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enn Gould: Bach Goldberg Variations 1981 Studio Video
음악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음악이란 것이 본래 가장 비언어적인 예술이기에, 음악에서 얻은 느낌을 갖가지 수사를 동원하여 언어로 옮기면 옮길수록 도리어 가장 중요한 무언가는 점점 더 멀리 달아나는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음악 감상을 하면서 느낀 감동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 왜 그런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처음에는 음악을 글로 논하고 표현하는 감수성이 부족해서 그런 건 줄 알았다. 그랬다가 요즘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시를 다른 언어로 번역했을 때, 결국 번역되지 않고 남는 것이 바로 그 시”라는 어떤 시인의 말처럼, 음악 역시 애초에 그렇게 언어로 옮겨질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일지 모른다.
허나 그렇다고 음악에 대한 글쓰기가 모두 무용하다고 할 수 있을까. 가끔 아주 가끔 보석같이 빛나는 글을 마주칠 때가 있는데, 미셀 슈나이더의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가 바로 그런 책이다. 그런데 전기라고 하자니 연대기적 구성을 찾아볼 수 없고, 그의 음악에 대한 해설 혹은 평론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몽상적인 시적 언어를 구사한다.
다양한 자료와 사실들을 토대로, 그의 내면에서 일어났을 법한 고뇌와 성찰을 그의 음악의 결을 따라 재구성해낸다. 글렌 굴드는 감정의 폭발보다는 극도의 정제를, 연주회장보다는 녹음 스튜디오를 선호한 독특한 피아니스트다. 가장 '비(非)피아노적인' 방법으로 피아노를 연주하고자 했던 모순에 찬 인물이다.
1955년 6월의 따뜻한 날에 굴드는 두꺼운 외투에 목도리까지 두른 채 녹음 스튜디오에 나타났다. 장갑을 낀 손에 들려 있는 악보가방, 생수 2병, 타월 한 무더기, 알약병 5개가 그의 소지품이었다. 그리고 그를 구성하는 이미지에서 절대 빠져선 안 되는 키 작은 접이의자. 그는 마치 낚시의자와도 같은 14인치 높이의 의자를 꺼내놓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참으로 얼토당토않은 모습이었을 터. 스튜디오 직원들은 황당했을 것이다. 그날 녹음실에서 연주된 곡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이 레코딩에는 ‘전설의 탄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파격. 당시 그의 음반을 들은 비평가들과 대중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도대체 바흐를 이렇게 연주할 수도 있단 말인가.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러시아 대사 카이저링크 백작의 궁정 음악가였던 골드베르크가 불면증에 시달리던 백작을 위해 바흐에게 작곡을 부탁했던 일종의 자장가였다. 2개의 아리아와 30개의 변주로 이루어진 이 곡은 총 연주시간이 40여분 정도의 대곡이다. 각각의 변주는 연주시간이 짧게는 1분, 길게는 4분여 정도까지 늘어진다.
하지만 굴드는 악보 위에 쓰여진 바흐의 시간은 안중에도 없었다. 완벽한 기교를 바탕으로 그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흐름을 완전히 자신 만의 세계 속에 집어넣었다. 페달은 아예 사용하지도 않았고 템포는 자유자재로 변형시켰다. '골드베르크'가 '굴드베르크'로 변하는 역사적인 순간.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 바흐는 광막한 벌판에 우뚝 솟은 태산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거대한 봉우리를 오르면서 감탄하고 경외하고 좌절해야 했던가. 그러나 굴드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 한 장으로 그는 전 세계 음악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를 둘러싼 이런 식의 일화는 한두 개가 아니다. 2년 뒤 뉴욕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과 협연하던 날. 그는 따뜻한 물에 거의 한 시간가량 손을 담그고 있다가 연주회 시작 2분 전에야 대기실에 나타났다. 이날의 옷차림도 황당했다. 두터운 외투와 올이 굵은 헐렁한 스웨터. 당황한 번스타인이 “청중 앞에서 이 스웨터를 벗을 건 아니지”라고 묻자, 그는 아무 대답 없이 스웨터를 벗었다. 그 바람에 머리카락이 온통 헝클어졌지만 그는 손으로 그것을 쓸어 올리지도 않은 채 무대로 나갔다. 그날 연주한 곡은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2번’. 그는 애지중지하는 난쟁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고, 청중에게서 비스듬히 등을 돌린 자세였다. 그는 느린 악장에 이르자 입을 헤 벌린 채 무대 천장에 시선을 고정시켰고, 마지막 악장에선 거의 뒤로 쓰러질 것 같은 자세로 피아노를 쳤다.
