 

 

 

 

 

 

 

 

 

 

 

 

*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대한기독교서회, 2003)

* 문시영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읽기》 (세창미디어, 2014)

 

 

 

《고백록》이 고전이 된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젊은 시절 자신의 방탕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참회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책에 보여준 그의 신앙 고백은 신학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졌다. 《고백록》에서 완성된 신학은 역사에서 사라진 수많은 교부(敎父) 중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던 아우구스티누스를 기독교 역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교부로 재탄생시킨 힘이 된다. 오늘날 기독교 하면 떠오르는 ‘원죄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확립한 것이다. 창세기에서 아담(Adam)하와(Ḥawwāh)가 선악의 열매를 먹으면서 원죄를 짓게 되었고, 인간은 신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를 인간의 속박에 관한 이야기로 읽고,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고 주장했다. 인간은 자신에 내재한 죄를 스스로 극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의 도움, 즉 구원을 받을 존재이다.

 

아우구스티누스만큼 자신의 내면세계를 잘 분석한 사람도 없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가 알고 싶었던 ‘나’는 죄를 짓고 살아왔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다. 《고백록》을 읽어보면 그가 어렸을 때 지은 범죄와 그 범죄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 기록되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나무에 달린 배를 훔친 절도 행위의 동기에 대하여 분석했다(《고백록》 제2권 4장). 자기가 배를 따 먹은 것은 배가 고파서일까? 아니면 훔쳐서 팔고 싶어서였을까? 그는 배를 따서 맛만 보고는 모두 버렸다. 그러면 왜 배를 훔쳐 먹었을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인간 내면의 원죄 의식에서 찾았다. 인간 내면에는 원죄 의식이 자리 잡고 있고 이것 때문에 죄를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 [품절] 일레인 페이절스 《아담, 이브, 뱀》 (아우라, 2009)

* G. R. 에번스 《중세의 그리스도교》 (예경, 2006)

 

 

 

종교사학자 일레인 페이걸스(Elaine Pagels)는 자신의 책 《아담, 이브, 뱀》(아우라, 2009)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설이 기독교 교리의 근간으로 자리 잡게 된 과정과 그 역사적 배경을 설명한다. 이 책과 관련해서 기독교인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준 기독교의 변천 과정을 압축해서 정리한 《중세의 그리스도교》(예경, 2006)도 참고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설은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확립되던 시기에 가장 중요한 교리로 발전하게 됐다. 초기 기독교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던 ‘소수의 종파’였고, 이로 인해 숱한 박해를 받았다. 박해를 받아 수많은 순교자를 낸 기독교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Constantinus I)밀라노 칙령으로 공인을 받으면서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그 뒤 여러 가지 난관이 있었으나 이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로마에 기독교가 합법화되면서 기독교는 대중적인 종교로 발전한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교부들은 교회에 들어온 신자들을 가르치는 과거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떻게 기독교인이 되는가?’를 가르치기 위해 《고백록》을 쓰게 된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사악한 존재이므로 인간의 자유의지는 왜곡될 수 있다. 이게 바로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을 통해 증명한 범죄의 원인이며 ‘원죄설’을 입증하는 증거이다. 페이걸스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발전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설은 개인을 통제하는 정치적 수단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녀의 주장은 권력과 종교의 야합, ‘권력화된 종교’를 새삼 떠올리게 한다. 기독교는 과거를 잊은 듯 권력자 또는 박해하는 자의 위치가 되어 다른 종교에 대해 비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서구에서 타인의 종교를 인정하는 관용이 자리 잡는 것은 백여 년간 지속한 종교전쟁의 값비싼 희생을 치른 후의 일이다.

 

 

 

 

 

* Trivia

 

선한용 신부가 번역한 《고백록》은 2003년에 ‘문화관광부(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추천우수학술도서’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이 책에 고쳐야 할 오류가 있다.

 

68쪽 역주는 유노(Juno)‘주피터(Jupiter)이자 부인’으로 설명되어 있다. 유노는 로마 신화의 최고 여신이며 그리스 신화의 헤라(Hera)와 같은 인물이다. 주피터는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Zeus)의 동일 인물이다. 주노가 주피터의 부인인 건 맞다. 그러나 주피터의 딸은 아니다. 주노는 주피터보다 먼저 태어난 누나이다.

