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무 불만, 걱정 없이 마냥 행복한 사랑이라는 것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사랑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먼지처럼 쌓였다가 털려나간다. 그리고 먼지가 다시 내려앉는 것처럼 믿음은 헛되이 되풀이된다. 서로의 인생에 그늘을 드리우지 않고 저마다의 완벽한 나날을 향유하는 사랑. 하지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상상이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행복과 또 꼭 그 만큼의 고통을 가지고 태어나니까. 물론 실연이 주는 고통의 크기에는 한계가 없고 인간의 마음은 부서지기 쉽다. 이별은 어느 한 순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갈등이 쌓이면서 끝내 폭발하는 결과물이다. 그런 힘든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별 전후의 얼마간은 상대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한다. 다 그 사람 잘못 같고, 함께 했던 지난 시간이 무의미해지면서 허무감이 든다.
♣ 진실을 찾으려는 야성적 본능의 호기심
만약에 실연당한 여성이 내면의 ‘야성’을 유지하는 여걸이었다면 고통의 시간을 의연하게 대처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심리분석학자이자 심리 상담 전문의인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여성 본연의 야성을 되찾자고 주장한다. ‘야성’, ‘늑대’라는 단어는 남성에게 어울리는 고유 명사다. 반대로 여성은 ‘여우’라고 말한다.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융의 분석 심리학을 사용하는 ‘아니무스’(Animus, 여성의 무의식 속에 들어 있는 남성적 요소)를 근거로 멸종 위기나 다름없는 늑대를 부른다. 본래 여성(woman)의 어원은 늑대(wolf)에서 유래했으며, 여성과 늑대는 선천적으로 사랑이 넘치고 적응력과 직관력이 뛰어나며 씩씩하고 용감하다는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 늑대'의 원형을 세계 민담이나 설화, 동화에서 찾고 있는데 프시케의 모습에서도 ‘어머니 늑대’의 원형을 볼 수 있다. 자신의 모습을 프시케에게 절대로 보이지 않으려는 에로스는 ‘어머니 늑대’ 특유의 호기심을 억누르는 존재다. 프시케 입장에서는 남편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에로스는 자신의 정체를 알려는 프시케의 호기심을 잊기 위해서 그녀를 왕비 못지않은 편안하고 화려한 생활을 누리게 해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프시케의 언니들은 자신들보다 잘 살고 있는 프시케가 부럽고, 질투한다. 그녀들은 에로스가 프시케에게 한 약속을 어기도록 부추기는데 프시케의 마음에 숨어있던 야성적 호기심의 본능을 깨우게 만든 셈이다. 프시케는 경고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프시케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동화 <푸른 수염> 삽화, 귀스타브 도레 그림
푸른 수염은 아내에게 진실을 깨닫는 데 필요한 열쇠만 못 쓰게 막는다. 이는 그녀의 여걸, 즉 일의 진상을 알고자 하는 여성의 본능을 없애는 행위다. 야성적 직관을 잃은 여성은 심각한 위험에 빠진다. 푸른 수염의 이 말에 복종하는 것은 정신적인 자살 행위와 같다. 그 무서운 비밀의 문을 열어야 비로소 자신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73쪽)
야성적 호기심을 발현하는 프시케의 행동은 클라리사 에스테스가 ‘어머니 늑대’의 원형을 찾아 낸 이야기, <푸른 수염>의 아내와 비슷하다. 푸른 수염은 새 신부인 아내에게 자신에게는 정말 중요한 열쇠 하나를 맡긴다. 그 열쇠는 그동안 자신의 전 아내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살해한 ‘죽음의 방’이었다. 푸른 수염은 외출하면서 아내에게 자신의 성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하는 조건을 달면서, 절대로 ‘죽음의 방’ 열쇠만큼은 열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그러나 푸른 수염의 아내 역시 남편의 약속을 어기게 된다. 아내는 언니들과 함께 수수께끼의 열쇠에 맞는 방을 찾아보는 게임을 같이 하는데 진실을 찾으려는 야성적 본능이 드러난다.
