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축복이다. 문명이 언어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고 글쓰기도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언어가 유용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는 늘 불안정하다. 말의 의도는 그것이 아닌데 상대방은 나쁘게 받아들인다. 관계는 악화한다. 언어로 온전한 생각을 전달하기 어렵다.

 

 

 

 

 

 

 

 

 

 

 

 

 

 

 

 

개인이 사회를 고발하는 의사소통도 그렇다. 의사소통행위는 전달의 본질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이를 '충돌'이라고 말했다. 그는 '충돌'의 이유를 다수의 개인은 서로 다른 인식을 하므로 타인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봤다.

 

지난 10일 한 고려대생이 붙인, '안녕들 하십니까'(줄여서 안녕들) 제목의 대자보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자보는 페이스북을 통해 확산했고 철도파업과 밀양송전탑, 부정선거 의혹 등 최근 이슈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전국 대학은 물론 외국 대학에도 자보에 화답하는 응답자보가 계속 올라왔다.

 

 

 

 

 

 

'안녕들' 자보의 폭발적인 반응에 반발하는 움직임도 일기 시작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에는 자보를 찢은 사진이 올라왔다. 보수 성향 대학생 단체 자유대학연합은 반박자보 공개모집에 나섰다.

 

‘안녕들’ 현상은 개인주의에 익숙하고 경쟁시스템에 시달린 우리 청춘들에 반성을 촉구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자보를 공개하고, 응답·반박자보가 나붙는 단선적인 과정이 건전한 대화와 토론문화를 조성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자보는 무전기가 아니다. 무전의 매력은 밀접한 소통이 가능한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무전기는 답하는 무전이 와야 비로소 소통이 완성되는 쌍방향성을 전제한다. 응답자보 그리고 이에 맞서는 반박자보를 공개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쏟아낸다. 그러나 쌍방향적 대화가 아닌 독백에 가깝다. 의견에 반하는 사람에게 들리지 않고, 의견을 공유하는 사람들만 듣는 그들만의 독백이 될 수 있다. 벽에 붙여진 수많은 종이 자보들은 대화의 시도마저 어렵게 하는 단절의 벽이 되고 있다.

 

여기서 사람들은 절망할 것이다. 안녕하지 못한 것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열린 대화의 불가능성에 절망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자세로 자보를 주고받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 ‘충돌’이다.

 

 

 

 

 

 

 

 

 

 

 

 

 

 

 

 

 

 

자보가 문제의식을 확인하고, 반대 진영과 맞서는 일방적 전달에 그친다면 그것에 더 이상 주목할 필요는 없다. 대화 없는 독백은 불통을 낳는다. 소통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는 시도를 해야 한다. 눈과 귀를 막는 우리 사회의 고질병을 답습할 것인가. 자보를 쓰려고 손에 쥐고 있는 펜을 내려놓자. 자신과 다른 생각에 귀를 기울여야 생각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이제는 생각의 진위를 구별하려는 자세가 필요할 때다.

 

어디선가 자보를 쓰고 있을 청춘들, 안녕들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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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십니까?...

저는 2013년 12월 12일 오늘, 안녕하지 못합니다.

 

점점 날씨가 추워지며 겨울이 오고 있음을 몸소 느끼고 있습니다.

차가워지는 날씨만큼이나 우리 사회도 점점 얼어붙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정부의 철도민영화 반대를 위해 철도노조는 거리로 나가 국민을 대변하여 민영화 반대 파업을 하고 있습니다.

정당한 쟁의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12일 현재 7600여명의 직원을 직위해제했습니다.

 

도무지 2013년 지금의 우리 대한민국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부당함 앞에 우리들은 무관심해야만 했습니다. 침묵을 할 수 밖에 없는 사회구조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더 이상 이 미친 세상에 침묵하지 않기로 도망치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오늘 보다 좀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더 이상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권력의 역주행 앞에 저항하는 힘을 보태는 현명한 시민이 되겠습니다.

 

비록 오늘은 안녕하지 못하지만 오늘 보다 나은 내일 우리 진짜 안녕하기로 !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우리 어디에 있더라도 모두 행복하기를 바라겠습니다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묻고 알리지 말아야 할 것을 알리며 이 글을 마칩니다.

