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한 존재들 - 결함과 땜질로 탄생한 모든 것들의 자연사
텔모 피에바니 지음, 김숲 옮김 / 북인어박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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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노자(老子)도덕경41에 속담을 인용하면서()를 설명한다.



 “크게 모가 난 것은 모서리가 없고,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며

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 큰 형상은 형체가 없다.”

 도는 숨어 있어 이름이 없지만

오직 도만이 잘 돌봐주고 잘 이루게 할 수 있다.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夫唯道, 善貸且成.



(김원중 옮김, 노자, 글항아리, 2013, 170~171)

 


모서리 없는 네모, 들리지 않는 큰 소리(이 표현은 유치환의 시 깃발의 첫 구절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연상시킨다), 형상은 있으나 형체가 없는 것이 모든 것은 현실에 없다노자의 도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지만, 이름과 형체가 없어서 신비스럽.


도덕경41장의 전체 문장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네 글자가 대기만성(大器晩成)’이다. 큰 그릇은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듯이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짐’을 이르는 말이다. 도덕경여러 판본이 존재한다. 도덕경에 주석을 단 왕필(王弼)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라고 해석했다. 국내에 출간된 도덕경대부분은 왕필의 주석을 참고한다. ‘비단에 적힌 도덕경이라 해서 백서본(帛書本)’으로 불리는 판본이 있다백서본에 대기만성’은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에 대기면성(大器免成)’으로 표기되어 있다대기면성은 대기만성과 다르게 비관적이다큰 그릇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큰 그릇은 완성되지 않는다’, ‘큰 그릇이 되기는 어렵다로 해석한다. 최진석 교수를 포함한 학자들은 대기면성대기만성으로 잘못 알려졌다고 주장한다. 반면 김원중 교수대기면성대기만성모두 옳은 해석으로 여긴다. 그는 노자가 해석의 다양성을 염두에 두면서 도덕경을 썼다고 주장한다.


좀 늦더라도 노력만 하면 큰 그릇을 완성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대기만성을 선호한다. 하지만 형체가 없는 도의 특성상 큰 그릇은 완성되지 않는다큰 그릇을 완성할 수 없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 없다. 도덕경40장의 핵심유생어무(有生於無)’. 천하의 만물은 살아 있다(有生). 살아 있음의 시작은 없음()’이다. 도는 영원히 순환한다. 노자는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라 했다(反者道之動, 도덕경40). 결국 살아 있는 것은 없음으로 되돌아간다. 큰 그릇을 빨리 만들어서 완성하든, 천천히 만들어서 완성하든 시간이 지나면 원래 색깔이 사라지며 형태가 점점 변한다. 슬슬 금이 가기 시작하다가 언젠가는 깨진다그릇 색깔이 사라지면 다시 덧칠하면 된다. 깨진 그릇은 다시 붙이면 된다. 변형되고 파손된 그릇을 땜질하면 다시 살아난다. 도덕경40장의 유생어무41장의 대기면성완전한 형태의 도’를 이룰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세상 모든 것은 겉으로 봐선 완벽해 보이지만, 실은 불완전한 존재.


불완전한 존재들: 결함과 땜질로 탄생한 모든 것들의 자연사유생어무대기면성의 교훈을 과학의 관점으로 설명한 책이다여전히 사람들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믿는다.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와 함께 나무 위에서 살다가 어느 순간 두 발로 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살기 위해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인간의 도구 사용은 인류 진화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다. 여기서부터 인간은 지구상에서 완벽하게 진화한 종()으로 인식됐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착각에 빠진 인간은 조상들의 고향인 자연을 파괴하면서 살아간다. 


진화의 의미를 오해하는 사람들은 진보를 진화의 동의어로 생각한다. 진보와 진화를 모두 경험한 인간은 스스로 완벽한 존재라고 단정 짓는다하지만 진화는 인간이 계속해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과정이 아니다우리는 완벽함과 완전한 존재를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오류와 결점, 불안정성, 불완전한 존재는 발전을 더디게 하는 걸림돌이자 개선해해서 제거해야 할 문제로 취급한다한때 돌연변이는 신으로부터 저주받은 괴물로 낙인찍혔다. 우생학자들은 완벽한 인간이 아닌 장애인은 태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류의 진화 과정과 자연사는 완벽함이라는 지점에 도달하는 탄탄대로가 아니다결함과 우연’이 마주치는 가시밭길이다갑작스럽게 변한 자연환경은 대멸종을 초래했다. 여기서 소수의 종은 비록 완벽하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시밭길을 무사히 걸어갔다. 몇몇 동물은 생존을 위해 자기 신체 일부를 변형하거나 퇴화하는 전략을 선택한다타조는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다리를 발달하는 대신에 날개를 포기했다. 원래 잡식성 동물인 판다는 대나무 줄기를 손에 쥔 채 먹기 위해 손목뼈를 가짜 엄지로 진화시켰다.


