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세습에 열중하는가 - 재벌의 세습경영과 한국경제의 미래
유재용 지음 / 나남출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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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가 어려워지고 정권의 임기 끝이 저만치 보이기 시작하면 레임 덕(lame duck) 현상이 일어난다. 레임 덕은 임기 말 대통령의 권력이 약화하는 현상을 뜻한다. 대통령의 지도력이 약해지면서 정책이 오락가락하는 상황을 다리를 저는 오리의 모습에 빗댔다. 이때 재벌과 보수 야당은 공세의 고삐를 조이기 시작한다. 전경련, 자유기업원 등 산하단체는 물론이려니와 우파 학자들까지 총동원하여 정부의 기업정책을 비판한다. 일부 보수 언론까지 여기에 가세하여 마치 정부가 재벌을 억압하여 우리 경제가 정부 잘못되고 있는 것처럼 여론을 호도한다.

 

그들은 정권 교체를 위해 현실의 왜곡도 마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정경유착을 알고도 묵인하는 재벌 중심 자본주의를 종식하고 우리나라에 올바른 시장경제가 정착되도록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서슴없이 좌파 또는 종북 세력으로 매도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못 하는 일이 없다. 과거에 그랬듯이 말이다.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1997년. 재벌의 연쇄도산으로 역사 이래 최대의 경제 위기를 맞았다. 부실 재벌의 처리 비용으로 이미 백조 원이 넘게 들었고 앞으로 더 들어야 할 돈과 이자 비용까지 고려하면 이백조 원은 넘을 터인데, 이 모두가 우리 같은 서민들이 갚아야 할 빚이 되었다. 이런 천문학적인 규모의 빚을 국민에게 떠넘긴 장본인들이 바로 재벌이 아니었던가. 그들은 남의 돈을 내 돈인 양 물 쓰듯 쓰면서 수익성을 무시한 채 화려한 외형확장에만 탐닉했다. 돈을 못 벌어 이자를 갚기 힘들면 돈을 더 꾸면 되었다. 회계장부를 조작하여 돈을 많이 버는 양 꾸미면 되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제대로 한번 살려보자는 것이 재벌개혁이다. 재벌의 성적표를 제대로 매겨 시장에 보여주자는 것이다. 각종 비리에 연루되거나 경제 성장을 위해 제대로 된 노력을 하지 않은 재벌에 책임을 묻자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오랫동안 유지해온 국가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런 것이 있었기에 그 국가들의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성공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다.

 

《우리는 왜 세습에 열중하는가》는 기업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 발전을 더디게 하는 세습 경영을 비판한다. 여기까지 보면 너무 당연한 얘기로 들린다. 하지만 책 제목의 주어에 주목하시라. ‘우리’는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이 ‘우리’는 중의적이다. 불공정한 세습 경영을 고집하는 우리나라 재벌과 그들을 옹호하는 세력들을 가리킬 수 있고, 이러한 심각한 상황을 불편하게 여기지 않는 대중을 뜻하기도 한다. 멜로드라마의 진부한 단골 소재 중 하나가 ‘백마 탄 왕자’처럼 등장하는 재벌 2세이다. 그들은 부모의 경영권을 물려받은 차기 경영인이면서도 자신이 소유한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을 좋아한다. 대중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설정임을 알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에 열광한다. 세습 경영이 부작용이 많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경영인의 리더십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에 소극적이다. 경제가 잘못되면 먼저 대통령 탓으로 돌린다. 물론 대통령의 리더십과 관료주의는 비판 대상이다. 그런데 재벌 3, 4세들이 선친의 기업을 물려받아 경영하면서 경제 발전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만한 일을 한 적이 있는가. 자영업자와 소상공인, 중소기업 등에 빨대를 꽂은 재벌 3, 4세들을 보라. 이게 경제 발전을 위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경유착 근절과 재벌개혁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우리나라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전근대적인 세습 경영이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친 재벌 경제학자들은 이러한 경영 방식을 ‘기업 상속’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기업 상속은 장점이 많다. 기업이 보유한 핵심기술과 경영 노하우를 발전시키고, 기업경영의 영속성을 제고할 수 있다. 그런데 친족 관계로 맺어진 경영인들이 기업 상속을 위해 분식회계 · 정경유착 등 무리한 시도를 했다면 그들의 경영 능력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과연 그들은 경제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자신감 있는 경영 비전이 있어서 기업 상속을 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기업’ 그 자체를 지키고 싶은 것일까. 후자의 목표를 위한 거라면 문제가 있다. 기업에 대한 국민적 신뢰도를 깎는 요인 중 하나다. 그런데 친 재벌 경제학자들은 기업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분노, 그리고 비판마저 ‘반 기업 정서’를 부추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지금의 재벌을 만든 고인들은 남다른 도전과 창의성으로 기업을 일궈낸 공로로 생전에도 재계 지도자로 추앙을 받았다. 이 땅에 자동차와 중화학공업을 뿌리내리고 반도체 · 전자 등 첨단산업을 태동시킨 혜안은 경영학의 사례연구와 분석과제로 손색이 없다. 그들의 경영 방식도 한계가 있고 비판 대상이 되지만, 국익과 경제 성장을 위해 노력했으므로 존경받아 마땅하다. 재벌 1세들에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으라면 경영권 세습을 당연하게 여긴 점이다. 그들의 후손은 리더십 검증을 받지 않은 채 기업을 이끈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의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재벌 1세들의 공로에 감명받은 사람들은 말한다. 재벌 1세가 워낙 능력이 뛰어나니 당연히 그들의 후손들도 기업을 잘 이끌어나가는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이루어진다면 정말 좋은 일이다. 하지만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된다. 경영인의 외모는 유전될 수 있어도 자질과 능력은 절대로 유전되지 않는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 사실만 알아도 세습 경영이 얼마나 전근대적이고 후진적인지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왜 세습에 열중하는가》는 적폐 청산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있는 이 시대에 어떻게 정경유착의 명맥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지 아주 쉽게 설명한다. 기자 출신인 저자는 권력과 부만 대물림되는 세습 경영의 문제점들을 하나하나씩 알려준다. 재벌 3, 4세의 역량에 대한 공정한 검증이나 평가가 없이 부모의 사회경제적 후광에 의지해 정치권력과 자본 권력의 중심에 선다. 세습 경영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부의 편중 현상을 심화시켜 서민들을 시름에 빠지게 하고, 부정부패에 따른 기회비용은 경제 발전을 저해한다. 세습주의(저자는 어쩔 수 없이 ‘세습자본주의’라고 썼는데, 저자 말대로 ‘세습 자본주의’를 자본주의라고 볼 수 있는지 딜레마다)가 근절되지 않으면 ‘흙 수저론’ 논쟁이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흙 수저’ 청년이 경영인이 될 수 있는 공정한 경쟁 기회가 박탈된다. 우리는 먹고 살기 바쁜 와중에 재벌이 저지른 크고 작은 사건들을 보면서 점차 분노에 무감각해지고, ‘역시 그럴 줄 알았어!’라면서 짜증 섞인 혼잣말을 되뇐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먹고 살기 힘든 원인을 대통령에게 찾는다. 그러면서 경제를 확실히 살릴 만한 대통령 후보감이 누군지 살펴본다. 이런 와중에 재벌 책임론은 잊힌다. 우리의 무관심 속에 재벌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세습과 비리를 시도한다.

