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축복이다. 문명이 언어에서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고 글쓰기도 가능해졌으니 말이다.

 

하지만 언어가 유용성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는 늘 불안정하다. 말의 의도는 그것이 아닌데 상대방은 나쁘게 받아들인다. 관계는 악화한다. 언어로 온전한 생각을 전달하기 어렵다.

 

 

 

 

 

 

 

 

 

 

 

 

 

 

 

 

개인이 사회를 고발하는 의사소통도 그렇다. 의사소통행위는 전달의 본질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이를 '충돌'이라고 말했다. 그는 '충돌'의 이유를 다수의 개인은 서로 다른 인식을 하므로 타인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봤다.

 

지난 10일 한 고려대생이 붙인, '안녕들 하십니까'(줄여서 안녕들) 제목의 대자보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자보는 페이스북을 통해 확산했고 철도파업과 밀양송전탑, 부정선거 의혹 등 최근 이슈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전국 대학은 물론 외국 대학에도 자보에 화답하는 응답자보가 계속 올라왔다.

 

 

 

 

 

 

'안녕들' 자보의 폭발적인 반응에 반발하는 움직임도 일기 시작했다. 인터넷 커뮤니티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에는 자보를 찢은 사진이 올라왔다. 보수 성향 대학생 단체 자유대학연합은 반박자보 공개모집에 나섰다.

 

‘안녕들’ 현상은 개인주의에 익숙하고 경쟁시스템에 시달린 우리 청춘들에 반성을 촉구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그러나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자보를 공개하고, 응답·반박자보가 나붙는 단선적인 과정이 건전한 대화와 토론문화를 조성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자보는 무전기가 아니다. 무전의 매력은 밀접한 소통이 가능한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무전기는 답하는 무전이 와야 비로소 소통이 완성되는 쌍방향성을 전제한다. 응답자보 그리고 이에 맞서는 반박자보를 공개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쏟아낸다. 그러나 쌍방향적 대화가 아닌 독백에 가깝다. 의견에 반하는 사람에게 들리지 않고, 의견을 공유하는 사람들만 듣는 그들만의 독백이 될 수 있다. 벽에 붙여진 수많은 종이 자보들은 대화의 시도마저 어렵게 하는 단절의 벽이 되고 있다.

 

여기서 사람들은 절망할 것이다. 안녕하지 못한 것에 대한 절망이 아니라, 열린 대화의 불가능성에 절망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자세로 자보를 주고받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 ‘충돌’이다.

 

 

 

 

 

 

 

 

 

 

 

 

 

 

 

 

 

 

자보가 문제의식을 확인하고, 반대 진영과 맞서는 일방적 전달에 그친다면 그것에 더 이상 주목할 필요는 없다. 대화 없는 독백은 불통을 낳는다. 소통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는 시도를 해야 한다. 눈과 귀를 막는 우리 사회의 고질병을 답습할 것인가. 자보를 쓰려고 손에 쥐고 있는 펜을 내려놓자. 자신과 다른 생각에 귀를 기울여야 생각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이제는 생각의 진위를 구별하려는 자세가 필요할 때다.

 

어디선가 자보를 쓰고 있을 청춘들, 안녕들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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