 

 

 

 

 

세상은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에 의해 멸망하는 게 아니고,

아무것도 안하며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에 의해 멸망할 것이다 (아인슈타인)

 

 

... 사진을 보면서 어느새 후자가 되어 소심한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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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12-14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느덧 소심해졌네요...

cyrus 2013-12-17 23:03   좋아요 0 | URL
이제 우리 젊은 세대들이 사회문제를 인식해고 직시했으니 공감만 하지 말고, 서로 다른 생각의 차이를 인정하고 분별하려는 자세가 필요한거 같습니다. 그래야 우리들이 사회인이 되어서도 좀 더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이사야 벌린은 자신이 쓴 책『고슴도치와 여우』에서 고대 그리스 우화를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성향을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두 가지 모델로 나누었다. 고대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쿠스가 남긴 “여우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많이 알지만, 고슴도치는 한 가지 큰 것을 본다”는 구절을 발전시킨 것이다. 아르킬로쿠스의 말이 어느 쪽에 호의적인 것인지는 쉽게 간파될 수 없는 일이지만, 일단 그의 말은 여우란 녀석이 아무리 많이 안다고 날뛰어 봐야 그 재주란 ‘잔꾀’일 뿐이고 ‘큰 것’을 모르고 있는 한 결국은 고슴도치의 지혜를 당할 수 없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여우는 여러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며 세상의 복잡한 일들을 두루 살핀다. 그들은 어지럽고 산만하게 여러 곳을 기웃거리는 탓에 자신의 생각을 하나의 종합적인 개념이나 통일된 비전으로 통합하질 못한다. 그에 반해 고슴도치는 복잡한 세상의 개념들을 한데 종합하여 하나의 체계적인 개념이나 원리로 단순화 시킨다. 고슴도치는 모든 과제와 딜레마들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단순한 개념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벌린의 관심은 고슴도치와 여우 중에서 어느 한 쪽을 선호하고 그것을 지지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고슴도치와 여우로 대표되는 지혜의 대립모델이 정치가와 사상가들, 더 크게는 인간 일반의 지적, 예술적 성향을 구별 지어 서로 다른 성질을 기술하는 비유적 양분구도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벌린에 의하면 고슴도치형이 구심적 사고유형을 지녔다면 여우형은 원심적 사고유형을 지녔다. 그 결과 프로이트, 다윈,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헤겔은 모두 고슴도치형인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 몽테뉴, 괴테, 세익스피어 등은 모두 여우형에 속한다.

벌린의 통찰이 아니더라도 우리 인생에서 부분과 전체를 보는 조화로운 눈은 정말 중요하다. 사실 인생이란 경주에서 우리가 정상으로 가는 데 방법적인 차이는 아주 작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은 차이가 성공과 실패라는 정반대의 결과와 엄청난 보상의 차이를 가지고 온다. 일차적으로 우리가 작은 나무를 보지 못하고 숲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무를 보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인생이란 큰 숲을 보는 일이다. 인생이란 숲을 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차이란 정말 큰 것이다. 나무를 보는 지혜 못지않게 우리에게는 인생이라는 거대한 숲을 보는 통찰이 필요하다. 숲을 볼 때 인생의 꿈과 비전도 가질 수 있고, 인생을 대하는 자세 또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인생을 영위하는 일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대사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정치판에서는 저마다 자신이 이 나라를 구할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출사표를 던진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되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중대한 선택의 기로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도 오직 당의 입지를 위한 밥그릇 정쟁이 이어지고 있다. 1년 전 대선에서 국민과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정치인들은 어디로 갔는가. 자신과 정치집단을 위해 이것저것 저울질 하며 상황을 살피는 정치인들만 눈에 보인다. 이념의 잣대로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고지식한 고슴도치와 사소한 문제에 딴지 걸어 불필요한 정쟁을 야기시킬 뿐 정작 중요한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어리석은 여우 같은 정치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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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트 뭉크 - 미술문고 208
장소현 / 열화당 / 1996년 3월
평점 :
절판


 

 

Scene #1 두려움에 지배당한 자

 

 

 

 

 

Edvard Munch 「By the Deathbed」 1893

 

 

만남 뒤엔 이별이라는 말이 있다. 살아가면서 수없이 반복 되는 일이다만, 해도 해도 익숙해 지지 못하는 것이 이별의 슬픔이다. 인간의 모습은 사랑을 그리워하고, 이별의 아픔에 슬퍼함으로 느껴지는 수많은 감정들을 가진 아름다운 동물이다. '행복은 순간이요. 슬픔은 영원하다'라는 어느 시인의 구절처럼 인간은 원래 사랑의 따스함보다 우울함과 슬픔을 오래 기억한다는 연구 결과로도 나와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사랑을 갈망하며,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공유함으로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을 만들어 가는 반복적인 삶을 살아간다. 배신과 증오, 불안과 절규, 죽음, 사랑, 행복 다양한 심정들을 반영하는 예술가들 중에 에드바르트 뭉크는 생애의 사랑과 이별은 모두 고통이었다.

