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늘 어긋난다 해도 너 울지는 마 / 이별도 세월도 죽음도 가를 수 없는 우리 사랑이니까

(휘성, ‘살아서도 죽어서도’)

 

 

 


 Scene #1  오프페우스♥에우리디케 

 

 

 

 

 

귀스타브 모로  「오프페우스의 목을 들고 있는 트라키아 여인」  1865년

 

평화로운 지상에 아름답고도 섬뜩한 잔혹극이 펼쳐진다. 리라를 즐겨 켰던 음악의 대가 오르페우스. 그는 자신을 숭배하던 무녀들의 구애를 거절했다가 그네들 손에 몸이 갈가리 찢기고 머리통이 잘렸다. 한 여인이 강에 떠내려 온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그의 리라를 건져 올린 뒤 애틋한 눈길로 어둠 속에서 내려다본다. 이젠 늦었다.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를 지옥에서 구출해오다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끝내 부인과 영영 이별해버린 슬픔을 그는 벗어날 수 없었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신부로 맞았다. 그런데 목동의 스토킹을 피해 달아나던 에우리디케가 독사에 물려 숨지고 말았다.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던 오르페우스에게 지옥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신이 내린 천재 뮤지션답게 오르페우스는 슬픈 노래로 저승의 뱃사공을 울려 카론의 배에 무임승차했고, 아름다운 연주로 괴물의 꼬리를 내려 저승의 입구를 통과했다. 마침내 명부의 왕 하데스의 콧날까지 시큰하게 한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얻어 지상으로 돌아오는 기적을 일으킨다. 다만 지상에 당도할 때까지 뒤따르는 에우리디케를 절대 보지 말라는 조건이 있었다.

 

오르페우스는 어떻게 되었는가? 뱀에 물려 절뚝거리는 아내가 잘 따라오는지, 돌에 걸려 넘어지는 것은 아닌지, 하데스의 선심이 혹 거짓은 아닌지 쏟아지는 걱정과 끊임없는 의심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상에 발을 딛는 마지막 순간에 오르페우스는 의혹을 억누르지 못하고 에우리디케를 보고야 만다. 그가 뒤돌아보는 순간, 열심히 뒤를 따르던 에우리디케는 다시 지옥으로 빨려 들어간다. 오르페우스의 절규어린 비탄도 애원의 목소리도 에우리디케를 붙드는 데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르페우스는 아내를 잃은 슬픔을 달래려는 듯, 꿈같은 사랑의 달콤함과 난파된 사랑의 사연을 절절히 노래했다.

 

 

 Scene #2  생텍쥐페리♥콩쉬엘로

 

 

 

 

 

 

 

 

 

 

 

 

 

 

 

 

생텍쥐페리의 처녀작 『남방 우편기』의 주인공 자크 베르니스는 사막의 모래 언덕 위에서 죽는다. 주인공은 우편물을 싣고 유럽에서 아프리카를 경유하는 우편기 조종사다. 소설 속에서 그의 사망을 알리는 전보는 간결하고 차갑다.

 

‘세네갈의 생루이에서 툴루즈에 알림. 프랑스-아메리카 우편기를 티메리스 동쪽에서 발견함. 적들은 근방을 떠났음. 조종사는 피살되고, 비행기는 파손됨. 우편물은 무사함. 다카르로 운송 중임.’

 

‘다카르에서 툴루즈에 알림. 우편물이 다카르에 잘 도착함. 이상.’ (275~276쪽)

 

생텍쥐페리는 자신의 소설 주인공처럼 사라졌다. 삶의 낮은 차원을 견디는데 서툴렀던 이 남자를 사랑하는 일은 또한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 생텍쥐페리에게 아내가 있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행방불명되기 전부터, 그리고 행방불명 된 이후로도 그가 돌아오기만을 한결같이 기다리던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아르헨티나 항공우편회사 지사장이던 생텍쥐페리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27세의 과부 콩쉬엘로.

 

엘살바르도의 7대 부호 가문 출신인 콩쉬엘로는 17세에 미국 유학을 가서 첫 남편을 만났지만 2년 만에 사별하고 파리 사교계에 진출, 과테말라 출신의 작가이자 외교관인 고메스 카리요와 재혼한다. 그러나 1년 만에 다시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남편의 현금 유산을 찾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들렀을 때 생텍쥐페리를 만난다. 사교회장에서 콩쉬엘로를 처음 만난 생텍쥐페리는 비행기를 태워주겠다고 제안했고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는 공중에서 나눈 키스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프랑스 귀족 출신인 생텍쥐페리 집안은 남미 출신의 이혼녀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가히 세기적 방랑벽의 소유자라 할 생텍쥐페리는 도망갔다가 돌아오고, 또 도망가기를 반복했다. 생텍쥐페리는 문학적 성공을 거둬도, 비행 기록을 수립해도, 콩쉬엘로가 곁에 있어도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들어차 있던 근원적인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는 혼자서 비행기의 조종간을 잡고 있을 때 비로소 행복을 느꼈다. 어쩌면 두 사람은 고독 속에서만 사랑이 온전히 유지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더욱 놀라운 것은 두 사람이 언제나 최초의 사랑으로 끊임없이 회귀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러브스토리는 『남방 우편기』에 묘사되어 있다. 리비에르와 그가 소년 시절부터 사랑했던 주느비에브의 모델이 바로 생텍쥐페리와 콩쉬엘로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소설의 결말처럼 끝나고 만다. 1944년 7월 31일, 고독한 조종사는 자신의 애마 P38라이트닝과 함께 지중해의 상공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실종되기 전, 생텍쥐페리는 콩쉬엘로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집스런 작은 게처럼 날 꼭 잡고 있어줘서 고마워.” 남편의 실종을 두고 자살 혹은 탈영이라는 소문도 있었지만 콩쉬엘로는 모른 척한다. 그녀는 남편이 이제는 자신 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일기에조차 실종에 대해 한 마디도 쓰지 않은 것은 물론 남편의 귀환 소식에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힘을 믿었다. 그것은 바로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연인들이 주고받는 신비한 감정의 힘, 바로 ‘사랑’의 힘이었다.

