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트 뭉크 - 미술문고 208
장소현 / 열화당 / 1996년 3월
평점 :
절판


 

 

Scene #1 두려움에 지배당한 자

 

 

 

 

 

Edvard Munch 「By the Deathbed」 1893

 

 

만남 뒤엔 이별이라는 말이 있다. 살아가면서 수없이 반복 되는 일이다만, 해도 해도 익숙해 지지 못하는 것이 이별의 슬픔이다. 인간의 모습은 사랑을 그리워하고, 이별의 아픔에 슬퍼함으로 느껴지는 수많은 감정들을 가진 아름다운 동물이다. '행복은 순간이요. 슬픔은 영원하다'라는 어느 시인의 구절처럼 인간은 원래 사랑의 따스함보다 우울함과 슬픔을 오래 기억한다는 연구 결과로도 나와 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사랑을 갈망하며, 서로의 아픔과 상처를 공유함으로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을 만들어 가는 반복적인 삶을 살아간다. 배신과 증오, 불안과 절규, 죽음, 사랑, 행복 다양한 심정들을 반영하는 예술가들 중에 에드바르트 뭉크는 생애의 사랑과 이별은 모두 고통이었다.

 

뭉크의 그림은 무의식 속에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준다. 숨어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한 그림을 그렸던 뭉크는 폐결핵으로 죽은 어머니와 누이에 대한 기억 때문에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상처받은 유년기의 기억은 뭉크 예술세계의 기본 색조를 이루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불행한 기억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Scene #2 그림에 덧칠된 황량한 마음

 

 

 

 

 

Edvard Munch 「The Storm」 1893

 

 

뭉크의 그림은 습하고 어둡다. 그것은 마치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를 굳이 까발리려 하는 잔인하고 악랄한 취미를 가진 적처럼 가까이에 붙어 있다. 음습한 기운과 불길하고 축축한 두려움. 출구가 쉽게 보이지 않는 불안한 공간에 갇혀서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공포를 기다리며 병들어가고 있는 단절과 고립의 상황. 이런 현대인의 내면을 뭉크는 격렬하고 고통스럽게 그린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을 볼 때마다 시간의 약에 의해서 완치될 줄만 알았던 마음의 환부가 욱신거린다.

 

어릴 때부터 계속되어 온 식구들의 죽음과 병의 무겁고 숨 막히는 공기, 뭉크의 그림은 그가 일일이 겪어낸 상처의 흔적이며 고통의 몸부림이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 풍경들은 매우 주관적이며 상징적이다. 뭉크의 감정이 풍경 속에 곧장 전이되어 들끓고 흔들리며 휘감긴다.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다. 뭉크의 그림 전반을 흐르는 주제는 상처와 불안, 외로움과 죽음이다. 이것이 노르웨이의 쓸쓸하고 스산한 풍경과 맞물리면서 우리의 황량한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뭉크는 말한다. ‘내가 기억하는 한 언제나 삶의 불안이 나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불안을 통해 스스로를 예술로 치유해내고 나아가 자신의 이러한 성찰이 사람들에게 빛을 가져다주리라는 소망을 품었다고 밝혔다. 절망을 직시한 끝에 그는 불안이나 병, 상처와 고통 같은 어둠의 영역들을 통해 마침내 빛나는 희망의 삶에 다다르기를 바랐던 것이다.

 

 

 

Scene #3 뭉크는 다리에서 무엇을 보았나?

 

 

 

 

 

Edvard Munch 「The Scream」 1893

 

 

「절규」는 핏빛으로 회오리치는 하늘과 소용돌이치는 터키석 빛 피오르드와 진홍빛 노을이 물든 물결이 어지럽다. 그리고 사선으로 다리를 건너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맨 앞에는 한 사람이 온몸을 움츠린 채 서서 우리를 향해 해골 같은 얼굴로 귀를 막고 비명을 지른다. 그는 어떤 공포와 마주친 것일까? 그의 비명소리에 물결은 미친듯이 소용돌이친다. 그는 두려움에 턱이 빠져나갈 듯 악을 쓰지만, 저 멀리 뒤에서 산책을 하고 있는 듯한 두 사람의 친구들에겐 들리지 않는다. 삶을 위협하는 두려움에 맞닥뜨려 있어도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Edvard Munch 「Anxiety」 1894 / 「Evening on Karl Johan Street」 1892

 

 

「절규」를 그린 바로 이듬해 뭉크는 외계인처럼 눈동자 아래가 퀭하게 시들해진 군중의 일부를 다리 위에 데려다놓는다. 이 그림 제목 또한 「절규」와 마찬가지로 시니컬하다. 제목은 불안.

