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의 정의

 

 

 

 

 

 

 

 

 

 

 

 

 

 

 

 

 

국민 공통 기본 교육 과정으로서의 미술 교육은 다양한 미술 활동을 통하여 심미적 태도와 상상력, 창의력, 비판적 사고력을 길러 주고, 미술 문화를 이해하며 계승,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전인적 인간을 육성하는 데 목적이 있다.

 

대입 논술 시험에 종종 예술, 특히 미술과 관련된 문제들이 출제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예·체능 과목이 수능 필수 과목이 아니기 때문에, 실기평가나 수행평가 점수에만 신경 쓸 뿐, 미술 이론에 관심도 없고, 접할 기회도 거의 없다. 게다가 최근에는 미술, 음악, 체육 등의 과목을 내신 성적에서 제외하자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학생들의 부담을 줄이자는 취지라고 한다. 서열을 위한 점수 매기기가 아닌 서술형 평가를 도입하겠다는 시도는 일견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내신에서 제외되는 과목이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하다.

 

미술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당연히,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 ‘예술’이라는 포괄적인 개념을 간단히 정의해 둘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예술은 ‘심리적 변화를 일으키는 형식들을 창조하려는 모든 시도들’로 정의된다. 이는 허버트 리드의 예술에 관한 정의를 약간 변형시킨 것이다. 그는 예술을 ‘(마음을) 기쁘게 하는 형식을 창조하려는 어떤 시도’로 정의하였다.

 

그러나 그의 정의에서 ‘기쁘게’라는 부분이 영 탐탁지 않다. 모든 예술이 마음을 기쁘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은 우리를 슬프게도 하고, 흥분시키기도 하며,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짜증나게도 한다. 예술을 이처럼 포괄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예술을 예술가 집단이나 평론가 집단의 전유물로 바라보는 매우 잘못된 관점을 바로 잡기 위해서다. 우리의 정의에 따르면,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공책이나 책상 위에 그리는 낙서들도 모두 예술이 될 수 있다. 아니, 미술이다. 그리고 심지어는 일상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도 미술이 될 수 있다.

 

 

 

 ♣ 예술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예술이 창조적 활동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텅 비어 있는 하얀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창조는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사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일종의 창조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너무나 유명해진 마르셀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을 보라. 「샘」은 비평가들에게 지난 세기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그러나 샘은 일반인들에게는 매우 당혹스러운 작품이다. 남자 화장실의 소변기에 불과해 보이기 때문이다.

 

 

 

 

 

 

 

 

 

 

 

 

 

 

1917년 뒤샹은 평범한 가게에서 구입한 소변기에 ‘R. 머트(R. mutt)'라는 이름을 서명해 뉴욕 독립미술가협회 전시회에 출품했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기성품(레디메이드)을 예술작품이라며 전시회에 출품한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명화로 꼽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비교해보자. 「모나리자」는 작가의 창작물로서 유일하며 깊은 예술적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샘」의 원형인 변기는 유일하지도 않고 작가의 창작물도 아니며 예술적 감성을 발견하기란 더욱 어렵다. 기성품에 변기 제조회사 이름을 대신해 자신의 사인을 넣는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예술품이 될 수 있을까? 동시대 사람들은 비웃었다. 기존 미술의 개념을 완전히 뒤집는, 듣도 보도 못한 예술품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오늘날 비평가들에게 「샘」은 20세기 최고의 예술품이다.

 

이렇듯 예술가에게는 ‘역발상’과 ‘생각의 무한성’을 요구한다. 「샘」은 예술품의 의미를 재정의한 작품이다. 「샘」을 계기로 과거에는 예술품이라고 부르기 힘들었던 많은 작품이 예술품으로 불리게 됐다. 결국 뒤샹은 「샘」을 통해 예술의 범위를 광범위하게 확장한 셈이다. 미술사에 이만큼 강력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예술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예술'로 아는 경험의 범주는 매체나 생산수단이 아니라, 집단적 감각에 의해 정의된다.

