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장애인사 - 장애인 소외와 배제의 기원을 찾아서
정창권 지음 / 사우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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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남긴 시인 호메로스(Homeros)는 시각장애인이었다. 우화를 쓴 이솝(Aesop)은 등이 굽은 장애인이었다. 악성(樂聖)이라 불리는 음악가 베토벤(Beethoven)은 청각장애인이었고,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Cervantes)는 한쪽 팔을 쓰지 못했다. 사회운동가 헬렌 켈러(Helen Keller)는 시각 · 청각 · 언어장애인이었다. 대부분 알만한 세계적 위인들이고,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 역사 속 유명한 장애인이 누구 있는지 생각해보면 언뜻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장애를 가진 위인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만큼 가려지고 소외돼 왔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이 시각장애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종대왕은 안질에 걸려 시력이 점점 약해져 일상생활에 불편을 느낄 정도였다. 훈민정음 창제를 처음으로 알린 1443년에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거의 잃어 지팡이 없이는 걷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장애를 숨기지 않았다. 조선 초기에 ‘명통시(明通寺)라는 시각장애인 단체가 만들어졌다.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관직에 등용되는 데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장애인 차별이나 편견 등의 문제가 불거질 때면 대부분 사람(특히 비장애인)은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지금도 이런데 옛날에 장애인들은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까?’ 하지만 《근대 장애인사》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과거에 살았던 장애인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생각이 편견일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조선 시대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어울려 생활했으며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했다. 양반 출신 장애인은 과거를 보아 관직에 나가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며, 악기를 연주하는 직업을 가진 장애인도 많았다. 중증 장애인으로 자립하기 어려운 사람은 국가가 나서서 복지정책을 폈다. 직접 식량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조세와 부역을 면제시켜줬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장애인들은 서서히 배척되기 시작한다. 조선 시대 장애인들이 생계 수단으로 삼던 점복(占卜: 점치는 일)과 독경(讀經: 경을 읽어 가정의 복을 빌거나 재앙을 물리치는 일)이 혹세무민한다는 이유로 개화기 지식인들의 비판을 받는다. 생계수단을 잃은 장애인들은 극심한 생활고를 겪게 되고, 근대 이후에 직업을 갖지 못한 장애인들은 ‘자립 능력이 없는 인간’으로 치부되어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천대받는 신세가 된다.

 

《근대 장애인사》는 방대한 옛 자료들을 꼼꼼히 살펴 근대 장애인들의 생활상 전반을 복원한다. 이 책은 특히나 장애 문제를 사회복지학적 측면만이 아니라 미시사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의미 또한 아주 크다. 그동안 근대의 장애 문제에 대한 미시사 연구는 거의 없다시피 해 획기적인 저작으로 평가할 만하다. 평소 역사 속에서 주목받지 않았던 여성들이나 장애인들에 관해 관심이 컸던 정창권 교수는 《근대 장애인사》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확신을 하게 됐다. 근현대 이전 장애인들은 지금보다 더 인간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각종 자료를 통하여 조선시대부터 시작해서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의 장애인들의 삶을 살펴본 다음, 조선 시대 장애인들은 단지 몸이 불편한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고 진단한다. 또한 장애인을 지칭하는 각종 혐오 표현이 장애인의 사회적 지위가 급격히 하락한 일제 강점기 이후에 나오게 된 과정을 살핀다.

 

일제 강점기에 장애인이라는 용어가 없었다. ‘불구자(不具者)가 그나마 널리 쓰인 말이었다. 불구자는 ‘신체의 어느 부분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뜻하는 일본어 ‘후구샤(ふぐしゃ)에 유래되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 일본어는 신체적 · 정신적 결함을 가진 존재를 표현하는 말이 되었다. 이후 노동력, 상품성을 최고로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되면서 장애인은 ‘무능력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했다. 여기에 1910년대 이후부터 조선에 우생학이 유행하면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인식은 더욱 강해졌다. 일제의 장애인 복지정책은 ‘생색용’에 불과했다. 조선이 근대화되면서 장애인의 수는 늘어났지만, 장애인 복지정책은 갈수록 후퇴했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가장 공을 들인 내용은 ‘근대사에 족적을 남긴 장애 인물들’을 간략하게 소개한 3부에 있다. ‘장애 인물들’에 여성 차별과 장애인 차별이라는 이중고 속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여성 독립운동가와 교육자, 작가들도 포함되어 있다. 장애란 비단 오늘날의 문제인 것만은 아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장애인은 존재했으며, 과거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많은 장애인과 그들의 삶의 만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저자의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 마땅하다. 앞으로 더욱 많은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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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9-06-02 0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장애인에도 관심이 없는 시대에 장애인 역사에 대해 쓴 책이 나오다니 반갑네요!!