 

 

 

 

 

 

 

 

 

 

 

 

 

 

 

 

 

 

* 아풀레이우스 《황금 당나귀》 (현대지성, 2018)

* [구판 절판] 아풀레이우스 《황금 당나귀》 (매직하우스, 2007)

 

 

 

오자는 아니지만, 79쪽 역주에는 《황금 당나귀》(현대지성, 2018)의 저자 아풀레이우스(Apuleius)‘아플레이우스’라고 표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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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2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9-12 17:27   좋아요 1 | URL
태어난 순간부터 원죄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비관적인 생각 아닐까요? 요즘 쾌락주의자, 이신론자에 관한 책을 읽어서 그런지 종교의 교리에 맞춰가면서 사는 삶이 답답하게 느껴집니다. ^^;;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지적 편력은 다양하다. 그래서 그를 특정한 범주에 잠시나마라도 붙들어 매는 것이 불가능하다. 푸코를 영유하는 방식은 사람들에 따라 너무나 편차가 심하다. 푸코의 대머리에 무작정 오르다가는 미끄러져서 떨어질 수 있다. 다행히 요즘은 푸코의 대머리에 오르는 데 유용한 사다리 같은 책들이 많다. 다만 오래돼서 낡아빠진 사다리는 피해야 한다. 튼튼한 사다리가 여러 개 있다면 오래된 사다리까지 챙겨야 할 필요는 없다.

 

 

 

 

 

 

 

 

 

 

 

 

 

 

 

 

 

 

 

* 자네트 콜롱벨 《미셸 푸코, 죽음의 빛》 (인간사랑, 1998)

 

 

 

《미셸 푸코, 죽음의 빛》(인간사랑, 1998)유통기한이 훨씬 지난 ‘오래된 사다리’다. 푸코의 철학을 소개한 책이지만, 내가 보기엔 필독해야 할 이유가 없는 책이다. 이 책은 20년(!) 전에 나왔다. 절판되지 않은 게 용하다. 이 책의 프롤로그인 『여정과 추억』은 저자가 자신의 푸코 읽기 여정을 말년 푸코의 삶과 겹쳐 술회한 내용인데, 쓸데없이 길다. 그래도 번역자의 꼼꼼한 역주는 읽을 만하다. 번역자는 참고 문헌들에 대한 세심한 검토를 곁들여 이 힘든 작업을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번역자도 사람인지라 종종 무지(無知)로 인해 잘못된 정보를 전하기까지 하는 오류를 범한다. 교정은 원고에 있는 오류를 바로잡고, 인쇄 상태를 바로잡는 행위이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교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책은 ‘잘못된 책’이다.

 

 

 

 

 

 

 

 

 

 

 

 

 

 

 

 

 

 

* [아직 안 읽은 책] 미셸 푸코 《말과 사물》 (민음사, 2012)

 

 

 

 

 

 

 

 

 

 

 

 

 

 

 

 

* 노르베르트 볼프 《디에고 벨라스케스》 (마로니에북스, 2007)

* 자닌 바티클 《벨라스케스》 (시공사, 1999)

 

 

 

78쪽에 푸코의 《말과 사물》(민음사, 2012)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말과 사물』은 우연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거기엔 가장 걱정스런 것이 아직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발상은 보르헤스(Borges)의 한 텍스트로부터 연유한다”는 말로 『말과 사물』은 시작한다. 오히려 이 짧막한 문장은 『귀족의 딸들(Ménines)』의 화려한 묘사가 감추는 방법론적 서문에 의해 가려져 있다.

 

 

 

‘짧막한’은 ‘짤막한’의 오자(誤字)이다. 『귀족의 딸들』은 무엇인가? 스페인의 화가 벨라스케스(Velázquez)의 그림 『라스 메니나스(Las Meninas)를 말한다. 이 그림은 ‘시녀들’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벨라스케스가 어린 공주와 시녀들, 그리고 공주의 놀이 상대였던 난쟁이와 개를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귀족의 딸들’은 나오지 않는다. 번역자는 벨라스케스의 그림 제목을 엉뚱하게 적었다.