프랑스의 유전학자 프랑수아 자콥(Francois Jacob)이 말한 대로, 진화는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땜질하는과정이다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단순히 완벽함에 이르기 위해 진화하지 않는다. 오로지 잘 살고 싶어서 진화한다. 불완전한 결함을 받아들이고, 이를 수정한다. 오류와 결함은 진화의 원동력이다


우리는 완벽함을 추구하지만, 현실적으로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없다. 완벽함을 이루기 위한 노력만 강조하는 대기만성은 이제 더 이상 위로의 말이 아니다.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현실적인 위로의 말은 대기면성이다. 불완전한 존재들에 나온 이 문장은 대기면성의 뜻을 담고 있다.



 인류는 생명체의 정수라기보다 여전히 만들어지는 중이다

우리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만들어지는 존재


(223)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에 자신이 원하는 큰 그릇을 만들고 싶다면 계속 만들어라완벽한 도()를 담은 그릇보다 볼품없어도 용도(用途, 쓸모) 있는 그릇이 더 좋다완벽함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 완성이 덜 된 그릇도 제 눈에는 만족스러워 보인다완성형 존재가 아닌 우리는 삶을 땜질하면서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만든다.






<cyrus의 주석>



* 194

 




 인간의 남성은 여성이 임신할 준비가 된 순간을 감지하지 못한다. 개코원숭이, 맨드릴개코원숭이, 침팬지 그리고 보노보노[주]와는 확실히 다르다.


[]보노보의 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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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4-04-05 0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노보노‘도 감지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ㅎㅎ

cyrus 2024-04-08 06:40   좋아요 1 | URL
나름 재미있는 오자였어요. ^^
 
우주의 수학 - 최소한의 수식으로 이해하는
스토 야스시 지음, 전종훈 옮김, 강성주 감수 / 플루토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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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천체물리학자 우주에 관심이 많은 물리학자. 천체(天體)우주에 살고 있는 행성, 항성, 성단, 성운 등을 아우르는 용어. 사실 천체물리학자를 천문학자라고 해도 무방하다. 천문학자 심채경이 쓴 책 제목처럼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천문학자들이 보는 것은 별이 움직이는 현상을 설명하는 법칙이다.


일본의 천체물리학자 스토 야스시(須藤 靖)는 우주를 보지 않는다. 그는 우주에 깊이 스며든 수학을 본다. 야스시는 우주가 수식과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는다그가 쓴 우주의 수학오랫동안 우주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수학 법칙들을 소개한 책이다. 저자는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과 수학이 있다고 믿는 파에 속한다. 기호로만 이루어진 수식이 저자의 눈에는 아름답게 빛난다


대부분 물리학자와 수학자는 설명하기 복잡한 자연 현상을 단순하면서도 간결하게 표현한 방정식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하지만 수학을 어려워하는 사람은 수식이 낯설다. 이런 사람들은 수학으로 가득한 우주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이 믿고 있는 수학-우주론이 우주를 설명하는 유일한 진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책을 다 읽은 독자에게 우주가 법칙과 수학의 지배를 받을 리 없다는 파를 계속 지지할 것인지 말 것인지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저자는 솔직하다. 자신도 어려운 수식을 보면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자의 겸손한 태도는 수학이 싫어서 밤하늘을 바라보는 즐거움조차 포기할 것 같은 사람들의 마음을 달랜다저자는 수식이 도출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우주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기본적인 수식만 알려준다. 물리학자는 수식으로 법칙을 표현한다. 법칙이 우주는 이렇다라는 형태로 된 문장이라면, 수식은 그 문장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글자다글자 한두 개 빠지면 읽을 수 없는 어색한 문장이 되듯이, 수식이 없으면 법칙을 오롯이 설명할 수 없다.