 

이 그림 속에 있는 인물들은 뭉크의 또 다른 작품 「칼 요한 거리의 저녁」속의 사람들과 빼닮았다. 표정과 생김새, 옷차림은 물론 서로 바라보지 않고 정면을 향한 포즈도 같다. 뭉크는 노르웨이 오슬로 시 번화가인 칼 요한의 거리에 서게 했던 인물들을 쏙 빼다가 「절규」의 남자가 서 있던 ‘다리’ 위로 옮겨놓았다. 그 뒤로 주황색 하늘이 펼쳐진다.왜 그는 유독 다리에 집착했을까?

 

뭉크가 경험한 것은 단순히 절규의 원인이나 결과로 설명할 수 없는, 다리 위를 기억할 수밖에 없도록 이끈 어떤 ‘순간’이었다. 뭉크에게 있어 그 장소는 색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 장소 인근에는 정신병원이 있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병원에서 종종 미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근처에는 방목장과 도살장도 있다. 뿐만 아니라 뭉크의 절친한 친구였던 칼레 로헨이 문제의 장소 근처에서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뭉크에게 있어서 삶은 죽음과 경계선상에 놓인 매우 불안정한 것이었다. 「절규」의 배경은 다리 위의 거리지만, 사실은 뭉크 자신의 내면의 세계이며 자아의 모습이다.

 

 

 

Scene #4 뭉크는 두려워서 외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말한다. 뭉크의 「절규」에 나타나는 해골 같은 형상의 인물과 원근법이 상실된 불안감을 연출하는 풍경을 보면서 죽음의 불안을 회화로 남긴 일종의 유서라고. 그리고 현대인의 불안과 절망을 상징할 때 자주 나오는 익숙한 이미지가 되었다.

 

그러나 뭉크를 평생 불안과 죽음의 공포를 노래한 어둠의 화가로만 봐야 하는가? 그를 ‘불안’과 관련된 화가로 규정하는 것은 결국 우리 마음 안에 도사린 우울, 무력감, 허무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의 뿌리인 불안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

 

뭉크가 심취했던 ‘불안’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말했다. “불안은 사람을 마비시킬 뿐만 아니라, 인간을 발전시키는 동력이 되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뭉크는 자신의 예술이 키에르케고르의 철학과 일맥상통하다는 걸 스스로 인정할 정도다. 자신의 마음을 위협하는 불안이 때로는 생존을 보장한다는 사실을 뭉크는 깨달았을 것이다.

 

뭉크는 “절규, 나는 대자연을 통과해 가는 거대한 절규를 느꼈다.”라고 1895년에 제작한 석판화에 적어놓는다. 사람이 들어주지 않는 절규를 들어주는 자연. 뭉크는 끝없이 불화하는 자신과 세상과의 진절머리 나는 외로운 싸움을 이 그림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아무도 그의 다급한 목소리에 관심이 없다. 그의 상처, 그의 절망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나 뭉크는 거대한 절규를 몸소 느꼈을 뿐, 굴복하지 않았다. 불안 장애에 가까울 정도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보면 현실에서 도망칠 법한데 뭉크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불안은 뭉크의 미래를 준비하게 하고, 불확실성의 조건들을 확실성의 조건으로 바꾸도록 이끌었다. 뭉크에게 불안은 장애가 아니라 탁월한 예술창작이나 위대한 학문을 낳은 원동력이 되었다. 그에게 불안은 자신의 삶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뭉크에게 다리라는 장소는 감정을 미치게 만들 정도로 ‘트라우마’를 일으키는 외부 세계가 아니다. 그가 다리 위에서의 ‘순간’을 기억하고, 집착하는 이유는 세상과 단절된 자신의 절규와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자기투쟁의 장소이기도 하다. 핏빛 하늘 그리고 어지러운 물결로 둘러싸인 다리는 뭉크에게 생(生)의 감각을 흔들어주기에 충분했다. 뭉크의 절규는 거대한 자연 속의 절규를 듣고 두려움에 떨어서 외치는 것이 아니다. 질식할 것 같지만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어떻게 해서든 살아내야 한다는 혼신의 외침이다.