 

 

 

그렇다면 뒤샹에게 예술품이란 무엇일까. 그는 예술품의 구성 요건을 예술품 밖에서 찾았으며 구체적으로 두 가지 요건을 제시했다. 첫째 작가가 예술품으로 선택ㆍ인정한 것으로, 둘째 올바른 장소와 맥락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샘」처럼 작가가 예술품으로 제시하고, 미술관 같은 전시 공간에 놓이면 예술품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뒤샹이 남성용 변기 같은 레디메이드를 통해서 진정 주장하려는 것은 사물의 성격과 내용이 가변적이며 환경과 맥락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보이며 아무렇게나 다루는 남성용 변기조차도 환경과 맥락에 따라 얼마든지 가치 있는 예술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뒤샹은 샘을 통해 예술품이든 작가든 모두 가변적이고 불완전한 존재임을 일깨운다. 이 같은 철학을 가진 뒤샹이 스스로 제시한 ‘예술품의 두 가지 요건’을 절대조건이라고 주장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뒤샹은 절대조건을 제시하고 싶은 게 아니라 예술품을 둘러싼 관념적인 여러 시각이 의심받지 않고 있는 당시 현실을 문제 삼은 것이다.

 

 

 

 ♣ 창조 그리고 예술에 대한 잘못된 편견

 

만약 우리가, 창조는 좁은 골방에 틀어박힌 초췌한 예술가들이 머리를 쥐어 뜯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위의 작품들은 작품이라고 불릴 수 없을 것이다. 저런 것쯤은 누구라도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당장 주변에 있는 아무 물건이나 두 가지를 결합하여, 그럴싸한 이름을 붙여보자. 그 과정에 예술에 대한 우리의 정의가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다. 그저 어떤 질료를 선택하여, 나름의 방식대로 배치하였다. 즉, 형식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여 예전에는 그저 '물건'에 불과했던 대상을 '작품'으로 창조해낸 것이다.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평범한 생활용품을 선택하여 전시함으로써 물건의 실용성은 사라지고 그저 ‘사물’로 돌아가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선택행위 즉, 아이디어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는 수공적 기술의 재현행위가 아닌 선택한다는 정신적 행위가 예술가의 본질이라는 그의 이론은 기존미술에 도전하는 개념미술의 기초를 이루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버려진 폐품, 기계로 대량생산된 물체들을 그대로 작품에 사용하는 현대 개념미술가는 작품을 창조하는 대신 선택하는 사람인 것이다.

 

사람들은 현대미술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전시장의 작품들을 보며 이것도 작품인가 의아해한다. 그러나 우리 주위의 일상용품을 상식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저 의자, 병, 바퀴 등등일 뿐이지만 소변기조차도 일상적 사물로서의 인식을 단절하고 순수한 형태적 의미만으로 바라본다면 대칭적이며, 부드러운 곡선을 가졌고, 우아한 기하학적 오브제로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되는 것. 이것이 뒤샹이 우리에게 보여준 역발상의 미학이다.

 

이렇게 보면, 예술이란 예술가라고 '규정된'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없을지는 몰라도,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예술이 뭔가 대단한 것이라는 믿음이나 예술가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재능을 타고 난 사람들일 것이라는 믿음은 예술에 대한 편견이 낳은 일종의 신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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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학 혁명의 구조』 토머스 S. 쿤 / 까치글방  

 

흔히 식자들은 '명저'에 대한 조건을 말할 때 "그 책이 세상에 나오기 이전과 이후를 뚜렷하게 이분해버린 책이 곧 명저"라고 정의한다. `과학혁명의 구조`는 이 조건에 딱 들어맞는 책이다. 1962년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를 출간하자 과학계는 최악의 서평을 선사한다. 과학사적 변화가 논리적인 논증이 아니라 개종(改宗)과 같은 혁명을 통해 가능하다고 했으니 합리주의로 무장한 과학자들이 기분이 좋았을 리 없다. 격렬한 찬사가 들려온 건 뜻밖에도 비과학 분야에서였다. 책 출간 이후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철학계를 비롯해 사회, 정치, 역사, 예술 분야에서 유행병처럼 퍼져나갔다. 내가 수학하고 있는 전공인 행정학과에서 '패러다임'이 많이 사용한다.