우주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법칙은 크게 세 가지다. ‘1 법칙’, ‘2 법칙’, ‘3 법칙으로 알려진 케플러(Johannes Kepler) 법칙은 행성이 움직이는 경로인 궤도가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뉴턴(Isaac Newton)은 자신이 발견한 운동법칙(물체의 질량과 가속도의 곱은 그 물체에 작용하는 힘과 같다)과 케플러 제3 법칙을 결합하여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한다. 만유인력은 중력을 뜻한다. 사실 만유인력은 뉴턴 역학을 다룬 외국 서적을 접한 일본 학자들이 ‘universal gravity’를 한자로 번역해서 나온 단어다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질량을 가진 물질이 중력을 발생시켜, 시공간이 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는 곡면을 이용한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영감을 얻어 일반상대성이론을 발견한다케플러, 뉴턴, 아인슈타인은 수학의 도움을 받아 인류가 나타나기 훨씬 오래 전부터 존재한 우주의 법칙들을 이해했다.


망원경이 발명되기 전까지 천문학자들은 맨눈으로 밤하늘을 관측했다. 하지만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그들이 정말로 보고 싶은 것은 맨눈으로 볼 수 없다. 천문학자는 우주 어딘가에 숨어 있는 법칙을 보고 싶어 한다. 시력이 좋은 눈을 가진 천문학자가 매일 밤하늘을 관측해도 우주가 꼭꼭 숨긴 법칙을 찾지 못한다. 법칙을 발견하려면 눈은 밤하늘을 바라보되 머리로 생각하면서 우주에 물어봐야 한다. 우주를 향해 법칙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질문하고, 우주가 천문학자에게 알려준 법칙과 관련한 단서를 분석하려면 수학이라는 언어가 있어야 한다


우주가 수학을 잘 아는 존재라면 천문학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수학을 모르는 천문학자는 날 보려고 하지 마!






<cyrus의 주석>




* 69

 

 1609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당시 발명된 망원경을 처음으로 천체 관측에 사용했습니다.[1] 이전의 천문학자나 철학자들은 맨눈으로 천체를 관측해야만 했죠.

 

[1] 영국의 천문학자 토머스 해리엇(Thomas Harriot, 1560?~1621)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보다 4개월 먼저(정확한 날짜는 1609726) 망원경으로 달을 관측했고, 달의 표면을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을 남겼다. 하지만 해리엇은 달 그림을 발표하지 않았고, 갈릴레오는 1610년에 자신이 직접 그린 달 그림을 발표했다.


[참고문헌 1] 로베르타 J. M. 올슨 & 제이 M. 파사쇼프, 곽영직 옮김

COSMOS 우주에 깃든 예술, 북스힐, 2021

 

[참고문헌 2마이클 벤슨, 지웅배 옮김

코스미그래픽: 인류가 창조한 우주의 역사, 롤러코스터, 2024






* 153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세계지도는 지구 표면을 평면으로 펼친 지도입니다. 하지만 지구는 실제로는 구형이어서[2] 완벽하게 평면으로 펼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2차원 평면으로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죠.





[2] 지구는 완전한 구형이 아니다. 적도 지방이 부푼 타원체다. 따라서 지구는 찌그러진 형태라서 지역마다 중력의 강도가 다르다. (출처: [‘지구는 더 이상 둥글지 않다?’ 사진 공개맞을까 틀릴까] 매일경제, 201142일 입력)





* 203

 

 2019410일 천문학 역사에서 중요한 날로 기록되었습니다. 이날 사건의 지평선 망원경 공통 연구팀이 타원은하 M87[3]의 중심에 위치한 초거대 블랙홀의 첫 이미지를, 전 세계에 있는 전파망원경에 연결해 촬영했습니다. ‘사건의 지평선은 슈바르츠실트 반지름의 다른 표현으로, 빛조차 탈출할 수 없는 블랙홀의 경계를 말합니다.


[3] M87처녀자리에 있는 타원은하. 처녀자리 A 은하라고도 부른다. ‘M’‘Messier’의 약자, 천체 목록을 만든 프랑스의 천문학자 샤를 메시에(Charles Messier)에서 따왔다.





* 참고 문헌 237쪽





 매튜 스탠리, 아인슈타인의 전쟁: 상대성이론은 어떻게 국가주의를 극복했는가?, 국내 미출간. [주4]


[주4] 아인슈타인의 전쟁: 상대성이론은 어떻게 전쟁에서 승리했나(김영서 옮김, 브론스테인, 2020)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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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4-05 0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우주가 보고 싶은데, 수학실력이 부족해서 지금은 안되겟어요.ㅠㅠ

cyrus 2024-04-05 06:33   좋아요 0 | URL
저도 수학 문제 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고등학생 때 수학능력시험 수리 영역 점수를 잘 받으려고 정말 수학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문과인데도 수학 성적 올리는 데 노력했죠. 그렇게 2년 공부해서 수학능력시험 때 받은 수리 영역 점수가 27점이었어요.. ㅋㅋㅋㅋ 그때부터 제가 수학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꼈어요... ㅋㅋㅋ 그래도 수학을 책으로 보는 건 좋아해요. 수학 관련 도서에 나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거든요. ^^
 
죽음의 집 이안재 희곡선 1
윤영선.윤성호 지음 / 책공장 이안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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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집은 가까이, 죽음의 집은 더 가까이.