cyrus 2019-06-02 11:20   좋아요 0 | URL
정창권 교수는 십 년 전에 이미 조선시대 장애인사를 연구하여 이를 주제로 한 책을 몇 권 냈어요. 방귀희 교수도 장애인 연구를 하는 분입니다. ^^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뉴욕과 워싱턴에서 동시다발 테러가 일어났다.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미국 대통령은 “우리는 지금 전쟁 중”이라면서 테러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도널드 럼즈펠드(Donald Rumsfeld) 국방부 장관은 사전경고 없이 군사적 응징을 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 강준만 《미국사 산책 15: ‘9·11 테러 시대’의 미국》 (인물과사상사, 2010)

 

 

 

 

부시 행정부는 전쟁 돌입에 앞서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9·11 테러의 주모자이자 과격 이슬람 테러단체인 알카에다(Al Qaeda)의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의 인도를 요구하는 한편 탈레반 정권과 연대 가능한 이슬람국가나 외부세력을 차단하기 위한 총체적인 외교전을 펼쳤다. 그러나 탈레반은 미국의 요구를 거절했다.

 

 

 “고귀한 독수리(Noble Eagle)가 나라를 지키고 무한정의(Infinite Justice)가 테러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미국이 공식 발표한 군사 작전명은 ‘무한정의’이었다. 부시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이 빈 라덴 신병 인도를 사실상 거부함에 따라 걸프 지역 인근에 항공모함과 전투기들을 배치하면서 이 같은 작전명을 붙였다. 독수리는 미국을 상징하는 국장(國章) 중의 하나이다. ‘무한정의’ 작전은 1998년 빈 라덴의 테러리스트 훈련캠프 공습 작전이었던 ‘무한접근(Infinite Reach)’ 작전의 맥락을 잇고 있다. 당시 클린턴(Clinton) 정부는 크루즈 미사일을 이용해 빈 라덴의 기지를 공격했으나 빈 라덴을 체포하는 데 실패했다. 부시 행정부는 ‘무한’이라는 단어가 있는 작전명을 내세우면서 장기전을 감수하더라도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기필코 빈 라덴을 체포하여 테러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미 국방부는 이슬람권 국가의 정서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작전명을 ‘항구적 자유(enduring freedom)’로 변경했다.

 

 

 

 

 

 

 

 

 

 

 

 

 

 

 

 

 

 

 

* [레드스타킹 16번째 책] 주디스 버틀러 《위태로운 삶》 (필로소픽, 2018)

 

 

 

 

아프가니스탄 공습 이후 미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생포된 탈레반 및 알카에다 포로들을 쿠바의 관타나모 만(Guantanamo Bay)에 있는 해군기지 수용소로 이송했다. 그러나 미국 행정부와 국방부는 수용소에 이송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포로(prisoners)’로 규정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들을 ‘포로’가 아닌 ‘테러를 일으킨 범죄자’로 간주하면 군사 법정에 세우는 데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관타나모 수용소에 구금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은 전쟁 포로 및 전쟁 난민을 보호하는 ‘제네바 협약(Geneva Conventions)’에 명시된 권리를 받지 못한다. 관타나모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법의 적용을 받지 못한 채 무기한으로 구금 상태(Indefinite detention)로 지내야한다.

 

 

 

 

 

 

 

 

 

 

 

 

 

 

 

 

 

 

 

 

* 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콜레주드프랑스 강의 1977~78년》 (난장, 2011)

* 강미라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 읽기》 (세창미디어, 2013)