 

 

 

 

 

『라스 메니나스』는 이야깃거리가 많은 그림이다. 그림 속의 벨라스케스(그림 왼쪽에 붓을 들고 있는 남자) 자신은 어린 마르가리타(Margarita) 공주를 그리고 있다. 이 그림의 흥미로운 점은 거울 속의 펠리페 4세(Felipe Ⅳ) 부부의 모습이다. 실제로 스페인 국왕 부부는 그림 모델로 서고 있는 공주의 지루함을 달래주기 위해 화가의 작업실을 찾았지만, 벨라스케스는 국왕 부부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았다. 벽에 걸린 거울 속에 비친 국왕 부부 모습(그림 중앙)을 그렸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 그림을 해석한다. 그는 이 그림이 “모든 것을 재현하려는 고전 시대의 욕망을 압축하여 표현한 작품”이라고 평가하면서, 이 그림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주체가 생략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푸코의 해석에 따르면 『라스 메니나스』는 어린 공주의 모습을 재현한 그림이라 볼 수 없고, 공주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화가 자신의 행위를 재현한 그림으로도 볼 수 없다.

 

 

 

 

 

 

 

 

 

 

 

 

 

 

 

 

 

 

 

*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나남출판, 2003)

* 제바스티안 브란트 《바보배》 (읻다, 2016)

 

 

 

 

 

 

 

 

 

 

 

 

 

 

 

 

* 월터 보싱 《히에로니무스 보스》 (마로니에북스, 2007)

* 월터 S. 기브슨 《히에로니무스 보스》 (시공사, 2001)

 

 

 

 

126쪽에 있는 ‘제롬 보스(Jerome Bosch)『광인들의 배(바보 배)』를 그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를 프랑스어로 표기한 이름이다. 푸코는 보스가 그린 『광인들의 배』에 영감을 받아 《광기의 역사》(나남출판, 2013)를 쓰게 된다. 푸코는 이 책에서 『광인들의 배』가 그려진 르네상스 시대만 해도 광인은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었을 뿐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된 존재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독일의 인문주의자 작가 제바스티안 브란트(Sebastian Brant)이 쓴 《바보배》(읻다, 2016)는 르네상스 시대 광인의 지위를 알 수 있는 문헌이다.

 

 

 

 

 

 

 

 

 

 

 

 

 

 

 

 

* 로제 마리 하겐 《피테르 브뢰헬》 (마로니에북스, 2007)

* [절판] 닐스 요켈 《브뢰겔》 (RHK, 2006)

* 월터 S. 기브슨 《브뢰겔》 (시공사, 2001)

 

 

 

보스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출신인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도 광인을 묘사한 그림 작품을 남겼다. 그런데 《미셸 푸코, 죽음의 빛》의 번역자는 동명이인의 브뤼헐을 언급했다. 126쪽 역주에 피터르 브뤼헐이 아니라 그의 차남 얀 브뤼헐(Jan Bruegel)을 설명한 내용이 있다. 얀 브뤼헐은 아버지와 다르게 주로 정물화를 그렸으며, ‘꽃의 브뤼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브뤼헐’이라는 성을 가진 화가가 세 명(지옥, 광인 등을 주제로 기괴한 분위기의 그림을 그린 ‘대’ 피터르 브뤼헐, 그의 장남 ‘소’ 피터르 브뤼헐, 차남 얀 브뤼헐)이나 있다 보니 번역자가 이름을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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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8-09-10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파고 들고 싶은 사람이에요 ㅎ 푸코

cyrus 2018-09-12 06:55   좋아요 0 | URL
푸코가 독자에게 좌절감을 주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참고 책을 읽어보면 그의 분석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

2018-10-15 1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15 17:17   좋아요 0 | URL
어떤 음악인지 궁금하네요. 혹시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인가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한 그림을 보는 건 즐거워요. ^^
 
바로크의 자유사상가들 반철학사 3
미셀 옹프레 지음, 곽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동서고금의 모든 철학자는 행복의 의미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성찰해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란 인간 개개인이 가진 덕()을 찾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수행하는 정신적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법과 정치 속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했다. 에피쿠로스도 인간의 목적을 행복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가 말하는 행복은 쾌락이었다. 그는 방종한 생활 같은 육체적 쾌락보다는 금욕을 통한 정신적 쾌락에 주안점을 두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절제된 쾌락을 강조했지 육체적 쾌락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쾌락을 많이 추구하면 더 큰 쾌락을 양산하기 때문에 결국 정신적 고통을 얻게 된다고 보았다.