 

뭉크의 그림은 무의식 속에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준다. 숨어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그림을 그렸던 뭉크는 폐결핵으로 죽은 어머니와 누이에 대한 기억 때문에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상처받은 유년기의 기억은 뭉크 예술세계의 기본 색조를 이루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불행한 기억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Scene #2 그림에 덧칠된 황량한 마음

 

 

 

 

 

Edvard Munch 「The Storm」 1893

 

 

뭉크의 그림은 습하고 어둡다. 그것은 마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를 굳이 까발리려 하는 잔인하고 악랄한 취미를 가진 적처럼 가까이에 붙어 있다. 음습한 기운과 불길하고 축축한 두려움. 출구가 쉽게 보이지 않는 불안한 공간에 갇혀서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공포를 기다리며 병들어가고 있는 단절과 고립의 상황. 이런 현대인의 내면을 뭉크는 격렬하고 고통스럽게 그린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을 볼 때마다 시간의 약에 의해서 완치될 줄만 알았던 마음의 환부가 욱신거린다.

 

어릴 때부터 계속되어 온 식구들의 죽음과 병의 무겁고 숨 막히는 공기, 뭉크의 그림은 그가 일일이 겪어낸 상처의 흔적이며 고통의 몸부림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 풍경들은 매우 주관적이며 상징적이다. 뭉크의 감정이 풍경 속에 곧장 전이되어 들끓고 흔들리며 휘감긴다.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다. 뭉크의 그림 전반을 흐르는 주제는 상처와 불안, 외로움과 죽음이다. 이것이 노르웨이의 쓸쓸하고 스산한 풍경과 맞물리면서 우리의 황량한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뭉크는 말한다. ‘내가 기억하는 한 언제나 삶의 불안이 나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불안을 통해 스스로를 예술로 치유해내고 나아가 자신의 이러한 성찰이 사람들에게 빛을 가져다주리라는 소망을 품었다고 밝혔다. 절망을 직시한 끝에 그는 불안이나 병, 상처와 고통 같은 어둠의 영역들을 통해 마침내 빛나는 희망의 삶에 다다르기를 바랐던 것이다.

 

 

 

Scene #3 뭉크는 다리에서 무엇을 보았나?

 

 

 

 

 

Edvard Munch 「The Scream」 1893

 

 

「절규」는 핏빛으로 회오리치는 하늘과 소용돌이치는 터키석 빛 피오르드와 진홍빛 노을이 물든 물결이 어지럽다. 그리고 사선으로 다리를 건너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맨 앞에는 한 사람이 온몸을 움츠린 채 서서 우리를 향해 해골 같은 얼굴로 귀를 막고 비명을 지른다. 그는 어떤 공포와 마주친 것일까? 그의 비명소리에 물결은 미친듯이 소용돌이친다. 그는 두려움에 턱이 빠져나갈 듯 악을 쓰지만, 저 멀리 뒤에서 산책을 하고 있는 듯한 두 사람의 친구들에겐 들리지 않는다. 삶을 위협하는 두려움에 맞닥뜨려 있어도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Edvard Munch 「Anxiety」 1894 / 「Evening on Karl Johan Street」 1892

 

 

「절규」를 그린 바로 이듬해 뭉크는 외계인처럼 눈동자 아래가 퀭하게 시들해진 군중의 일부를 다리 위에 데려다놓는다. 이 그림 제목 또한 「절규」와 마찬가지로 시니컬하다. 제목은 불안.

 

이 그림 속에 있는 인물들은 뭉크의 또 다른 작품 「칼 요한 거리의 저녁」속의 사람들과 빼닮았다. 표정과 생김새, 옷차림은 물론 서로 바라보지 않고 정면을 향한 포즈도 같다. 뭉크는 노르웨이 오슬로 시 번화가인 칼 요한의 거리에 서게 했던 인물들을 쏙 빼다가 「절규」의 남자가 서 있던 ‘다리’ 위로 옮겨놓았다. 그 뒤로 주황색 하늘이 펼쳐진다.왜 그는 유독 다리에 집착했을까?

 

뭉크가 경험한 것은 단순히 절규의 원인이나 결과로 설명할 수 없는, 다리 위를 기억할 수밖에 없도록 이끈 어떤 ‘순간’이었다. 뭉크에게 있어 그 장소는 색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 장소 인근에는 정신병원이 있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병원에서 종종 미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근처에는 방목장과 도살장도 있다. 뿐만 아니라 뭉크의 절친한 친구였던 칼레 로헨이 문제의 장소 근처에서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뭉크에게 있어서 삶은 죽음과 경계선상에 놓인 매우 불안정한 것이었다. 「절규」의 배경은 다리 위의 거리지만, 사실은 뭉크 자신의 내면의 세계이며 자아의 모습이다.