 

이제 재벌 문제를 논할 때 ‘우리는 왜 세습에 무관심하는가’에 먼저 초점을 맞춘 다음 ‘그들이 왜 세습에 열중하는지’ 접근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만의 자본주의(세습주의)’에 적극적으로 분노하고 타파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저항하는 시민들의 힘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경험이 수없이 많다. 우리는 정권 교체를 이끈 결정적인 동력이 된 저항 의식과 결집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런 우리가 재벌 세습주의를 근절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 Trivia

 

 

* 우리나라에서 유독 세습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로 능력에 대한 평등적 인식을 꼽았다. 그렇다. 능력에 대한 존중의식이 있다면 사실 세습은 가능하지 않다. (234쪽)

 

 

→ 재벌 3, 4세의 능력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은 능력에 대한 평등적 인식과 거리가 멀다. 저자는 재벌에 속하지 않은 전문 경영인의 능력을 존중하는 인식이 형성되어야 세습주의를 근절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입장이 제대로 전달되려면 ‘능력에 대한 평등적 인식의 부재’라고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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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뱀파이어’와 ‘레즈비언 뱀파이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두 존재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전에 ‘여성 뱀파이어’의 계보를 살펴보면서 이들에게 어떤 특징이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콜리지 시선》 (지만지, 2012)

* 존 키츠 《키츠 시선》 (지만지, 2012)

* [품절] 존 키츠 《빛나는 별》 (솔출판사, 2012)

* 괴테 《괴테 시 전집》 (민음사, 2009)

 

 

 

 

우리가 알고 있는 뱀파이어 이미지는 브람 스토커(Bram Stoker)의 소설에 나오는 드라큘라(Dracula) 백작과 이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드라큘라 백작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뱀파이어에 관한 각종 전설이 전해 내려왔고 낭만주의 문학이 꽃 피던 시대에 뱀파이어는 ‘죽은 연인’ 또는 ‘이승의 남성을 유혹하는 유령 신부’로 묘사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은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의 서사시 『크리스타벨(Christabel), 존 키츠(John Keats)의 시 『라미아(Lamia)『무정한 연인』, 괴테(Goethe)의 담시 『코린트의 신부』 등이 있다.

 

 

 

 

 

 

 

 

 

 

 

 

 

 

 

 

 

 

 

 

 

 

 

 

 

 

 

 

 

 

 

 

 

 

* 박선경 엮음 《세계 서스펜스 추리여행 1》 (나래북, 2014)

* 테오필 고티에 《고티에 환상 단편집》 (지만지, 2013)

* [품절] 민경수 엮음 《클라리몽드: 아홉 개의 환상기담》 (작품, 2013)

* 이탈로 칼비노 엮음 《세계의 환상 소설》 (민음사, 2010)

* 이규현 엮음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창비, 2010)

* [품절] 정진영 엮음 《뱀파이어 걸작선》 (책세상, 2006)

 

 

 

 

프랑스의 소설가 테오필 고티에(Theophile Gautier)의 단편소설 『죽은 연인』에 나오는 클라리몽드(Clarimonde)는 남자를 유혹해 피를 빠는 매춘부다. 이 소설은 여러 권의 단편 선집에 수록되었는데 제목이 다양하다. ‘클라리몽드’, ‘사랑에 빠져 죽은 여인(《고티에 환상 단편집》)’, ‘죽은 여인의 사랑(《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죽은 여자의 사랑(《세계의 환상 소설》) 등이 있다.

 

앞서 언급한 작품들에 묘사된 여성 뱀파이어는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사악한 존재’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남성 앞에 성적 매력을 발산하며 그들을 사랑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 르 파뉴 《카르밀라》 (초록달, 2015)

 

 

 

 

스토커의 《드라큘라》와 함께 뱀파이어 고전으로 손꼽히는 레 파누(Le Fanu)《카르밀라(Carmilla)는 여성 뱀파이어가 등장한 작품으로 분류된다. 카르밀라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레즈비언 여성으로 묘사된다. 그렇지만 나는 카르밀라를 ‘여성 뱀파이어’가 아닌 ‘레즈비언 뱀파이어’라고 생각한다. 여성 뱀파이어와 레즈비언 뱀파이어는 다르다. 카르밀라는 여성 뱀파이어의 계보에 속할 수 없다.

 

 

 

 

 

 

 

 

카르밀라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정체성을 설명하려면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모니크 위티그(Monique Wittig)의 명제를 가져 와야 한다. 위티그는 1980년에 발표한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다(On ne naît pas femme)라는 글에서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는 파격적인 명제를 제시한다.

 

 

 

 

 

 

 

 

 

 

 

 

 

 

 

 

 

 

 

* 조현준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 (행성B, 2018)

* [품절] 케티 콘보이 외 엮음 《여성의 몸,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한울아카데미, 2001)

 

 

 

 

 

 

 

 

 

 

 

 

 

 

 

 

* 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을유문화사, 1993)

* 변광배 《제2의 성: 여성학 백과사전》 (살림, 2007)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다』 번역문은 《여성의 몸, 어떻게 읽을 것인가》(한울아카데미)에 수록되어 있다. 이 글은 레즈비언을 가부장 및 이성애 중심 사회를 전복하는 새로운 주체로 규정한 선언문이다. 안타깝게도 이 중요한 글이 수록된 책이 절판되었다.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행성B)에 위티그의 이론을 소개한 내용이 있다.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위티그는 보부아르(Beauvoir)의 영향을 받은 페미니스트다. 위티그는 보부아르의 명제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를 재해석하고 이를 변용한다. 보부아르가 말한 ‘만들어지는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여성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형성되는 ‘젠더(gender)’의 여성이다. 그러나 위티그는 그녀의 명제를 동의하면서도 ‘만들어지는 여성’이 이성애 여성에 더 가깝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위티그는 보부아르의 명제를 확장하여 ‘만들어지는 여성’은 레즈비언이어야 한다고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녀는 사회적으로 강제된 젠더 역할, 즉 ‘남성’과 ‘여성’으로 설명하는 성의 범주는 ‘이성애적 계약(heterosexual contract)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여성은 태어나는 게 아니다』에서 보여준 위티그의 문제의식은 ‘이성애 중심 사회 및 문화 비판’이다.

