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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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835]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Scene #1 초콜릿처럼 펄펄 끓는 이야기

 

오늘은 ‘밸런타인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날이었다. 거리의 제과점 앞에는 온갖 장식으로 포장된 초콜릿 선물이 지나는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한창 사랑의 꽃을 피우는 청춘 남녀들에겐 더없이 행복하고 달콤 쌉싸름한 날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오늘 같은 특별한 날에 읽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초콜릿이 끊는 물’과 같은 감동을 전하는 책이다. 제목만으로는 뭔가 달콤한 사랑의 이야기일 것이라는 짐작을 하겠지만 초콜릿 맛처럼 오묘하게, 사랑, 음식, 페미니즘, 역사가 한 통 속에서 펄펄 끓고 있는 이야기이다.

 

사랑에 빠진 이는 요리를 한다. 어설픈 칼질에 손을 벨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매운 양파의 향에 방울방울 눈물을 짓게 되더라도. 각기 다른 성향의 재료가 모여 조화로운 맛을 이룬다는 건, 마치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하나의 사랑을 이루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다. 조리 과정 또한 사랑의 감정과 비슷한 맥을 가지므로 우리는 볶고, 끓이고, 은근한 불을 지펴 음식을 만들어내는 것 아닐까.

 

 

 Scene #2 티타의 러브 레시피

 

 

 

이 소설에서 초콜릿은 9월의 음식이다. 당시 초콜릿은 마시는 음료인데 물의 양과 끓이는 시간에 따라 달콤하고 쌉싸름한 정도가 달라진다. 작가는 초콜릿 만드는 과정을 이렇게 묘사한다.

 

초콜릿을 타는 것도 아주 중요했다. 서툴게 타면 최상급의 초콜릿도 맛없어질 수 있다. 덜 끓이거나 너무 오래 끓이면 걸쭉해지거나 탄 맛이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84쪽)

 

소설에서 묘사하는 요리는 인생과 사랑에 대한 은유다. 이들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초콜릿 맛과 닮았다. 티타에게는 요리를 하는 부엌이야말로 자신의 세계이고 미래다. 그녀가 마음을 담아 요리하는 마법 같은 음식은 때로는 눈물을 일으키고, 때로는 최음제가 되며, 때로는 향수와 추억의 매개가 된다.

 

티타는 막내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어머니를 모셔야한다는 가문의 전통 아래 사랑을 잃는다. 하지만 끊임없이 욕망하기에 자신의 손으로 음식을 만든다. 불에 닿은 옥수수 반죽은 토르티야가 되고, 불에 닿은 쌀은 밥이 된다. 토르티야가 다시 반죽으로 돌아갈 수 없고, 밥이 도로 생쌀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불에 닿은 티타의 가슴을 돌려놓을 수 없다.

 

 

 

이 소설에서 가장 로맨틱한 장면을 꼽자면 페드로가 선물한 장미를 가지고 티타가 요리를 만들어내는 모습이다. 바로 장미 꽃잎 소스를 곁들인 메추리 요리다. 요리를 먹은 사람들은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정열과 욕망을 억제할 수 없게 된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은 사실 자체로 한 권의 요리책이다. 달마다 바뀌는 요리는 낯선 재료들의 향연, 시끌벅적한 남미의 파티 분위기를 양념으로 끼얹으며 읽는 이의 상상력을 부추긴다.

 

첫 번째 요리는 ‘1월 크리스마스 파이’. 파이는 달콤하거나, 기껏 상상력을 펼쳐봐야 고기가 들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1월 크리스마스 파이의 재료는 정어리 통조림, 초리소, 양파, 오레가노, 세라노 칠레고추 통조림, 페이스트리 반죽이 재료다. 어른어른 알 듯 말 듯한 맛이 마음을 쥐었다 놓았다 한다. 읽을 때마다 이전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맛이 미뢰를 휘감는다.