 

『과학혁명의 구조』출간 50주년을 맞아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이 쓴 서론이 추가되었고 서울대학교 홍성욱 교수가 공동 역자로 참여했다. 구판에는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이 번역했다. 그동안 이 책이 몇 차례 개정을 거듭해서 번역했는데 여전히 읽기가 무척 어렵다는 독자의 지적이 있었다. 나는 두 달 전에 알라딘 중고매장을 통해서 구판을 구입했는데 하필 50주년 기념으로 새롭게 번역한 개정판이 나오고 말았으니 만약 이 책이 선정된다면 비교하면서 독서해볼 수 있겠다.

 

 

 

 

 

 

 

 

 

 

 

 

 

 

 

 

 

 

 *『경제 이론으로 본 민주주의』 앤서니 다운스 / 후마니타스  

 

이 책은 브루킹스 연구소 선임연구원인 다운스가 50여 년 전인 20대 중반에 쓴 박사학위 논문이다. 저자 앤서니 다운스는 ‘합리적 행위자’라는 경제학의 가정을 정치학에 적용해 민주주의에서 정당정치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정당과 유권자의 행위와 그 결과는 무엇인지와 같은 복잡한 문제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예측한다. 비록 그의 이론은 오늘날에 보면 한계가 있지만 합리성을 전제로 경제학적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설명하려고 한 정치학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 『시적 정의』 마사 누스바움 / 궁리  

 

미국의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시카고대학 로스쿨의 방문교수로 지내면서 법학과 문학의 접목을 시도했다. 그녀의 수업방식은 독특하다. 학생들에게 전문적인 지식이나 합리적 추론의 방법론을 강의하는 대신 학생들과 함께 소포클레스, 플라톤, 세네카, 디킨스를 읽고 토론했다. 법학 강의 시간에 문학 읽기라, 생각만 해도 수강신청하고 싶은 수업이다. 문학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공감, 상상력, 연민의 감정이 합리적인 공적 판단을 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봤다. 궁극적으로는 문학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기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학 내 인문학의 입지가 줄어들고 있는 요즘, 누스바움의 책이 그 해결책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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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를 쓰고 싶은 그리운 이름 하나 없을까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바람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동안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즐거운 편지')

 

 

 

가을이 오면 ‘편지를 쓰고 싶은 그리운 이름 하나 없을까’하고 감상적인 행동을 해보고 싶은데 시간을 먹어 갈수록 편지를 쓰고 싶은 간절한 이름 하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때가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지인이 몇 명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수 쓰지도 않겠지만. 요즘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저 멀리 있는 지인에게 간단한 인사나 안부 정도 할 수 있다. 오히려 손글씨로 정성스럽게 편지를 보낸다면 받는 사람은 어안이 벙벙할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낸 것처럼 옛날에는 편지를 주고 받는 것 또한 당연한 건데 말이다. 그만큼 삭막해지고 마음의 물기가 말라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편지는 또한 공감 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 누군가에는 정말 간절한 편지

 

 

 

 

 

 

마음과 마음의 소통이 있고 무엇인가 서로가 나눌 수 있는 공통점이나 발전이 있을 때 지속되게 만들 수 있다. 소통할 수 없는 편지는 독백이며 메아리와 같다. 각자 수녀원과 수도원에 들어가 살았던 중세의 연인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는 편지를 주고받는 것으로써 그리움을 달래며 신앙에 정진했다고 전해진다. 엘로이즈가 처음 아벨라르에게 보낸 편지는 ‘무엇이든 나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편지를 써 보내 주세요’라고 보낸 편지였다.

 

 

 

 

 

 

 

 

 

 

 

 

 

 

 

 

 

 

 

 

 

 

 

 

 

 

 

시인 김남조는 '편지'라는 시에서 '한 구절을 다시 쓰면, 한 구절을 읽는 당신,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라고 쓰고 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게 된 계기는 괴테가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를 사랑하게 되어 고민 하다가 우연히 끔찍한 사건(유부녀를 사랑한 남자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권총 자살)의 소식을 들었던 것에서 시작된다.

 

그는 거기서 소설의 실마리를 찾고 영감을 얻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3개월 만에 썼다. 그 소설을 샤를로테한테 편지와 함께 보낸다. 하지만, 그들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그토록 많은 독자들이 볼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권총 자살 유행까지 만들어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서간체 소설이다. 처음, 괴테가 자기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함께 띄운 편지는 '잘 있어요. 사랑하는 로테, 당신에게 나와 많은 점에서 비슷한 친구 한 사람을 보내 드립니다. 당신이 그를 잘 받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이름은 베르테르라고 합니다'였다.

