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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 - 꽃보다 시보다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고민정 글.사진 / 마음의숲 / 2013년 8월
평점 :
품절
사랑받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행복이다. (헤르만 헤세)
Scene #1 로맨티스트를 만나다
무더위의 흔적이 완전히 싹 가시지 않았던 작년 9월 중순인 걸로 기억한다. 특별한 일 때문에 오랜만에 서울에 간 적이 있었다. 고향인 대구로부터 가장 먼 지역이지만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몇 몇 분들이 살고 있어서 시간이 나면 만나기도 한다.
시 낭독 소모임은 그리 넓지 않은 카페에서 진행되었다. 여기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내 기억에 의하면 나를 포함한 7명일 것이다. 여기에는 시 낭독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인 두 분도 참석했다. 낭독 모임에 참석한 시인 중 한 사람은 고민정 아나운서의 남편으로 알려진 조기영 씨였다.
사실 조기영 시인과 고민정 아나운서의 러브 스토리는 인터넷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다. 둘 다 경희대 중문학과 11년 차 선후배로 처음 만나게 되었다. 고민정 아나운서가 조기영 시인을 좋아하게 돼서 오랜 연애 끝에 부부의 연을 맺었다. 개인적으로 아나운서와 시시인의 러브 스토리를 낭만적으로 여겼던 터라 로맨티스트 조기영 시인을 직접 보게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우연히 친한 누님의 모임에 따라간 것뿐인데.
시인의 첫인상은 나랑 비슷하게 마른 체구였다. 올해 초에 시인이 강직성 척추염이라는 희귀병에 고생하고 있다는 소식이 매스컴에 소개됐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때 시인이 병 때문에 자신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음을 살짝 언급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상은 무척 좋았다. 행복의 향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널리 퍼뜨리는 참한 웃음이 매력적이었다.
아쉽게도 고민정 아나운서가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활자로만 보던 시의 창작자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시인 특유의 문학적 감수성을 오감(五感)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조기영 시인은 아이패드로 자신이 연애 시절 고백할 때 쓴 시 ‘청혼’을 방송에서 낭독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된 따끈따끈한 감수성이 살아 숨 쉬는 시 몇 편을 접할 수 있었다. 시 낭독 모임은 지방에서 사는 나에게는 단 하루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 여름 밤이 되면 가끔 오랫동안 떠올려보는 꿈결 같은 순간이다.
Scene #2 - 그런 사랑 또 없습니다
MBC <황금어장-라디오스타> ‘연하남 사용 설명서’ 편을 보며 새삼 세상 참 요지경 속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상형’은 그야말로 이상(理想)일 뿐이지만 ‘100만 원이라도 더 벌 수 있는 남성’을 이상형으로 꼽는 여자 연예인의 말을 듣고 있자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10만 원도 아니고 무려 100만 원이란다. 한 달에 100만 원을 벌기 위해 온갖 풍파와 부대끼며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저런 소리를. 나름 힘들게 벌고 있다고는 변명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결혼은 사랑보다 현실이다.” 다소 씁쓸하게 느껴지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실제 현실이 뒤받쳐 주지 않은 결혼생활은 양쪽 모두를 힘들게 한다. 돈 마다하는 사람 없고 돈 때문에 좋던 관계가 금이 가고 소원해진다는 걸 모르는 나이가 아니다.
하지만 나보다 경제력이 월등하지 않으면 존경심이 일지 않는다는 가치관, 매우 위험하면서도 경솔한 발상이다. 부부 사이에 있어 서로에 대한 존중은 기본이다. 인연을 맺은 후 실직을 할 수도 있고 병을 얻을 수도 있는 노릇이 아닌가. 살면서 생기는 변수는 부지기수, 그런 뜻밖의 상황이 전개되면 존경심이 사라져 버릴까 봐 두렵다.
내 주위에 그런 생각을 하는 친구가 있다면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고 싶지만, 인생경험 짧은 내가 잔소리하고 열변을 토해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그 대신 고민정 아나운서가 쓴 책을 권하고 싶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미안해』 차분하면서도 담백스러운 글 속에는 사랑을 가볍게 여기는 독자의 심장을 꼬집는다. 그렇다고 심하게 아플 정도는 아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순수한 아이를 타이르듯이 친절하다. 그녀의 달달한 문체는 기성 세대의 잔소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가난한 시인과의 결혼을 반대하지 않은 고민정 아나운서의 부모님도 존경스럽지만 자신의 증세를 잘 알고 있기에 가족에게 폐가 되지 않기 위해 철저히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는 조기영 시인도 존경스럽다. 고민정 아나운서는 그가 존경할 수 있는 남자여서 좋았다고 했다. 잘생긴 남자, 돈 많은 남자, 여러 종류의 남자가 많았지만 존경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 남자는 지금의 남편 하나뿐이라고 했다. 바로 ‘존경’이라는 단어는 이런 곳에 써야 하는 거다.