 

 

 

 Scene #3 내 안의 사랑이 다시 타오를 수 있도록 

 

 

우리 할머니는 아주 재미있는 이론을 가지고 계셨어요.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당길 수 없다고 하셨죠. (중략) 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그 불꽃이 일면서 생기는 연소 작용이 영혼을 살찌우지요. 다시 말해 불꽃은 영혼의 양식인 것입니다. 자신의 불씨를 지펴줄 뭔가를 제때 찾아내지 못하면 성냥갑이 축축해져서 한 개비의 불도 지필 수 없게 됩니다. (124~125쪽)

 

 

우리 모두가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상상해보자. 그 성냥불은 혼자 지필 수 없으며 불을 댕길 수 있는 무언가를 찾지 못하면 영혼의 양식인 불꽃이 사그라져 어둠 속을 헤매게 된다. 뜨거워야 할 우리 마음속에 매캐한 연기만 올라온다면 우리는 사랑을 꿈꿀 수 없다. 뜨거운 사랑이 한순간이라도 식어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내 안의 사랑이 다시 타오를 수 있도록, 성냥갑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성냥개비에 불을 일으킬 수 있는 날은 많겠지만, 아무래도 오늘 같은 날은 특별하다. 카사노바가 최음제로 썼다는 초콜릿은 사실 고대 로마시대부터 연인들이 애정을 표현하는 음식이었다. 사랑의 감정을 지속하고 상대가 활기찬 성욕을 유지하도록 돕고 싶을 때 초콜릿을 선물하곤 한다.

 

사람들은 밸런타인데이가 상업적이라고 욕하면서도 때가 되면 초콜릿과 선물을 산다. 기업의 뻔한 상술이지만, 그 상술이 얼어붙은 지갑을 열게 하고 식어버린 마음을 따스하게 데운다면 굳이 욕할 일 만은 아니다. 하루쯤 낭만을 부려도 좋을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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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마크 트웨인의 반전(反戰)우화

 

 

   

 

 

 

『톰 소여의 모험』『허클베리 핀의 모험』등의 작품을 남긴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전쟁을 위한 기도』는 작가 사후 발표된 반전(反戰)우화이다. 이 작품이 우리나라에 번역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인 2003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가 이슬람 국가들과의 ‘테러와의 전쟁’을 하고 있을 무렵이다. 그 때 미국 내에서 반전 분위기가 조성되었을 때 트웨인의 반전우화가 다시 한 번 조명받기 시작했다.

 

돌베개 출판사에 나온 이 작품은 현재 품절이다. 인지도 높은 작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대표작들의 인기에 가려서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만 것이다. 그러다가 운 좋게 이 책을 구할 수 있었다.

 

며칠 전, 돌베개 출판사의 공식 팬페이지(www.facebook.com/dolbegae)에서 『전쟁을 위한 기도』두 권이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예전부터 관심 가졌던 책이라서 망설임 없이 책을 구입하겠다고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냈다. 우편료 포함 정가로 책을 구입했다. 사실 출판사에서 직접 연락을 취해서 책을 구입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팬페이지를 관리하는 분에게 앞으로 돌베개의 품절, 절판된 책을 구할 때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낼 수 있게 허락을 받았다. 메일보다는 페이스북 메시지가 답변을 빨리 확인할 수 있으니까.

 

돈을 입금할 수 있도록 팬페이지 관리자께서 성함과 은행계좌를 알려주셨는데 놀랍게도 그 분은 바로 돌베개 대표 한철희님이었다. 출판사 대표님이 지금까지 출판사 페이스북을 관리하고, 책과 관련 소식을 업데이트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대표님 혼자서 관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웬만한 출판사 공식 카페나 페이스북은 주로 출판사 직원들이 관리, 운영하는 편이다) 독자들과 직접 소통하고, 좋은 책을 알리는 대표님의 모습에 돌베개라는 출판사를 다시 보게 됐다.

 

 

 

 Scene #2   평화로 포장된 전쟁의 비극

 

서로 다른 나라나 진영이 마찰을 일으키고 그 싸움이 무력적으로 번지는 것을 우리는 전쟁이라고 한다. 흔히 전쟁이라고 하면 '우리 쪽이 정의고, 저 쪽이 적이다'는 식으로 정의되어지고, 현란한 무기와 전술들이 구현되어진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영웅이 되고, 평화와 정의가 실현된다.

 

‘평화’를 의미하는 영어의 ‘Peace’(피스)는 라틴어 ‘Pax’(팍스)에서 비롯된 말이다. 팍스는 고대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평화의 여신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사회적 불안감이 높아질수록 팍스는 더욱 신격화되고 숭배 받았다. 그녀는 올리브 나뭇가지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는데 올리브는 ‘평화’와 ‘전쟁에서의 승리’를 동시에 상징한다. 전쟁과 평화가 공존하는 여신, 참으로 아이러니다. 결국 로마식 평화란 모름지기 전쟁(승리)을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것이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 곧 ‘로마의 평화’란 것도 힘에 의해 성취됐다는 걸 알게 된다. 주변국들을 무력으로 점령해 꼼짝 못하게 만들었으니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로마의 막강한 힘에 눌려 숨죽인 평화, 이게 팍스의 본래 모습이었다.