 

위티그는 생물학적 여성의 존재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해 모성과 재생산 기능을 강조하는 사회적 인식뿐만 아니라 가모장을 중심으로 한 여성사까지 반대한다. 이러한 설명들이 결국은 이성애에 초점에 맞춰져 있으며 이성애 중심주의는 ‘헤테로 여성의 레즈비언 차별’의 원인이 된다.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여성을 사랑하는 것은 ‘어머니’라는 정상성의 여성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카르밀라는 ‘이성애적 계약’에 저항하는 레즈비언이다. 그녀는 결혼과 모성, 재생산을 중요시하게 여긴 빅토리아 시대의 견고한 사회적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한 존재이다. 위티그는 이성애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여성은 레즈비언이라고 주장한다. 이성애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결국 남자나 여자 되기를 거부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위티그는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는 명제를 도출한 것이다. 위티그가 말한 레즈비언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다. 위티그는 생물학적 · 사회적 남녀 성별 범주를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하고도 특별한 존재가 레즈비언이라고 주장한다.

 

카르밀라는 이성애자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레즈비언 뱀파이어’다. 카르밀라는 소녀에게 접근하여 밤마다 그녀들의 목을 노린다. 남성들이 카르밀라의 악행을 가만히 지켜볼 리가 없다. 특히 소설에 나오는 슈필스도르프(Spielsdorf) 장군은 카르밀라 때문에 목숨을 잃은 조카딸의 복수를 꿈꾼다. 카르밀라를 퇴치하기 위해 결성된 ‘남성 십자군’의 임무는 가사 및 재생산 노동을 전담하는 헤테로 여성이 되어야 하는 소녀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결국 카르밀라는 ‘남근’을 상징하는 말뚝에 박혀 죽는다.

 

 

 

 

 

위티그의 레즈비어니즘(lesbianism)은 남성 가부장, 이성애 중심의 정치 및 문화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면서 성적 자율성을 가진 레즈비언 정체성을 제시한다. 그러나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가부장 및 이성애 중심 사회에 저항하는 위티그의 입장에 공감하면서도 레즈비언을 특별한 존재로 만든 위티그의 명제를 비판한다.

 

 

 

 

 

 

 

 

 

 

 

 

 

 

 

 

*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문학동네, 2008)

* 조현준 《젠더는 패러디다》 (현암사, 2014)

 

 

 

버틀러도 레즈비언이다. 그러나 그녀는 강제적 이성애 중심 사회에 대항하는 유일한 존재가 레즈비언뿐이냐고 반문한다. 레즈비언이 아무리 특별하고도 주체적인 존재라고 해도 레즈비언이 중심이 되는 여성운동은 헤테로 여성과의 연대를 단절하게 만드는 전체주의적 권위로 작동될 수 있다고 비판한다.

 

 

 

  위티그는 보부아르의 선언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에 응답하면서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대신에 사람은 (누구나?) 레즈비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이라는 범주를 거부하면서 위티그의 레즈비언-페미니즘은 모든 종류의 이성애 여성과의 연대를 단절하는 것으로 보이며, 은연중에 레즈비언이야말로 논리적이거나 정치적으로 필연적인 페미니즘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이런 종류의 분리주의적 규정주의는 확실히 더 이상은 존속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정치적으로 바람직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젠더 트러블》, 324쪽)

 

 

나는 버틀러의 문제 제기가 여성주의 운동과 성소수자 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 즉 정체성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 낸시 프레이저 《불평등과 모욕을 넘어》 (돌베개, 2017)

* 철학아카데미 엮음 《처음 읽는 영미 현대철학》 (동녘, 2014)

 

 

 

미국의 여성주의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여성, 성소수자, 노동자’ 등의 단일 정체성을 강조한 좌파의 사회운동 노선을 비판한다. 그녀는 정체성이 ‘물화(reification)’되는 현상이 어떤 개별 존재를 특정한 정체성에 고정해버린다고 주장한다. 레즈비언이 헤테로 여성을 여성운동 연대자로 보지 않는 것, 그리고 ‘일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트랜스 여성을 여성운동 연대자로 보지 않는 것은 ‘레즈비언’ 또는 ‘여성’이라는 단일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나오는 입장이다. 분리주의식 여성운동은 권위주의, 전체주의의 양상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정체성 인정’으로 일관된 여성운동은 단일 정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또 다른 여성을 차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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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6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26 15:5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무성애자 여성이 있으니까요. 레드스타킹 모임에 참석한 이후부터 성소수자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모르는 사실이 많아요. ^^;;
 

 

 

 

《카르밀라》를 펴낸 초록달 출판사1인 출판사다. 한 사람이 혼자서 책 한 권을 만들어 판매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책 한 권 만드는 과정 중에서 가장 힘든 업무는 외국 문학작품을 번역하는 일이다. 번역해보지 않았지만, 조금만 역자들의 삶을 생각해본다면 번역하는 일이 고된 작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역자는 원문의 단어 하나하나 끊임없이 눈으로 만져본 다음 그 의미와 비슷한 제2의 단어를 찾아내서 종이에 옮겨 써야 한다. 홀로 단어들과 씨름하고 있는 역자들 덕분에 독자는 다른 나라의 글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 르 파뉴 《카르밀라》 (초록달, 2015)

 

 

 

초록달 출판사가 레 파누(Le Panu)의 대표작 두 편(『카르밀라』와 『그린 티』)을 번역하기로 한 점, 그리고 이 책의 출간을 위해 후원해준 분들 모두 진심으로 감사하다. 하지만 이 책의 번역문에 아쉬운 점이 눈에 띈다. 먼저 『카르밀라』의 번역문부터 살펴보겠다.

 

 

 

 

 

  아무 말이 없던 아버지가 셰익스피어의 소설 한 구절을 인용하며 말했다. 아버지는 영어 실력을 유지하기 위해 큰소리로 글을 읽고는 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소리 내어 말했다. (27~28쪽)

 

 

 

 

 

 

 

 

 

 

 

 

 

 

 

 

 

 

 

* 메리 램, 찰스 램 《명화와 함께 읽는 셰익스피어 20》 (현대지성, 2016)

* 메리 램, 찰스 램 《셰익스피어 이야기》 (비룡소, 2012)

 

 

 

 

셰익스피어(Shakespeare)는 소설을 쓴 적이 없다. 그는 희곡 작품과 소네트(sonnet)를 썼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은 소설 형식으로 편집되어 만들어지기도 했다. 영국의 수필가 찰스 램(Charles Lamb)과 그의 누이 메리 앤 램(Mary Ann Lamb)은 1807년에 어린이들의 눈높이를 맞춘 《셰익스피어 이야기》를 썼다. 메리 램은 낭만주의 문인들과 교류하는 작가였으나 정신병 발작으로 어머니를 살해했다. 찰스 램은 평생 독신으로 누이를 간호하면서 살았다. 남매가 함께 쓴 《셰익스피어 이야기》는 어린이를 위한 고전이 되었다.

