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마음의 창으로 세상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달라진다. 삶에 안주하는 사람과 성취하는 사람의 차이는 세상을 보는 마음의 창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안주하는 사람은 설령 성공 가능성이 99%라고 하더라도 1%의 실패 가능성에 연연한다.

 

그래서 실패를 두려워하는 자기 방어적인 시나리오로 최악의 결과를 그려보고는 모험 자체를 시도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일로 성공을 거두더라도 감격보다는 안도감만 느낀다. 성취하려는 사람은 용기가 있고 자신이 직면한 문제에 도전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로 인해 비행기가 발명되고 우주선도 탄생할 수 있었다. 성취하려는 사람은 안주하는 사람과 달리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이다.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실수한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새로운 일을 시도해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을 했다.

 

 

 

 

 

 

 

 

 

 

 

 

 

 

 

 

『노자』 52장에 보면 ‘견소왈명(見小曰明) 수유왈강(守有曰强)’으로 ‘작은 것을 보는 것을 밝음(明)이라 하고,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을 강함(强)이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사소한 변화를 감지하는 명철한 지혜와 날카로운 통찰력을 의미한다. 작은 것을 본다는 것은 자신의 시야에 갇혀 좁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세심하게 감지함으로써 크게 보는 통찰력이다.

 

우리 앞에 닥쳐온 고난 극복에 실로 큰 힘이 되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지혜다. 지혜가 기다림의 대상이 아닌 적극적인 훈련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지혜의 본질이 우리 마음의 한계를 지각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지혜는 우리가 추구하는 대상인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지혜는 끊임없는 훈련의 대상이기도 하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어떤 일에 깊이 몰입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이 없어지는 상태를 'Flow'라 부르고, 플로 상태가 행복과 성취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소통의 창구가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만, 지혜는 우리에게 이런 자기중심성이 만들어내는 환상 앞에서 철저하게 겸손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현대사회는 단순한 똑똑함보다는 지혜로움이 더 중요하고, 삶은 단 하나의 정답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나'의 존재와 '우리'라는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항상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처럼 진정한 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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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 원형 심리학으로 분석하고 이야기로 치유하는 여성의 심리
클라리사 에스테스 지음, 손영미 옮김 / 이루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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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내면이 무엇을 원하고 말하는지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마음의 고통은 사라진다.

 

 

- 칼 구스타프 융 -

 

 

 

 

 

 

 ♣ "당신 때문에 실망했어요!"

 

 

 

 

 

프랑수아 제라르  「프시케와 에로스」  1797년

 

 

영어로 사랑한다는 표현은 'Make love'와 'Fall in love'라고 하는데 '사랑'이라는 뜻을 깊이 표현한 것은 전자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사랑을 ‘Amour'(아모르)라고 부르는 유래를 신화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모르는 이성간의 사랑을 뜻하며 로마 신화에서는 큐피드, 그리스에서는 에로스라고 불리는 연애의 신이다. 그는 아프로디테의 아들로 늘 황금 화살을 갖고 다녔는데 그 화살에 찔리면 사랑에 빠진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뛰어난 미모로 아프로디테의 노여움을 산 프시케를 혼내주러 갔다가 실수로 자신의 화살에 찔려 사랑에 빠지고 둘은 부부가 된다. 큐피드는 자신의 모습을 보려고 하면 영원히 헤어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를 하고 동생의 행복을 시기한 언니들의 부추김으로 프시케는 약속을 어긴다. 그녀의 행동에 크게 실망한 큐피드는 떠나게 되고, 프시케는 남편을 찾아 온갖 시련 속에서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된다. 큐피드는 프시케를 구하고 아프로디테에게 간청하여 결혼을 허락 받는다. 비로소 프시케는 불로불사의 생명을 얻는다.