 

팍스가 로마식 평화라면 ‘Shalom’(샬롬)은 영적인 평화, 곧 신앙인의 참 모습이다. 구약시대엔 신이 인간에 내리는 축복을 샬롬이라 불렀다.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 처음 나타나 한 인사말이 ‘평화가 너희와 함께’, 곧 ‘샬롬 알레이켐’이었다.

 

마크 트웨인의『전쟁을 위한 기도』는 팍스의 위선을 통렬하게 꾸짖고 샬롬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다. 출병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전쟁의 광기와 맹목적 애국심을 심어주는 교회 목사가 등장한다. 목사의 설교가 끝나자 어느 늙은 이방인이 나타나 그를 나무란다. 알고 보니 노인은 하나님의 메신저. “지금까지는 너희들의 말로 하는 기도를 들었다. 이젠 내가 너희들의 마음속에 있는 기도를 말해 보겠다”며 풍자와 독설적인 언어를 사용해 전쟁의 광기를 고발한다. 다음은 노인이 전하는 '전쟁을 위한 기도' 전문이다.

 

 

 

“오! 주여, 우리 아버지시여!

 

 

우리의 젊은 애국자들이, 우리의 사랑하는 용사들이, 전장으로 나가나이다.

 

이들과 함께 하소서! 우리의 영혼도 이들과 함께 나아갑니다. 따스한 난롯가의 단란한 평화를 뒤로하고 적을 무찌르기 위해.

 

오, 우리 주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도우시어 우리의 포탄으로 저들의 병사들을 갈기갈기 찢어 피 흘리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저들의 청명한 벌판을 저들 애국자들의 창백한 주검으로 뒤덮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천둥같은 총성을 저들의 부상병들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내지르는 비명속에 잠기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포화로 저들의 누추한 집들을 잿더미로 화하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저들의 죄 없는 과부들이 비통에 빠져 가슴 쥐어뜯게 하소서. 우리를 도우시어 저들이 집을 잃고 어린 자식들과 함께 흙바람 이는 황폐한 땅을 의지가지 없이 떠돌게 하소서.

 

누더기를 걸친 채 굶주림과 갈증 속에서 여름에는 이글거리는 태양에 겨울에는 살을 에는 한풍에 노리개가 되어 영혼은 찢기고 노고에 지친 몸으로 헤매게 하소서.

 

주님께 안식할 무덤을 갈구하더라도 거절하시고 주님을 경모하는 우리를 위하여, 저들의 소망을 산산이 날려버리시고, 저들의 생명을 시들게 하시고, 저들의 비참한 순례가 끝나지 않게 하시고, 저들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하시고, 저들의 눈물로 저들의 길을 젖게 하시고, 저들의 상처투성이 발에서 흐르는 피로 흰 눈을 얼룩지게 하소서.

 

우리는 그것을 바라나이다. 사랑의 정신으로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께. 우리는 그것을 바라나이다.

 

 

곤고한 처지에 놓여 회개하는 마음으로 겸허히 당신의 도움을 청하는 모든 이에게 항상 믿음직한 피난처요, 친구이신 주님께. 아멘.”

 

 

 

젊은이의 주검으로 덮인 들판, 부상자의 몸부림과 비명, 죄 없는 과부들의 슬픔, 그리고 끝없는 절망. 노인은 전쟁의 참상을 묘사했지만, 아무도 그를 믿어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은 끝나도 비극은 계속된다. 팔다리가 없는 상이군인들이 거리의 성냥팔이로 전락하고 소시민들은 빈곤에 허덕인다. 전쟁으로 특혜를 본 사람들은 사회에서 떵떵거린다. 그들은 폭력에 중독되면, 전쟁범죄를 저질러도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19세기 말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자 마크 트웨인은 이처럼 전쟁의 야만성에 직격탄을 날렸다. 한마디로 로마식의 팍스를 질타한 것이다. ‘전쟁의 위한 기도’라는 제목에 우리 인류가 미치광이 같은 전쟁의 광기에 빠지지 말자는 뜻을 담고 있다. 팍스가 샬롬이 되고, 샬롬이 팍스가 되는 현실. 참으로 헷갈리는 세상이다. 이 세상에서 과연 진짜 ‘미치광이’는 누구인가.