굴드는 콘서트홀의 청중을 좋아하지 않았다. 피아니스트로서 한창 때였던 1964년, 당연히 출연료도 고공행진 했을 그 시기에 굴드는 청중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려버린다. 그때부터 그의 음악 활동은 오로지 방송국과 음반사의 스튜디오에서만 이뤄진다.
굴드의 오랜 친구이자 의사였던 피터 F. 오스왈드의 증언에서 청중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 굴드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현악기들이 불협화음을 만들어낼 때를 기다리며, 지휘자가 까다로운 박자에서 실수하기를 기다리고 끔찍합니다. 음악회를 쫓아다니는 철면피한 인간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싫어하며 신뢰하지도 않고, 친구로 삼고 싶지도 않습니다.”
오스왈드의 헤석에 의하면 굴드는 연주회장에 오는 청중이 음악을 들으러 오는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다분히 감정이 치우친 감이 있으나 청중이 있는 연주회장을 거부하는 굴드의 독특한 음악 철학으로 이해해야할 듯 싶다.
그렇게 스스로 고립을 원했던 피아니스트.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우울증을 앓았으며, 상식을 뛰어넘는 멋대로의 행태를 보여줬던 사람. 그러나 굴드를 다만 그렇게 기행을 일삼은 피아니스트로만 바라본다는 것은, 어쩌면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청중의 태도’와 별로 다르지 않을 법하다.
연주하는 동안 피아노는 사라지고 음악만 남길 굴드가 바랬듯, 책을 읽다보면 작가는 사라지고 굴드만 남는다. '골드베르크'가 '굴드베르크'로 전환되는 당시 녹음실 안 굴드의 모습도 떠올힌다. 그 순간 음악과 언어는 기분 좋게 화해한다.
그러나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을 때면 정말 굴드의 모습만 남는다. ‘골드베르크’가 아니라 ‘굴드베르크’라고 우스갯소리로 불리는 이유가 있다. 생전 굴드가 변주곡을 연주하는 장면이 담긴 동영상으로 음악을 많이 들어서 그런 걸까. 수면을 부르는 불면증 음악치료곡이라고 하던데 MP3로 곡을 들으면 정작 중요한 잠은 오지 않고, 자꾸 수십 명의 양들이 자꾸 내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그냥 음악이 좋다. 이 좋은 선율은 내 귀 안으로 속삭이는 자장가라기보다는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더욱 생기를 돋게 만드는 피로회복제 같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나에게는 생기를 돋게 만드는 음악이라면 한니발 렉터에게 이 음악은 은밀하게 숨겨있던 살기(殺氣)를 되살려준다. 영화 <양들의 침묵>에서 한니발 렉터로 분한 앤서니 홉킨스의 명연을 잊을 수 없다. 감옥에 갇혀있던 랙터가 탈출하는 장면, 교도관의 얼굴을 늑대처럼 물어뜯고 곤봉으로 사정없이 두들겨 패는 순간에,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정말 기발하고 독특한 조합이다. 명상적 분위기가 가득 담긴 단순한 선율이 잠자고 있던 악마의 본성을 깨웠던 걸까. 보통 사람으로선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상성격자 렉터에게, 살인은 어쩌면 ‘경건한 명상’이었던 모양이다.