 

그가 지중해에서 사라진 지 54년이 지난 1998년에 고기를 잡던 어선 그물에 낡은 비행기 잔해와 팔찌 하나가 걸려 올라왔다. 팔찌 안쪽에는 조그만 이름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콩쉬엘로

 

 

 Scene #3  앙드레 고르♥도린

 

 

 

 

 

 

 

 

“당신은 곧 여든 두살이 됩니다. 키는 예전보다 6㎝ 줄었고 몸무게는 겨우 45㎏입니다. 그래도 당신은 여전히 탐스럽고 우아하고 아름답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가슴 깊은 곳에 다시금 애타는 빈자리가 생겼습니다. 오직 내 몸을 꼭 안아주는 당신 몸의 온기만이 채울 수 있는 빈자리입니다.” (6쪽)

 

생태정치 운동가이자 사상가인 앙드레 고르와 그의 아내 도린. 두 사람은 평생을 이념의 동지로, 더 나아가 일상의 동반자로 함께 했다. 기쁨과 슬픔, 희열과 절망 속에서, 그리고 불치병을 앓던 도린의 형용할 수 없는 통증과 고통 속에서 함께 나이가 들어갔다. 삶의 곳곳에서 마주치는 죽음의 그림자. 그러나 죽음 자체는 겁나지 않았다. 두려운 것은 오직 아내와의 이별일 뿐. 80여 쪽 넘게 이어지는 고르의 편지는 두 사람이 함께 살아낸 시간이 늘 함께 춘 사랑의 춤이었음을 고백한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고.” (88쪽)

 

그토록 많은 책을 저술했고, 사상이나 이념에 천착한 지식인은 아내 없이는 모든 게 공허함을 홀몸으로 견디기가 힘들었을까. 2007년 9월 24일. 프랑스 외곽 시골마을에서 부부는 나란히 저세상으로 떠났다. 사인은 동반자살. 결코 혼자 가지 않겠다는 생전의 약속 그대로. 두 사람을 태우고 남은 재는 유언대로 두 사람이 손수 가꾼 정원에 뿌려졌다.

 

러브레터라는 게 꼭 사랑을 시작할 때만 가능한 게 아닌 것이다. 삶이 끝나려 할 때, 그 때까지도 사랑이 계속되고 있음을 스스로 다짐하며 보내는 연서(戀書)도 있음을, 그런 사랑편지가 더 지극한 감동을 준다.

 

 

 Epilogue  사랑의 정의 

 

나는 누군가를 끊임없이 생각한다. 그 혹은 그녀는 지금 내 곁에 없다. 나는 부재의 시간 속에 있다. 부재의 시간은 고통의 시간이다. 누군가의 부재가 나에게 끊임없이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누군가에 대한 생각에 붙잡혀서, 벗어날 수 없이 매여 있음, 이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그렇게 붙잡혀서 매여 있음이다.

 

한국어의 ‘사랑’이란 단어가 그 정황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원래 많이 ‘생각하다’라는 의미의 한자어다. 즉 사량(思量)이었다. 한가지의 생각에 얽매여 있기. 그것이 사랑이 되었다. 이전에 고어에서 사랑은 ‘고임’이었다. 괴다, 고이다. 몽골어에서도 사람과 사랑이 동의어다. 사랑은 사람이다. 사람이 사랑이다. 사람에 대한 생각,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것이 사랑인 것이다.

 

그리스에서 사랑은 에로스(eros)다. 치명적인 화살을 가진 신, 에로스는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사랑의 격정에 빠지게 만드는 화살을 쏜다. 인간은 화살에 맞고, 사랑의 격정에 빠져든다. 거기엔 아무런 논리적 이유가 없다. 그리스들은 사랑의 감정을 신의 희롱으로 보았다. 사랑에 빠진 자는 에로스 신의 화살을 맞은 것이다. 화살을 맞고 사랑에 빠진 자, 이젠 죽음조차도 그 사랑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 사랑은, 부재의 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 내 곁에 없다. 나와 생각하는 대상 사이에는 무섭고 지독한 심연이 가로놓여 있는 듯하다. 그것이 사랑이다. 부재를 통해서만 더욱 명징하고 절박하게 확인되는 감정, 그것이 사랑의 감정이다. 사랑은 자꾸만 생각나게 만드는 것이다. 간절한, 감내하기 힘든 그리움이다. 그리하여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찾아 죽음을 무릅쓰고 하데스의 왕국으로 내려간다. 우리는 모두 오르페우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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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nn Gould: Bach Goldberg Variations 1981 Studio Video

 

 

음악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음악이란 것이 본래 가장 비언어적인 예술이기에, 음악에서 얻은 느낌을 갖가지 수사를 동원하여 언어로 옮기면 옮길수록 도리어 가장 중요한 무언가는 점점 더 멀리 달아나는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음악 감상을 하면서 느낀 감동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처음에는 음악을 글로 논하고 표현하는 감수성이 부족해서 그런 건 줄 알았다. 그랬다가 요즘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시를 다른 언어로 번역했을 때, 결국 번역되지 않고 남는 것이 바로 그 시”라는 어떤 시인의 말처럼, 음악 역시 애초에 그렇게 언어로 옮겨질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일지 모른다.

 

 

 

 

 

 

 

 

 

 

 

 

 

 

 

 

허나 그렇다고 음악에 대한 글쓰기가 모두 무용하다고 할 수 있을까. 가끔 아주 가끔 보석같이 빛나는 글을 마주칠 때가 있는데, 미셀 슈나이더의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가 바로 그런 책이다. 그런데 전기라고 하자니 연대기적 구성을 찾아볼 수 없고, 그의 음악에 대한 해설 혹은 평론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몽상적인 시적 언어를 구사한다.

 

다양한 자료와 사실들을 토대로, 그의 내면에서 일어났을 법한 고뇌와 성찰을 그의 음악의 결을 따라 재구성해낸다. 글렌 굴드는 감정의 폭발보다는 극도의 정제를, 연주회장보다는 녹음 스튜디오를 선호한 독특한 피아니스트다. 가장 '비(非)피아노적인' 방법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고자 했던 모순에 찬 인물이다.