* 미셸 푸코, 콜린 고든, 파스콸레 파스퀴노 외 《푸코 효과》 (난장, 2014)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무기한 구금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관타나모 수용소에 기한 없이 갇혀 지내야 하는 수감자들의 실상을 고발한다. 그녀는 관타나모 수용소 안에서 일어나는 인권 침해 문제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용소 구금자를 무기한으로 억류하도록 결정하는 국가 주권의 실체를 지적한다. 버틀러는 이 ‘국가 주권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제시한 ‘통치성(governmetality)이라는 개념을 참고한다. 1970년대 말 푸코는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푸코 사후에 강의록이 출간되었고, ‘통치성’을 설명한 내용이 담긴 강의록은 《안전, 영토, 인구》라는 제목이 붙여졌다)에서 처음으로 ‘통치성’을 언급한다. 푸코가 생각한 ‘통치’는 ‘품행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활동의 형태’이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적합한 품행으로 처신하고 행동하도록 이끄는 기술이나 절차, 자격 등을 ‘통치성’이라 할 수 있다. 푸코는 왕권과 법을 통해 사회질서를 통제하던 16~17세기와 달리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전통적인 권력과 구분되는 ‘통치성’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통치성은 국민 전체를 ‘인구’라는 이름으로 관리(통제)하는 동시에 건강, 안전, 복지 등을 보장받으려는 개인의 자유로운 행동을 유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푸코가 보기에, 통치성은 단순히 국가 권력자의 권위가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지식이나 기술이다. 따라서 통치성을 분석할 때 통치의 주체가 되는 권력이나 기관이 누구이며 이들이 사용하는 지식이나 기술의 형태를 어떻게 이루어지고, 그 통치의 효과가 어떤지 등을 파악해야 한다.

 

버틀러는 ‘통치성’ 개념을 활용해 관타나모 수용소 수감자들을 군사 재판으로 세우려는 미국의 정책을 낱낱이 해부한다. 그리고 그녀는 법적 영역 밖에서 수감자들의 운명(‘무기한 구금’)을 결정하는 행정부 관료들의 역할을 ‘초법적 행정 권력’이 작동된 통치성으로 보고 있다. 국가로부터 주권을 위임받은 미국 행정부 관료들은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권위를 확장하고, 국제 협약을 무시하면서 수감자들을 무기한으로 감금시킨다.

 

버틀러의 책 《위태로운 삶》에 수록된 두 번째 글 『폭력, 애도, 정치』와 세 번째 글 『무기한 구금』은 ‘미국’이라는 국가가 생존할 수 있게 하는 통치성의 실체와 일상생활에 침투한 통치성의 부정적인 효과들을 보여준다. 부시 행정부는 ‘무한정의’를 위해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하면서 국민들에게 테러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분자들을 경계하라고 주문했다. 테러 경계령은 테러에 대한 공포심을 부추겼고, 미국인들은 ‘자기방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테러와 무관한 무슬림들을 경계하고 차별했다. 부시 행정부의 ‘통치성’은 미국인들에게 제대로 먹혀들었다. 9·11 테러 이후의 미국인들은 인구를 관리하는 권력에 종속되는 동시에 스스로 안전을 지키려는 주체가 되었다. 아마도 그들은 타자를 위태롭게 만든 행위를 ‘정의’를 위한 일이라고 자위할 것이다. 테러에 희생된 무슬림들은 애도를 받아야 할 대상이 되지 못한다. 관타나모 수용소에 갇힌 무슬림들은 합법적인 절차를 받을 수 있는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한 채 이도 저도 아닌 ‘무기한 수감자’로 살아간다. 그들에게 ‘항구적 자유’는 없다. 이렇듯 미국 관료들이 생각하는 ‘무한’과 ‘무기한’의 공통점은 타자를 인간답지 살지 못하게 만드는 무시무시한 언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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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1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01 15:49   좋아요 0 | URL
저는 ‘무한 리필’이 가능한 식당에 가면, 제가 가져온 음식은 무조건 다 먹어요. 예전에는 ‘무한’이라는 말이 좋게 느껴졌어요. 그런데 이 말을 누가, 어떤 상황에 쓰느냐에 따라 부정적인 의미가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요즘 9.11 테러와 관련된 글을 읽게 되니까 2001년 이후의 미국과 국내외 상황을 톺아보고 싶어지네요. 테러 이후에 미국과 이슬람권 국가 간의 냉전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군산복합체가 급성장했어요. 거기에 관련된 세력이 네오콘이죠.
 
거울 촉각 공감각
조엘 살리나스 지음, 정유선 옮김 / 성안당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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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의 뇌는 주변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해석한다. 보이는 것을 보고, 들리는 것을 들으면서 주변 상황을 인식한다. 하지만 어떤 뇌는 종종 이 같은 인지 과정에서 벗어난 특이한 기능을 활성화하기도 한다. ‘책’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퍽퍽한 식감의 삶은 닭고기 맛이 난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특정 글자나 숫자를 보면 색깔이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통증을 느끼는 상대방을 보면 자신도 통증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이 세 사람의 반응은 마약에 취해서 나오는 환각 증상이 아니다. 거울-촉각 공감각(mirror-touch synesthesia)’ 능력자(줄여서 ‘공감각자’)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일이다.