 

뭉크는 그림을 그리며 버텨낸다. 타인의 고통을 끌어안는 통각이 마비된 지옥 같은 세상이지만 “나는 영혼을 해부하듯이 그릴 것이다”라고 끝없이 자기 암시를 하며 자신과 싸운다. 자신의 적이면서도 예술적 동지라고 할 수 있는 불안을 낱낱이 해부하여 그림으로 표현한다. 뭉크 본인은 자신을 병마에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연약한 체질이라고 여겼지만, 정신력만큼은 누구보다도 강했다. 뭉크는 그림의 주제에 몰입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바칠 정도로 그렸다. 하나하나의 붓 터치에 담은 작품들은 그의 감정들을 대변한다. 그저 그려진 작품이 아닌 몰입되어진 작품에는 작가의 숨결이 느껴진다.

 

 

 

 

Edvard Munch 「The Sun I」 1911~1916

 

 

그 숨결 속에는 너무나 절박하고 처절하기에 오히려 살아야 한다는 희망이 꿈틀거린다. 뭉크라는 사내는 여전히 살아 있음을 반증이라도 하듯이. 인생의 밑바닥을 치는 순간 다시 희망이 찾아오는 묘한 반전과도 같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슬픔의 날 참고 참으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라는 뿌쉬낀의 시 구절처럼.

 

 

 

Scene #4 피할 수 없다면, 불안을 즐겨라!

 

뭉크의 그림은 단순한 풍경이나 초상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 ‘뭉크’ 그 자체다. 뭉크 스스로 자신의 그림 그리는 행위를 자유의지가 낳은 고백이자 인생에 대한 관조를 명료하게 드러내려는 시도라고 봤다.

 

그의 그림들을 전체적으로 보게 되면 전·후반기의 색조와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만년에 몸과 정신이 병으로 고통 받을수록 생명감이 넘치는 훨씬 밝은 색체와 힘찬 붓 터치를 구사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도 견디기 어려운 불안의 감정을 뭉크는 자신의 유일한 장난감이자 마음 치유제인 붓과 물감으로 가지고 놀았다. 이런 걸 바로 진정한 대가(大家)라고 할 수 있겠다.

 

뭉크의 예술철학에서 보듯이 그가 자신의 작품에서 내면의 풍경을 진솔하게 드러냄으로써 '쿵!' 하고 가슴을 때리는 것처럼 내게 큰 울림을 준 것이리라. 가족의 죽음과 연인의 상실, 그에 따른 슬픔과 고통, 우울, 그리고 노년에 죽음을 맞는 뭉크의 내면세계는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존재의 일부가 되어버린 불안은 누구도 피해 갈 수가 없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현실적 근거가 있는 불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뭉크는 ‘예술’이라는 현실적 근거가 있었기에 불안과 절규 앞에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삶이 언제는 우리에게 우호적이던가. 때론 끝없이 추락할 것만 같이 위태롭고 우리가 바치는 열정을 비웃듯 차갑고 냉랭한 시선을 던져도 우리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담담히 걸어가야 한다. 끔찍했던 순간들이 돌아보면 아득하게 느껴지는 때도 있는 것처럼. 뭉크의 고뇌는 위대한 예술이 되어 역설적이게도 살아있는 자가 누리는 생생한 증거가 되었다. 그래서 인류의 축복이 되었다. 참으로 뭉클하기 않은가. 뭉크를 알면 그의 예술은 어두운 게 아니라 뭉클하다.

 

삶은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이라 했다.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기 일쑤지만, 뭉크와 같은 표현주의 예술가의 작품을 통해 가끔이나마 이를 깨닫는다. 그리고 이는 다시 삶을 열심히, 아름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삶의 교훈을 준다. 이런 점에서, 뭉크의 그림들은 개인의 삶에는 고통의 정수일지라도 만인의 삶에는 더없는 가치를 오늘도 내면의 절규와 불안의 늪에 허우적이는 우리들에게 뭉클한 위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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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4-02-03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사탕을 어마어마하게 받으셨던데 혜성! >ㅅ< 축하하오 - ㅋㅋ
곰발님이 일등상 받았다고 해서 축하하러 들어왔다가 목록을 보니 혜성이 뙇!! >ㅅ <

cyrus 2014-02-03 22:29   좋아요 0 | URL
하나님, 혜성이 아니라 해성... ^^;; 여기서는 실명 공개를 잘 하지 않는데 뜬금없이 댓글로 저를 부를 줄이야.. ㅋㅋㅋㅋ 먼저 알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곰발님 글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글을 아주 재미있게 잘 쓰시더군요. 삽하나님 같은 젋고 발랄한 분이라면 좋아할만한 글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