 

1774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출간 되자 유럽은 물론 온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며 달려들었다. 어쩌면, 모든 문학 즉, 시, 소설 등은 누군가에게 띄우는 공개된 편지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간절한 이름 하나에게 닿기를 바라는 연서(戀書)이다.

 

 

 

 ♣ 가을에 도스또예프스끼를 읽어보자

 

소통 부재의 시대를 사는 이들이 그 누군가를 만나 마음과 영혼의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는 공개된 연서인 것이다. 끊임없이 그 마음의 문을 노크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한 공감, 완전한 소통, 완전한 사랑을 위해 끊임없이 시와 소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도서관의 장서에 들어있는 책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편지이다. 흐르는 시간 속에 먼지 쌓여 가면서 소통 할 수 있는 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바야흐로 가을이다. 진정한 소통 부재의 현실 속에서 이 가을에 마음의 문을 조심스레 열며 소통의 통로를 마련해 주는 이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연서를 띄우고 싶다. 열린 문과 닫힌 문 사이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이 가을에 누군가에게 보낸 연서(책)를 발견하고 가슴 떨리는 감동을 가지고 읽으며, 또 누군가에게 닿을 연서를 띄운다. 글을 쓴다. 책 즉, 연서는 고독한 영혼이 고독한 영혼을 향한 선물이며, 문을 두드림이며 진정한 소통에의 갈망이다.

 

이 가을에 기억의 창고에 아직도 남아 있는 그리운 이름 하나에게 편지를 띄워보자. 오래된 수첩 속에 빼곡하게 적힌 이름들 중에 소통의 이름 하나 찾아보자. 그리고 누군가에게 띄웠을, 혹시 당신에게 띄웠을지도 모르는 책 한권을 읽어보자.

 

혹시 나처럼 ‘편지를 쓰고 싶은 그리운 사람’ 하나 없다면 책을 읽음으로써 감성으로 마음을 살찌워보는 것도 좋다. 과학저널 ‘사이언스’ 최신호에는 ‘어떤 글’을 읽는 것이 지적 능력과 감성 능력, 주변 사람들과의 사회적 관계 등을 발달시키는데 좋은지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실렸다. 여기서 말하는 ‘그 어떤 글’이 뭔지 아시는가. 그것은 바로 러시아 출신 소설가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와 극작가 안톤 체호프다.

 

 

 

 

 

 

 

 

 

 

 

 

 

 

 

 

심리학자들은 이번 연구를 위해 독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다른 글을 읽게 했다. 한쪽에는 체호프, 도스또예프스끼 등 유명작가의 작품을 읽게 했고, 다른 쪽은 최신 베스트셀러 등을 읽도록 했다. 이후 두 그룹은 얼굴 표정 사진을 보고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행동을 할지를 예측하는 등의 테스트를 거쳤다. 지능·감성·사회관계 정도를 측정하기 위해서다. 그랬더니 유명 문학작품을 읽은 그룹의 점수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서로 읽은 작품의 특성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신작 베스트셀러는 대부분 작가가 흥미를 더하기 위해 작품 내용을 특정방향으로 통제해 독자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적다는 특성이 있다. 반면에 유명 문학작품은 등장인물 고유의 특성에 따라 작품이 전개되는 다양성을 띠고 있어 실생활과 유사하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유명 문학작품을 읽은 독자는 자신의 상상력을 통해 작품에 몰입하게 돼 감성, 지성, 사회관계의 정도가 발달된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만 따져놓고 본다면 모든 ‘신작 베스트셀러’가 우리의 감성 범위를 제한시키는 건 아니다. 어차피 ‘베스트셀러’에도 도스또예프스끼에 꿀리지 않은 좋은 작품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먼지 앉은 채 당신의 손길이 닿기를 기다릴 지도 모르는 책을 찾아보자. 이 가을날에. 잠시 잊고 있었던 도스또예프스끼 전작 독서를 시작해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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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커뮤니케이션은 선전에 조종된다

 