 

공감각자들은 전쟁 영화를 보는 것이 고문이다. 이들은 상대방의 신체에 가해진 물리적 충격을 보는 것만으로 그 자극이 마치 자신의 몸에 가해진 것처럼 감각 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감각자들은 물건을 보면 맛을 느끼거나 이름에서 색깔을 보는 경험을 한다. 공감각자 중에는 비범한 예술적 감각을 가진 이들도 많다.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Richard Feynman, 그는 살아있었을 때 삼바 춤을 즐겼고 봉고라는 타악기를 수준급으로 연주했다), 가수 빌리 조엘(Billy Joel) 등이 있다.

 

신경과 의사인 조엘 살리나스(Joel Salinas)는 공감각자다. 그는 《거울 촉각 공감각》에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공감각 능력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저자는 자신의 공감각 능력을 뇌과학의 관점으로 설명하면서 인간의 감각과 뇌의 활동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쉽게 풀어낸다. 이 책 머리말의 첫 문장은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공감각자의 삶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는 나를 배반한다.  (16쪽)

 

 

공감각자의 뇌는 상대방의 경험을 인식한다. 그 순간 공감각자의 몸은 ‘상대방의 몸’이 되고, 그 몸에 ‘내 감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공감각자는 ‘강제적으로’ 공감한다. 거울-촉각을 몸소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공감각자들이 평생 ‘나 자신과 싸움’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할 것이다. 틀린 건 아니다. 실제로 저자는 공감각 능력으로 일상생활에 불편함을 겪었다. 공감각자의 뇌는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다른 사람을 인식하면서 확인된 정보를 받아들인다. 저자는 자신의 뇌가 다른 사람의 경험과 감정에 지나치게 몰두하지 않도록 더욱 신경을 써야 했다. 외부 반응에 아주 예민한 공감각자는 늘 겪어야 하는 거울-촉각 경험을 피하고자 바깥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기도 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거울-촉각 공감각이 그 능력을 갖춘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저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거울-촉각 공감각은 병리적인 현상이나 장애가 아니다. 거울-촉각 공감각도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 중의 하나이다. 거울-촉각 공감각도 장점이 있다. 저자는 환자들의 정서적 · 신체적 경험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입체적인 의사’이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환자들의 진심을 확인하고, 그들이 느꼈을 통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된다.

 

 

 눈앞에서 환자가 세상을 떠날 때마다 나도 죽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 느낌은 결코 약해지는 법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여러 번 죽었다. 환자가 죽는 것을 볼 때, 죽음 속으로 사라지기 전 마지막 순간을 내 몸에서 체험했다. 헛된 공포의 마지막 순간, 또는 침묵의 특전이었다. 나는 이러한 순간마다 달갑지 않았고, 우발적이며 충격적이고 혼란스러운 죽음을 막기 위해 항상 무언가,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환자의 마지막 순간의 의식을 존중하고, 그들 삶에서 마지막 순간의 증인이 되고 싶었다. 환자의 마지막 바람은 존중받아야 하고 아무 결함 없이 확실히 이행되어야 한다.  (194쪽)

 

 

환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의사들이 많다. 이런 의사들은 아프다고 칭얼대면서 찾아오는 환자들을 돌려보내기 위해 효과가 미미한 약을 처방한다. 그것은 인간의 고통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이 없는 행동이다. 환자와의 정서적 거리감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의사들은 저자의 공감각 경험 사례를 참고했으면 한다.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로써 과학적인 진단과 분석, 즉 ‘의술’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아울러 환자의 통증과 고통 및 두려움까지 공감하며 귀담아 들어주는 ‘인술’이야말로 질병으로 고통받아 병원을 찾는 환자들을 위해 갖춰야 할 덕목이다.

 

《거울 촉각 공감각》은 색다른 능력을 가진 신경과 의사의 자서전이 아니다. 이 책은 ‘공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공감. 얼핏 들으면 평범하고 쉬운 단어이지만 그 의미가 모호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동안 공감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라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좋은 말인데도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누구나 공감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대부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얼추 생각하는 선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저자가 말하는 공감은 이러한 단순히 ‘생각하기’에만 있지는 않다.