 

 

 

 

 

 

 

 

 

 

 

 

 

 

 

 

 

P.s 마크 트웨인의 이 짧은 우화를 읽고 싶다면 스메들리 버틀러의 『전쟁은 사기다』를 읽으면 된다. 이 책 뒷편에 트웨인의 우화가 수록되어 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전쟁의 추악한 이면을 고발하고 반전을 강조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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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02-14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이스 북에서 읽고 관심 가졌는데, 품절이라고 쓰셔서 아쉬웠습니다.
이 내용이 다른 책에도 실려있군요.
보관함에 담아가요.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

cyrus 2014-02-14 22:35   좋아요 0 | URL
아니에요. 사실 돌베개 판본에는 삽화와 영어 원문도 수록되어서 얇은 분량인데도 깊이가 있어요. 그냥 가볍게 읽을 책이 아니에요. 저도 이 책이 품절이라서 아쉬워요.
 
문명과 수학 - 세상을 움직이는 비밀, 수와 기하
EBS 문명과 수학 제작팀 지음, 박형주 감수 / 민음인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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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닭 2마리의 2와 숫자 2의 2를 같은 것으로 이해하기까지는

수천 년의 시간이 걸렸다.

 

- 버트런드 러셀 -

 

 

 

 

 Scene #1   “수학을 배워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고대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의 유명한 일화로 글을 시작해본다. 그에게 기하학을 배우던 학생이 유클리드에게 질문했다. ‘이런 것을 배워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유클리드가 하인을 불러 지시했다. “저 친구에게 동전 한 닢을 주어라. 그는 자기가 배운 것에서 반드시 무엇인가를 얻어야 하니까 말이다.”

 

오늘날에도 똑같은 질문을 던질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일상생활에서 간단한 계산 정도 만 할 줄 알면 됐지, 골치 아픈 수학을 왜 배워야 하느냐는 그 볼멘소리.

 

수학 공부 별로들 안 좋아한다. '수학은 공공의 적'이란 말이 나돌고 우리는 대개 학교 교육을 받는 동안 '적과의 동침'을 하게 된다. 이 무슨 해괴한 짓인가. 수학은 말하자면 인류가 일궈 놓은 문명의 정수쯤 될 텐데, 어찌하여 수학을 백안시하는 그런 엉뚱한 일이 벌어졌을까.

 

어렸을 때 수학 공부를 했던 기억을 더듬어서 정리해본 결과 수학을 싫어하는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집약이 된다. 우선 사고의 단계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해보지도 않고 수학 교과서를 펼치자마자 미리 겁부터 먹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수학을 아예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스스로 자신은 수학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버리면 누적결손으로 학년이 올라갈수록 그 문제의 심각성을 커질 뿐이다.

 

그 다음 계산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는 점이다. 문명의 이기인 전자계산기나 컴퓨터에 익숙해져 있어 아예 사칙의 중요성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복잡한 계산은 컴퓨터가 해주는데 왜 머리 아프게 직접 풀 이유가 어디에 있겠느냐 하는 잘못된 생각이 가득하다. 자판만 누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안이한 생각이 수학을 어려운 과목으로 만들고 있다.

 

 

 

 Scene #2   '1+1=2', 증명이 어려운 수학의 세계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數)로 봤다. 이 수들의 조화가 세상 만물을 만들어내고 우주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법칙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숫자로 표현된다. 내가 혼자 있을 때는 숫자 1과 함께하는 것이다. 아기돼지 삼형제의 그림동화에서 숫자 3을 발견한다.

 

내가 친구와 둘이서 있을 때는 숫자 2와 함께 있는 것이다. 남과 여, 낮과 밤, 신발 두 짝, 양말 두 짝, 손바닥 두 개, 엄마와 아빠 등 이 세상에 두 개로 이루어져 있는 것들이 많다. 이 세상은 두 개로 되어 있을 때,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새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은 날개 하나가 아니라 양쪽에 날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발이 두 개인 것은 발 하나로는 걸어 다니거나 설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 마음에 두 개의 마음이 항상 있는 것은 조화와 균형을 갖기 위한 것이다.

