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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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309]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같은 장소에 다시 찾아왔지만
같은 시간을 다시 찾아가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김소연 ‘장난감의 세계’ 중에서, 『수학자의 아침』)

 

 

 

 Scene #1  누군가에게 추천하기가 애매한 책

 

독서가 은밀한 관음의 쾌감을 선사할 때가 있다. 시선을 사로잡기보다 한사코 흐트러뜨리는 책이 그렇다. 윤곽을 잃어버린 피사체 위에 더 또렷하게 맺히는 상, 혹은 더 적극적으로 초점을 풀어 마치 매직아이의 숨은 그림을 탐색하듯 유쾌한 방황에 나설 때 그 쾌감은 시작된다. 그럴 때 텍스트는 단숨에 따라 읽을 대상으로서의 객체가 아니라 동행하며 대화하는 상대 주체가 된다. 그런 책은 어쩔 수 없이 아껴 읽게 되고, 그런 독서는 느리다 못해 산만해지곤 한다.

 

그 과정에서 찾아낸 숨은 그림, 또 방황의 울렁거림, 그 느낌을 만끽할 때의 내가 머물던 어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리움을 나는 쉽사리 놓지 못한다. 물론 그 느낌의 기억들이 내가 읽은 텍스트의 주제나 내용, 혹은 어떤 구절과 인과적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훗날 다시 읽더라도 복기할 수도 없다. 나 아닌 누군가에게 그 모호한 연관성을 전달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다시 읽고 싶은 책을 떠올리며 매번 느끼던 당혹감도 그런 꺼칠한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책의 내용과 개인적 감상을 소개하는 것으로는 내가 그 책을 다시 읽고 싶은 이유를 전달할 수 없고, 다시 읽고 싶은 이유를 설명하자니 나 아닌 누군가의 공감을 얻을 자신이 없었다. 그냥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라면 여기저기서 뽑아놓은 양서나 고전 추천도서 목록을 소개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몇 권 꽂혀있지 않은 책장 앞을 이리저리 바장이다가 ‘뭐 이 정도면 좋아하겠지’라는 식으로 책을 골랐던 것 같다.

 

내가 아끼고 좋아하고 또 그리워하는 것을, 그것이 무엇이든, 누구에게 소개해서 공감을 얻는 일은 어렵고 불편하다. 아마도 거기에 부합되는 책 한 권을 꼽으라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일 것이다.

 

 

 

 Scene #2  마들렌 과자 하나로 ‘나’를 발견하다  

 

소설은 이야기를 필요로 하지만 작가들은 바로 이야기 때문에 구속을 당하기도 한다. 이야기를 포기하면 소설이 재미가 없어지고 이야기에 매달리다 보면 사물을 정밀하게 표현할 수 없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새로운 소설로 각광받았던 것은 바로 이 딜레마에 대한 해답을 주었기 때문이리라. 프루스트는 사건의 전개가 강조되는 이야기보다 사물 그 자체의 진실과 아름다움을 묘사하고자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일찍부터 글쓰기란 자신이 느낀 감동을 정확히 전달하는 것이 첫째이며, 소설도 글쓰기의 연장일 뿐이라는 신념 위에 철저히 묘사의 수련을 쌓아 오던 프루스트였다.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때로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너무 빨리 감겨 ‘잠이 드는구나.’라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15쪽)

 

소설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머니가 재워주지 않으면 잠들 수 없었던 화자인 ‘나’(마르셀)의 어린 시절. 여름에 레오니 고모집이 있는 콩브레에서 보냈던 일. 성당의 엄숙한 아름다움. 그런 속에서 예술 종교 철학 사랑에 점차 눈 떠간다는 얘기로 이어진다.

 

내용은 누구나 접할 수 있는 유년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과거를 찾아가는 계기의 특별함에 의해 이 평범함은 전혀 다른 것이 된다. 성인이 된 화자가 어느 날 침울해 있는데 어머니가 홍차와 과자를 준다. 홍차를 마시다가 그는 느닷없이 몸속에 솟구치는 이상한 기쁨을 느낀다. 1권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면서도 극적인 장면이다. 아마도 극적인 감각의 전환 장면이 없었다면 프루스트의 소설은 일상 속 이야기를 장황하게 써내려간 지루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침울했던 하루와 서글픈 내일에 대한 전망으로 마음이 울적해진 나는 마들렌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으로 기계적으로 입술을 가져갔다. 그런데 과자 조각이 섞인 홍차 한 모금이 내 입천장에 닿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 내 몸속에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감미로운 기쁨이 나를 사로잡으며 고립시켰다. (중략) 그러다가 갑자기 추억이 떠올랐다. 그 맛은 내가 콩브레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 방으로 아침 인사를 하러 갈 때면, 아주머니가 곧잘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서 주던 마들렌 과자 조각의 맛이었다.” (86, 88쪽)

 