<죽음의 집>은 2007년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윤영선 극작가의 미발표 희곡이다. 2012년에 낭독 공연에서 대본 일부가 낭독되면서 <죽음의 집초고가 처음으로 극장 무대의 조명을 받았다. <죽음의 집초고를 확인한 극작가 겸 연출가 윤성호가 작가 노트를 단서 삼아 쓰이지 않은 이야기를 새로 썼다. <죽음의 집대본의 1부는 고인의 초고이며 2부는 윤성호가 쓴 것이다죽은 자가 쓴 글과 ‘살아있는 자가 쓴 글이 포개진 희곡, 즉 미완성과 완성이 뒤엉킨 <죽음의 집>은 2017년 윤영선 극작가의 10주기 추모 페스티벌에 초연되었다. 2020년 제41회 서울연극제에 공연된 <죽음의 집>은 희곡상(윤영선윤성호)과 연출상(윤성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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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
미셸 투르니에 지음, 에두아르 부바 사진,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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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책 읽기 모임 두루미’ 세 번째 선정 도서





태양은 지구를 향해 빛을 흩뿌리면서 다닌다. 낮에 열정적으로 일한 태양은 제대로 쉬고 싶다. 태양은 숙면을 위해 어두운 이불을 푹 덮는다. 태양이 잠들기 시작하면 자고 있던 달이 잠에서 깨어난다. 달은 잠잘 때 덮고 있던 푸른 이불을 갠다. 태양은 자고 있어도 계속 빛을 뿜어낸다. 태양 빛은 매우 강렬해서 어두운 이불을 뚫고 나올 정도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태양 빛은 못생긴 달을 위한 조명이 되어준다. 태양 빛을 받지 못한 달은 지구에서 보이지 않는다. 달의 반쪽 부분에 태양 빛을 받으면 반달이 된다. 태양 빛이 달을 감싸 안으면 보름달이 된다. 밤이 되면 태양 빛으로 화장한 달의 얼굴이 나타난다. 중력에 몸을 맡긴 달은 지구 주변을 돈다. 하지만 달은 자신의 뒷모습을 절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어떤 불자가 덕망이 높은 승려를 만나러 직접 찾아왔다. 불자는 승려에게 가르침을 청했으나 승려는 자신도 글을 모른다면서 거절했다. 헛걸음한 불자가 실망감을 드러내자, 승려는 불자에게 달을 보라면서 손가락을 들었다. 그러면서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보는 불자를 나무랐다. 어리석은 불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만 눈이 쏠려 제대로 봐야 할 달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달을 잘 보는 승려도 달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승려는 달의 앞모습만 쳐다봤기 때문이다. 승려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달의 완전한 모습이 아니라 달의 얼굴이다.


항상 태양 빛을 받아서 생기가 넘치는 앞모습에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사실 뒷모습도 살아있다. 뒷모습은 세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 그렇지만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은 앞모습에 있다. 눈 하나만 뒤에 달려 있으면 좋으련만. 뒷모습이 아쉬워한다. 하지만 세상은 뒷모습의 소원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얼굴에 있어야 할 눈이 뒤통수에 있으면 세상은 앞모습을 괴물이라고 손가락질한다. 한쪽 눈만 있는 얼굴은 매력이 없다. 비난이 두려운 앞모습은 한쪽 눈을 절대로 뺏기고 싶지 않다뒷모습은 할 말이 많은데, 말을 할 수 없다. 하필이면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는 입이 얼굴에 있다. 뒷모습은 냄새를 맡고 싶다. 그런데 한 번 열면 쉬지 않는 입 바로 위에 냄새 맡는 코가 달려 있다. , , 입이 앞쪽에 몰려 있다.


에두아르 부바(Edouard Boubat)는 세간의 빛을 잘 받지 못해 시들시들해진 뒷모습을 향해 카메라를 비춘 사진작가다. 그는 뒷모습이 살아있다는 진실을 확인했다. 초라해진 자신의 모습에 어깨가 축 처져 있던 뒷모습이 부바의 카메라가 반가워서 어깨를 들썩인다. 뒷모습을 찍은 부바의 카메라에 이름이 있다면, 그 이름은 바로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 뒷모습이 부바의 밝은 방(Camera Lucida)’에 들어서는 순간, 자신도 살아 있다면서 온갖 동작으로 표현한다.