 

1955년 6월의 따뜻한 날에 굴드는 두꺼운 외투에 목도리까지 두른 채 녹음 스튜디오에 나타났다. 장갑을 낀 손에 들려 있는 악보가방, 생수 2병, 타월 한 무더기, 알약병 5개가 그의 소지품이었다. 그리고 그를 구성하는 이미지에서 절대 빠져선 안 되는 키 작은 접이의자. 그는 마치 낚시의자와도 같은 14인치 높이의 의자를 꺼내놓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참으로 얼토당토않은 모습이었을 터. 스튜디오 직원들은 황당했을 것이다. 그날 녹음실에서 연주된 곡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이 레코딩에는 ‘전설의 탄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파격. 당시 그의 음반을 들은 비평가들과 대중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도대체 바흐를 이렇게 연주할 수도 있단 말인가.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러시아 대사 카이저링크 백작의 궁정 음악가였던 골드베르크가 불면증에 시달리던 백작을 위해 바흐에게 작곡을 부탁했던 일종의 자장가였다. 2개의 아리아와 30개의 변주로 이루어진 이 곡은 총 연주시간이 40여분 정도의 대곡이다. 각각의 변주는 연주시간이 짧게는 1분, 길게는 4분여 정도까지 늘어진다.

 

하지만 굴드는 악보 위에 쓰여진 바흐의 시간은 안중에도 없었다. 완벽한 기교를 바탕으로 그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흐름을 완전히 자신 만의 세계 속에 집어넣었다. 페달은 아예 사용하지도 않았고 템포는 자유자재로 변형시켰다. '골드베르크'가 '굴드베르크'로 변하는 역사적인 순간.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 바흐는 광막한 벌판에 우뚝 솟은 태산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거대한 봉우리를 오르면서 감탄하고 경외하고 좌절해야 했던가. 그러나 굴드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 한 장으로 그는 전 세계 음악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를 둘러싼 이런 식의 일화는 한두 개가 아니다. 2년 뒤 뉴욕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하던 날. 그는 따뜻한 물에 거의 한 시간가량 손을 담그고 있다가 연주회 시작 2분 전에야 대기실에 나타났다. 이날의 옷차림도 황당했다. 두터운 외투와 올이 굵은 헐렁한 스웨터. 당황한 번스타인이 “청중 앞에서 이 스웨터를 벗을 건 아니지”라고 묻자, 그는 아무 대답 없이 스웨터를 벗었다. 그 바람에 머리카락이 온통 헝클어졌지만 그는 손으로 그것을 쓸어 올리지도 않은 채 무대로 나갔다. 그날 연주한 곡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2번’. 그는 애지중지하는 난쟁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고, 청중에게서 비스듬히 등을 돌린 자세였다. 그는 느린 악장에 이르자 입을 헤 벌린 채 무대 천장에 시선을 고정시켰고, 마지막 악장에선 거의 뒤로 쓰러질 것 같은 자세로 피아노를 쳤다.

 

굴드는 콘서트홀의 청중을 좋아하지 않았다. 피아니스트로서 한창 때였던 1964년, 당연히 출연료도 고공행진 했을 그 시기에 굴드는 청중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려버린다. 그때부터 그의 음악 활동은 오로지 방송국과 음반사의 스튜디오에서만 이뤄진다.

 

 

 

 

 

 

 

 

 

 

 

 

 

 

 

굴드의 오랜 친구이자 의사였던 피터 F. 오스왈드의 증언에서 청중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 굴드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현악기들이 불협화음을 만들어낼 때를 기다리며, 지휘자가 까다로운 박자에서 실수하기를 기다리고 끔찍합니다. 음악회를 쫓아다니는 철면피한 인간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싫어하며 신뢰하지도 않고, 친구로 삼고 싶지도 않습니다.”

 

오스왈드의 헤석에 의하면 굴드는 연주회장에 오는 청중이 음악을 들으러 오는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다분히 감정이 치우친 감이 있으나 청중이 있는 연주회장을 거부하는 굴드의 독특한 음악 철학으로 이해해야할 듯 싶다.

 

그렇게 스스로 고립을 원했던 피아니스트.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우울증을 앓았으며, 상식을 뛰어넘는 멋대로의 행태를 보여줬던 사람. 그러나 굴드를 다만 그렇게 기행을 일삼은 피아니스트로만 바라본다는 것은, 어쩌면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청중의 태도’와 별로 다르지 않을 법하다.

 

연주하는 동안 피아노는 사라지고 음악만 남길 굴드가 바랬듯, 책을 읽다보면 작가는 사라지고 굴드만 남는다. '골드베르크'가 '굴드베르크'로 전환되는 당시 녹음실 안 굴드의 모습도 떠올힌다. 그 순간 음악과 언어는 기분 좋게 화해한다.

 

그러나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을 때면 정말 굴드의 모습만 남는다. ‘골드베르크’가 아니라 ‘굴드베르크’라고 우스갯소리로 불리는 이유가 있다. 생전 굴드가 변주곡을 연주하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으로 음악을 많이 들어서 그런 걸까. 수면을 부르는 불면증 음악치료곡이라고 하던데 MP3로 곡을 들으면 정작 중요한 잠은 오지 않고, 자꾸 수십 명의 양들이 자꾸 내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그냥 음악이 좋다. 이 좋은 선율은 내 귀 안으로 속삭이는 자장가라기보다는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더욱 생기를 돋게 만드는 피로회복제 같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나에게는 생기를 돋게 만드는 음악이라면 한니발 렉터에게 이 음악은 은밀하게 숨겨있던 살기(殺氣)를 되살려준다.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한니발 렉터로 분한 앤서니 홉킨스의 명연을 잊을 수 없다. 감옥에 갇혀있던 랙터가 탈출하는 장면, 교도관의 얼굴을 늑대처럼 물어뜯고 곤봉으로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순간에,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정말 기발하고 독특한 조합이다. 명상적 분위기가 가득 담긴 단순한 선율이 잠자고 있던 악마의 본성을 깨웠던 걸까. 보통 사람으로선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상성격자 렉터에게, 살인은 어쩌면 ‘경건한 명상’이었던 모양이다.