 

대부분 사람은 쾌락주의(hedonism)를 향락과 개인적 안위의 삶을 살라고 선동하는 철학으로 오해한다. 쾌락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 때문에 음란하고 불순한 사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에피쿠로스는 자연현상에 대한 이성적 이해를 통해 미신의 현혹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쾌락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는 자연 현상을 신들의 행위로 인식하던 당대의 관념에 비추어 보면 매우 도발적인 주장이다. 이런 관점은 바로크 시대(Baroque period)의 자유사상가(libertins)로 이어진다.

 

바로크의 자유사상가들은 서양 철학사에 잘 언급되지 않은 17세기 자유사상가 5명과 당대 자유사상가의 정신을 이어받은 유명한 철학자 1명을 소개한 책이다. 유명한 철학자 1은 세계가 곧 신이며 정신이라는 범신론을 주장했던 스피노자(Spinoza). 스피노자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 피에르 샤롱(Pierre Charron), 프랑수아 라 모트 르 베예(François de La Mothe Le Voyer), 샤를 드 생 테브르몽(Charles de Saint-Évremond), 피에르 가상디(Pierre Gassendi),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Cyrano de Bergerac)은 일반인에게 생소한 철학자이다. 사실 시라노는 에드몽 로스탕(Edmond Rostand)의 희곡 덕분에 코가 큰 추남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가 시대를 앞서간 책을 쓴 철학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무신론자, 유물론자인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옹프레(Michel Onfray)()철학사라는 작업을 통해 주류 중심 철학에 밀려나 잊힌 과거 사상가들을 호명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씌워진 케케묵은 편견까지 털어내어 그들이 살아온 삶과 사상을 보여준다. 바로크의 자유사상가들반철학사시리즈 세 번째 책이다.

 

자유사상가는 인간의 개인 의지를 강조하여 기독교의 교조적인 교리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렇다 보니 자유사상가를 무신론자로 보는 입장이 생겼고, 그들의 도발적인 생각은 위험한 사상으로 간주하여 배척받았다. 그런데 무신론자 옹프레는 자유사상가들이 신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피에르 샤롱과 라 모트 르 베예, 생 테브르몽은 신앙절대주의자 또는 이신론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영적인 힘, 천국과 지옥 같은 개념을 비판한 사상)였다. 가상디는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친 유신론자였다. 시라노와 스피노자는 범신론자였다. 17세기는 전쟁과 종교 분쟁으로 혼란이 거듭했던 시대였는데, 자유사상가들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군주제가 유지되면 사회적 혼란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비록 바로크의 자유사상가 각자가 지향하는 관점마다 차이가 있지만, 그들은 당대 시대적 흐름을 타고 등장한 학자들이었다.

 

바로크는 불완전한 진주(완벽하게 둥글지 않은 진주)라는 의미의 포르투갈어이다. 바로크 문화는 파격, 불규칙, 변화를 추구한다. 그런 점에서 바로크 시대의 자유사상가는 보편적인 진리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며 정형적인 기독교 정신을 의심한다. 성경 중심의 신앙을 실천하는 신학자나 기독교인 입장에선 자유사상가의 등장이 달갑지 않다. 그래서 그들을 과장되고, 기존 체제에 순응하지 못한 인간으로 바라보면서 공격했다. 주류 학자들은 무신론과 거의 흡사한 자유사상가들의 생각을 거부했다. 자유사상가를 무신론자로 취급하면서 그들의 존재감은 서서히 잊히고, 서양 철학사에 그들의 이름조차 볼 수 없었다. 후세 사람들은 피에르 샤롱을 몽테뉴(Montaigne)수상록을 표절한 얼치기로 평가했고, 가상디가 과학적 관찰을 중요하게 생각한 천문학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바로크의 자유사상가들은 인간을 위한 철학을 강조한다. 그들이 보는 신은 인간의 이성이나 육체에 개입하지 않는다. 신은 인간에 무관심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기독교적 원죄의식에서 벗어나 지금 자신이 선 자리에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사상가들은 기독교적 신이 중심이 되는 사회 한가운데서 인간이라면 직접 스스로 해야 할 질문들을 화두로 던졌다. 어떻게 하면 인간은 좀 더 인간답게살 수 있을까? 현재는 지나가면 다시 오지 않는다. 오늘 하고자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쾌락이라고 말하지만, 자유사상가들이 지향하는 자유는 자발적 행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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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 가면 책방 주인이 소중히 여기는 책들을 만날 수 있다. 그 책들은 살 수가 없다. 오직 책방에서만 읽을 수 있다. 책방을 찾는 손님이 보기에는 그냥 언제든지 팔 수 있는 책이지만, 책을 가진 주인 입장에서는 아무에게나 주고 싶지 않은 보물이다. 그 마음,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읽다 익다책방 주인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글을 좋아한다. 그 분은 헤세가 쓴 작품뿐만 아니라 헤세 읽기에 도움이 되는 책도 모으고 있다. 물론 책 모으는 일에만 열중한 분은 아니다. 책방 주인이 수집한 헤세의 책은 독서모임을 하면서 읽은 것들이다. 내가 보기에 읽다 익다책방 주인은 건강한 애서가이지, 심각한 책 중독자는 아닌 것 같다.