노엄 촘스키는 “영상을 통한 미국화는 소리 없는 프로파간다(Propaganda)의 무서운 효율성으로 무장한 채 우리 안으로 침투한다. 따라서 영화, TV 등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영상들에 대해 경계하는 법을 시급히 배워야 한다”고 경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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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파간다', 즉 선전이라는 말은 요즘처럼 사람들의 생각을 인위적으로 조작한다는 부정적인 혐의를 받지 않았다. 1차 대전에서 일상적인 용어로 남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PR(Public Relations)의 아버지'로 알려진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선전이라는 용어에서 부정적 이미지를 씻어버리는 동시에 선전 전략과 활동을 긍정적으로 소개했다.

 

 

"영어에 '선전'만큼 그 의미가 심하게 왜곡된 단어는 없다. 이러한 변화는 지난 전쟁 때 일어났다. 그 결과 이 단어는 음흉한 성격을 띠게 됐다. (중략) 본연의 의미에서 '선전'은 정직한 가문에서 태어나 명예로운 역사를 지닌, 그야말로 건전한 단어다." (에드워드 버네이스 『프로파간다』중에서)

 

 

선전이란 사람의 생각을 휘두르는 조작 방식이라는 의심을 많이 받지만, 버네이스는 "대중은 마음대로 주무르는 무정형의 덩어리가 아니다"며, 기업과 정부는 대중이 기꺼이 수용할 만한 방법을 통해 존재와 목적을 이해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버네이스의 주장은 어떤 용어나 행위가 아무리 가치중립적이더라도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에 의해 손쉽게 악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한계가 있다. 또한,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의 복잡한 사회ㆍ경제구조에는 버네이스가 제시한 비교적 단순하고 '소박한' 선전 전략이 통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

 

 

 

 

 ♣ 우리가 의사소통을 힘들어하는 이유

 

 

 

 

 

 

 

 

 

 

 

 

 

 

 

대한민국 직장인들이 직장생활에서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일’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실제로 10명 중 3명이 가족 간에 대화를 하지 않고, 10명 중 8명이 직장에서 동료와 불화를 겪는 그야말로 각박하고 외로운 시대다. 상대방과 진심어린 마음을 주고받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인맥 쌓기에 열중한다. 관리가 아닌 관계 맺기에 있어서는 서툴기만 하다.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저마다의 다른 개성과 색조를 가지고 태어난다. 그래서 각자의 처한 상황과 고통에 대한 내성 그리고 타고난 천성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요즘처럼 물질적 풍요로움에만 의존하고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하려는 이기주의적인 사회에서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의 상처와 고통을 생각 없이 무시하고 오히려 그것을 발판삼아 올라서기 위해서 애쓰는 인간들이 수 없이 많이 있다는 사실과, 또한 상처받은 사람들의 아픔을 외면한 채 그저 그렇게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많이 일어남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일들을 저지른 사람들이 마지막 의지로 실행한 선택은 희망적이기 보다는 절망적인 쪽으로 기울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에 있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상처’다. 과연 상대방이 내 진심을 알아줄까, 나를 오해하거나 미워하지는 않을까, 혹시 배신을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과의 소통 부재와 스스로의 고립을 유발한다.

 

 

 

 