 

이 큐피드와 프시케의 신화는 우리에게 사랑에 대한 여러 가지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프시케가 약속을 어긴 것은 사랑의 미성숙과 도전을 의미하고 둘째, 남편의 사랑을 되찾고자 시련을 겪는 동안 프시케의 영혼은 성숙하고 셋째, 그 고통의 시간을 통과한 후에야 진정한 사랑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와 사랑의 느낌으로 빠져들 때 그의 어떤 부분이 나를 매혹시키는 걸 느낀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진부한 관계’ 혹은 ‘권태로운 관계’로 사랑의 화면이 변경되면 나를 ‘뻥’ 가게 만든 그 부분 때문에 속이 뒤집히는 걸 경험하게 된다. ‘당신이 있어 행복해요!’가 ‘당신 때문에 실망했어요!’로 바뀌는 것이다.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아마도 쌍방과실이라 봐야 할 것이다.

 

매일 아무 불만, 걱정 없이 마냥 행복한 사랑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사랑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먼지처럼 쌓였다가 털려나간다. 그리고 먼지가 다시 내려앉는 것처럼 믿음은 헛되이 되풀이된다. 서로의 인생에 그늘을 드리우지 않고 저마다의 완벽한 나날을 향유하는 사랑. 하지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이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행복과 또 꼭 그 만큼의 고통을 가지고 태어나니까. 물론 실연이 주는 고통의 크기에는 한계가 없고 인간의 마음은 부서지기 쉽다. 이별은 어느 한 순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갈등이 쌓이면서 끝내 폭발하는 결과물이다. 그런 힘든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별 전후의 얼마간은 상대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다. 다 그 사람 잘못 같고, 함께 했던 지난 시간이 무의미해지면서 허무감이 든다.

 

 

 

 ♣ 진실을 찾으려는 야성적 본능의 호기심

 

만약에 실연당한 여성이 내면의 ‘야성’을 유지하는 여걸이었다면 고통의 시간을 의연하게 대처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심리분석학자이자 심리 상담 전문의인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여성 본연의 야성을 되찾자고 주장한다. ‘야성’, ‘늑대’라는 단어는 남성에게 어울리는 고유 명사다. 반대로 여성은 ‘여우’라고 말한다.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융의 분석 심리학을 사용하는 ‘아니무스’(Animus, 여성의 무의식 속에 들어 있는 남성적 요소)를 근거로 멸종 위기나 다름없는 늑대를 부른다. 본래 여성(woman)의 어원은 늑대(wolf)에서 유래했으며, 여성과 늑대는 선천적으로 사랑이 넘치고 적응력과 직관력이 뛰어나며 씩씩하고 용감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 늑대'의 원형을 세계 민담이나 설화, 동화에서 찾고 있는데 프시케의 모습에서도 ‘어머니 늑대’의 원형을 볼 수 있다. 자신의 모습을 프시케에게 절대로 보이지 않으려는 에로스는 ‘어머니 늑대’ 특유의 호기심을 억누르는 존재다. 프시케 입장에서는 남편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에로스는 자신의 정체를 알려는 프시케의 호기심을 잊기 위해서 그녀를 왕비 못지않은 편안하고 화려한 생활을 누리게 해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프시케의 언니들은 자신들보다 잘 살고 있는 프시케가 부럽고, 질투한다. 그녀들은 에로스가 프시케에게 한 약속을 어기도록 부추기는데 프시케의 마음에 숨어있던 야성적 호기심의 본능을 깨우게 만든 셈이다. 프시케는 경고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프시케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동화 <푸른 수염> 삽화, 귀스타브 도레 그림

 

 

푸른 수염은 아내에게 진실을 깨닫는 데 필요한 열쇠만 못 쓰게 막는다. 이는 그녀의 여걸, 즉 일의 진상을 알고자 하는 여성의 본능을 없애는 행위다. 야성적 직관을 잃은 여성은 심각한 위험에 빠진다. 푸른 수염의 이 말에 복종하는 것은 정신적인 자살 행위와 같다. 그 무서운 비밀의 문을 열어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73쪽)

 

 

야성적 호기심을 발현하는 프시케의 행동은 클라리사 에스테스가 ‘어머니 늑대’의 원형을 찾아 낸 이야기, <푸른 수염>의 아내와 비슷하다. 푸른 수염은 새 신부인 아내에게 자신에게는 정말 중요한 열쇠 하나를 맡긴다. 그 열쇠는 그동안 자신의 전 아내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살해한 ‘죽음의 방’이었다. 푸른 수염은 외출하면서 아내에게 자신의 성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하는 조건을 달면서, 절대로 ‘죽음의 방’ 열쇠만큼은 열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그러나 푸른 수염의 아내 역시 남편의 약속을 어기게 된다. 아내는 언니들과 함께 수수께끼의 열쇠에 맞는 방을 찾아보는 게임을 같이 하는데 진실을 찾으려는 야성적 본능이 드러난다.  

