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학벌은 카스트 체계와 유사한 위계 서열 구조다. 인도의 카스트는 겉으로 보기에는 대충 4개의 시스템으로 돼 있다. 소위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나뉜다. 하지만 4개의 카스트는 그 안에 무수한 하위 카스트를 내장해 다시 아주 세분된 신분적 위계 서열을 이룬다. 우리 사회의 학벌도 그렇다. 입시 때만 되면 수능 성적과 내신 등에 따라 정교하고도 치밀한 대학의 순위가 드러난다. 이는 막강한 사회적 규정력을 지닌 잣대다.

 

한국 사회 교육열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은 바로 사회적 희소가치인 상위 학벌의 획득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토록 학벌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것이 모든 한국인이 갈망하는 사회적 희소가치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학벌은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모든 영역에서 최고로 상승할 수 있는 수직적 통로인 동시에 그 자체가 각 영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권력이다. 이 같은 학벌의 권력화는 국민 스스로 학벌 경쟁에 투쟁적으로 참여하게 만든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교육현실에서 ‘꿈과 끼를 살리는 행복교육’을 강조한다는 게 너무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접근이 아닐까? 분명히 그런 측면이 있다. 지금 한국 교육은 ‘학력 경쟁’이 아니라 ‘성적과 학벌 경쟁’에 매몰되어 있다. 마치 교육의 본래 목적이 상급학교 진학에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철옹성같이 강건한 ‘입시교육의 우상’을 그대로 두고 ‘창의 인성교육’을 강조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학벌을 둘러싼 싸움은 세계화의 추세와 맥을 같이한다. 국내 대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외국 유학으로 팽창한 지 오래다. 고전적 의미의 유학은 감소하고 고교 졸업 후 외국 대학으로 진학하거나 조기유학 역시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 과정으로 우월한 지위에 서게 된 사람은 과시를 통해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기 일쑤다. 이런 점에서 한국 사회의 과시는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와 다르다. 헤겔의 ‘위신 투쟁’이나 호네트의 ‘인정 투쟁’과도 근본적으로 차이가 난다.

 

좋은 학력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증명서로 통하는 세상이다. 그들은 많이 가져도 되고 목소리가 커도 된다. 사람대접 받으려면 특정 학벌 집단에 들어가야 한다. 희소가치를 지닌 자가 과시를 하는 게 당연한 사회가 돼 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학벌을 사랑한다. 너무나도 맹신적으로.

 

수능시험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지금 강남 고3 교실은 명문대라는 승리의 월계관을 놓고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을 방불케 한다. 학벌은 하루빨리 물리쳐야 할 ‘공공의 적’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쟁취하도록 권할 수밖에 없는 게 부모의 심정이다. 가수 강진은 자신을 울리는 '땡벌'을 사랑한다지만 지금 '강남'은 학벌 때문에 힘들어 지쳐도 어쩔 수 없이 사랑하고 있다. 서울 최고의 엘리트 가수 '강남'이 부른다. 학벌!

 

난 이제 지쳤어요 학벌 / 기다리다 지쳤어요 학벌 /

혼자서 공부하는 시간이 너무 너무 힘들어요 /

당신은 못 말리는 학벌 / 당신은 날 울리는 학벌 /

밉지만 당신을 너무 너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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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3-10-25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묘하네요, 강남이 부르는 학벌!
난 이제 지쳤어요 학벌/
기다리다 지쳤어요 학벌/
당신은 날 울리는 학벌/
밉지만 당신을 너무 너무 사랑해~~~~
음.. 아무리 봐도 절묘해요. ㅎㅎㅎ

cyrus 2013-10-25 23:46   좋아요 0 | URL
학벌에 대한 글을 쓰다가 문득 강진의 노랫말이 생각났어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