 

『카르밀라』의 시대적 배경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레 파누가 작중 시간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자는 로라(Laura)가 어느 시기에 살았는지 어림짐작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카르밀라』의 작중 시간은 19세기 중반이다. 《셰익스피어 이야기》가 19세기 초반에 나왔으니 로라가 이 책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셰익스피어가 언급된 원문과 번역문만 봐서는 로라의 아버지가 《셰익스피어 이야기》의 한 구절을 인용했는지 아니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작품에 있는 구절을 인용했는지 알 수 없다. 원문에는 ‘셰익스피어의 소설’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구절이 없다. 어린 로라는 어른이 읽는 희곡 버전보다 소설 버전의 《셰익스피어 이야기》가 더 익숙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소설’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셰익스피어의 소설’은 오역이다.

 

 

 

 

  라폰테인이 머리에 검은색 터번을 쓰고 인상이 험악했던 여인에 대해 설명했다. (38쪽)

 She described a hideous black woman, with a sort of colored turban on her head.

 

 

 

 

 

 

 

 

 

 

 

 

 

 

 

 

 

 

 

 

* [품절] 정진영 엮음 《뱀파이어 걸작선》 (책세상, 2006)

 

 

 

다음 인용문은 흑인 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그걸 지적하기 위해서 인용한 것은 아니다. ‘colored turban’을 번역한 표현에 문제를 제기하려는 것이다. ‘coloured’는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을 비하하는 뜻을 가진 단어이지만, ‘검은색 터번을 쓴 여인’이라고 번역하면 독자는 (원문에 분명히 언급된) 그 여인이 흑인이라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다. 원문의 뜻을 그대로 살리면서 번역한다면 ‘색깔 있는 터번을 쓰고 인상이 험악했던 흑인 여성’으로 쓰는 것이 적절하다. 이미 『카르밀라』를 번역했던 정진영‘유색 터번을 두른 오싹한 흑인 여자’라고 썼다(《뱀파이어 걸작선》, 36쪽).

 

 

 

 

 

 

 

 

 

 

 

 

 

 

 

 

 

 

 

 

* [품절] 윤호송 엮음 《세계 괴기소설 걸작선 1》 (자유문학사, 2004)

 

 

 

 

다음 인용문은 『그린 티』의 결말에 해당하는 문장의 일부다. 마틴 헤셀리우스 박사(Dr. Martin Hesselius)는 동료 교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녹차를 마신 뒤부터 악마를 목격하게 된 제닝스(Jennings) 신부의 증상에 대한 소견을 밝힌다.

 

필자는 《세계 괴기소설 걸작선 1》(자유문학사)에 수록된 『녹차』를 읽었는데, 『녹차』(자유문학사)의 결말과 『그린 티』(초록달)의 결말에 있는 내용이 약간 다르다는 걸 느꼈다. 확인해 보니, 『그린 티』의 결말 부분에 오역으로 보이는 문장이 있었고, 심지어 원문의 일부가 누락된 것을 알았다.

 

 

 

  You know my tract on “The Cardinal Functions of the Brain.” I there, by the evidence of innumerable facts, prove, as I think, the high probability of a circulation arterial and venous in its mechanism, through the nerves.

 

 ‘뇌의 기본적인 기능’이란 제목을 붙인 내 논문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거기에서 많은 사례를 들어, 뇌 조직의 기능에 신경이 연결되어 정 · 동맥 혈액의 순환 작용이 크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증명했다. 

 

(『녹차』, 343쪽)

 

  제가 뇌 주요기능학회에서 어떤 연구를 발표했었는지 아실 겁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증거를 제시하며, 신경세포가 뇌 메커니즘에서 동맥과 정맥 순환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밝히지 않았습니까. 

 

(『그린 티』, 250쪽)

 

 

 

‘my tract’ ‘내 (소)논문’ 또는 ‘내 팸플릿’으로 번역해야 한다. 따라서 ‘The Cardinal Functions of the Brain’은 헤세리우스 박사가 쓴 논문 제목이거나 주제이다. 원문에 ‘학회’라고 번역할 만한 단어가 보이지 않는다.

 

 

 

 

다음 문장은 『그린 티』에 누락된 원문과 그 번역문이다.

 

 

 

  The seat, or rather the instrument of exterior vision, is the eye. The seat of interior vision is the nervous tissue and brain, immediately about and above the eyebrow. You remember how effectually I dissipated your pictures by the simple application of iced eau-de-cologne. Few cases, however, can be treated exactly alike with anything like rapid success. Cold acts powerfully as a repellant of the nervous fluid. Long enough continued it will even produce that permanent insensibility which we call numbness, and a little longer, muscular as well as sensational paralysis.

  I have not, I repeat, the slightest doubt that I should have first dimmed and ultimately sealed that inner eye which Mr. Jennings had inadvertently opened. The same senses are opened in delirium tremens, and entirely shut up again when the overaction of the cerebral heart, and the prodigious nervous congestions that attend it, are terminated by a decided change in the state of the body. It is by acting steadily upon the body, by a simple process, that this result is produced—and inevitably produced—I have never yet failed.

 

 

  외적 영상으로서의 역할, 혹은 도구는 바로 눈(eye)이다. 하지만 내적 영상의 역할은 눈 주변에 있는 조직과 뇌가 담당한다. 내가 얼음으로 차게 만든 오드콜로뉴(eau-de-cologne: 향수 이름)를 사용한 것만으로도 당신의 환각 증상을 완전히 없애 버린 것을 떠올려 주길 바란다. 그렇게 신속정확하게 큰 효과를 본 예는 좀처럼 없었다. 어쨌든 차게 한다는 것은 신경 유동체(nervous fluid)를 흩어지게 하는 데 강력한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 방법을 장시간 연속해서 사용한다면, 마비(paralysis)라는 영속적인 불감성(不感性, 감각이 없는: insensibility)을 생기게 할 것이다. 그리고 더욱 오랫동안 연속해서 사용하면 감각과 함께 근육(muscular)까지도 마비될 것이다.