 ♣ 진정한 소통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결국,우리 사회가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을 가로막는 현상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국민통합도, 조직과 사회의 건강성도 회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랫동안 잘못된 의사소통의 폐해에 시달린 우리 사회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나는 있다고 본다. 비록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드라마 <굿 닥터>에 ‘늑대소녀 은옥이’가 나오는 에피소드를 보면 박시온(주원 분)은 ‘진정한 소통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개들과 함께 자랐던 은옥이. 이 아이는 어른들의 잔인한 아동학대에 희생당한 친구다. 인간사회를 학습 받지 못하고 개들이 사는 세상에서 길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의 말로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모든 행동은 개와 다름이 없다. 화가 나거나 경계를 하면 무조건 물어뜯고, 사람의 접근을 두려워하며, 인간의 소통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병실에서 길길이 날뛰는 은옥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일단 아이를 진정시켜야 한다. 온몸이 피투성이, 상처투성이인 채로 가만히 내버려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김도한(주상욱 분)은 강도 높은 진정제를 주사하라고 오더를 내린다. 조금은 잔인해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며, 또한 치료 시간을 획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김도한처럼 직업의식과 의사로서의 소명의식이 투철한 이가 있을까. 그는 의사가 가져야 할 완벽한 이성과 냉철함을 지니고 있다. 은옥이에게 그 어떤 해를 입혀서도 안 되며, 반드시 치료를 해서 낫게 해야 한다는 생각 또한 그 누구 못지않다. 하지만 그에게는 없고 박시온에게만 있는 한 가지가 있었다. 아니 어쩌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김도한은 모르고 박시온은 알고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박시온은 모든 이를 경계하며 으르렁거리기만 하는 은옥에게 사람이 아닌 개로 다가간다. 마치 엄마개가 새끼개를 찾아가듯, 무릎을 꿇고 두 손, 두 발로 어슬렁어슬렁, 그리고 조심스럽게 은옥에게로 기어간다. 조금씩 은옥의 경계가 풀어지려 한다. 박시온이 내미는 손에 자신의 손을 얹으려 할 뻔도 했었다. 다른 레지던트들이 은옥의 사지를 잡아 진정제를 투여하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이 짧으면서도 강렬했던 장면은 꽤 커다란 메시지를 던진다. ‘소통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소통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었다. 진정제 투여로 치료를 할 수 있었으니, 결론적으로 보면 김도한도 은옥과의 소통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박시온은 소통의 결과가 아닌, 소통의 방법을 건드렸다. 상대방의 처지가 되는 것, 그 처지가 설사 낮고 추하며 형편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밑으로까지 내려가 보는 것, 그렇게 된 후에야 상대방과 진정한 소통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박시온은 보여줬다.

 

‘커뮤니케이션’, 우리는 이 단어를 하루에도 수십 번 듣는다. TV 광고에서, 직장에서, 교육을 통해서,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심지어 우스개 농담 속에서도 듣게 되는 말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소통을 하는 자세는 어떠한가. 이미 고착화된 생각을 쥔 채 상대방을 맞이하고 있지는 않은가. ‘절대’, ‘반드시’라는 말로 나의 생각을 견고히 하는 데 몰두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러한 자세는 이기적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오고 감이 불가한 이기적인 소통만 낳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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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구석본 

 

 

그가 거울을 본다

거울 속에 한 남자가 죽어 있다

죽은 남자가 웃는다 ‘웃음’이 죽었다

‘좋은 아침’이라고 죽는 남자가 말하자

‘좋은 아침’이 죽었다

남자는 ‘웃음’과 ‘좋은 아침’의 죽음을 보지 못한 채

붉은색 넥타이를 매고 향수를 뿌리고

로션을 가볍게 바르고는 다시 웃는다

웃음이 두 번 죽지만 남자는 여전히 보지 못한다

이번에는 휘파람을 분다

휘파람이 핑그르 돌다가 죽어버린다

남자는 쌓이고 쌓인

그들의 죽음을, 남자의 죽음을, 오늘의 죽음을,

끝내 보지 못한 채 떠난다

남자가 떠난 후,

시취(尸臭)가 향수처럼 한동안 맴돌다가 사라지자

비로소 거울 속에는 복제된 어제의 풍경들이

속속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제 죽음은 일상에 미만해 있다. 일상의 죽음은 그렇게 거울 속 허상에게도 검은 손아귀를 내민 셈이다. 가히 ‘죽음의 죽음’이라 할 사건이 우리가 아침마다 마주하는 거울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웃음’이 죽고, ‘좋은 아침’도 죽었다. 그가 부는 휘파람마저 “핑그르 돌다가 죽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끝내 이 모든 죽음을 끝내 보지 못하고 떠난다. 그는 이 모든 죽음의 근원이자 이유를 알지 못하고 떠나지만, 우리는 그 답을 시의 결미에서 보게 된다. 이 모든 죽음은, 그러니까 모든 것이 “복제된 어제의 풍경들”이라는 점이 근본 이유이다. 즉, 실체는 이미 죽어 부재하며, 거울 속 같은 허상들만 속속 살아나고 있는 것이 우리가 매일 죽음처럼 반복하는 일상이라는 전언이다.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이 연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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