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는 영국 옆에 있는 섬나라지만, 걸출한 작가들이 태어나고 자란 세계문학의 보고이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브람 스토커(Bram Stoker),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 등은 아일랜드 출신이다. 예이츠와 쇼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앞에 언급한 작가들보다 인지도가 낮지만, 시인 셰이머스 히니(Seamus Heaney)는 1995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19세기 말 아일랜드에서는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문화 운동을 통해 정신적인 독립을 이루려는 노력이 병행되어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문예 부흥 운동(The Gaelic Revival Movement)이 있었다. 문예 부흥 운동을 주도한 아일랜드의 문화예술인들은 잊힌 켈트인(Celts)의 고대 신화와 게일어(Gaelic)를 복원하고, 상실된 민족 주체성을 고양했다. 이러한 아일랜드의 문예 부흥 운동은 일제 식민 통치 시절의 우리 문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아일랜드에는 요정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나오는 구전 설화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아일랜드인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든 각종 전설과 민담은 아일랜드 특유의 문학을 활짝 꽃피게 만든 자양분이 됐다. 영국과 아일랜드 출신의 환상소설 작가들은 어린 시절부터 들은 구전 설화를 자양분 삼아 이야기에 살을 붙여나갔다. 아일랜드를 포함한 영국의 환상 문학 계보를 되짚어 볼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작가는 《드라큘라》를 쓴 브람 스토커지만, 스토커 이전에 등장한 ‘이 작가’를 절대로 빠질 수 없다. 그는 바로 조지프 토마스 셰리든 레 파누(Joseph Thomas Sheridan Le Fanu)다.[주]

 

 

 

 

 

 

 

나는 ‘레 파누’라고 쓰고 있지만, 정확한 영문 이름표기라고 할 수 없다. 현재 외래어 표기법을 따르면 ‘레 퍼뉴’ 또는 ‘러 파누’라고 쓴다. 그러나 ‘르 파뉴’, ‘르파누’, ‘레퍼뉴’라고 쓰는 사람도 있다. ‘Le’와 ‘Fanu’를 붙여 쓰는 경우가 있는데, 정확하게 표기하려면 띄어 써야 한다. 《주석 달린 셜록 홈즈 4》(현대문학)에서는 ‘러패뉴’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더 골치 아픈 건 미들 네임(middle name)을 한글로 표기하는 것이다. 나는 ‘셰리든’이라고 썼지만, 또 어떤 사람은 ‘셰리던’, ‘셰리단’이라고 쓴다. 한글로 표기된 이름이 다양한 외국 작가가 또 있을까? 아무튼 나는 ‘레 파누’라고 쓰겠다.

 

레 파누는 아일랜드 더블린에 태어난 작가이다. 그는 아일랜드의 구전 설화에 관심이 많았고, 이를 다듬어서 환상 소설과 공포 소설을 주로 썼다. 그래서 레 파누의 소설에는 꼭 한 번은 아일랜드의 미신이라든가 구전 설화의 일부 내용이 언급된다. 소설은 이야기 밖의 화자가 아는 사람에게서 들은 신기하고도 으스스한 경험담을 들려주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그래서 레 파누의 짧은 환상 소설과 공포 소설을 읽으면 한 편의 구전 설화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든다. 파누는 실재와 환상이 하나로 포개진 세계를 그려낸 다음, 그 속에서 혼란을 느끼는 인물의 내면 심리를 묘사한다.

 

 

 

 

 

 

 

 

 

 

 

 

 

 

 

 

 

 

 

* 이탈로 칼비노 엮음 《세계의 환상 소설》 (민음사, 2010)

* [품절] 프랑수아 레이몽, 다니엘 콩페르 《환상문학의 거장들》 (자음과모음, 2001)

 

 

 

 

환상 소설을 직접 선별하고 편집한 이탈리아의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는 레 파누를 ‘최초의 유령 이야기 집필 전문가’라고 평가했다. 과거의 환상 소설은 소수의 작가만 쓰는 가벼운 글이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모방하는 예술을 지향한 고전주의 미학이 지배한 주류 문단은 환상 소설을 저급한 이야기로 치부했다. 그러나 영국에서 유령을 소재로 한 고딕 소설(Gothic novel)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환상에 흥미를 느낀 독자들의 욕망을 충족시켜 줬다. 레 파누가 등장하면서 환상 소설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고 ‘전문화’하기 시작된다. 19세기 영국에 유령 이야기를 안 쓴 작가를 찾기가 어렵다.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도 유령 이야기를 썼다. 《환상문학의 거장들》(자음과모음)에서 레 파누는 ‘환상문학의 위대한 고전 작가’로 소개된다.

