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벌린은 자신이 쓴 책『고슴도치와 여우』에서 고대 그리스 우화를 바탕으로 하여 인간의 성향을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두 가지 모델로 나누었다. 고대 그리스 시인 아르킬로쿠스가 남긴 “여우는 자질구레한 것들을 많이 알지만, 고슴도치는 한 가지 큰 것을 본다”는 구절을 발전시킨 것이다. 아르킬로쿠스의 말이 어느 쪽에 호의적인 것인지는 쉽게 간파될 수 없는 일이지만, 일단 그의 말은 여우란 녀석이 아무리 많이 안다고 날뛰어 봐야 그 재주란 ‘잔꾀’일 뿐이고 ‘큰 것’을 모르고 있는 한 결국은 고슴도치의 지혜를 당할 수 없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여우는 여러 가지 목적을 동시에 추구하며 세상의 복잡한 일들을 두루 살핀다. 그들은 어지럽고 산만하게 여러 곳을 기웃거리는 탓에 자신의 생각을 하나의 종합적인 개념이나 통일된 비전으로 통합하질 못한다. 그에 반해 고슴도치는 복잡한 세상의 개념들을 한데 종합하여 하나의 체계적인 개념이나 원리로 단순화 시킨다. 고슴도치는 모든 과제와 딜레마들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단순한 개념으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벌린의 관심은 고슴도치와 여우 중에서 어느 한 쪽을 선호하고 그것을 지지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고슴도치와 여우로 대표되는 지혜의 대립모델이 정치가와 사상가들, 더 크게는 인간 일반의 지적, 예술적 성향을 구별 지어 서로 다른 성질을 기술하는 비유적 양분구도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벌린에 의하면 고슴도치형이 구심적 사고유형을 지녔다면 여우형은 원심적 사고유형을 지녔다. 그 결과 프로이트, 다윈, 마르크스, 아인슈타인, 헤겔은 모두 고슴도치형인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 몽테뉴, 괴테, 세익스피어 등은 모두 여우형에 속한다.

벌린의 통찰이 아니더라도 우리 인생에서 부분과 전체를 보는 조화로운 눈은 정말 중요하다. 사실 인생이란 경주에서 우리가 정상으로 가는 데 방법적인 차이는 아주 작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은 차이가 성공과 실패라는 정반대의 결과와 엄청난 보상의 차이를 가지고 온다. 일차적으로 우리가 작은 나무를 보지 못하고 숲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나무를 보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인생이란 큰 숲을 보는 일이다. 인생이란 숲을 본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의 차이란 정말 큰 것이다. 나무를 보는 지혜 못지않게 우리에게는 인생이라는 거대한 숲을 보는 통찰이 필요하다. 숲을 볼 때 인생의 꿈과 비전도 가질 수 있고, 인생을 대하는 자세 또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인생을 영위하는 일도 그러할진대 하물며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대사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정치판에서는 저마다 자신이 이 나라를 구할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출사표를 던진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 되었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중대한 선택의 기로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도 오직 당의 입지를 위한 밥그릇 정쟁이 이어지고 있다. 1년 전 대선에서 국민과 나라를 위해 일한다는 정치인들은 어디로 갔는가. 자신과 정치집단을 위해 이것저것 저울질 하며 상황을 살피는 정치인들만 눈에 보인다. 이념의 잣대로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고지식한 고슴도치와 사소한 문제에 딴지 걸어 불필요한 정쟁을 야기시킬 뿐 정작 중요한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어리석은 여우 같은 정치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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