이처럼 골드베르크는 어떤 날에는 ‘굴드베르크’로 들려지고, 또 가끔은 렉터를 위한 살인 명상(?) 음악으로, 무시무시한 영화의 한 장면이 잔상처럼 떠올리기도 한다. 이런 딴 생각 때문에 그동안 골드베르크의 선율을 베개 삼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바흐가 불면증에 시달리는 백작을 위해서 만들었다는 그 유명한 일화 하나 때문에 골드베르크가 수면용으로 적합한 곡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이것이 사실인지 허구인지 불분명하단다. 그래도 과학적인 연구 결과에 의하면 실제로 첫 곡 아리아와 25번째 변주곡은 잠을 청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아리아와 30개의 변주 중 몇 십 개의 곡을 여러 번 들었지만 나한테는 골드베르크의 선율은 최고의 베개가 아닌 것 같다. 혹시 내가 바흐가 만든 독일산 ‘골드베르크’ 베개가 아니라 여태까지 캐나다산 ‘굴드베르크’ 베개를 사용하고 있었던 걸까. 사실 굴드의 피아노 버전은 점점 음이 진행될수록 지나치게 뚱땅거리는 느낌이 강해서 살포시 찾아온 잠마저 달아나게 만드는 느낌이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굴드를 “좋은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기다리듯 가만히 앉아서 작품이 차려지기를 기다리는, 조용하고 수동적인 청중에 맞서 싸움을 거는 돌발적인 천재”라고 말했다. 연주회장이 아닌 집에서도 클래식 음악을 편안하게 이어폰으로 들을 수 있는 요즘, 만약 굴드가 살아있다면 어떻게 생각했을지 무척 궁금하다. 골드베르크가 수면용 음악이라고 해서 자신의 연주를 잠들기 전에 듣는 감상자를 긍정적으로 생각했을까.
왠지 굴드의 성격상 ‘굴드베르크’가 아닌 ‘골드베르크’를 듣는 감상자를 싫어했을 것 같다. 특히 연주회장의 청중과 마찬가지로 ‘골드베르크’를 듣고 수면을 취하려는 감상의 목적을 진정한 음악 감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이드의 표현대로 굴드는 ‘지식인 비르투오소’, 즉 기교가 뛰어난 연주자에 가깝다. 기존의 화려하고 달콤한 음으로 이루어진 골드베르크’가 아니라 명징하게, 스타카토로 울려나오는 ‘굴드베르크’를 원했다. 그래서 그가 죽어서도 오래 전에 한물 간 클래식 음악 스타인 바흐를 놓지 않았으며 평생에 걸쳐 이 ‘골드베르크’를 ‘굴드베르크’로 두 번씩이나 녹음했다.
‘굴드베르크’를 듣지 않을 때 굴드는 좋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 꿈을 기다리는, 피로감이 쌓인 감상자에 맞서 싸움을 거는 돌발적인 수면 방해자가 되어 우릴 괴롭힌다. “내 연주를 듣고 잠들지 마시오!” 굴드는 피아노 연주할 때 입으로도 쉴 새 없이 내의미를 알 수 없는 허밍을 내뱉기도 하는데 자신의 연주를 듣고 잠을 청하려는 감상자를 방해하는데 딱 좋다. 굴드도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일화를 모를 리가 없다. 자신의 ‘굴드베르크’만큼은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청중의 자장가가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굴드의 연주는 바흐에 대한 그의 해석 방식이 과연 옳은가, 그른가를 떠나 자신만의 확실한 해석으로 일관하며 파격과 낯설음을 통해 우리의 고정관념을 해체시킨 것은 분명하다.
삶이 가파른 고비에 몰려 살아가기가 힘에 부치다고 느낄 때 굴드가 연주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한번쯤 들어볼 일이다. 삶에 활력을 불어주는 선율이 될 지도 모른다. 다만 한니발 렉터 같은 상상 초월하는 사람은 절대로 들어서는 안 된다.
혹시 그의 연주를 듣다가 혹시 뭐라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그 음반이 불량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우리 곁에 그가 생생하게 숨 쉬고 있음에 위로를 받을 것이며. 마지막 소절 마지막 음이 끝날 즈음엔 새가 눈 덮인 가지를 후르륵 털며 날아간 후의 나뭇가지 같이 우리 삶의 무게도 한결 가벼워지고, 진정 음악은 신이 떠나면서 우리에게 남겨둔 기억이며 위로임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