 

 

 

Scene #4 뭉크는 두려워서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뭉크의 「절규」에 나타나는 해골 같은 형상의 인물과 원근법이 상실된 불안감을 연출하는 풍경을 보면서 죽음의 불안을 회화로 남긴 일종의 유서라고. 그리고 현대인의 불안과 절망을 상징할 때 자주 나오는 익숙한 이미지가 되었다.

 

그러나 뭉크를 평생 불안과 죽음의 공포를 노래한 어둠의 화가로만 봐야 하는가? 그를 ‘불안’과 관련된 화가로 규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 마음 안에 도사린 우울, 무력감, 허무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의 뿌리인 불안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

 

뭉크가 심취했던 ‘불안’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불안은 사람을 마비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을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뭉크는 자신의 예술이 키에르케고르의 철학과 일맥상통하다는 걸 스스로 인정할 정도다. 자신의 마음을 위협하는 불안이 때로는 생존을 보장한다는 사실을 뭉크는 깨달았을 것이다.

 

뭉크는 “절규, 나는 대자연을 통과해 가는 거대한 절규를 느꼈다.”라고 1895년에 제작한 석판화에 적어놓는다. 사람이 들어주지 않는 절규를 들어주는 자연. 뭉크는 끝없이 불화하는 자신과 세상과의 진절머리 나는 외로운 싸움을 이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아무도 그의 다급한 목소리에 관심이 없다. 그의 상처, 그의 절망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나 뭉크는 거대한 절규를 몸소 느꼈을 뿐, 굴복하지 않았다. 불안 장애에 가까울 정도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보면 현실에서 도망칠 법한데 뭉크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불안은 뭉크의 미래를 준비하게 하고, 불확실성의 조건들을 확실성의 조건으로 바꾸도록 이끌었다. 뭉크에게 불안은 장애가 아니라 탁월한 예술창작이나 위대한 학문을 낳은 원동력이 되었다. 그에게 불안은 자신의 삶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뭉크에게 다리라는 장소는 감정을 미치게 만들 정도로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외부 세계가 아니다. 그가 다리 위에서의 ‘순간’을 기억하고, 집착하는 이유는 세상과 단절된 자신의 절규와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자기투쟁의 장소이기도 하다. 핏빛 하늘 그리고 어지러운 물결로 둘러싸인 다리는 뭉크에게 생(生)의 감각을 흔들어주기에 충분했다. 뭉크의 절규는 거대한 자연 속의 절규를 듣고 두려움에 떨어서 외치는 것이 아니다. 질식할 것 같지만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내야 한다는 혼신의 외침이다.

 

뭉크는 그림을 그리며 버텨낸다. 타인의 고통을 끌어안는 통각이 마비된 지옥 같은 세상이지만 “나는 영혼을 해부하듯이 그릴 것이다”라고 끝없이 자기 암시를 하며 자신과 싸운다. 자신의 적이면서도 예술적 동지라고 할 수 있는 불안을 낱낱이 해부하여 그림으로 표현한다. 뭉크 본인은 자신을 병마에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연약한 체질이라고 여겼지만, 정신력만큼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뭉크는 그림의 주제에 몰입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바칠 정도로 그렸다. 하나하나의 붓 터치에 담은 작품들은 그의 감정들을 대변한다. 그저 그려진 작품이 아닌 몰입되어진 작품에는 작가의 숨결이 느껴진다.

 

 

 

 

Edvard Munch 「The Sun I」 1911~1916

 

 

그 숨결 속에는 너무나 절박하고 처절하기에 오히려 살아야 한다는 희망이 꿈틀거린다. 뭉크라는 사내는 여전히 살아 있음을 반증이라도 하듯이. 인생의 밑바닥을 치는 순간 다시 희망이 찾아오는 묘한 반전과도 같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슬픔의 날 참고 참으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라는 뿌쉬낀의 시 구절처럼.

 

 

 

Scene #4 피할 수 없다면, 불안을 즐겨라!

 

뭉크의 그림은 단순한 풍경이나 초상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뭉크’ 그 자체다. 뭉크 스스로 자신의 그림 그리는 행위를 자유의지가 낳은 고백이자 인생에 대한 관조를 명료하게 드러내려는 시도라고 봤다.