    

 

 

 

 

 

 

 

 

 

 

 

 

 

 

 

* 톰 라비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돌베개, 2011)

* 니콜라스 A. 바스베인스 젠틀 매드니스(뜨인돌, 2006)

* 구스타브 플로베르 애서광 이야기(범우사, 2004)

    

 

 

자신을 책 중독자라고 밝힌 작가 톰 라비(Tom Raabe)는 책 중독을 깊은 수렁에 비유한다. 그가 말하는 책 중독자에는 세 가지 부류가 있다. 장서광, 애서가, 수집가이다. 장서광은 책을 사고 또 사는 사람이다. 애서가는 책을 읽고 또 읽는 사람이다. 책의 겉모습에 열광하는 사람은 장서 광이고, 책의 내용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애서가이다. 수집가는 책의 사소한 차이에 열광한다. 그들은 저자 친필 사인이 있는 초판본을 엄청나게 좋아한다. 수집가와 애서광의 경계는 모호하지만, 책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하는 애서광은 남이 갖고 있지 않는 책을 본인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갖고 있다[1]. 19세기 초 미국 정치가 프랭클린 토머스(Franklin Thomas)는 도서수집가인 할아버지를 가장 고귀한 질병, 애서광에 푹 빠진 분이라고 표현했다. 애서광은 고귀한 광기(gentle madness)이다.

 

톰 라비는 옷보다 책을 사는 것을 좋아했다. 톰 라비가 친구에게 서점에 같이 가자고 말했을 때, 친구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옷을 샀던 날이 언제인지 기억나나?” 책 중독자는 기본적인 소비생활을 잊어버리거나 포기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일이 잘 없다. 영화를 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러나 언제든지 빌려 볼 수 있고, 사서 볼 수 있는 책이 더 재미있게 느껴진다. 책을 사거나 읽는 행위를 삶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책 중독자는 심책(審冊)주의자이다. 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Francois Truffaut)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딘가 아픈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주2]. 책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 책 중독자들은 어딘가 모자란 사람들이다.

 

    

 

 

 

 

 

 

 

 

 

 

 

 

 

 

* 정희진 혼자서 본 영화(교양인, 2018)

    

 

 

 

 

 

 

 

 

 

 

 

 

 

 

 

 

 

 

*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문학동네, 2015)

*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민음사, 2008)

 

    

 

정희진폭식을 해도 괜찮고, ‘숙취도 없는 것이 바로 영화라고 했다[주3]. 책도 마찬가지다. 보들레르(Baudelaire)의 시구(詩句)처럼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어느 것이든 취할 수 있다. 취하라! 그대가 원하는 책에. 책에 취해도 취한 것 같지 않다. 책을 많이 읽어도 지루하지 않다. 자고 일어나면 책 중독자를 유혹하는 새 책들이 나오는데 지루할 틈이 어디 있겠는가.