 

이처럼 골드베르크는 어떤 날에는 ‘굴드베르크’로 들려지고, 또 가끔은 렉터를 위한 살인 명상(?) 음악으로, 무시무시한 영화의 한 장면이 잔상처럼 떠올리기도 한다. 이런 딴 생각 때문에 그동안 골드베르크의 선율을 베개 삼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바흐가 불면증에 시달리는 백작을 위해서 만들었다는 그 유명한 일화 하나 때문에 골드베르크가 수면용으로 적합한 곡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이것이 사실인지 허구인지 불분명하단다. 그래도 과학적인 연구 결과에 의하면 실제로 첫 곡 아리아와 25번째 변주곡은 잠을 청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아리아와 30개의 변주 중 몇 십 개의 곡을 여러 번 들었지만 나한테는 골드베르크의 선율은 최고의 베개가 아닌 것 같다. 혹시 내가 바흐가 만든 독일산 ‘골드베르크’ 베개가 아니라 여태까지 캐나다산 ‘굴드베르크’ 베개를 사용하고 있었던 걸까. 사실 굴드의 피아노 버전은 점점 음이 진행될수록 지나치게 뚱땅거리는 느낌이 강해서 살포시 찾아온 잠마저 달아나게 만드는 느낌이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굴드를 “좋은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기다리듯 가만히 앉아서 작품이 차려지기를 기다리는, 조용하고 수동적인 청중에 맞서 싸움을 거는 돌발적인 천재”라고 말했다. 연주회장이 아닌 집에서도 클래식 음악을 편안하게 이어폰으로 들을 수 있는 요즘, 만약 굴드가 살아있다면 어떻게 생각했을지 무척 궁금하다. 골드베르크가 수면용 음악이라고 해서 자신의 연주를 잠들기 전에 듣는 감상자를 긍정적으로 생각했을까.

 

왠지 굴드의 성격상 ‘굴드베르크’가 아닌 ‘골드베르크’를 듣는 감상자를 싫어했을 것 같다. 특히 연주회장의 청중과 마찬가지로 ‘골드베르크’를 듣고 수면을 취하려는 감상의 목적을 진정한 음악 감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이드의 표현대로 굴드는 ‘지식인 비르투오소’, 즉 기교가 뛰어난 연주자에 가깝다. 기존의 화려하고 달콤한 음으로 이루어진 골드베르크’가 아니라 명징하게, 스타카토로 울려나오는 ‘굴드베르크’를 원했다. 그래서 그가 죽어서도 오래 전에  한물 간 클래식 음악 스타인 바흐를 놓지 않았으며 평생에 걸쳐 이 ‘골드베르크’를 ‘굴드베르크’로 두 번씩이나 녹음했다.

 

‘굴드베르크’를 듣지 않을 때 굴드는 좋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 꿈을 기다리는, 피로감이 쌓인 감상자에 맞서 싸움을 거는 돌발적인 수면 방해자가 되어 우릴 괴롭힌다. “내 연주를 듣고 잠들지 마시오!” 굴드는 피아노 연주할 때 입으로도 쉴 새 없이 내의미를 알 수 없는 허밍을 내뱉기도 하는데 자신의 연주를 듣고 잠을 청하려는 감상자를 방해하는데 딱 좋다. 굴드도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일화를 모를 리가 없다. 자신의 ‘굴드베르크’만큼은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청중의 자장가가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굴드의 연주는 바흐에 대한 그의 해석 방식이 과연 옳은가, 그른가를 떠나 자신만의 확실한 해석으로 일관하며 파격과 낯설음을 통해 우리의 고정관념을 해체시킨 것은 분명하다.

 

삶이 가파른 고비에 몰려 살아가기가 힘에 부치다고 느낄 때 굴드가 연주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한번쯤 들어볼 일이다. 삶에 활력을 불어주는 선율이 될 지도 모른다. 다만 한니발 렉터 같은 상상 초월하는 사람은 절대로 들어서는 안 된다.

 

혹시 그의 연주를 듣다가 혹시 뭐라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그 음반이 불량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 곁에 그가 생생하게 숨 쉬고 있음에 위로를 받을 것이며. 마지막 소절 마지막 음이 끝날 즈음엔 새가 눈 덮인 가지를 후르륵 털며 날아간 후의 나뭇가지 같이 우리 삶의 무게도 한결 가벼워지고, 진정 음악은 신이 떠나면서 우리에게 남겨둔 기억이며 위로임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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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ummii 2016-02-06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굴드베르크 변주곡 ㅎㅎ제가 좋아하는 음반 중 하나에요 자장가로 절대 들을 수가 없죠 ㅎㅎ 굴드의 타법은 음정 하나하나가 명료하게 귀에 꽂히는데도 거슬림이 없어요 제가 바흐 음악을 제일 좋아하게 된 것도 굴드의 해석이 한 몫 했죠~오랜만에 다시 꺼내 듣고 싶네요^^
 
개미제국의 발견 - 소설보다 재미있는 개미사회 이야기
최재천 지음 / 사이언스북스 / 1999년 1월
평점 :
품절


 

 Scene #1 지구의 진짜 주인은 개미

 

“그들은 마치 하나의 유기체에 속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사람을 건드리면 모두가 그 손길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에서 퐁텐블로 숲 땅속에 몇 달째 갇혔다가 개미의 도움으로 살아난 사람들을 보고 구조대원들이 나누는 얘기다. 햇볕도, 먹을 것도 없는 땅 속에 갇힌 사람들이 살 길은 개미처럼 되는 것뿐이었다. 전체의 생존 속에서 개인의 생존을 보장받는 개미사회의 방식을 따랐던 것이다.