  사실 나는 제닌구즈(제닝스) 씨가 모르는 사이에, 어떻게 해서든 그의 내면의 시력(inner eye)을 잃게 해서, 마지막에는 결국 그것을 가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와 같은 지각은 섬망증(delirium tremens: 의식장애와 내적인 흥분의 표현으로 볼 수 있는 운동성 흥분을 나타내는 병적 정신상태)의 경우에도 일어나는 신경의 이상 충혈(congestion)이 신체 정황의 결정적인 변화에 의해서 한정될 때에 완전하게 폐지된다. 이런 결과는, 신체상에 항상 작용하는 단순한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으로써,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는 실패한 적이 없었다.

 

 

(『녹차』, 343~344쪽)

 

 

 

이 긴 내용을 요약하자면, 헤세리우스 박사는 제닝스의 환각 증상을 녹차에 중독된 ‘내면의 눈(inner eye)’에서 일어난 이상 증세라고 진단한다. 그래서 이 증상의 원인을 제대로 발견한다면 완치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린 티』의 역자는 ‘내면의 감각’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나는 이 표현이 ‘inner eye’의 의미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번역을 해본 적이 없는 평범한 독자의 개인적인 의견이므로 이 글에 대한 반박 의견이 나올 것으로 예상한다.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겸허히 받아들이고 수정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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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밀라 영국인이 사랑한 단편선 2
조셉 토마스 셰리던 르 파뉴 지음, 최윤영 옮김 / 초록달(오브) / 2015년 6월
평점 :
절판


 

 

 

 

 

 

 

 

 

 

뱀파이어(vampire) 하면 야회복과 검은 망토를 걸친 남성을 떠올리기 쉽다. 이 익숙한 남성 뱀파이어의 모습은 브람 스토커(Bram Stoker)《드라큘라(Dracula)를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 탄생하였다. 남성 뱀파이어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은 미국 영화의 중심지인 할리우드(Hollywood)다. 1931년에 개봉한 영화 <드라큘라>에서 뒤로 빗어 넘긴 머리와 긴 송곳니, 검은 망토의 남성 뱀파이어 이미지가 등장했다.

 

사실 스토커의 《드라큘라》가 나오기 전에 이미 여성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문학 작품들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괴테(Goethe)의 시 『코린트의 신부』고티에(Gautier)의 단편소설 『죽은 연인』이다. 두 작품에서 보여준 여성 뱀파이어는 남성을 홀릴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으나 그를 유혹하여 피를 빠는 언데드(undead: 살아있는 시체)다.

 

아름답고 매혹적인 여성 뱀파이어 중 가장 유명한 존재는 아일랜드 출신의 소설가 레 파누(Le Fanu)가 창조한 ‘카르밀라(Carmilla)다. 『카르밀라』는 1872년에 발표된 작품집 《유리잔 속에서 어둡게(In a Glass Darkly)에 포함된 중편소설이다. 《유리잔 속에서 어둡게》는 레 파누가 죽기 일 년 전에 나온 작품이다. 이 작품에 『카르밀라』를 포함한 총 다섯 편의 중 · 단편이 수록되었는데, 한동안 잊힌 작가를 재평가하게 만든 ‘스완 송(Swan Song: 최후의 걸작)이다. 5편의 이야기는 마틴 헤세리우스 박사(Dr. Martin Hesselius)가 기록한 불가사의한 사건들을 다룬다. 《유리잔 속에서 어둡게》에 수록된 다섯 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1. 『그린 티(Green Tea)

2. 『친구들(The Familiar)

3. 『하보틀 재판관(Mr. Justice Harbottle)[주1]

4. 『드래건 볼란트의 방(The Room in the Dragon[주2] Volant)

5. 『카르밀라』

 

 

2016년에 초록달 출판사의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만들어진 《카르밀라》는 『카르밀라』와 『그린 티』를 번역한 것이다. 『그린 티』는 예전에 ‘녹차’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적이 있었으나(《세계 괴기소설 걸작선 1》) 그 이야기가 수록된 책이 절판되는 바람에 한동안 보기 힘든 작품이었다.

 

『카르밀라』는 18~19세기 유럽에 유행한 고딕 소설(Gothic novel)의 기본 요소를 충실히 갖추고 있다. 이 이야기 속의 화자(‘이야기 밖의 화자’는 이름과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로라가 경험한 불가사의한 사건을 기록한 헤세리우스 박사의 연구 자료를 언급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이자 주인공인 로라(Laura)가 사는 곳은 외진 지역에 있는 으리으리한 성(schloss)이다. 이 성의 형태를 묘사한 번역문에서는 ‘으리으리한 저택(11쪽)이라고 되어 있는데, 슐로스는 ‘성(城)을 뜻하는 독일어다. 스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고성이 고딕 소설의 단골 배경인 만큼 ‘저택’보다는 ‘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로라 가족이 사는 성은 오스트리아의 남부 지방인 스티리아(Styria)에 있다. 성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공간이다. 어머니를 일찍 여윈 로라는 거의 성 안에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다. 아무래도 인적이 드문 곳에 성이 있다 보니 성을 왕래하는 또래 친구들이 적을 수밖에 없다.

 

로라는 어린 시절에 악몽을 겪은 적이 있다. 밤이 되면 어떤 여인이 로라의 방에 찾아와 로라의 목에 상처를 냈다. 너무나도 생생했던 일이라 로라는 자신의 목에 상처를 낸 미지의 존재가 실제로 목격했다고 주장하지만, 가사 도우미는 그녀의 말을 꿈으로 생각할 뿐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악몽 같은 날을 겪은 지 12년이 지난 후에 로라는 우연히 사륜마차가 전복되는 사고를 목격한다. 그 마차에 중년 부인과 소녀가 타고 있었는데, 부인은 로라의 아버지에게 자신의 딸을 당분간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부인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 로라의 아버지 덕분에 소녀는 로라의 성에 거주하게 되는데, 그 소녀가 바로 카르밀라다.

 

로라는 카르밀라의 외모가 12년 전 자신의 목에 상처를 낸 여인과 닮은 것을 알고 깜짝 놀란다. 그러자 카르밀라도 12년 전에 꾼 꿈에서 로라와 비슷한 여인을 봤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신비한 공통점을 매개로 친하게 지내게 된다. 하지만 카르밀라는 로라의 유일한 또래 친구이지만, 자신의 과거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카르밀라는 로라와 단 둘이 있을 때마다 마치 사랑스러운 애인을 대하는 것처럼 로라에게 다가가 친밀감을 드러낸다. 이때 카르밀라는 로라를 ‘내 사랑(Dearest: ‘간절한’, ‘여보’라는 뜻이 있다)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카르밀라는 당황하는 내 모습에 흡족해하며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고, 뜨거운 입술로 내 뺨 이곳저곳에 키스를 퍼부으며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넌 내 거야, 내 것이 되어야만 해. 너와 나는 영원히 하나야(You are mine, you shall be mine, you and I are one for ever).