 

그의 그림들을 전체적으로 보게 되면 전·후반기의 색조와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만년에 몸과 정신이 병으로 고통 받을수록 생명감이 넘치는 훨씬 밝은 색체와 힘찬 붓 터치를 구사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도 견디기 어려운 불안의 감정을 뭉크는 자신의 유일한 장난감이자 마음 치유제인 붓과 물감으로 가지고 놀았다. 이런 걸 바로 진정한 대가(大家)라고 할 수 있겠다.

 

뭉크의 예술철학에서 보듯이 그가 자신의 작품에서 내면의 풍경을 진솔하게 드러냄으로써 '쿵!' 하고 가슴을 때리는 것처럼 내게 큰 울림을 준 것이리라. 가족의 죽음과 연인의 상실, 그에 따른 슬픔과 고통, 우울, 그리고 노년에 죽음을 맞는 뭉크의 내면세계는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어버린 불안은 누구도 피해 갈 수가 없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현실적 근거가 있는 불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뭉크는 ‘예술’이라는 현실적 근거가 있었기에 불안과 절규 앞에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삶이 언제는 우리에게 우호적이던가. 때론 끝없이 추락할 것만 같이 위태롭고 우리가 바치는 열정을 비웃듯 차갑고 냉랭한 시선을 던져도 우리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담담히 걸어가야 한다. 끔찍했던 순간들이 돌아보면 아득하게 느껴지는 때도 있는 것처럼. 뭉크의 고뇌는 위대한 예술이 되어 역설적이게도 살아있는 자가 누리는 생생한 증거가 되었다. 그래서 인류의 축복이 되었다. 참으로 뭉클하기 않은가. 뭉크를 알면 그의 예술은 어두운 게 아니라 뭉클하다.

 

삶은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이라 했다.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기 일쑤지만, 뭉크와 같은 표현주의 예술가의 작품을 통해 가끔이나마 이를 깨닫는다. 그리고 이는 다시 삶을 열심히, 아름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삶의 교훈을 준다. 이런 점에서, 뭉크의 그림들은 개인의 삶에는 고통의 정수일지라도 만인의 삶에는 더없는 가치를 오늘도 내면의 절규와 불안의 늪에 허우적이는 우리들에게 뭉클한 위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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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4-02-03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사탕을 어마어마하게 받으셨던데 혜성! >ㅅ< 축하하오 - ㅋㅋ
곰발님이 일등상 받았다고 해서 축하하러 들어왔다가 목록을 보니 혜성이 뙇!! >ㅅ <

cyrus 2014-02-03 22:29   좋아요 0 | URL
하나님, 혜성이 아니라 해성... ^^;; 여기서는 실명 공개를 잘 하지 않는데 뜬금없이 댓글로 저를 부를 줄이야.. ㅋㅋㅋㅋ 먼저 알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곰발님 글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글을 아주 재미있게 잘 쓰시더군요. 삽하나님 같은 젋고 발랄한 분이라면 좋아할만한 글이에요.
 

 

 

 

  

 

 

Edvard Munch 「despair」 1892

 

 

 

철길 너머에서 기차가 온다

 

간이역에서 노을이 탄다

 

그 다음 노을은 기차를 놓친다

 

밀림 끝에서 물소 떼가 풀을 뜯는다

 

강 건너편의 노을이 한 번 더

 

기차를 세운다 먼 우렛소리를 세운다

 

머뭇거리는 기차의 유전자를 지나

 

철없는 부들이 키를 세운다

 

아르니카 꽃이 한 동안 피어 있다

 

 

- 유병근 ‘뭉크에게 보내는 문자메시지’-

 

 

 

 

 

 

 

Giorgio de Chirico 「The Melancholy Departure」 1914

 

 

 

뭉크는 일그러진 존재의 형상과 짙은 색조를 통해 인간 내면의 불안과 공포를 보여준 화가다. 그런 뭉크에게 문자 메시지로 전송하는 시인의 풍경 또한 불안한 기운이 감돈다. 흡사 조르지오 데 키리코의 형이상학적 회화를 연상시킨다. 생의 간이역엔 어둠이 내리고 기차는 놓치기 십상이다. '너머' '끝' '건너편' '먼'이란 아득하고 두려운 공간에서 큰 소리 치거나 소외된 채 서로 어긋나는 존재들. 그들이 보내오는 메시지를 받아 판독해내는 것, 그것이 세상과 삶의 내면을 드러내는 그림 혹은 시다. 그나저나 오늘이 뭉크 탄생 150주년인데, 생일을 축하할 겸 이 시를 하늘에 있는 뭉크에게 보내고 싶은데 과연 마음에 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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