 

소설 속 꾸며낸 이야기일 뿐일까. 개미는 인간사회와 놀랄 만큼 닮아 있다. 개미사회의 철저한 분업과 협업이 보여주는 효율성은 놀랍기만 하다. 조직을 구하기 위해 자폭하는 개미, 여왕개미를 겨냥해 역적모의를 하는 개미, 식물을 보호해주고 대가를 받는 개미 등등. 개미와 인간은 지구의 2대 지배자이지만 개미는 1억 년 이상을 살아왔다는 점에서 우리 인간이 배워야할 게 더 많을지도 모른다. 지구의 진짜 주인은 개미라고 해도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자랑하는 인간다운 특징들을 동물이, 그것도 기어 다니는 아주 작은 동물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할 사람도 있을 듯하다. 개미가 우화 한 편의 주인공 역할을 맡는 정도라면 봐줄 만하지만, 그 이상 기어오르면 왠지 주제넘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뤄진 수많은 연구 결과는 개미 사회를 인간 사회의 모형으로 삼을 만하다고 말한다. 개미들은 인간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든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모습들을 보여준다.

 

사회생물학의 창시자이자 개미 연구로 알려진 에드워드 윌슨은 더 나아가서 인류학자들이 인간 사회의 특징이라고 열거하는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윤리적 요소들이 사실은 고도의 지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좁쌀만한 뇌를 지닌 개미에게서 인간과 유사한 것들을 발견한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자랑할 것이라고는 심심찮게 자기 파괴 성향을 드러내는 고도 지능과 애매한 의사 전달로 불화를 일으키곤 하는 언어만 남은 꼴이 아닌가.

 

 

 Scene #2 인간과 개미는 '똑같다'라고 말할 수 없다

 

개미 사회의 문화를 우리네 사는 모습과 비교하기도 하고 개미 기업의 경영을 인간의 경제활동에 비춰보기도 한다. 개미 사회는 워낙 복잡하고 조직적이라 문화 경제 심지어는 정치까지 인간 사회와 비교해 분석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과 개미의 유사성은 겉으로만 닮은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의 사려 깊은 행동과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개미의 행동이 비슷해 보인다고 해서 ‘똑같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노예 제도다.

 

 

 

 

 

노예를 구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남의 개미집을 습격해 애벌레를 강탈해온 뒤 노예로 삼는 종도 있고, 아예 남의 개미집에 들어가서 여왕을 죽이고 대신 여왕 행세를 하는 종도 있다.

 

아마존개미는 스스로 생계를 꾸릴 능력을 완전히 잃고 노예 노동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노예들이 돌보지 않으면 굶어죽을 것이다. 노예들은 꿀과 죽은 곤충 같은 먹이를 구해오고, 여왕과 새끼를 돌보며, 집을 청소하고 수선하는 등 생명유지를 위한 모든 활동을 도맡는다. 그래서 아마존개미는 정기적으로 근처의 불개미 집을 습격해 여왕과 일개미들을 내쫓고 번데기들을 강탈해온다.

 

그렇다면 개미의 노예제는 인간의 노예제와 얼마나 비슷할까? 차이점이 있다면 개미 사회에서 노예들은 원래 자유생활을 하는 다른 종이며, 인간 사회는 더 이상 노예를 부리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노예 개미는 사실 가축에 가깝다. 노예에게 번식이 허용되지 않고, 노예의 사회조직이 주인의 것과 대등하거나 우월할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 말이다. 개미의 노예제는 그들의 사회성에서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본능적 진화의 산물인지 여전히 그 비밀이 풀리지 않았지만 이러한 특징은 개미 사회가 보여주는 수많은 측면 중 하나이며, 개미 사회의 복잡성을 증가시키는 한 요인이다.

 

 

 

 

 

 

'개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근면'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개미는 근면함의 대명사로 각인되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로 세뇌를 받으며 자랐다. 솔로몬왕은 잠언에서 우리더러 개미의 근면함을 배우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하지만 개미는 우리 인간만큼 부지런하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베짱이만큼 열심히 일하는 것도 아니다. 일개미는 하루에 평균 5시간 정도밖에 일하지 않으며 나머지 시간은 휴식을 취하면서 에너지를 비축한다. 부지런하지 않은 일개미가 아무 것도 안 하면서 빈둥거리면서 일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일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어도 일하지 않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앞을 내다보며 좀 더 큰일을 위해서 활동을 멈추는 것이다. 쉬는 일개미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출동 명령을 기다리는 이른바 대기조라고 보면 된다. 언제 침입할지 모르는 외부 개미와 맞설 수 있고, 개미집에 있는 여왕개미와 알을 보호할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고도의 효율성을 이끌어낸 일하지 않는 일개미의 현상을 통해, 고도로 조율된 조직 원리를 읽을 수 있다.

 

 

 Scene #3 일개미와 관료의 차이점

 

요즘 우리 사회는 천재지변에 버금가는 인적 재난으로 인해 절뚝거릴 때가 많다. 최근에 발생한 세월 호 침몰 사건은 재난 사고에 대한 정부의 부실한 사후조치를 보여줬다. 그동안 수차례 인명 피해의 대형 사고가 발생하면 안전관리 매뉴얼을 정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매번 최악의 결과만 되풀이되고 있다. 정부는 대형 사고가 날 때마다 책임자 엄벌과 철저한 재발 방지대책 마련을 약속했다. 그러나 번번이 실효성 없는 사후약방문에 그쳤다. 과연 꼼꼼하게 매뉴얼을 다시 점검하고 책임자를 문책한다고 해서 제2의 세월 호 침몰 사건이 발생할 때 시민의 안전을 보호 할 수 있을까.

 

훨씬 더 엄중한 책임이 공직 조직에 있다. 해양경찰과 해양수산부 공무원들은 두 달 전 세월 호에 대한 특별 안전점검에서 선내 침수방지 장치 등 5개 문제점을 적발했지만, "조치했다"는 선사 측의 말만 믿고 재점검을 실시하지 않았다. 사후 대응조치도 무능하고 혼란스러웠다. 일을 대충하려는 관료주의의 병폐는 '일을 하되 일을 하지 않는' 일개미와 무척 비교가 된다. 우리나라 관료는 일을 하되 일을 제대로 하지 않다. 일개미는 미래의 일을 위해서 휴식을 취한다면, 관료는 업무 연관성도 없는 상황에서 그냥 시간을 보낸다.