 

(『카르밀라』 중에서, 54쪽)

 

 

 

두 여성의 에로틱한 관계는 레즈비언(lesbian)의 애정 관계와 유사하다. 그래서 카르밀라를 ‘여성 뱀파이어’가 아닌 ‘레즈비언 뱀파이어’로 볼 수 있다.[주3] 레 파누가 로라와 카르밀라의 관계를 에로틱하게 묘사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카르밀라』는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 중반기에 나온 소설이다. 그 시대에 산 사람들 특히 지식인들은 도덕적 중심에 우뚝 서려는 인간상을 지향했다. 빅토리아 시대의 도덕적 인간상은 속물적이지 않으면서도 도덕적으로 결백하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존재이다. 중산층과 귀족계층의 도덕적인 영국 신사들은 도덕적 인간상이 되고자 노력했고, 여성은 도덕적 인간상의 축에 들지 못한다. 그러므로 ‘남자답지 못한 행동’, 즉 ‘여성스러움’은 남성성을 강조한 도덕적 인간상의 조건에 부합하지 못한다. 특히 동성애는 도덕적 타락의 극치로 여겼다.

 

당시 인기 절정에 올랐던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지면서(와일드의 동성 연인의 아버지가 와일드의 동성애를 공개했다) 한순간에 몰락해버린 사건은 동성애에 대한 빅토리아 시대의 부정적 인식을 확인할 수 있는 동성애자 탄압 사례로 남아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 볼 때 보수적인 영국 독자들은 로라의 카르밀라의 레즈비언 관계를 도덕적 공동체의 근간을 위협할 수 있는 위험 징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독자들은 소설에 묘사된 동성애에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독자들은 그녀들의 동성애 관계를 무서워하면서도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궁금해서 보게 된다. 독자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카르밀라를 ‘도덕성이 오염된(타락한) 괴물’로 규정하면서도 그녀의 매혹적인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한다. 이야기 곳곳에 나오는 에로틱한 묘사는 남성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해 레 파누가 종이 위에 설치한 장치이다. 로라와 카르밀라는 서로를 향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세상은 그녀들의 사랑을 치료받아야 할 ‘병든 열정’으로 치부했다.

 

『그린 티』는 지나치게 학문 연구에 몰두한 인간의 내면이 섬뜩한 미지의 힘에 점점 압도당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제닝스(Jennings) 신부는 글을 쓰다가 정신이 지치면 녹차를 자주 마셨다. 녹차에 중독된 이후로 신부는 원숭이를 닮은 악마를 자주 본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제닝스 앞에 나타나는 악마가 보이지 않는다. 악마는 신부의 눈앞에 계속 나타나고, 그 악마가 점점 나타날수록 신부는 괴로움을 호소한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독자들은 『카르밀라』보다 『그린 티』를 더 무서워했을 것이다. 『그린 티』가 영국 독자들에게 공포심을 유발하는 이유는 차(茶)를 즐겨 마시는 영국인의 평범한 일상이 무서운 사건이 되고, 그 불가사의한 사건을 분석할 수 있는 이성조차 무력해지기 때문이다. 『그린 티』에 신부가 마시는 녹차는 현실 세계에 있으면서도 현실 세계에서 마실 수 없는 녹차이다. 레 파누는 이 녹차 하나로 사람들이 익숙하게 생각하던 현실 세계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다. 독자는 녹차를 즐겨 마실 수 있는 일상이 사라진 세상을 대면할 때 긴장감과 섬뜩함을 느낀다. 『그린 티』는 레 파누가 남긴 소설 중에 걸작으로 손꼽힐 만하다.

 

 

 

 

 

[주1] 『하보틀 재판관』에 관한 내용은 필자의 글을 참고할 것.

[GBLA #3: 레 파누] (2019년 8월 20일 작성)

https://blog.aladin.co.kr/haesung/11044572

 

 

[주2] ‘Dragon’은 상상의 동물인 용(龍)과 ‘거친 여자’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소설 제목에 있는 ‘Dragon’은 후자의 의미에 더 가까울 것이다.

 

 

[주3] 필자가 말하는 ‘여성 뱀파이어’와 ‘레즈비언 뱀파이어’의 의미는 다르다. 그러니까 레즈비언 뱀파이어는 ‘(생물학적) 여성’이 아닌 뱀파이어다.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모니크 위티그(Monique Wittig)의 레즈비언 여성주의 이론을 근거를 가지고 카르밀라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내용은 따로 글로 풀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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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8-22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즈비언 뱀파이어가 생물학적 여성이 아닌 뱀파이어라는 말씀은 레즈비언이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라는 말씀인가요?? 정체성 차원이 아니라 생물학적 차원에서도요??

주3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아서, 얼른 따로 글로 풀어주시기를 기다려봅니다....

cyrus 2019-08-22 15:37   좋아요 0 | URL
모니크 위티그는 보부아르가 말한 유명한 명제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다”를 재해석하면서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여성은 이성애 여성이 아니라 레즈비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위티그는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라는 주장까지 합니다.

위티그가 거부하는 ‘여성’이란 이성애 중심 사회에 있는 생물학적 여성을 뜻해요. 위티그는 생물학적 남성과 여성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방식이 이성애 중심주의가 만들어낸 해석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위티그는 여성 내부의 이성애 중심주의가 레즈비언의 존재 자체를 거부한다고 지적했고, 레즈비언이야말로 남성 중심적 권력과 이성애 중심주의 모두를 거부할 수 있는 주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 나온 명제가 바로 “레즈비언은 여성이 아니다”입니다. 위티그가 강조하는 레즈비언은 남녀 성별 범주를 넘어서는 독립적인 주체입니다.

카르밀라를 ‘여성 뱀파이어’라고 보는 해석이 많았는데요, 저는 이 해석이 카르밀라의 레즈비언 정체성을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여성 뱀파이어’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뱀파이어라는 정체성을 부각하거든요. 결국 여성 뱀파이어는 남성을 유혹하는 이성애적 존재가 돼 버려요. 그렇지만 카르밀라는 이성애적 존재가 아니죠. 그래서 저는 위티그의 이론을 가지고 와서 카르밀라를 ‘이성애 중심 사회를 전복하는 레즈비언 뱀파이어’로 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레즈비언을 특별한 주체로 내세우는 위티그의 주장도 비판받고 있습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 트러블>에서 위티그가 레즈비언을 이상화한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상, 제가 쓰려는 글을 요약해봤습니다. ^^

syo 2019-08-22 16:01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개념이 품고 있는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그 개념을 거부하고, 그 거부를 선언하는 언술로 ˝레즈비언은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다˝ 라고 주장했다는 거죠??