 

괴테는 소설 『파우스트』에서 숫자의 속성을 가르쳐 준다. “하나로 열을 만들라. 둘은 떠나게 하고, 셋을 즉각 이루라. 그러면 그대는 부유하리라. 넷을 버려라! 다섯과 여섯으로, 이렇게 마녀는 말한다. 일곱과 여덟을 만들라. 그러면 성취하리라. 이리하여 아홉은 하나, 열은 영(零) 이것이 마녀의 구구셈이니라.”

 

인류가 문명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추상적 사고능력은 가장 위대한 사고능력이었다. 여러 가지 다른 사물들, 다른 현상들 속에서 공통점을 찾아내어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는 언어적 추상능력, 그것을 숫자와 도형으로 나타내고 사고하는 수학적 추상능력, 그 공통점을 여러 가지 기호를 사용하여 법칙을 나타내는 과학적 추상능력 등이 바로 그것이다.

 

어린 시절 때 배우게 되는 ‘1+1은 2’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인 연산이다. 그러나 인류가 ‘자연수 1과 1의 합은 2’라는 과정을 이해하고 결론을 증명하기까지 수많은 사고능력이 필요했다. ‘1+1이 2인 이유’는 언뜻 당연한 것처럼 보이나, ‘1+1=2’를 증명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놀랍게도 이 단순한 질문의 답은 1913년에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증명했다. 허나 워낙 전문적인 용어가 동원돼 일반인이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이렇듯, 수학은 답을 찾기 위한 과목이 아니다. 문명이 발전되어도 여전히 풀리지 못한 문제가 수두룩하다. 여러 가지 사물들 속에서, 자연물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숫자로 표현하고 나타내보게 하는 것이 추상적 사고의 출발이다. 그러므로 수학공부는 자연 속에, 사회 속에, 인간의 마음과 생각 속에 담겨있는 비밀을 발견하는 추상의 세계로 여행하는 것이다.

 

 

 

 Scene #3   문명사 속에 남겨진 수학의 흔적

 

어린아이들은 손가락을 구부리며 수를 헤아린다. 평범하지만 이 자연스러움에서부터 수의 개념이 시작되었고, 수 개념을 좀 더 확장된 수 체계로 넓히기 위해 ‘연산’을 정의하게 되었다.

 

수학은 문명이 생긴 이래 인류와 함께 발전돼 왔다. 수학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와 함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는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사고를 통해 문명을 발달시켰고 개척해 왔다. 오래전 사람들은 하나와 둘 외의 수는 단지 “많다”라고 했다. 그러나 기르는 가축 수가 늘면서 나무에 눈금을 새기기 시작했다. 이집트인은 물건의 개수를 셀 때 조약돌을 사용하여 물건 하나에 돌 하나씩을 묶어 셈을 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셈하다’라는 뜻의 영어 단어 ‘calculus’는 ‘작은 돌’이란 뜻에서 나온 것이다.

 

또 수의 개념이 확장되고 연산을 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손을 사용하여 셈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10개인 손가락을 자연스레 사용함에 따라 십진법이 현재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게 되었다. 10진법 탄생으로 아무리 많은 숫자도 쉽게 표시할 수 있어 우주를 탐구하려는 인간 호기심이 충족되기 시작했다. 과학 발달과 더불어 인간은 더 빠른 계산을 필요로 하면서 1과 0만을 사용하는 2진법을 이용했다. 이를 이용해 컴퓨터를 개발해 삶의 질을 높이고 우주탐험도 가능해졌다.

 

0이 우리들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상상보다 훨씬 다양하고 강력하다. 0은 양수(+)도 음수(-)도 아닌 '무(無)'일 뿐이며, 현대 수학에서 나눗셈을 허용하지 않는 등 어떤 의미에서 0은 수학 합리성을 붕괴시키는 특수한 힘을 갖고 있다. 0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0을 통해서 수학이라는 우주의 언어를 파악하고 그것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의 막연한 질서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게 됐다.

 

결국 우주를 이해하는 모든 수학은 무라고 하는 0의 토대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긴 세월을 거쳐 온 0의 탄생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런 의미에서 0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고 절망과 기쁨의 은유적인 상징이며, 없음이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없음이다. 또 0은 우리 모두의 궁극적인 근원이자 영원한 수수께끼이기도 하다. 0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는 출구로 수학과 철학,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는 숫자다.