 

 

 

 

나는 이 시점에서 개미의 위기관리체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개미 사회에는 크고 작은 사고들이 끊이질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엄청난 노동력을 대기상태에 묶어두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회 전체로 볼 때 더 이득이기 때문이다. 개미 사회는 전체 노동력의 무려 4분의 3을 위기관리에 할당하고 나머지 4분의 1로만 사회를 운영하게 되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엄청난 양의 관료의 노동력을 비축할 수는 없지만 효율적으로 현장에 적절하게 투입되고 이에 맞춰 대응할 수 있는 관료가 필요하다. 혼자서 죽어라고 일하는 것과 남들 일하는데 혼자서 빈둥거리는 것은 개미의 덕목이 아니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정작 필요한 것은 개미사회에서 보는 뛰어난 협업과 분업의 효율성이다. 그러면 사회 안정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 심각한 사태에 대비하여 언제든지 어떤 일이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며 인간 이외의 동물을 자신보다 낮은 존재로 간주한다. 특히 ‘벌레 보듯이’라는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듯 동물 중에서도 곤충을 더욱 하찮은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개미를 관찰하는 저자의 시선은 다분히 인간 중심적 관점이기도 한데, 그 때문에 결국 개미의 생태는 우리 삶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게 된다. 개미가 인간보다 먼저 농사를 지은 지구 최초의 농사꾼임을 아는 순간 자신을 최초의 경작자로 꼽는 인간의 오만이 떠오른다. 또 인간에 필적할 정도로 자원을 끌어 모아 사용하기는 하기만 과시적으로 소모하지 않는 개미의 습성은 악착같이 희소한 것에 집착하는 인간의 탐욕과 대조된다. 특히 개미가 베짱이보다 부지런하지 않으면서도 효율적으로 일을 하는 사실을 알고 나면 보이는 그대로 믿었던 무지가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개미가 작다고 얕보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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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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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30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장소에 다시 찾아왔지만
같은 시간을 다시 찾아가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김소연 ‘장난감의 세계’ 중에서, 『수학자의 아침』)

 

 

 

 Scene #1  누군가에게 추천하기가 애매한 책

 

독서가 은밀한 관음의 쾌감을 선사할 때가 있다. 시선을 사로잡기보다 한사코 흐트러뜨리는 책이 그렇다. 윤곽을 잃어버린 피사체 위에 더 또렷하게 맺히는 상, 혹은 더 적극적으로 초점을 풀어 마치 매직아이의 숨은 그림을 탐색하듯 유쾌한 방황에 나설 때 그 쾌감은 시작된다. 그럴 때 텍스트는 단숨에 따라 읽을 대상으로서의 객체가 아니라 동행하며 대화하는 상대 주체가 된다. 그런 책은 어쩔 수 없이 아껴 읽게 되고, 그런 독서는 느리다 못해 산만해지곤 한다.

 

그 과정에서 찾아낸 숨은 그림, 또 방황의 울렁거림, 그 느낌을 만끽할 때의 내가 머물던 어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리움을 나는 쉽사리 놓지 못한다. 물론 그 느낌의 기억들이 내가 읽은 텍스트의 주제나 내용, 혹은 어떤 구절과 인과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훗날 다시 읽더라도 복기할 수도 없다. 나 아닌 누군가에게 그 모호한 연관성을 전달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다시 읽고 싶은 책을 떠올리며 매번 느끼던 당혹감도 그런 꺼칠한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책의 내용과 개인적 감상을 소개하는 것으로는 내가 그 책을 다시 읽고 싶은 이유를 전달할 수 없고, 다시 읽고 싶은 이유를 설명하자니 나 아닌 누군가의 공감을 얻을 자신이 없었다. 그냥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라면 여기저기서 뽑아놓은 양서나 고전 추천도서 목록을 소개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몇 권 꽂혀있지 않은 책장 앞을 이리저리 바장이다가 ‘뭐 이 정도면 좋아하겠지’라는 식으로 책을 골랐던 것 같다.

 

내가 아끼고 좋아하고 또 그리워하는 것을, 그것이 무엇이든, 누구에게 소개해서 공감을 얻는 일은 어렵고 불편하다. 아마도 거기에 부합되는 책 한 권을 꼽으라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일 것이다.

 

 

 

 Scene #2  마들렌 과자 하나로 ‘나’를 발견하다  

 

소설은 이야기를 필요로 하지만 작가들은 바로 이야기 때문에 구속을 당하기도 한다. 이야기를 포기하면 소설이 재미가 없어지고 이야기에 매달리다 보면 사물을 정밀하게 표현할 수 없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새로운 소설로 각광받았던 것은 바로 이 딜레마에 대한 해답을 주었기 때문이리라. 프루스트는 사건의 전개가 강조되는 이야기보다 사물 그 자체의 진실과 아름다움을 묘사하고자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일찍부터 글쓰기란 자신이 느낀 감동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첫째이며, 소설도 글쓰기의 연장일 뿐이라는 신념 위에 철저히 묘사의 수련을 쌓아 오던 프루스트였다.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때로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너무 빨리 감겨 ‘잠이 드는구나.’라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15쪽)

 

소설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머니가 재워주지 않으면 잠들 수 없었던 화자인 ‘나’(마르셀)의 어린 시절. 여름에 레오니 고모집이 있는 콩브레에서 보냈던 일. 성당의 엄숙한 아름다움. 그런 속에서 예술 종교 철학 사랑에 점차 눈 떠간다는 얘기로 이어진다.