그녀는 '존경'할 수 있는 사랑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 가고 있다. 물질에 끌려 다니기보다는 가치를 우선시하며 가벼운 사랑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절대 흔하지 않은 사랑의 진정성을 찾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또한, 그들에게 허락된 아이 은산을 향한 사랑도 담겨 있다. 남들에게 내색하지 못했던 자신의 고통과 사랑에 대해서도 담담히 풀어냈으며, 흔들리지 않기 위해 서로를 의지했던 사랑의 흔적들이 곳곳에 묻어난다. 꽃보다, 시보다 아름답다.
Scene #3 ‘친밀함’과 ‘책임’이라는 좋은 양분
당신은 향해
아주 오랫동안 서 있었습니다
한 번의 비와
한 번의 추위와
가을은 쓰러지고
겨울이 어깨 위로 내려와 있는
지금 이 시간에도
나의 마음은 온통
당신을 향해 서 있습니다
당신의 눈빛을 찾아
당신의 얼굴을 찾아 방황했던,
길고 길었던, 때문에
그리움이라는 한마디 말로는
부족한 시간들 속에서
당신과 나는 언제나
하나의 공간에서
함께 있지 못하였습니다.
누군가 그러했듯이.....
(중략)
아마도 내가
당신과 더불어
시라는 조금은 특별한 연인을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매일 밤을 달려
당신의 아파트 창문이 보이는
공원의 한 켠에서
당신의 모습을 찾아서
헤메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밤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고이 잠들었을 이 시간에
고백합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조기영 ‘오래된 사랑 고백’ 중에서,『사람은 가고 사랑은 남는다』88~90쪽)
조기영 시인은 지금까지 현재 시집 한 권을 출판했다. 출판연도는 좀 오래됐다. 구입한 시집은 2000년에 나온 초판이다. 시집에 수록된 ‘오래된 사랑 고백’이라는 시는 이제 막 두 사람의 심장에 사랑의 씨앗이 움트기 시작했을 때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하나의 아름다운 씨앗을 틔기까지 두 사람 앞에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마주했다.
“당신과 나는 언제나 / 하나의 공간에서 / 함께 있지 못하였습니다.” 시 구절처럼 두 사람은 공간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함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두 사람이 느꼈던 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오랜 시간 사람들의 사랑의 감정을 연구해온 심리학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랑의 유효기간은 짧으면 6개월 길면 30개월이라고 한다. 길어도 30개월이 지나면 상대방을 향한 고귀함이나 환상은 산산조각 나고, 이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상대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래서 사랑의 온기가 30개월을 넘어서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친밀함’과 ‘책임’이라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동반자적인 사랑’이라고 명명한다. 서로에게 친밀함과 책임이 있을 때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다.
고민정 아나운서와 조기영 시인이 ‘존경’할 수 있는 사랑의 씨앗을 마음 속 깊이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친밀함’과 ‘책임’이라는 좋은 양분을 먹고 자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공유하는 ‘친밀함’과 ‘책임’의 양분은 사랑의 온기를 더욱 따뜻하게 만들었고 결국 사랑의 씨앗은 '은산'이라는 귀여운 생명으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Scene #4 그 사람 더 사랑해서 고맙습니다
돈은 사랑도, 심지어 사람까지도 사고판다. 가난하기에 이별을 하고, 가난하기에 피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가난하고 인생에 큰 어려움에 봉착되었을 때 사랑을 버려야 한다고 돌아설 때 사랑은 오히려 죽지 않고 뜨겁게 가슴에 각인된다.
돈에 팔릴 사랑이라면 진즉 헤어지는 것이 좋다. 함께 할 수 있다면 풀잎에 맺힌 이슬에서도 진주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가진 것 없어도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주위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밀물과 썰물이 이어지고 끊어지길 반복하듯 가난과 부유함도 이어지고 끊어지길 반복한다. 그러나 한번 깨어진 사랑은 뒤바뀌는 법이 없다. 돈으로는 영원히 빛나는 사랑을 할 수가 없다. 진실한 사랑을 하려면 가난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
가난하다고 사랑의 꿈조차 가난해져서는 안 된다. 자신이 힘들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방관하거나 포기해서도 안 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아니 솟아날 구멍이 있는 하늘만 무너지게끔 되어 있다. 가난하다고 그리움을, 살아가기가 힘들다고 사랑을 버려야겠는가. 순수한 마음 끝까지 변치 않는다면 가난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인생의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 맑은 영혼 지켜가며 서로가 서로를 받쳐준다면 못할 일이 없다. 오염되지 않은 사랑은 부패하지 않는다. 가난까지 보듬을 수 있는 맑은 사랑이라야 영원히 빛날 수 있다.
신이 준 최고의 축복은 돈이 아니라 빛나는 사랑이다. 그런 사랑을 해보아야 삶이 아름답고 풍요로워진다. 그렇기에 그 사람 더 사랑한다고 해서 미안해 할 필요 없다. 만약에 언젠가 또 다시 조기영 시인이나 운 좋게 고민정 아나운서도 만나게 된다면 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 사람 더 사랑해서 고맙다고. 지금도 여전히 빛나고 살아 숨쉬는 사랑을 두 눈으로 볼 수 있고 따뜻한 사랑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