화자가 마들렌을 혀로 맛보는 이 장면만 여러 번 읽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작가의 감각이 놀랍기만 하다. 홍차 맛이 어린 시절에 맛 본 차 맛과 겹치면서 생생한 과거를 떠 올린 게다. 홍차 적신 마들렌의 맛과 냄새와 촉감은 마르셀을 감미로운 행복감으로 몰아넣는다. 고립감을 느낄 정도의 극도의 희열감을 맛보게 해준다. 그렇게 만나는 과거는 경험 당시의 그것보다 훨씬 강도가 높고 참신하다. 화자, 즉 프루스트는 말한다. 홍차에 적신 마들렌 하나가 내가 도달하려는 본질을 내 안에서 찾도록 일깨워주었다고.

 

반면 화자의 오감은 언제 어디서나 쉽게 무뎌지지 않을 것이다. 범속한 일상을 생생한 감동의 그것으로 바꿔 놓기 위해 그는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시간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시점 이동과 중문 복문으로 구성된 문장은 중첩된 이미지끼리 어울리면서 사물을 한층 의미심장한 것으로 확충한다.

 

“몇 시나 되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기적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가더니, 마치 숲 속에서 우는 새의 노래마냥 거리감을 드러내면서, 나그네가 다음 역을 향해 발걸음을 서두르는 그 황량한 들판의 넓이를 그려 보았다.” (16쪽)

 

사물의 새로운 이미지를 찾는 이런 태도가 평범한 일상 속에 숨겨져 있는 신비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Scene #3  ‘잃어버린 시간’의 의미

 

한편 프루스트의 소설은 이별과 재회 또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이중적 의미도 담고 있다. 1부 ‘스완네 집 쪽으로’가 그러한 모색의 실마리에 해당한다.

 

작품세계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것은, 우리가 부단히 죽어 가고 있다는 세네카 식의 인식이다. 특히 망각현상이 그 극명한 예이다. 까마득히 먼 유년시절에 겪었던 일들은 물론, 불과 며칠 전의 일들도 쉽게 잊거나 잊혀진다. 그것이 프루스트가 인식한 우리의 정서적 모습이다. 다시 말해 살아 있음의 뚜렷한 징표인 우리의 정서적 퇴적물은 그렇게 덧없이 지워진다. 그러나 영영 지워지는 것일까? 그렇게 죽어 소멸되는 것일까? 그것이 ‘잃어버린 시간’의 중심적인 의문이다.

 

물론 지난 세월의 일들을 기록에 의지하여, 또는 다른 수단의 도움을 얻어 인위적으로 기억해 낼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일들은 우리 개체 고유의 실존적 체험과는 무관한 사건들이다. 그러한 사건들의 특징은 온갖 유행이념이나 잡다한 교조(敎條), 주입되거나 들쑤셔진 억지감정 등에 의해 빚어진 그 무엇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속성상 다소간의 거짓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과거의 부활도 있다. 또한 어떤 때는 어느 대상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설레지만, 아무 추억도 되살아나지 않는다. 부활된 것의 정체가 영영 밝혀지지 않는 경우이다.

 

‘잃어버린 시간’은 그토록 하찮은 사물에 의해 촉발된 황홀감이나 격정의 비밀을 깨달아 가는 역정을 그리고 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터득한 ‘진정한 예술’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잃어버린 시간’은 ‘잃어버린 줄로 믿었던 시간’을 가리키는 반어법일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존재적 체험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프루스트가 ‘되찾은 시간’이라고 명명한 그 시절 또한 단순한 과거의 어느 순간만이 아니다. 지극히 하찮은 사물과의 우연한 접촉에 의해 부활된 그 상태, 황홀감을 수반하는 그 찰나적 상태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실을 깨닫는 순간, 소설의 주인공은 일체의 현상세계로부터 이탈한 자신의 초월적 본질을, 다시 말해 불멸의 가능성을 감지하기도 한다.

 

 

 

 Scene #4  잃어버린 시간 찾기의 어려움

 

끝없이 붙잡고 미끄러지는 과거를 쫓는 욕망, 지금의 현재 더 나아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성취를 위한 달음박질. 이 두 가지 삶의 반응은 주체와 대상이 달라진 줄도 모른 채 환상 같은 맹목의 힘으로 이어지곤 한다. 그러다 한 순간 어떤 계기에 멈춰 서서 돌이켜본 뒤 그 잃어버린 시간의 덧없음을 발견하게 된 자의 그리움이 밀려온다. 그리움의 대상은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장소만은 아니다. 사물도 사람도 책도, 한 순간의 기억도 될 수 있을 것이다.