    

 

 

 

 

 

 

 

 

 

 

 

 

 

 

 

* 알베르토 망겔 서재를 떠나보내며(더난출판사, 2018)

 

 

책 중독자의 정체를 알고 싶으면, 그가 소중히 여기는 애독서를 살펴보면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알베르토 망겔(Alberto Manguel)서재를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했다[4]. 서재에 있는 모든 책은 책 중독자의 살덩어리요, 피다. , 책 중독자는 예수가 아니다. 모든 책 중독자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책을 애지중지하게 여기는 심책주의자는 책을 빌려주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니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책 중독자 말고 책을 잘 빌려주는 마음씨 좋은 애서가를 만나길. 나처럼 어딘가 모자라고, 책밖에 모르고, 책을 빌려주지 않는 책 중독자, 심책주의자는 되도록 멀리하는 것이 상책이다.

 

 

 

 

 

[1] 플로베르, 이민정 옮김, 애서광 이야기, 범우사, 2004, pp. 62.

[2] 정희진, 혼자서 본 영화, 교양인, 2018, pp. 8.

[3] 같은 책, pp. 11.

[4] 알베르토 망겔, 이종인 옮김, 서재를 떠나보내며, 더난출판, 2018, pp.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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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9-06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기억이 맞다면 cyrus님의 예전 서재 사진보다 많이 정돈된 느낌입니다^^:)

cyrus 2018-09-07 19:33   좋아요 1 | URL
제가 사진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네요. 제 서재는 아니구요, ‘읽다 익다‘ 책방에 있는 책장이에요. 책방지기님이 헤세의 글을 좋아해서 사서 모은 책들을 책방에 꽂아둔거예요.. ^^

2018-09-07 0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9-07 19:38   좋아요 0 | URL
애서광은 책의 노예라고 하던데, 이 말 그대로 굿즈광도 굿즈의 노예네요.. ㅎㅎㅎ

대부분 외국의 술 도수는 소주보다 높던데 술 잘 마시는 외국인들은 소주를 물처럼 마실거예요. 특히 러시아인들은요. ^^

sslmo 2018-09-07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겨울호랑이 말씀처럼 왜 이렇게 단출해졌죠?^^
님도 미니멀라이프들 격하게 실천하고 계신건 아니겠죠?

이제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도 살랑~ 불고 책읽기 좋은 계절입니다~^^

cyrus 2018-09-07 19:41   좋아요 0 | URL
‘읽다 익다‘ 책방지기님의 책이에요. 책방에 있는 책장을 제가 사진으로 찍은거예요. ㅎㅎㅎ

요즘은 지출이 많아서 책 구입 횟수가 줄어들었어요. 그래도 원하는 책을 만나면 반드시 구매합니다. ^^

2018-09-07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08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0 14: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0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8-09-08 2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멈춤없이 흐르고 계시는군요. ㅎ 멋져요

cyrus 2018-09-09 20:45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저를 기억해주시고, 반가운 인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나쁜 사마리아인들 (10주년 특별판) - 신자유주의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나이다.

 

(누가복음 23:44)

 

 

 