 

 

 

 ♣ ‘삶/죽음/삶’의 여신을 받아들인 프시케

 

다시 프시케와 ‘여걸’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 결국 프시케는 그동안 궁금했던 에로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야성적 본능의 대가는 에로스가 그녀를 떠나버림으로써 이들의 사랑은 파멸에 이르고 만다. 산산이 깨어진 사랑, 즉 이별과 실연을 겪게 되면 고통스러운 감정의 사이클을 겪는다. 처음에는 분노였지만, 그 다음은 ‘차였다’는 모멸감, 그리고는 ‘또 누군가를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 문득 옆에 아무도 없다는 허전한 생각도 들고, 초라한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에드바르트 뭉크  「여자의 세 시기 (스핑크스)」 1894년

 

 

여성은 육체를 통해 삶/죽음/삶의 주기와 아주 가까이 살고 있다. 특히 사랑하고 창조하고 믿는 천부적인 본능을제대로 보전한 이들의 경우 모든 생각과 충동이 자연스러운 리듬에 따라 생겼다가 사라진다. (180쪽)

 

 

 

불처럼 뜨겁게 활활 타오르는 사랑이 이별 후에 식어가고, 먼지가 된 사랑의 재를 털어내지 못하는 감정의 사이클은 우리 삶의 주기와 비슷하다.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다시 한 번 새로운 삶이 탄생한다.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이런 삶의 주기를 ‘삶/죽음/삶’의 여신이라고 부른다. 여걸은 ‘삶/죽음/삶’의 여신을 받아들일 줄 알고, 그걸 볼 줄 안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삶의 주기를 의연하게 받아들인다.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늑대처럼 말이다.

 

‘사랑’(Amour) 없는 ‘영혼’(Psyche)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에로스를 떠나보낸 프시케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녀 곁에는 '삶/죽음/삶'의 여신이 있었다. 에로스는 다시 만나기 위해 자신을 싫어하는 아프로디테의 과제를 마다하지 않는다. 여러 차례 위기를 맞게 되지만 프시케는 신의 계락을 두려워하지 않고, 강인한 인내력으로 고난을 극복한다. 에로스와의 재회는 진정한 사랑의 부활이다. 즉 영혼이 다시 살아남은 것이다. 완전한 사랑을 누리기 위해서는 언젠가 마주하게 될 이기적인 욕심과 망상을 포용하고 견뎌낼 줄 알아야 한다.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현대사회에서 ‘여걸’이 사라지면서, ‘삶/죽음/삶’의 원형 또한 그 의미가 왜곡되고 퇴색되었다고 말한다.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삶/죽음/삶’의 주기를 이해하고 유지해야 된다.

 

 

 

 ♣ 잃어버린 야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여걸을 되찾고 싶거든 덫을 피하라. 균형 잡힌 삶을 살 수 있도록 본능을 단련하고, 마음껏 뛰고, 소리치고, 원하는 것을 차지하라. 또 그것에 대해 모든 걸 알아내고, 눈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모든 걸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빨간 신을 신고 춤을 추라. 단, 그 빨간 신은 반드시 직접 만든 신발이어야 한다. (250쪽)

 

 

여걸은 훌륭한 여성의 지지자다. 마음보다는 머리로 움직이고, 충동적이기보다는 이성적일 것이며, 상처받지 않으며 그 자체로 완전함을 추구할 것이다. 결국 잃어버린 야성을 되찾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건 나 자신의 문제가 되는 거다. 야성을 억눌리는 덫이 외부에 있는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될 수도 있다.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자신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의 문제이다. 세상에 바라보는 가치관을 바꾸고 자신의 내면을 바꾼다면 삶을 바꾸는 데 일조할 수 있다. 그것이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다.