 

1부부터 기억의 장황하고 중층적인 서사, 집요하고 밀도 높은 묘사와 사념의 문장들로 이어지는 소설은 질로나 양으로나 단숨에 읽기는 어렵다. 나는 두어 차례 이 책에게서 거절당하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지금까지만 해도 총 5번이나 거절당했다. 1부 1권에서 반 정도 화자의 기억을 따라가는데 간신히 성공했을 뿐이다. 얼른 1권 2부로 넘어가야하는데 이놈의 마음은 자꾸 딴 데만 보려고 하다니. 요즘처럼 삶의 여유가 없을 정도로 점점 빨라지는 속도의 세상 속에 의식하지도 못하고 지나가 버리는 수많은 순간이 얼마나 많았을까. 이러한 찰나의 순간들을 프루스트는 모두 잡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수많은 문자가 촘촘하게 구성된 문장의 그물망을 한 땀 한 땀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프루스트는 소설을 써내러 갔다.

 

눈앞의 시간을 잡는 것도 힘든 일인데, 잃어버린 시간을 회상하고 찾아내는 일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느껴본다. 더구나 그것이 자신의 일생이 아닌 자신을 둘러싼 모든 시간과 공간 거기에 그 속에 배치된 사소한 사물마저도 기억을 살려내는 것이라면, 얼마나 더 힘든 일일까.

 

그렇게 본다면 프루스트는 정말 겸손하다. 그는 과거를 복원하고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라고 말한다. 완벽한 과거를 복원하고 특별한 데자부를 경험하는 것은 우연히 맛본 마들렌 덕분이다. 마들렌의 신비스러운 경험을 다시 한 번 느끼기 위해서 화자는 다시 마들렌 조각을 맛보지만, 그 때 그 순수하고도 온 몸에 전율이 돋는 그 감동의 순간을 재현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화자는 잃어버린 시간 찾기의 어려움을 글 중간에 살짝 토로하기도 한다. 같은 장소를 다시 찾아왔지만, 같은 시간으로 다시 가는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우리 과거도 마찬가지다. 지나가 버린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은 헛된 일이며, 모든 지성의 노력도 불필요하다. 과거는 우리 지성의 영역 밖에, 그 힘이 미치지 않은 곳에, 우리가 전혀 생각도 해 보지 못한 어떤 물질적 대상 안에 (또는 그 대상이 우리에게 주는 감각 안에) 숨어 있다. 이러한 대상을 우리가 죽기 전에 만나거나 만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달렸다." (85쪽)

 

 

 

 Scene #5  황량한 삶 속에서의 경험한 축복의 시간 

 

철학자 베르그송은 순차적 시간이 아닌 주관적인 시간, 즉 의식의 흐름을 통해 잠재된 기억이 ‘비의도적’으로 마주친 과거와 현재가 동시성을 갖는다고 말했다. 이렇듯 프루스트는 시공간을 넘어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의식의 흐름’으로 전개했는데 여기서 ‘비의도적 기억’과 동시간성을 통한 의미가 중요한 소재가 된다.

 

인간은 잃어버린 시간, 즉 과거를 기억으로 이어가고 싶어 한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그 기억을 이을 사람 또는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어떤 매개체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프루스트의 소설은 비의도적 기억이 현재에 소환되어 현재와 동시성을 갖기 위한 치열한 노력의 산물이다.

 

물론 기억은 과거에만 있지 않다. 어쩌면 그것은 만들어가는 것이기도 한다. 사람 사는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 피어나고 있으니까요. 기억을 이어가는 것만큼이나, 나 자신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도 다른 시작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기억’을 소중히 한다는 것은, 한 번 가면 지나가버리고 마는 유한적인 삶을 소중히 한다는 뜻이다. 다양한 목소리와 이야기로 가득 찬 세상에서 프루스트는 자신의 인생을 매우 사랑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삶의 한 부분이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사라지기 쉬운 과거의 영상을 기억을 통해 떠올림으로써 불가시(不可視)의 실재(實在) 시간을 찾아낼 수 있는 삶의 가능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매우 의미 있거나 절실 한 것일 수도 있다. 현재는 과거의 지속이며 현재와 과거의 동시간성을 갖는다는 것. 이를 통해 프루스트는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잊고 있었던 자아의 본질을 발견하고자 했다. 잃어버린 시간이 가망 없고 부질없는 욕망일지라도 때때로 그런 우연의 회상이 그립기도 하다. 

 

이러한 절심함 때문에 프루스트는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창작생활을 했다. 14년 동안 코르크로 방음된 밀폐된 방에 갇혀 천식과 싸우면서 말이다. 세상의 모든 재미를 등지고 죽음에 쫓기며 문장을 다듬어가는 한 예술가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러나 누가 감히 그를 불행했다고만 할 것인가? 그는 코르크 밀실에서 서서히 기억 한가운데로 걸어갔을 뿐이다. 잠시 과거를 살았던 것이다. 과거에서 잃어버린 마르셀, 즉 ‘나’라는 존재를 찾기 위해서. 황량한 삶 가운데에서도 신생 같은 환희를 맛볼 수 있게 한 축복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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