 

내용은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유년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과거를 찾아가는 계기의 특별함에 의해 이 평범함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성인이 된 화자가 어느 날 침울해 있는데 어머니가 홍차와 과자를 준다. 홍차를 마시다가 그는 느닷없이 몸속에 솟구치는 이상한 기쁨을 느낀다. 1권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면서도 극적인 장면이다. 아마도 극적인 감각의 전환 장면이 없었다면 프루스트의 소설은 일상 속 이야기를 장황하게 써내려간 지루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으로 기계적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중략) 그러다가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그 맛은 내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면, 아주머니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서 주던 마들렌 과자 조각의 맛이었다.” (86, 88쪽)

 

화자가 마들렌을 혀로 맛보는 이 장면만 여러 번 읽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작가의 감각이 놀랍기만 하다. 홍차 맛이 어린 시절에 맛 본 차 맛과 겹치면서 생생한 과거를 떠 올린 게다. 홍차 적신 마들렌의 맛과 냄새와 촉감은 마르셀을 감미로운 행복감으로 몰아넣는다. 고립감을 느낄 정도의 극도의 희열감을 맛보게 해준다. 그렇게 만나는 과거는 경험 당시의 그것보다 훨씬 강도가 높고 참신하다. 화자, 즉 프루스트는 말한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 하나가 내가 도달하려는 본질을 내 안에서 찾도록 일깨워주었다고.

 

반면 화자의 오감은 언제 어디서나 쉽게 무뎌지지 않을 것이다. 범속한 일상을 생생한 감동의 그것으로 바꿔 놓기 위해 그는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시간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시점 이동과 중문 복문으로 구성된 문장은 중첩된 이미지끼리 어울리면서 사물을 한층 의미심장한 것으로 확충한다.

 

“몇 시나 되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기적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가더니, 마치 숲 속에서 우는 새의 노래마냥 거리감을 드러내면서, 나그네가 다음 역을 향해 발걸음을 서두르는 그 황량한 들판의 넓이를 그려 보았다.” (16쪽)

 

사물의 새로운 이미지를 찾는 이런 태도가 평범한 일상 속에 숨겨져 있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Scene #3  ‘잃어버린 시간’의 의미

 

한편 프루스트의 소설은 이별과 재회 또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이중적 의미도 담고 있다. 1부 ‘스완네 집 쪽으로’가 그러한 모색의 실마리에 해당한다.

 

작품세계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것은, 우리가 부단히 죽어 가고 있다는 세네카 식의 인식이다. 특히 망각현상이 그 극명한 예이다. 까마득히 먼 유년시절에 겪었던 일들은 물론, 불과 며칠 전의 일들도 쉽게 잊거나 잊혀진다. 그것이 프루스트가 인식한 우리의 정서적 모습이다. 다시 말해 살아 있음의 뚜렷한 징표인 우리의 정서적 퇴적물은 그렇게 덧없이 지워진다. 그러나 영영 지워지는 것일까? 그렇게 죽어 소멸되는 것일까?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의 중심적인 의문이다.

 

물론 지난 세월의 일들을 기록에 의지하여, 또는 다른 수단의 도움을 얻어 인위적으로 기억해 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일들은 우리 개체 고유의 실존적 체험과는 무관한 사건들이다. 그러한 사건들의 특징은 온갖 유행이념이나 잡다한 교조(敎條), 주입되거나 들쑤셔진 억지감정 등에 의해 빚어진 그 무엇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속성상 다소간의 거짓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과거의 부활도 있다. 또한 어떤 때는 어느 대상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설레지만, 아무 추억도 되살아나지 않는다. 부활된 것의 정체가 영영 밝혀지지 않는 경우이다.

 

‘잃어버린 시간’은 그토록 하찮은 사물에 의해 촉발된 황홀감이나 격정의 비밀을 깨달아 가는 역정을 그리고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터득한 ‘진정한 예술’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시간’은 ‘잃어버린 줄로 믿었던 시간’을 가리키는 반어법일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존재적 체험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프루스트가 ‘되찾은 시간’이라고 명명한 그 시절 또한 단순한 과거의 어느 순간만이 아니다. 지극히 하찮은 사물과의 우연한 접촉에 의해 부활된 그 상태, 황홀감을 수반하는 그 찰나적 상태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소설의 주인공은 일체의 현상세계로부터 이탈한 자신의 초월적 본질을, 다시 말해 불멸의 가능성을 감지하기도 한다.

 

 

 

 Scene #4  잃어버린 시간 찾기의 어려움

 

끝없이 붙잡고 미끄러지는 과거를 쫓는 욕망, 지금의 현재 더 나아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성취를 위한 달음박질. 이 두 가지 삶의 반응은 주체와 대상이 달라진 줄도 모른 채 환상 같은 맹목의 힘으로 이어지곤 한다. 그러다 한 순간 어떤 계기에 멈춰 서서 돌이켜본 뒤 그 잃어버린 시간의 덧없음을 발견하게 된 자의 그리움이 밀려온다. 그리움의 대상은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장소만은 아니다. 사물도 사람도 책도, 한 순간의 기억도 될 수 있을 것이다.

 

1부부터 기억의 장황하고 중층적인 서사, 집요하고 밀도 높은 묘사와 사념의 문장들로 이어지는 소설은 질로나 양으로나 단숨에 읽기는 어렵다. 나는 두어 차례 이 책에게서 거절당하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지금까지만 해도 총 5번이나 거절당했다. 1부 1권에서 반 정도 화자의 기억을 따라가는데 간신히 성공했을 뿐이다. 얼른 1권 2부로 넘어가야하는데 이놈의 마음은 자꾸 딴 데만 보려고 하다니. 요즘처럼 삶의 여유가 없을 정도로 점점 빨라지는 속도의 세상 속에 의식하지도 못하고 지나가 버리는 수많은 순간이 얼마나 많았을까. 이러한 찰나의 순간들을 프루스트는 모두 잡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수많은 문자가 촘촘하게 구성된 문장의 그물망을 한 땀 한 땀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프루스트는 소설을 써내러 갔다.

 

눈앞의 시간을 잡는 것도 힘든 일인데, 잃어버린 시간을 회상하고 찾아내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느껴본다. 더구나 그것이 자신의 일생이 아닌 자신을 둘러싼 모든 시간과 공간 거기에 그 속에 배치된 사소한 사물마저도 기억을 살려내는 것이라면, 얼마나 더 힘든 일일까.