 

 

 공감은 단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왜 그 일이 일어나는지 생각할 정도로 신경 쓰는 것이다.  (386쪽)

 

 

정말로 진지하게 공감을 하려면 눈이라는 거울에 단순히 비친 상대방이 나 자신의 정신적 공간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즉 ‘나’와 상대방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만약 어떤 사람이 된다면 그 사람의 감정을 파악할 수 있고, 그 사람이 행동하는 이유를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상대방에 향한 과도한 몰입은 경계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사람에게 공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공감하지 못해도 괜찮다. 공감 능력이 남들보다 떨어졌다는 생각으로 자책하지 않아도 된다. 상대방을 생각해주는 공감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내가 원하지 않은 공감’, ‘강제적인 공감’ 같은 억지스러운 공감은 진지한 공감을 위해 비워야 할 우리의 정신적 공간을 비좁게 만든다. 그런 공감은 ‘나’를 속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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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은 삶과 종교가 하나로 된 가치관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 무슬림들의 일상생활과 그들의 종교 율법 간의 차이를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 정치,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모든 생활영역에서 그들이 항상 이슬람의 전통과 가치관을 앞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슬람은 적어도 무슬림들에게는 삶 그 자체와 동일시된다. 이것이 정교분리의 세속적 가치관에 익숙한 서구인들이나 우리가 이슬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게 만든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게다가 2001년에 일어난 9.11 테러 이후 우리는 이슬람권과 첨예하게 대립해 온 미국 중심의 인식 틀을 통해 이슬람을 이해해 왔다.

 

그래도 9.11 테러를 기점으로 국내에 이슬람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관련 서적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슬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왜곡과 편견에 가깝다는 점을 알면서도 속 시원하게 그 궁금증을 풀어주는 책은 없었다. 몇몇 책은 너무 학문적이거나 전문적이어서 일반 독자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추지 못했다. 지금부터 소개할 세 권의 책은 이슬람을 종교로서가 아닌 오랫동안 형성된 문화적 체계로 보고, 이슬람 경전인 코란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무슬림들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을 폭넓게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싶다.

    

 

 

 

 

 

 

 

 

 

 

 

 

 

 

 

* 수 로이드 로버츠 여자 전쟁(, 2019)

* 캐런 엘리엇 하우스 사우디아라비아: 중동을 들여다보는 창(메디치미디어, 2016)

* 제럴딘 브룩스 이슬람 여성의 숨겨진 욕망(뜨인돌, 2011)

    

 

 

여자 전쟁()30년 넘게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르헨티나, 아일랜드, 코소보 등 전 대륙을 넘나들면서 여성 인권을 취재한 영국의 언론인 수 로이드 로버츠(Sue Lloyd-Roberts)가 쓴 유일한 책이자 유작이다. 그녀는 이 책을 여성의 날에 맞춰 공개하려고 했지만, 완성하지 못한 채 201510월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딸이 저자가 쓰지 못한 마지막 장(12)을 마무리 지었다. 책의 마지막 장에 저자에게 보내는 딸의 진심 어린 메시지가 있다. 가슴 뭉클해지는 글이니 꼭 읽어보시길.

 

저자의 눈길이 가장 많이 머무는 곳은 이슬람 문화권의 여성들(감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파키스탄, 요르단)이다. 대부분 무슬림 여성은 여러 형태의 베일을 두르고 길을 나선다. 여성의 신체가 조금이라도 노출되면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수 있다는 명예를 중시하는 전통적 가치관에서 기인한 풍습이다. 감비아의 일부 지역에서는 지금도 할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여성 성기 절제술(Female Genital Mutilation, FGM)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여자 전쟁은 여성들의 인권 유린 사례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정권의 부도덕함과 종교 근본주의자들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여성들의 목소리도 들려준다. 이 책에서 저자는 비가시화되기 쉬운 중동 · 아프리카 · 아시아 여성들의 투쟁과 연대 의식에 주목한다.

 

여자 전쟁4장 제목은 세계에서 가장 큰 여성 감옥: 사우디아라비아이다. 제목만 보고도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무런 헌법적 견제도 없는 왕가의 통치를 받고 있다. 비록 사우디 정부는 약간의 제한적인 개혁을 발표했지만, 국민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들을 선출할 수 없고 종교나 언론 혹은 집회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사우디에서는 여성의 자동차 운전이 금지돼 있다. 사우디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사우디 사회 내부에 스며드는 서구식 문화 및 세속적 가치를 막기 위해 남편에 순종하는 무슬림 여성상을 강조한다.