 

내 안의 호기심을 발현하여 다양한 체험을 마다하지 않고, 외로움과 고독, 실연에 의한 상처도 모두 원초적 에너지로 승화킬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홀로 밤을 지새우는 여성들이여!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여걸, 즉 원초적 야성과 본능을 살살 꾀어내시라! 그러면 내 안의 무기력한 자아는 오늘로 죽을 것이다. 이제 늑대와 함께 춤을 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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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20 17: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국의 학벌은 카스트 체계와 유사한 위계 서열 구조다. 인도의 카스트는 겉으로 보기에는 대충 4개의 시스템으로 돼 있다. 소위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나뉜다. 하지만 4개의 카스트는 그 안에 무수한 하위 카스트를 내장해 다시 아주 세분된 신분적 위계 서열을 이룬다. 우리 사회의 학벌도 그렇다. 입시 때만 되면 수능 성적과 내신 등에 따라 정교하고도 치밀한 대학의 순위가 드러난다. 이는 막강한 사회적 규정력을 지닌 잣대다.

 

한국 사회 교육열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은 바로 사회적 희소가치인 상위 학벌의 획득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토록 학벌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것이 모든 한국인이 갈망하는 사회적 희소가치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학벌은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모든 영역에서 최고로 상승할 수 있는 수직적 통로인 동시에 그 자체가 각 영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권력이다. 이 같은 학벌의 권력화는 국민 스스로 학벌 경쟁에 투쟁적으로 참여하게 만든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교육현실에서 ‘꿈과 끼를 살리는 행복교육’을 강조한다는 게 너무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접근이 아닐까? 분명히 그런 측면이 있다. 지금 한국 교육은 ‘학력 경쟁’이 아니라 ‘성적과 학벌 경쟁’에 매몰되어 있다. 마치 교육의 본래 목적이 상급학교 진학에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철옹성같이 강건한 ‘입시교육의 우상’을 그대로 두고 ‘창의 인성교육’을 강조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학벌을 둘러싼 싸움은 세계화의 추세와 맥을 같이한다. 국내 대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외국 유학으로 팽창한 지 오래다. 고전적 의미의 유학은 감소하고 고교 졸업 후 외국 대학으로 진학하거나 조기유학 역시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 과정으로 우월한 지위에 서게 된 사람은 과시를 통해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기 일쑤다. 이런 점에서 한국 사회의 과시는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와 다르다. 헤겔의 ‘위신 투쟁’이나 호네트의 ‘인정 투쟁’과도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

 

좋은 학력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증명서로 통하는 세상이다. 그들은 많이 가져도 되고 목소리가 커도 된다. 사람대접 받으려면 특정 학벌 집단에 들어가야 한다. 희소가치를 지닌 자가 과시를 하는 게 당연한 사회가 돼 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학벌을 사랑한다. 너무나도 맹신적으로.

 

수능시험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지금 강남 고3 교실은 명문대라는 승리의 월계관을 놓고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방불케 한다. 학벌은 하루빨리 물리쳐야 할 ‘공공의 적’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쟁취하도록 권할 수밖에 없는 게 부모의 심정이다. 가수 강진은 자신을 울리는 '땡벌'을 사랑한다지만 지금 '강남'은 학벌 때문에 힘들어 지쳐도 어쩔 수 없이 사랑하고 있다. 서울 최고의 엘리트 가수 '강남'이 부른다. 학벌!

 

난 이제 지쳤어요 학벌 / 기다리다 지쳤어요 학벌 /

혼자서 공부하는 시간이 너무 너무 힘들어요 /

당신은 못 말리는 학벌 / 당신은 날 울리는 학벌 /

밉지만 당신을 너무 너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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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3-10-25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묘하네요, 강남이 부르는 학벌!
난 이제 지쳤어요 학벌/
기다리다 지쳤어요 학벌/
당신은 날 울리는 학벌/
밉지만 당신을 너무 너무 사랑해~~~~
음.. 아무리 봐도 절묘해요. ㅎㅎㅎ

cyrus 2013-10-25 23:46   좋아요 0 | URL
학벌에 대한 글을 쓰다가 문득 강진의 노랫말이 생각났어요 ㅋㅋㅋㅋ
 

 