 

그렇게 본다면 프루스트는 정말 겸손하다. 그는 과거를 복원하고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라고 말한다. 완벽한 과거를 복원하고 특별한 데자부를 경험하는 것은 우연히 맛본 마들렌 덕분이다. 마들렌의 신비스러운 경험을 다시 한 번 느끼기 위해서 화자는 다시 마들렌 조각을 맛보지만, 그 때 그 순수하고도 온 몸에 전율이 돋는 그 감동의 순간을 재현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화자는 잃어버린 시간 찾기의 어려움을 글 중간에 살짝 토로하기도 한다. 같은 장소를 다시 찾아왔지만, 같은 시간으로 다시 가는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우리 과거도 마찬가지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도 불필요하다. 과거는 우리 지성의 영역 밖에, 그 힘이 미치지 않은 곳에, 우리가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 (또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달렸다." (85쪽)

 

 

 

 Scene #5  황량한 삶 속에서의 경험한 축복의 시간 

 

철학자 베르그송은 순차적 시간이 아닌 주관적인 시간, 즉 의식의 흐름을 통해 잠재된 기억이 ‘비의도적’으로 마주친 과거와 현재가 동시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이렇듯 프루스트는 시공간을 넘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의식의 흐름’으로 전개했는데 여기서 ‘비의도적 기억’과 동시간성을 통한 의미가 중요한 소재가 된다.

 

인간은 잃어버린 시간, 즉 과거를 기억으로 이어가고 싶어 한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그 기억을 이을 사람 또는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어떤 매개체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프루스트의 소설은 비의도적 기억이 현재에 소환되어 현재와 동시성을 갖기 위한 치열한 노력의 산물이다.

 

물론 기억은 과거에만 있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한다. 사람 사는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 피어나고 있으니까요. 기억을 이어가는 것만큼이나, 나 자신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도 다른 시작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기억’을 소중히 한다는 것은, 한 번 가면 지나가버리고 마는 유한적인 삶을 소중히 한다는 뜻이다. 다양한 목소리와 이야기로 가득 찬 세상에서 프루스트는 자신의 인생을 매우 사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삶의 한 부분이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지기 쉬운 과거의 영상을 기억을 통해 떠올림으로써 불가시(不可視)의 실재(實在) 시간을 찾아낼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매우 의미 있거나 절실 한 것일 수도 있다. 현재는 과거의 지속이며 현재와 과거의 동시간성을 갖는다는 것. 이를 통해 프루스트는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잊고 있었던 자아의 본질을 발견하고자 했다. 잃어버린 시간이 가망 없고 부질없는 욕망일지라도 때때로 그런 우연의 회상이 그립기도 하다. 

 

이러한 절심함 때문에 프루스트는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창작생활을 했다. 14년 동안 코르크로 방음된 밀폐된 방에 갇혀 천식과 싸우면서 말이다. 세상의 모든 재미를 등지고 죽음에 쫓기며 문장을 다듬어가는 한 예술가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러나 누가 감히 그를 불행했다고만 할 것인가? 그는 코르크 밀실에서 서서히 기억 한가운데로 걸어갔을 뿐이다. 잠시 과거를 살았던 것이다. 과거에서 잃어버린 마르셀, 즉 ‘나’라는 존재를 찾기 위해서. 황량한 삶 가운데에서도 신생 같은 환희를 맛볼 수 있게 한 축복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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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슨 매컬러스의 『슬픈 카페의 노래』는 지금까지 3종이 번역, 출판되었다. 2005년 열림원에서 故 장영희 교수 번역으로 ‘열림원 이삭줍기’ 시리즈로 나왔다. 올해 초에 새로운 표지로 단장하여(표지 속 인물은 작가 카슨 매컬러스)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그리고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185번)로 나온 것으로 매컬러스의 또 다른 대표작이자 처녀작인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머지 1종은? 문예출판사에서 출간되었는데 정현종 시인이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문예출판사판은 현재 절판이다. 문예출판사에서 출간된 세계문학 작품들은 옛날 ‘문예 세계문학선’ 표지 디자인과 흡사하다. 흰 색 바탕에 한가운데에 작은 그림을 넣었다. 표지 그림은 반 고흐의 「아를의 밤의 카페」이다. 화려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고흐의 카페는 작품 속 인물인 아멜리아, 라이언 그리고 마빈의 삼각관계를 형성하기 전 행복했던 카페의 분위기가 연상된다.  과거 ‘문예 세계문학선’ 표지 디자인과 비슷하지만 『슬픈 카페의 노래』는 세계문학선 시리즈에 포함되지 않은 작품 중 하나이다. 

 

내가 가진 책은 1996년 초판이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유명한 세계문학 작품을 가장 먼저 번역 소개한 이력이 있는 문예출판사답게 정현종 번역본은 1972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아마도 카슨 매컬러스의 이 작품을 가장 먼저 번역한 출판사가 문예출판사일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번역본이 남아 있어서 정현종 시인의 번역본이 잊힌 감이 있다. 알라딘에 검색하면 표지마저도 나오지 않는다. 이 책에 매컬러스의 다른 단편소설들도 수록되어 있는데 ‘덧없는 생’, ‘사랑의 딜레마’, ‘나무, 바위, 구름’, 3편이다. 1972년판 당시에는 ‘사랑의 딜레마’는 처음에 ‘가정불화’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덧없는 생’은 ‘체류자’로, ‘사랑의 딜레마’는 ‘가정의 딜레마’라는 바뀐 제목으로 ‘나무, 바위, 구름’과 함께 단편집 『불안감에 시달리는 소년』(열림원)에 수록되어 있다.

 

 

 

 

 

 

 

 

 

 

 

 

 

 

 

매컬러스의 작품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그로테스크한 고딕 문학이 특징이다. 그녀의 소설 속 인물들은 비정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사건이 전개된다. 그녀는 ‘남부 고딕문학’의 대표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슬픈 카페의 노래』『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이외에도 1946년 작 『고딕 소녀』(The Member of the Wedding)도 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직접 극화하여 상연되기도 했다. 그리고 1961년 작 『바늘 없는 시계』는 『슬픈 카페의 노래』와 함께 수록되어 나온 적 있으나 출간된 지 오래되어서 시중에 구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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