 

사우디아라비아: 중동을 들여다보는 창(메디치미디어)은 사우디 내부에 작동하면서 유지되고 있는 사우디인 특유의 수동적인 성격을 다각도로 분석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미국의 언론인 캐런 앨리엇 하우스(Karen Elliott House)는 사우디 사람들의 내밀한 정서와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전통과 종교적 규범을 구체적으로 살피고 있다. 그녀는 알라, , 이슬람 중심주의의 전통과 생활방식에 고분고분 따르는 사우디 사람들 대다수가 거대한 벽으로 둘러싸인 미로와 같은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미로를 허물어뜨리거나 탈출하려는 적극성과 진취성을 가진 사우디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저항 의지를 사라지게 만드는 미로가 더욱 견고해질수록 여성의 지위와 인권에 대한 여론은 반이슬람적인 서구식 가치로 규정 받으면서 외면 받는다. 아랍의 봄을 이끈 계층이 분노한 청년층이라면, 사우디 사회의 개혁 요구는 여성이 주도해왔다. 하지만 이 변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엄밀하게 근본주의적이며 보수적이기도 한 여성들 역시 존재한다. 서구 문화에 어느 정도 적응한 젊은 사우디 여성들도 남성우월주의(‘남성이 여성을 보호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므로 운전은 남성만 할 수 있다’)와 이슬람 중심주의 생활 방식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이슬람 여성의 숨겨진 욕망(뜨인돌)을 쓴 호주의 언론인 제럴딘 브룩스(Geraldine Brooks)는 앞서 소개한 두 명의 저자들과 다르게 무슬림 여성들을 억압하는 이슬람 사회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 그녀는 남성 중심의 권력체계가 이슬람 신앙을 왜곡해 여성들을 이용하고 억압하고 있다고 말한다. 남성 기득권층이 코란을 해석하는 권리를 독점하고, 종교적 규범을 지키기 위해 코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왔다는 것이다. 그녀는 또 진보적인 무슬림들의 소극적인 저항 방식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녀의 지적에 따르면 몇몇 진보적인 무슬림은 명예살인과 여성 성기 절제술과 같은 반인권적인 관습을 이슬람 신앙과 철저히 분리하려고 한다. 그들은 서구권 국가에 망명하여 반인권 · 반문화적이라는 오명이 씌워진 이슬람 신앙 자체를 보호하는 데 급급하다. 이로 인해 그들은 이슬람 사회에 만연된 현실적인 문제를 보지 못한다. 제럴딘 브룩스는 진보적 무슬림이 근본주의적 무슬림을 향한 내부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무슬림 여성들의 몸과 삶을 짓밟는 관행들을 타파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이슬람권 국가에서도 작게나마 변화의 바람은 불고 있다. ‘아랍의 봄이후, 무슬림 여성들의 권리 향상 열망도 높아지고 있다. 세상이 느리게 진보하는 게 사실이라면 언젠가 이들도 코란에 갇힌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나라보다 일찍 여성 운동의 물결을 흠뻑 적신 미국과 유럽의 여성들도 어느 날 갑자기 자유를 만끽한 것은 아니다. 지금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크고 작은 여성 운동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새로운 문화와 삶의 방식을 만들려는 여성들의 여정을 계속될 것이다.

 

 

 

 

Trivia

 

 

* 엘 사와디FGM을 처녀막에 대한 집착의 결과라고 설명한다.  (여자 전쟁, 36)

 

→ 이집트의 여성운동가 나왈 엘 사다위(Nawal El Saadawi)의 오자.