 

 

 

 

 

 

 

 

 

 

 

 

 

 

 

 

 

인간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다. 열 달 넘게 엄마 뱃속에서 준비를 하지만 막상 세상에 나오면 1년이 넘도록 혼자서는 일어나지도 못한다. 그뿐이랴. ‘아기’라고 불리는 동안은 스스로 살아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런데 아기들이 사랑을 받으며 ‘생존’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무기는 우는 것이다. 배가 고플 때, 어디가 아플 때,'응가'를 해서 뒤가 축축할 때, 심지어는 익숙지 않은 환경에 처하면 어김없이 운다. 사실 이것 하나로도 아기가 원하는 ‘응급한’ 것들은 거의 대부분 해결할 수 있다. 또 하나의 비장의 무기는 웃음이다.  필요한 게 없어 울지 않는데도 식구들이 시간 나는 대로 들여다보고 시간이 나면 ‘까꿍’하면서 놀아주는 것은 아기가 방긋거리는 것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꾸뻬 씨의 행복여행』을 읽다가 재미있는 장면을 보았다. 정신과 의사인 꾸뻬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찾은 환자들에게 늘 ‘왜 아기들은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을까요?’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침묵이 흐른다. 그것은 아기들은 잘 알지만 어른들은 잊어버리고 사는 그 무엇이었다. 잠시 후 꾸뻬가 일러주는 답은 너무나 평범했다.  

 

‘사람들이 웃은 아이에게 더 다정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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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이터널 선샤인
미셸 공드리 감독, 짐 캐리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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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시는 공기 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이물질이 들어있다. 병을 일으키는 세균도 있다. 깨끗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이물질들을 모두 뺀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에게 병이 없어질까? 아니다. 오히려 면역력이 사라져 인간의 몸은 더 큰 질병에 노출된다. 이 무결점 공기 이론을 사랑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고통과 상처없이 순전 무결한 사랑. 세상의 모든 연인이 바라는 것일 테지만, 그 완벽한 커플에 우린 사랑이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을까?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이런 질문에 상상력을 더하여 만든 이야기다.

 

밸런타인데이. 남자는 평소와 다름없이 눈을 떴다. 그러나 알 수 없는 무력감이 찾아온다. 출근길을 서둘던 사내. 자신의 차에는 흠집이 나있다. 기차역에 도착한 그는 ‘밸런타인데이’라는 사실이 우울하다. 그는 사랑을 고백할 여인이 없었다. 건너편 모타우크로 가는 기차. 출발 전이다. 남자는 무작정 건너가 기차에 오른다. 출근길과 정반대 방향이었다. 왜 충동적으로 그랬는지 스스로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어느덧 그는 모타우크의 바닷가에서 차가운 바람과 파도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 바닷가의 한 편에 주홍색 머리를 한 여자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느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바닷가에서 마주쳤던 주홍색 머리를 한 여자와 같은 칸에 탔다. 소심한 남자와 달리 여자는 쾌활하고 적극적이다. 여자는 남자 옆에 가 앉는다. 착하고 소심한 조엘(짐 캐리 분)과 당당하고 자유로운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분)은 그렇게 만나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러나 너무 다른 두 사람은 계속되는 말다툼 끝에 이별에 이르고야 만다. 클레멘타인이 먼저 조엘에 대한 아픈 기억들을 지우기 위해 병원을 찾는다.

 

사랑의 아픈 기억을 지워주는 희한한 병원. 이 사실을 안 조엘도 그녀에 대한 기억을 삭제시킨다. 그렇게 기억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조엘은 알 수 없는 고립감에 빠진다. 지워질수록 클레멘타인과의 추억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의식 속의 기억은 그 어떤 질서도 가지지 않은 채 우연한 계기에 의해 자연스럽게 떠올릴 때가 있다. 클레멘타인의 기억을 하나씩 머릿속에서 지워가면서 조엘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들을 무의식의 무덤에서 파내어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경험했던 일들은 시간과 중요도 등 여러 가지 요인들에 따라 기억 속에서 다른 선명도를 갖는다. 최근의 일들은 또렷하고 과거의 일들은 흐릿하다. 그러나 조엘은 클레멘타인과의 기억들을 모두 지워버리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무의식 속에서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삭제작업들을 중단시키기 위해 무의식 속에서 발버둥치기 시작한다.