 

 

 

 

 

 

 

 

 

 

 

 

 

 

 

 

 

 

 

* 르 파뉴 《카르밀라》 (초록달, 2015)

* [품절] 정진영 옮김 《뱀파이어 걸작선》 (책세상, 2006)

 

 

 

 

 

 

 

 

 

* [절판, No Image] 르 파뉴 《흡혈귀 카르밀라》 (효리원, 1996)

* [절판, No Image] 르 파뉴 《사랑을 꿈꾸는 흡혈귀 카밀라》 (지경사, 1993)

 

 

 

 

레 파누의 대표작인 《카르밀라(Carmilla)여성 뱀파이어(vampire)가 등장하는 중편 소설로, 스토커의 《드라큘라》에 큰 영향을 준 걸작이다. 《카르밀라》는 영화로 나올 정도로 《드라큘라》만큼 파급력이 있는 뱀파이어 문학의 고전이다. 90년대에 ‘사랑을 꿈꾸는 카밀라’라는 제목의 번역본이 나온 적이 있다. 어린이 독자의 수준에 맞게 원작을 순화한 것이다. 사실은 원작에 레즈비언의 섹슈얼리티가 부각된 묘사가 있다.

 

국내에 레 파누의 단편소설 몇 편이 번역되어 나왔다. 여기서부터 그의 작품들을 발표 연도순으로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기로 한다. (H: 작품의 역사적 중요성, Q: 작품의 우수성, R: 작품 번역본의 희소가치)

 

 

 

 

 

 

유령과 접골사

The Ghost and the Bonesetter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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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파누가 처음으로 쓴 소설로 알려져 있다. 접골사는 골절되거나 탈골된 뼈를 직접 손으로 교정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뜻한다. 아일랜드의 지방에서 근문하는 주교 사제 프랜시스 퍼셀(Francis Purcell)은 독특한 취미가 있다. 그의 취미는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 마을 주민들이 경험한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수집하고 기록하는 일이다. 퍼셀은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 집행인이 퍼셀이 남긴 기록들을 살펴보게 되고, 이 소설에서 유언 집행인은 퍼셀이 기록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이야기 밖의 화자’로 등장한다. ‘이야기 속 화자’는 접골사 테리 닐(Terry Neil)의 아들이다.

 

테리 닐은 영주의 땅에서 일하는 소작인이다. 영주가 외출하면서 며칠간 성을 비우게 되면, 영주의 소작인들이 성을 지켜야 한다. 테리 닐도 어쩔 수 없이 영주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그 성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다. 성에 과거 영주의 할아버지의 초상화가 있는데, 밤이 되면 이 늙은 지주의 유령이 액자에 나와 성 안을 돌아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술을 마시고 물건을 흩뜨려 놓는다고 한다. 테리 닐은 뜬눈으로 성을 지키다가 늙은 지주의 유령을 만나게 되고 대화까지 하게 된다. 늙은 지주의 유령은 생전에 다친 오른쪽 다리를 가리키면서 부러진 뼈를 제대로 맞춰달라고 부탁한다. ‘재미있는 반전’이 있는 이야기다.

 

 

 

 

 

 

 

 

 

 

 

 

 

 

 

 

 

 

* [국내 미번역] 레 파누 《The Purcell Papers》 (Arkham House Publishers[주2], 1975)

 

 

 

『유령과 접골사』에 영주의 집사가 등장하는데, 이름은 로렌스 코너(Lawrence Connor)다. 그런데 번역문에는 ‘로렌스 오코너’라고 잘못 표기되어 있다. 『유령과 접골사』는 레 파누가 죽은 이후에 나온 《The Purcell Papers》(1880)에 수록되었다. 세 권으로 구성된 이 단편집은 작중인물인 퍼셀이 수집하고 기록한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단편집에 수록된 모든 글은 레 파누가 1838년부터 1840년까지 <Dublin University Magazine>라는 잡지에 발표한 것이다. 레 파누는 <Dublin University Magazine>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에인저 거리에서 일어난 기묘한 소동에 대한 기술

An Account of Some Strange Disturbances in Aungier Street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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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Book] 르파뉴 《에인저 거리에서 일어난 기묘한 소동에 대한 기술》 (올푸리, 2018)

* [e-Book] 브람 스토커 《판사의 집》 (올푸리, 2019)

 

 

 

 

이 단편소설도 <Dublin University Magazine>에 실렸다. 에인저(Aungier)는 실제로 더블린에 있는 거리다. 화자와 그의 사촌 톰 러들로(Tom Ludlow)는 에인저 거리에 있는 집에 살게 된다. 그런데 그 집은 17세기에 교수형을 집행했던 판사(사람들은 그에게 ‘교수형에 미친 판사’라는 별명을 붙여졌다)가 살았던 곳이다. 그들은 그 집에서 악몽과 같은 무서운 일을 겪는다. 그들이 본 것은 교수형에 미친 판사의 유령이었다. 이 이야기는 브람 스토커의 단편 『판사의 집(The Judge’s House)의 모티프가 된 작품이다. 그리고 1872년에 레 파누는 『에인저 거리』를 다듬어  『하틀보 재판관(Mr. Justice Harbottle)라는 제목의 작품을 발표했다.