 

 

* 내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우울한 현실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스라엘의 하마스(Hamas),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Mujahedin) 분파들, 이집트의 수많은 급진주의자들과 알제리의 이슬람구국전선(Islamic Salvation Front)이 자신의 조국과 이슬람 세계 전체의 모범이라고 주장하는, 남녀가 분리된 황막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슬람 여성의 숨겨진 욕망, 237)

 

오류. 하마스는 이스라엘 정부와 대립하는 팔레스타인의 무장 단체이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집권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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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2 - 털보 과학관장과 함께라면 온 세상이 과학 저도 어렵습니다만 2
이정모 지음 / 바틀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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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한 리뷰를 썼는데도 책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변명을 해보지만,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사실을 자꾸 잊어버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 과학책을 읽고 있을 때, 그 책 속에 있는 과학 지식이 내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는 기분이 든다. 그러나 자신감은 오래 가지 못한다. 책을 덮고 난 후부터 문제가 생긴다. 과학책에 있는 내용을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것을 말로 설명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새하얘지고 말문이 막혀버린다. 누군가가 나에게 불쑥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의 차이가 뭐예요?”라든가 “이기적인 유전자가 무슨 뜻이에요?”라고 질문한다면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책을 많이 읽으면 똑똑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분명히 똑똑한 애서가들이 있다. 그러나 예외는 있다. 나 같은 헛똑똑이는 책 읽는 것 자체를 즐기기만 하는 딜레탕트(dilettante, 호사가)에 가까운 독자이다. 즉 나는 책을 좋아하지만, 아는 게 많지 않은 사람이다. 이 말은 겸손의 표현이 절대 아니다.

 

최근에 책의 내용을 쉽게 잊어버리는 문제의 원인을 알아냈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의 칼럼 모음집인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2》에 첫 번째로 실린 글은 암기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독일에 유학 생활은 한 이정모 관장은 자신을 가르친 독일인 교수가 내는 구두시험에 어려움을 느낀다. 구두시험에 좋은 성적을 받으려면 교수가 가르쳐준 내용을 암기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암기를 잘하지 못한 이정모 관장, 아니 학생은 외워야만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시험 방식에 불만을 가진다. 이정모 학생은 교수에게 직접 찾아가 암기 중심의 교육에 문제 있다는 식으로 따진다. 그러자 교수는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이며 대답한다.

 

 

 “아니, 누가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했는가! 학습은 암기일세. 자네 머릿속에 있어야지 책 속에 있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번쩍이는 아이디어는 책이 아니라 자네 머리에서 나와야 하네. 그러니 열심히 암기하게나.”

그리고 덧붙였다.

“이해는 완전한 암기를 위한 준비과정이지.”

 

(『누가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했는가』 중에서, 13쪽)

 

 

이정모 학생은 교수의 말에 동의한다. 과학관장이 된 이정모 학생은 교수의 죽비 소리를 들었던 그 날을 회고하면서 창의성보다 더 중요한 게 암기라고 강조한다. 혹시 지금까지 나온 내용만 보면서 이정모 관장이 주입식 암기교육을 옹호한다고 단정하지 마시길 바란다. 이 글의 전문을 보면 알겠지만, 이정모 관장은 암기와 주입식 암기 교육을 확실하게 구분한다. 이정모 관장도 그렇고, 나도 주입식 암기교육을 반대한다. 이정모 관장이 말하는 ‘좋은 암기’란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을 이해하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기본기다. 독일인 교수는 스무 번 외우고 스무 번 잊어버리면 저절로 외워진다고 말한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책 속에 있는 내용을 확실하게 건져서 내 머릿속에 담으려면 일회성 독서만 가지고는 안 된다. 외워야 할 내용은 무조건 외워야 한다. 그러려면 책을 여러 번 읽어야 한다. 꼭 위편삼절(책을 엮은 가죽끈이 3번씩이나 끊어질 정도로 읽어야 한다는 뜻의 사자성어)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잊을 때가 되었다 싶으면 책을 읽으면 된다. 그러면 저절로 외워진다.

 

이정모 관장이 말했듯이 과학은 어렵다. 그런데 과학이 어렵다는 이유로 과학 공부를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잖은가. 정말 재미있고, 쉽게 풀어쓴 과학책은 많다. 이정모 관장이 쓴 과학책이 재미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요즘에는 만화로 된 과학책이 나오고 있다. 읽을거리가 많다. 과학책을 반복해서 읽고, 알아야 할 내용을 암기하는 습관을 들인다면 어렵게 느껴지던 과학이 친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포기하지 않고/그래도) 과학책을 읽어야겠습니다.

 

 

 

※ 《저도 과학은 어렵습니다만》 2권이 전작과 다른 점: 부록으로 이정모 관장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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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3 05: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5-23 12:38   좋아요 0 | URL
귀찮은 방식이지만, 책을 읽을 때도 정말 외워야 할 내용은 꼭 외워야겠어요....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