부바의 카메라 루시다에 찍힌 뒷모습은 찬란하지 않다. 나무 쟁기를 짊어진 인도의 어느 농부와 앙상한 소 두 마리의 뒷모습, 양손에 물뿌리개를 들고 정원을 걷는 정원사의 뒷모습, 허리를 구부리면서 산책하는 할머니의 뒷모습, 사람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들이 길바닥에 깔린 파리의 거리. 작가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는 파리의 거리가 찍힌 사진을 보면서 글을 썼는데, 이 글에 등 뒤에서 본 파리라는 제목을 달았다. 사진 한가운데에 멀리 떨어져 있는 에펠탑(Tour Eiffel)이 희미하게 보인다. 밤이 되면 아름다워지는 철의 여인(La Dame de Fer)’ 에펠탑에 현혹된 사람들은 낮이 되면 나타나는 더러운 진실을 보지 못한다. 쓰레기통에 담지 못한 더러운 진실이 여기저기에 방치된 거리는 도시의 지저분한 뒷모습이다.


뒷모습은 세련되지 않으며 하찮다. 그렇지만 카메라에 찍히면 사진을 보는 감상자의 눈과 마음을 찌르는 위력을 가진다. 에두아르 부바의 카메라가 주목한 뒷모습에 생기가 돋는 푼크툼(punctum)’이 있다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자신의 책 밝은 방: 사진에 관한 노트에서 푼크툼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푼크툼은 원래 찌름또는 작은 구멍을 뜻하는 단어다. 바르트는 푼크툼이 있는 사진이 자신을 찌르고,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고 했다바늘로 피부를 찌르면 아프듯이 사진 속 푼크툼은 감상자의 눈과 마음을 콕 찔러 아프게 만든다.


화려하지 않은 뒷모습은 억지로 꾸미지 않는다. 따라서 뒷모습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부바는 화려하지만,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앞모습에 전혀 관심이 없다. 앞모습을 찍은 사진에 푼크툼이 없어서 시시하다. 반면 뒷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면 가슴이 뛴다. 뒷모습이 살아있음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사진은 감상자의 마음을 뒤흔든다. 감상자는 뒷모습을 찍은 사진을 바라볼 때 푼크툼을 만난다.


사진 속 뒷모습은 조용하다. 뒷모습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고 싶어도 꾹 참는다. 앞모습은 제 할 말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야 사람들 앞에서 멋진 모습을 과시할 수 있거든. 이렇듯 앞모습을 찍은 사진에 익숙한 사람은 과묵한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 낯설어서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말이 없는 뒷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는 사진에서 푼크툼을 찾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모험이다. 사막 한가운데에 푼크툼이라는 바늘을 찾는 일이랄까바르트는 사진의 매력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로 모험을 골랐다. 푼크툼은 화려함과 거리가 멀고, 특별한 의미가 없다. 사진 속 뒷모습을 보면서 해석하지 않는 순간부터 감상자는 자신만의 푼크툼을 찾아 나선다. 이때부터 화려하지 않은 모험이 시작된다푼크툼이 있는 사진은 감상자를 찔러댈 뿐만 아니라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살아있는 감상자는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말한다. 그늘이 진 삶의 일부라든가 사람들 앞에 보여주면 부끄러운 치부를 숨기지 않는다. 자신이 진실한 삶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볼 줄 안다사진의 푼크툼을 찾는 모험은 어렵지 않다. 마음이 솔직하지 못하거나 외면을 멋지게 꾸미는 일을 좋아하는 성격이 모험을 어렵게 만든다.


카메라 루시다와 함께 만든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집 뒷모습자신의 진솔한 마음과 모습을 만나게 해주는 거울이다. 뒷모습만 보여주는 거울에 아름다움을 찾지 마시라. 그 대신에 우리가 찾아야 할 푼크툼이 있다. 푼크툼은 우리에게 진실하게 살아 보라면서 힘껏 찌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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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자이너 - 과학의 ‘아버지’들을 추방하고 직접 찾아나선
레이철 E. 그로스 지음, 제효영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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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주 가는 책방들을 운영하는 분들 대부분은 여성이다. 그분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고, 책방에 이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 모든 책방에 이 책이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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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4-03-19 1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임신한 와이프를 둔 남자나, 애기아빠들이 읽어도 참 좋을 것 같습니다.

cyrus 2024-03-20 06:29   좋아요 1 | URL
결혼할 마음이 없는 남자도 읽었으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