 

 

 

 Scene #4   수학, 인류의 과제를 풀기 위한 ‘가능성의 학문’    

 

인간이 무리를 이뤄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수를 세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일이었고 문명이 발달하면서 수 집합의 종류가 다양하고 복잡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심지어 외계에 보내는 메시지조차 이진법의 코드로 되어있는 것을 보면 문명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수가 있다고 생각해도 틀림없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쉽게 지나치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숫자는 다양하고도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굳이 돈 계산이나 어떤 대상의 측정과 같은 수치적인 표현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여러 상황에서 수를 사용해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고 편리한 여러 가지 생활의 지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숫자는 산수를 비롯한 수리과학을 배우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대상이고, 가장 이해하기 쉬운 수학의 도구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다양한 수의 성질을 이용한다면 그 명료하고 분명한 사고와 판단에 좀 더 논리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수학이 어느 시대에나 인간에게 이만큼 중시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현실 세계의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신비스러운 천체와 자연에 대한 강력한 인식 수단으로서 수학은 절대 진리로 여겨지기도 하고, 때론 신성시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인은 수학이 현상의 본질이라 믿었으며 ‘모든 것은 수’라는 피타고라스학파의 사상도 여기에서 나왔다. 이 사상은 시대와 더불어 확대 재생산됐다. 갈릴레이, 케플러, 뉴턴, 아인슈타인 등이 이룬 과학 분야의 최고 업적은 모두 수학 언어로 구성됐다.

 

세상과 문명이 변하는 것처럼 수학도 변하며, 새로운 수학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성경이나 불전 같은 ‘절대 진리’란 없다. 옛 수학자들은 절대 진리를 탐구한다며 스스로를 채찍질했지만 자유로이 공리를 설정함으로써 수학의 가치를 재발견했다. 그 몸부림 속에서 끊임없이 발전을 도모하는 노력이 모든 것을 수학의 대상으로 삼는 지적 인간의 숙명이다. 인류 공동체의 과제는 지식의 바다에서 유연하게 헤엄쳐 나아가며 끊임없이 참다운 지식을 찾아내는 데 있다. 뉴턴과 같은 위대한 수학자도 자신을 거대한 진리의 대양 앞에서 더 예쁜 조개와 동그란 조약돌을 찾는 소년에 비유하지 않았던가.

 

새 문명은 수학을 자극하고 수학은 그것을 받아들여 새로운 수학을 낳았다. 또 그 열매를 다시 현실 세계에 투영함으로써 문명을 세웠다. 이 때문에 수학은 ‘가능성의 학문’이자 시대 자체이기도 하다. 각 시대마다 수학은 문명의 상징이었다. 인류 문명에는 수학 우주와 현실 세계를 잇는 우주왕복선이 수시로 왕래한다. 앞으로도 자연, 사회, 인문 분야를 넘나들며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내는 수학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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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평론가가 내 그림을 마구 난도질해 댈 때마다 절망에서 버티게 해 준 힘은 오직 세잔의 그림이었다. 세잔만이 나의 유일한 스승이다.” (앙리 마티스)

 

외고집 세잔의 꿈은 소박하면서도 거대했다. 그는 평생 그림만 그리며 살다가 죽는 소박한 꿈과 불후의 명작을 만들려는 거대한 포부를 동시에 이루려 했다. 그의 그림은 처음에는 실력이 부족한 비주류로 멸시받았지만, 세잔은 스스로 선택한 화가의 길을 수도자처럼 고행하듯 살았다.

 

 

 

 

 

 

 

 

 

 

 

 

 

 

 

 

세잔의 그림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죽마고우였던 소설가 에밀 졸라였다. 졸라가 『작품』이라는 소설을 통해 누가 봐도 세잔이 모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끌로드라는 인물을 만들어 놓는다. 끌로드는 능력도 없으면서 자기가 위대하다고 착각하다가 결국 자살하고 마는 화가이다. 이 소설을 계기로 그들의 우정은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폴 세잔 「생트 빅투아르 산」 (1906년)

 

 

세잔은 친구의 잔인한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고향에 있는 거대한 산의 풍경에만 집착했다. 그곳은 바로 생트 빅투아르 산이었다. 산은 세잔에겐 어머니 같은 대상이었다. 언제든 달려가 품에 안길 수 있고 유일하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변함없는 산. 세잔의 상처를 제일 먼저 보듬어 준 곳도 이 산이다.