♣ ‘삶/죽음/삶’의 여신을 받아들인 프시케
다시 프시케와 ‘여걸’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 결국 프시케는 그동안 궁금했던 에로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야성적 본능의 대가는 에로스가 그녀를 떠나버림으로써 이들의 사랑은 파멸에 이르고 만다. 산산이 깨어진 사랑, 즉 이별과 실연을 겪게 되면 고통스러운 감정의 사이클을 겪는다. 처음에는 분노였지만, 그 다음은 ‘차였다’는 모멸감, 그리고는 ‘또 누군가를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괴로운 나날을 보낸다. 문득 옆에 아무도 없다는 허전한 생각도 들고, 초라한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에드바르트 뭉크 「여자의 세 시기 (스핑크스)」 1894년
여성은 육체를 통해 삶/죽음/삶의 주기와 아주 가까이 살고 있다. 특히 사랑하고 창조하고 믿는 천부적인 본능을제대로 보전한 이들의 경우 모든 생각과 충동이 자연스러운 리듬에 따라 생겼다가 사라진다. (180쪽)
불처럼 뜨겁게 활활 타오르는 사랑이 이별 후에 식어가고, 먼지가 된 사랑의 재를 털어내지 못하는 감정의 사이클은 우리 삶의 주기와 비슷하다.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지만, 다시 한 번 새로운 삶이 탄생한다.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이런 삶의 주기를 ‘삶/죽음/삶’의 여신이라고 부른다. 여걸은 ‘삶/죽음/삶’의 여신을 받아들일 줄 알고, 그걸 볼 줄 안다.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삶의 주기를 의연하게 받아들인다. 적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늑대처럼 말이다.
‘사랑’(Amour) 없는 ‘영혼’(Psyche)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에로스를 떠나보낸 프시케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녀 곁에는 '삶/죽음/삶'의 여신이 있었다. 에로스는 다시 만나기 위해 자신을 싫어하는 아프로디테의 과제를 마다하지 않는다. 여러 차례 위기를 맞게 되지만 프시케는 신의 계락을 두려워하지 않고, 강인한 인내력으로 고난을 극복한다. 에로스와의 재회는 진정한 사랑의 부활이다. 즉 영혼이 다시 살아남은 것이다. 완전한 사랑을 누리기 위해서는 언젠가 마주하게 될 이기적인 욕심과 망상을 포용하고 견뎌낼 줄 알아야 한다. 클라리사 에스테스는 현대사회에서 ‘여걸’이 사라지면서, ‘삶/죽음/삶’의 원형 또한 그 의미가 왜곡되고 퇴색되었다고 말한다.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삶/죽음/삶’의 주기를 이해하고 유지해야 된다.
♣ 잃어버린 야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여걸을 되찾고 싶거든 덫을 피하라. 균형 잡힌 삶을 살 수 있도록 본능을 단련하고, 마음껏 뛰고, 소리치고, 원하는 것을 차지하라. 또 그것에 대해 모든 걸 알아내고, 눈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모든 걸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빨간 신을 신고 춤을 추라. 단, 그 빨간 신은 반드시 직접 만든 신발이어야 한다. (250쪽)
여걸은 훌륭한 여성의 지지자다. 마음보다는 머리로 움직이고, 충동적이기보다는 이성적일 것이며, 상처받지 않으며 그 자체로 완전함을 추구할 것이다. 결국 잃어버린 야성을 되찾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건 나 자신의 문제가 되는 거다. 야성을 억눌리는 덫이 외부에 있는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될 수도 있다.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자신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의 문제이다. 세상에 바라보는 가치관을 바꾸고 자신의 내면을 바꾼다면 삶을 바꾸는 데 일조할 수 있다. 그것이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다.
내 안의 호기심을 발현하여 다양한 체험을 마다하지 않고, 외로움과 고독, 실연에 의한 상처도 모두 원초적 에너지로 승화킬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홀로 밤을 지새우는 여성들이여!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여걸, 즉 원초적 야성과 본능을 살살 꾀어내시라! 그러면 내 안의 무기력한 자아는 오늘로 죽을 것이다. 이제 늑대와 함께 춤을 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