그럼 다음 글에서는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 알 수 있겠군요. 화이팅 ㅎㅎㅎㅎ

cyrus 2019-08-22 16:20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에 위티그의 이론을 설명한 내용이 나와요. ^^
 
플럼번 달섬 세계고전 8
제시 레드먼 포셋 지음, 박재영 옮김 / 달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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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면서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한반도에 살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인종 문제’이다. 한국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단일 민족’이라고 배워 왔고, 이것을 또한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교육받았다. 하지만 한국인이 외국에 가면 ‘유색인’이라는 이유로 인종 차별을 당한다. 우리나라가 몇 년 전부터 다문화 국가가 되었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인종 차별이 심각하지 않다고 낙관하는 것은 섣부르다고 생각한다. 우리 주변에서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을 보는 것은 이제 흔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학교에 다닌다고 해도 아이들의 절반 이상이 학교에서 차별을 느낀 적이 있다고 한다. 피부색으로 인한 (동급생과 교사의) 놀림, 타민족 및 문화에 대한 교사의 편견 등이 그 원인이다. 한국인도 아시아계 유색인인데 우리나라에 이주해온 다른 아시아계 유색인들을 무시하고 차별한다. 예를 들면 3D 업종에서 근무하는 이주노동자들은 건강 위험성이 큰 분야에서 일하고 있음에도 의료적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이주노동자들은 우리나라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지만, 임금 체불과 인권 유린 등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는다. 한국인의 유색인 차별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교묘하게 작용하고 있다.

 

유색인을 차별하는 우리 사회에서 백인은 특별대우를 받는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비(非)백인에게 인종 차별적 시선을 보낸다. 특히 흑인이나 동남아 출신 사람들에게 그렇다. 이들이 지하철을 타면 옆자리에 앉는 것조차 꺼린다. 반면 백인에게는 유독 친절하게 대한다. 우리나라를 여행하는 외국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모 방송 프로그램에 유럽 백인 여성이 출연했다. 그녀는 지하철 좌석에 앉았고, 옆에 있던 할머니는 그녀에게 영어로 말 걸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흰 피부의 여성을 ‘미국 여성’인 줄 알고 대화를 시도한 것이다. 유럽인 여성은 할머니에게 영어를 하지 못한다고 대답하면서 자신은 미국인이 아니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 활동한 혼혈 연예인 또는 그들의 가족은 대부분 백인 출신이다. 백인계 혼혈인은 선망의 대상이다. 이들은 남부럽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나, 대부분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영어 콤플렉스’가 있는 ‘토종’ 한국인을 오히려 주눅 들게 한다. 미국의 주간지 <타임(Time)>이 선정한 ‘영향력 있는 10대’에 포함된 한국인 최초 흑인 모델 한현민은 학창 시절에 피부색 때문에 차별받은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너, 혼혈이냐?”고 놀림 섞인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다. 유럽계 백인과 아프리카계 흑인이 만나서 태어난 혼혈인은 ‘혼혈인 차별’과 ‘흑인 차별’이란 이중 차별을 겪는다. 이 혼혈인이 여성이라면, ‘여성 차별’까지 겪게 된다.

 

최근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선보인 제시 레드먼 포셋(Jessie Redmon Fauset)의 장편소설 《플럼 번(Plum Bun)미국에서 태어난 유색인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제시 포셋은 듀보이스(W. E. B. Du Bois)[주]를 만나 흑인 민권 운동에 참여했다. 그녀는 듀 보이스가 만든 잡지의 편집장을 맡아 흑인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했고, ‘할렘 르네상스(Harlem Renaissance, 미국 뉴욕의 흑인 지구 할렘에서 유행한 흑인예술문화 부흥 운동)로 알려진 1920년대 흑인 문학의 탄생과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플럼 번은 마른 자두가 발라진 구운 빵을 말한다. 플럼 번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유색인 여성 안젤라 머레이(Angela Murray)의 성격을 상징한다. 안젤라는 흑인 아버지와 백인 외모의 유색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이다. 그녀는 어머니를 닮은 하얀 피부지만, 그녀의 동생 버지니아(Virginia)는 까만 피부다. 안젤라는 백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닌 자신의 어중간한 유색인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면서 성장한다. 그녀는 벌써 어린 나이에 ‘백인 정체성’의 장단점을 파악한다. 안젤라가 생각하는 백인 정체성의 장점은 하얀 피부색 덕분에 백인으로서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 것이다. 반면 단점은 남들 앞에 백인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려면 가족 이외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혼혈 유색인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공개해선 안 된다. 그래서 안젤라는 뉴욕에서 생활할 때 유색인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스페인 출신 백인 여성을 떠올리게 하는 가명을 쓴다. 그 당시에 유색인도 흑인과 같이 차별받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린 안젤라는 시장을 가다가 흑인 아버지와 동생을 만날 뻔했는데, 그녀는 아버지와 동생에게 아는 척하지 않는다. 이러한 안젤라의 태도는 자신을 흑인과 상종하지 않는 백인인 것처럼 철저하게 행동하기 위한 의도적인 ‘패싱(passing)이다.

 

안젤라는 행복한 삶에 대한 욕망이 강하다. 그녀가 원하는 ‘행복한 삶’이란 ‘백인 중산층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안젤라는 백인 남자와 결혼하여 풍족하게 살고 싶어 한다. 그녀의 욕망은 달콤하다. 《플럼 번》의 역자에 따르면 ‘플럼 번’은 안젤라의 달콤한 욕망을 뜻한다. 이 소설에서 안젤라는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그녀는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그녀가 결혼하고 싶은 남자는 흑인을 경멸하는 백인이다. 안젤라는 이 백인 남자가 보는 앞에서 ‘백인 여성’으로 행동하기 위해 또다시 동생의 면전에 대고 무시(패싱)한다. 이처럼 《플럼 번》은 하얀 피부색의 순수혈통 백인을 선호하는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혼혈 유색인의 위태로운 삶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백인’이 아닌 혼혈 유색인은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없고, 백인과 함께 극장에 들어가지 못하는 등 여러 부당한 차별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안젤라는 하얀 피부색만 믿고 백인 행세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백인인 척하는 자신의 패싱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고, 자신이 추구한 행복한 삶은 결국 백인이라는 거울에 비친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안젤라가 백인 행세를 하면서 바라본 거울은 깨끗하고 참된 거울이 아니라 얼룩이 묻은 더러운 거울이다. 그래서 여기에 자신을 비추더라도 그녀가 보게 되는 것은 하얀 피부가 아니라 ‘백인 정체성’이다.