 

상처없이 안전하게 사랑하고 싶어 하는 것은 모든 연인들의 욕망이다. 헤어진 경우에는 마음에 문신처럼 남겨진 상대방의 기억을 지우지 못해 괴로워한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 아름답게 기억하기 위해 사람들은 사랑의 기억을 조작하려고 든다. 누구에게나 사랑보다 그 사랑했던 기억 때문에 아픈 순간이 있다. 시간은 모든 연인에게 그리 관대하지 않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인들은 서로에게 흠뻑 빠져 들기도 하지만 때론 ‘차라리 만나지나 말 것을…’ 을 후회 섞인 탄식을 되뇌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때 사랑했던 그 혹은 그녀와의 기억을 쉽게 지울 수는 없다. 주고받았던 선물, 편지는 없애버리면 되고, 사랑을 나눴던 장소는 찾지 않으면 되지만 ‘내 머릿속의 메모리’는 ‘리셋’(reset) 다고 될 것이 아니다.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시간뿐이다. 각각의 사람들에게 내장된 기억장치의 용량 차이로 그 속도가 문제일 뿐이다.그래서 영화는 관객에게 묻는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행복할까?’ ‘그럼 한 번 상상해보자'고 제안한다. 지워져가는 두 사람의 기억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이터널 선샤인>은 결국 사랑은 상대방의 모든 것, 아픈 기억까지도 포함한다는 확고한 결론에 도달한다.

 

사랑은 처절한 고통과 슬픔을 수반하지만 그것들을 기꺼이 껴안을 수 있는 자세라는 함의다. 또한 사랑의 추억이란 고통의 기억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 영화는 사랑은 단순히 기억이란 의식적인 영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사랑은 무의식의 대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주변 인물들도 추억을 삭제했지만 우연한 순간에 동일한 상대를 향해 새로운 감정이 샘솟는 것이다. 그러나 조엘의 눈에 비친 클레멘타인의 머리색은 시시각각 바뀌어 있다. 사랑은 질투와 욕망으로 상대를 끊임없이 의심하는 것이다.

 

기형도 시인은 연인과 헤어진 후의 사무치는 마음을 그의 시 '빈집'에서 이렇게 읊조렸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중략)'

 

시인은 사랑을 잃고 난 후에, 오히려 그 기억을 '쓴다'고 했다. 그렇게 사랑의 기억을 다시 재생하면서 그는 연인을 잊으려 했다. 조엘이 사랑의 기억을 소거하면서 잊으려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방법이야 무엇이든, 잃어버린 사랑을 기억에서 지우는 과정조차 달콤하고도 쓰라린 사랑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사랑하면서 만나게 된 눈물, 상처, 웃음, 행복은 사랑에 관한 모든 순간과 과정을 되새기게 된다. 그것은 훗날 잔잔한 추억이 되어 감동으로 재생된다. 첫 만남의 설렘이 영원할 수는 없다. 누구나 느끼는 이 딜레마를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현실의 수많은 연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와 그로 인한 상처를 보여주면서도 사랑을 긍정하도록 만든다. 진정 사랑하는 연인들이라면 어떤 상처가 있다하더라도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그 상처들을 다 상쇄할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그 설렘의 기억을 얼마나 자주 재생버튼을 누르느냐, 그것이 사랑을 유지시켜나가는 관건인 것이다.

 

“망각한 자는 복이 있나니, 자기 실수조차 잊기 때문이라” 이 영화에서 몇 번 인용되는 니체의 잠언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망각에 저항하는 사람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 잠언을 수용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니체의 명언을 살짝 바꿔봤다. “망각하지 않으려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용감하게 시간의 무자비함에 맞서 사랑의 정수를 맛보려 하기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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