세월이 지나면 경제를 이끌어가는 사상도 변한다. 경제학이 학문의 틀을 갖추기 시작하던 300년 전의 중심 사상은 시장 자유주의였다. 수요와 공급에 의해 시장에서 결정된 가격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으로 믿었다. 시장이 제대로 기능만 한다면 필요 이상으로 생산이 늘어나는 일도 없어지고, 당연히 심각한 불황도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1929년 미국에 대공황이 일어나면서 시장 지상주의를 믿던 경제학이 치명적인 일격을 맞았다. 엄청나게 많은 물건이 쏟아져 나와 가격이 내려갔지만 기대와 달리 소비가 늘어나지 않았다. 공황의 여파로 이미 소비자의 구매력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입었고, 시장도 전혀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유례없는 경제 공황 앞에 모든 국가는 저마다의 해결책을 찾아 나섰다. 사람들은 시장의 기능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때 시장을 통제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 정부의 역할이었다. 정부가 경제 각 부분을 적절히 통제하면 심각한 경기 침체가 나타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정부의 힘도 한계를 드러냈다. 정부에 대한 믿음이 깨지면서 등장한 것이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는 시장 지상주의를 그 바탕으로 한다. 정부는 완전 방임 상태를 추구한다. 소득 재분배는 물론, 복지 정책도 정부의 역할에서 배제된다. 다시 시장에 대한 믿음이 부활한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주목받으면서 시장이 부활했지만, 어두운 그림자도 남겼다. 대표적인 문제가 빈곤불평등이다. 자본이 소수에게 집중되자, 이것을 가지지 못한 집단은 절대적인 가난에 시달렸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가장 바람직한 경제사상으로 행세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앞잡이들은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경제 강대국들이 자유무역 중심의 시장경제 체제를 채택해서 경제성장을 달성했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개발도상국들이 이 원리를 따라야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과연 옳은 것인가.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경제학과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바로 이런 상식과 통념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밝히고 있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허구적 위상을 폭로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상처받은 자본주의를 치유하고자 한다. 그는 이 책에서 시장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다양한 담론들을 치밀하게 해부하면서 신자유주의 찬양론의 문제점을 드러내 보여준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자유무역 중심의 시장경제 원리를 채택해서 경제가 좋아진 선진국은 사실상 하나도 없다. 신자유주의의 앞잡이들이 그토록 찬양하는 경제 강대국 중 하나인 미국은 건국 초기 시절에 자국 기업을 보호했고, 외국인 투자를 규제했다.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은 산업육성을 위해서는 보호무역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치산업을 보호하고자 관세장벽을 쌓아 올리고, 각종 산업 보조금 제도를 도입했다. 장차 성장 잠재력은 있지만, 지금 당장은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있지 않으니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보호해줄 필요가 있는 산업이 유치산업이다. 경쟁력이 갖추어진 다음에 자유무역으로 전환하자는 것이 해밀턴의 유치산업 보호론의 핵심이다. 이 이론은 18세기 당시 유럽보다 산업 분야의 국제경쟁력이 뒤처지고, 자본을 수입해야 했던 미국의 입장을 철저히 반영한 것이다.

 

보호무역주의를 통해 성공한 나라는 미국뿐이 아니다. ‘시장경제의 창시자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태어나고 자란 영국을 포함한 여타 선진국들도 지금은 후진국들에 자유무역과 외국인 투자 개방을 설교하고 있지만, 그들이 후진국이었을 때는 보호무역을 하고 외국인 투자를 규제했다. 그런데 보호무역주의를 이끌었던 미국이 20세기 중반 이후 패권을 잡자 자유무역주의의 전도사가 됐다. 미국은 세계무역기구(WTO)의 산파역을 했다. 세계 여러 나라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잇달아 맺었다. 장 교수는 개발도상국들에 다가가서 신자유주의 체제의 장점을 설파하는 선진국을 나쁜 사마리아인들에 비유한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노상강도에게 약탈당한 남자를 도와주는 착한 사마리아인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는 신자유주의라는 강력한 무기를 내세워 개발도상국의 경제 자유화를 요구한 사악한 삼총사이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나온 지 벌써 십 년이나 지났지만, 우리나라는 경제위기 극복을 이유로 미국식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 없이 도입했다. 국유화와 복지정책은 무조건 나쁘고, 민영화와 무한 경쟁사회는 무조건 좋다는 인식이 언제부터인가 우리 뇌리에 박혀있었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경제 강대국(미국)을 주축으로 한 자유 시장 교리가 오랫동안 지배해 온 탓이다. 장 교수는 나쁜 사마리아인들10주년 특별판 서문에서 신자유주의는 아직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한국 역시 신자유주의의 앞잡이이자 희생자로서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한편에서는 이 책을 비판하는 자유 지상주의자들의 견해가 있었고, 놀랍게도 반미, 반자본주의를 주장하는 불온 도서로 지정된 적도 있다. 이 책에 찬사를 보내든 비난을 하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 사회는 이미 신자유주의의 흐름 한가운데에 있으며,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가 이 거침없는 흐름에 너무 무감각한 것이 문제이다. 신자유주의 시장 논리에 철저히 순응한 개인에게 돌아오는 대가는 빈곤의 늪에서 허덕이면서 타인으로부터 고립되는 비참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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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9-06 2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 정부에서 새롭게 다시 나왔네요. ^^
예전 정부에서 대표적 불온서로 낙인 찍힌 책....^^ 그나마 세상이 약간 좋아진 듯 합니다. ^^

cyrus 2018-09-07 19:43   좋아요 1 | URL
80년대에는 금서를 숨어서 몰래 읽었다면 요즘은 ‘금서목록=베스트셀러‘입니다. 장 교수의 책은 금서로 지정된 이후에 더 많이 팔렸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