 

전자책으로 만들어진 『에인저 거리』 번역본에 오류가 있다. 『에인저 거리』의 발표연도가 1851년’으로 잘못 적혀 있다. ‘하틀보 재판관’의 원제가 ‘Mr. Judge Harbottle’로 되어 있는데 ‘Judge’가 아니라 ‘Justice’이다.

 

 

 

 

 

 

 

녹색 눈을 가진 고양이의 원한

녹색 눈의 흰 고양이

흰 고양이

The White Cat of Drumgunniol (1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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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Book] 르파뉴 《흰 고양이》 (위즈덤커넥트, 2019)

 

 

 

 

 

 

 

 

* [절판, No Image] 레파뉴 《녹색 눈의 흰 고양이》 (뱅크북, 1996)

* [절판, No Image] 레파뉴 《녹색 눈을 가진 고양이의 원한》 (동림, 1993)

 

 

 

드럼거니얼(Drumgunniol)은 가상의 지명이다. 드럼거니얼에 사는 도너번(Donovan) 가족은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오는 저주에 시달린다. 녹색 눈의 흰 고양이는 불길한 예언을 암시하고, 한 가족을 파멸시키는 무시무시한 존재이다. 고양이는 불길함의 상징으로 이야기 속에 많이 등장해왔다. 그래서 이 소설은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검은 고양이》와 비교하기 위해 언급되기도 한다. 레 파누는 고양이와 유령이 동시에 나타나는 장면을 《카르밀라》에 재현했다.

 

 

 

 

 

 

악마 디컨

Dickon the Devil (18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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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진영 옮김 《세계 호러 단편 100선》 (책세상, 2005)

 

 

 

이 소설은 전설적인 영국의 록 그룹 (Queen)의 멤버인 존 디컨(John Deacon)과 관련이 없다. 이름의 알파벳 철자가 다르다. ‘악마 디컨’은 이십 년 동안 널따란 영지에서 노숙하는 사나이다. 그는 백치지만, 영지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악마다, 악마를 보았다!”라고 외치기만 한다. 화자가 디컨이 완전히 미쳐버리게 된 이유를 알려주는 짤막한 이야기다.

 

 

 

 

 

 

 

 

 

 

 

 

 

 

 

 

 

 

 

* [절판] 레파뉴 《유령의 집》 (동림, 2001)

* [절판, No Image] 레파뉴 《낡은 저택의 유령》 (동림, 1993)

 

 

 

90년대에 ‘동림’이라는 이름의 출판사가 ‘세계명작괴기시리즈’를 펴낸 적이 있다. 책 한 권에 서구의 단편 공포 소설과 환상소설을 세 편 이상 수록되었다. 어린이 독자를 겨냥해서 만든 책이라서 그런지 책의 번역 및 편집 상태는 차마 눈 뜨고 못 볼 정도로 좋지 못하다. 2000년대 초반에 동림 출판사는 ‘세계걸작스릴러’ 시리즈를 펴냈는데, 표제와 표지만 달라졌을 뿐 ‘세계명작괴기시리즈’의 구성과 똑같다. 그러므로 《낡은 저택의 유령》과 《유령의 집》은 같다고 보면 된다.

 

 

 

 

 

 

 

 

 

 

 

 

 

 

 

 

 

 

* 앰브로즈 비어스 《아울크리트 다리에서 생긴 일》 (혜윰, 2017)

 

 

 

이 책에는 레 파누의 작품으로 알려진 표제작(‘낡은 저택의 유령’, ‘유령의 집’) 이외에 ‘악마가 된 사나이’, ‘오른발 가운뎃발가락’이라는 단편소설도 수록되었다. 악마가 된 사나이’를 쓴 작가가 누군지 잘 모르겠지만, ‘오른발 가운뎃발가락’은 앰브로스 비어스(Ambrose Bierce)가 썼다.

 

 

 

 

 

[주1] 물론, 레 파누 이전에 활동한 고딕 문학 작가들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한 환상 문학 계보는 온전한 의미의 환상 문학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근대부터 시작한다.

 

 

[주2] 러브크래프트(Lovecraft)의 소설을 포함한 공포 소설 및 환상 소설들을 출판한 곳이다. ‘아캄/아컴(Arkham)’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 자주 나오는 가상의 도시다. 이 출판사는 러브크래프트의 작품들과 크툴루 신화(Cthulhu Mythos)와 관련된 저작물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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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0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22 12:03   좋아요 0 | URL
아일랜드에 극심한 기근이 일어나서 아일랜드 인들이 많이 죽고, 대부분은 미국이나 다른 유럽으로 이주했어요. 미국으로 이주해서 성공한 아일랜드 출신 사람이 많아요. 케네디 대통령의 조상이 대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아일랜드 인이에요. 살기 위해서 다른 나라로 이주해온 아일랜드 인들은 ‘외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많이 받았어요.

2019-08-22 0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22 12:05   좋아요 0 | URL
존 밀링턴 싱. 유명한 극작가네요. 제가 희곡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아서 싱이 이런 대단한 극작가인 줄 몰랐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