 

이야기 곳곳에 그 당시에 일어날 법한 인종 차별 상황들이 묘사되어 있다.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화가 났던 장면은 미술학교에 다니던 안젤라가 ‘아웃팅(outing, 다른 사람이 당사자 동의 없이 성소수자 또는 차별받는 특정 대상임을 밝히는 행위) 당하는 상황이다.

 

 

 

 모델 그리기 수업이 있는 오후였다. 모델이 들어왔다. 살짝 예쁘면서 심술궂은―다소 음산하고 비열한 기질이 넘치는―얼굴에 키가 작고 늘씬한 편에 속하는 젊은 여자였다. 모델은 안젤라와 시선이 맞닿자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집요하면서 회의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일찍이 안젤라와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던 에스더 배일리스였다.

  에스더가 표독스럽게 웃었다. “저기 유대인 여자 옆에, 안젤라 머레이 아닌가요?”

  쉴즈(미술학교 강사-cyrus 주)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자는 유색인이에요. 비록 그녀가 말하지 않았겠지만, 그렇지만 나는 알아요. 지금 받는 것보다 열 배를 준다면 모를까, 저 애를 위해 포즈를 취하지는 않겠어요. 네가 무슨 백인 숙녀라도 되는 것처럼 거기 앉아서 나를 그려!

  어이없고 당혹스러웠던 쉴즈 씨는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그렇지만 나는 안젤라가 정말 유색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매이블. 생긴 것도 그렇고 행동하는 것도 딱 백인 숙녀거든. 글쎄, 안젤라가 유색인일 리가 없어. 내가 유색인 여자를 몰라볼 것 같아?”

쉴즈 씨에게는 그것이 민감하면서도 수치스러운 문제 같았다.

  “유색인이었다면, 나에게 말을 했어야지.”

쉴즈 씨가 옹색하게 말을 불쑥 뱉었다.

  “하지만 머레이 양, 당신이 유색인이라는 말을 나에게 하지 않았지.”

안젤라는 친숙한 연극의 한 장면을 리허설하는 것 같았다.

  “유색인요! 당연히 내가 유색인이라고 말하지 않았죠. 왜 말해야 하죠?”

 

 

(77~79쪽, 밑줄 친 문장은 글쓴이가 강조하기 위해 한 것임)

 

 

 

에스더 베일리스는 안젤라와 같은 학교에 다닌 백인 여성이다. 학생 시절 에스더는 안젤라를 무시한 백인 학생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오랜만에 만난 안젤라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그녀가 유색인이라고 공개해버린다. 이 장면을 보고 분노하지 않는 독자가 과연 있을까?

 

혹자는 이 소설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흑인이 오래전부터 차별받으면서 살아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인을 파렴치한으로 묘사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으나 《플럼 번》은 단순히 ‘백인 대 흑인(유색인)’으로 나누어지는 이분법적 인종 구분에 사로잡힌 사회 문제만 비판하지 않는다. 아주 사소한 장면이라 독자들이 지나칠 수 있는데, 소설 후반부에 유색인이 가난한 백인을 무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안젤라는 파리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자신이 살았던 옛 집을 둘러본다. 그 집에 유색인 여자가 살고 있다. 그녀는 집 안에 들어가서 구경하고 싶었고, 유색인 여자에게 말을 걸어보려고 했으나 유색인 여자는 “가난뱅이 백인 쓰레기와는 볼 일이 없어”라고 투덜거린다.

 

(387~388쪽, 밑줄 친 문장은 글쓴이가 강조하기 위해 한 것임)

 

 

 

인용한 문장의 원문을 직접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백인 쓰레기’의 원문은 ‘White Trash(화이트 트래쉬)일 가능성이 있다. 화이트 트래쉬는 미국의 북부 백인들은 자신들보다 가난한 남부 백인을 낮춰 부를 때 쓰는 속어다. 백인 중심 사회에 차별받는 유색인 여자가 자신보다 가난하고 못사는 백인을 ‘쓰레기’라고 욕하는 장면은 흑인과 유색인은 ‘항상 차별받는 피해자 또는 사회적 약자’라고 고정적으로 보게 만드는 정체성 문제를 되짚어보게 만든다. 가끔 인종 문제에 접근할 때 우리는 ‘언더도그마(underdogma)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언더도그마는 힘의 차이를 근거로 선악을 판단하려는 오류이며 맹목적으로 약자는 착하고, 강자는 악하다고 인식하는 현상이다. 흑인과 유색인을 사회적 약자 정체성을 가진 존재로만 보게 되면, 흑인/유색인보다 못사는 백인이나 또 다른 흑인/유색인이 차별받는 상황을 외면하게 된다. 일상적인 차별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 따라 ‘나’라는 인간은 누군가로부터 차별받는 피해자가 될 수 있고, 때로는 누군가를 차별하는 가해자도 될 수 있다. 《플럼 번》은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중산층 중심주의가 어떻게 혐오를 작동시키며 한 인간의 내면을 분할시키는지를 정교하게 보여주는 훌륭한 소설이다.

 

 

 

 

 

[주] 필자가 쓴 듀보이스의 저서 《니그로》(삼천리, 2013) 서평에 듀보이스의 업적을 간략하게 소개된 내용이 있다.

https://blog.aladin.co.kr/haesung/10098157

 

 

※ Trivia

 

 

* “으응, 내가 하께요.” (41쪽)

 

→ “내가 할게요.”의 오식.

 

 

 

* “행복을 거의 잡았었는데, 앙젤, 혹시 브라우닝의 <로마 캄파냐 평온의 두 사람> 읽어 봤어?” (153쪽)

 

→ 영국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의 시 『로마 캄파냐 평원의 두 사람』의 오식.

 

 

 

* “끝까지 사는 거야.” 혹독한 운명이 참으로 명랑한 삶, 그 속에서 부닥치는 힘든 일들을 생각했다. 어머니 아버지의 인종, 흑인들을 생각했다. (331쪽)

 

→ ‘어머니 아버지’라고 고쳐 써야 한다.

 

 

*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플럼번』과 같은 시기에 출간된 넬라 라슨(Nella Larsen)의 『패싱(Passing)』이라는 소설일 것이다. (작품 해설, 412쪽)

 

→ 『플럼번』은 1928년에, 『패싱』은 1929년에 발표되었다. 플럼번』과 같은 시기에 나온 넬라 라슨의 소설은 『퀵샌드(Quicksand)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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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0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22 11:59   좋아요 0 | URL
네, 차별과 불평등 문제를 접근할 때 ‘사회적 약자=차별 및 불평등 피해자’라는 공식에 끼워 맞추면 안 됩니다. 역차별 문제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현재 차별과 불평등 문제는 과거에 비해 복잡해요.

2020-10-14 2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