 

산의 기운이 상처투성이 세잔에게 와서 붓을 잡아 준다. 세잔은 성실한 농사꾼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리고 또 그린다. 죽을 때까지 그린 산의 풍경은 87점. 평온하고 웅장한 형태의 생동감 넘치는 산을 20년 동안 여러 각도에서 다양하게 창조해낸다.

 

 

 

폴 세잔 「생트 빅투아르 산」 (1906년)

 

 

세잔은 사물을 바라보며 있는 그대로 그리려 하지 않았다. 본다는 것은 눈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물의 본질을 그림에 반영할 수 없었다. 그 사물을 감각적 부분들로 해체함으로써 이미 우리 머리에서 해석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생트 빅투아르 산」연작은 하늘이나 바위나 나무에 대한 것이 아니다. 자연이 뇌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그대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그림들은 훗날 입체파(자연을 입방체로 묘사하는 화파, 대표적인 화가는 피카소)의 탄생을 예고한다.

 

평생을 걸어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리다 죽어간 세잔. 외고집은 예술을 위한 투지였다. 그는 자신의 꿈이 옳았음을 세상 앞에서 증명했다. 산 하나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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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주의 미술의 주요 특징은 간단히 말해 꿈과 자연, 이상향이다. 낭만주의자들이 동경하는 이 모든 것은 지금 여기 없는 것이다. 아득하고 무한하며 끝닿을 데 없는 저 너머를 향해 있다. 윌리엄 터너(1775~1851)의 그림은 낭만주의의 이런 원형적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비, 증기, 속도」는 좀 더 각별해 보인다. 일단 제목에 ‘증기’, ‘속도’가 있는 것부터 근대적이다.

 

 

 

 

 

윌리엄 터너 「비, 증기, 속도」 1844년

 

 

화면을 아래와 위로 나눈다면, 아래는 땅을 보여주고 위는 하늘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리 분명하지는 않다. 자세히 보면, 오른편에 조그맣게 말이 끄는 마차가 보이고, 그 강물 위로 희미하게 조각배 한 척 지나간다. 기차는 몇 가지 색들이 교차하는 철길 위로 치닫듯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비와 기차는 붕 떠다니는 듯하다. 이 효과는 화면을 채우는 안개의 희뿌연 색채로 인해 더 실감 난다. 악조건의 기상에도 불구하고 질주 중인 기차의 속도감이 느껴진다. 어딘가에서 달려와 다시 어딘가로, 무한으로 기차는 달려간다. 기계의 힘, 그로 인한 가속도의 증가는 무한정 뻗어 갈 것이다.

 

여기에서 속도가 풍경을 압도하고, 기술(과학)이 자연(이상향)을 능가한다. 원래 무한성이나 신비는 자연의 속성이었지만, 이제 자연을 벗어나 기계 문명의 성격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기차는 산업화 이후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의 괴물을 암시하기도 한다. 낭만주의자들은 고대 신화나 중세 등 이미 가버린 시대를 갈망했지만, 터너가 갈망한 세계는 인간과 자연의 대립이 지양된 곳이다.

 

터너는 문명에 의해 잊힌 이상향의 은유물을 그림에 숨겨 넣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토끼의 얼굴도 있다. 토끼는 순결함과 평화로움의 상징이다. 그래서 이상향에 사는 동물로 그려지는데 우리 조상들은 달을 늘 이상향으로 그렸고, 그 이상향에는 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다고 했다. 토끼가 어두운 밤 달나라에서 방아를 찧을 수 있는 것은 눈이 그만큼 밝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끼 눈을 명시(明視)라고 한다.

 

달에 토끼가 살고 있다고 믿으면서 눈이 밝은 분이라면 이 그림에 숨은 토끼를 찾을 수 있다. 터너가 그린 토끼는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이상향의 희미한 흔적인 것이다. 과거에도 현재도 인간은 변함없이 자연과 이상향을 동경한다.

 

 

 

 

* 터너가 숨겨 놓은 토끼의 얼굴은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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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너가 숨긴 토끼의 얼굴은 기차가 지나가는 다리 아래에 있다.

단순한 착시에 의한 형상이라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실제로 미술 연구가들도 그림에 남아있는 토끼의 얼굴 형상에  

각자 나름대로 해석을 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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