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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리차드 세넷 지음, 김병화 옮김 / 현암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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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불평등한 사회의 '비참한 사람들'

 

지난해 개봉한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이 장기 흥행하며 600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고 한다. 한국사람 열 명 중 한 명이 영화를 본 셈이다. 이 ‘감동의 물결’에 대해 저마다 해석이 분분하지만, 많은 매체들이 대선 패배로 인해 ‘멘붕’에 빠진 야권 후보 지지자들이 그들의 좌절과 분노를 영화를 보며 ‘힐링’한다고 진단했다.

 

레미제라블의 ‘비참한 사람들’은 분명 이전에 혁명도 이룩했고 심지어 왕도 갈아치웠다. 그랬음에도 이들이 다시 실패할 혁명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전히 삶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 역시 거리의 기억과 정권교체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정작 개개인은 먹고살기가 나날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이태백’ ‘88만원 세대’는 여전한 장기침체와 승자독식 경쟁체제로 인해 30대가 되어서도 취업과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 ‘3포 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일해도 아니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워킹푸어’, 겉보기에는 번듯하지만 빚에 허덕이는 중산층 ‘하우스푸어’가 ‘서민’ 대다수를 지칭하는 용어로 대두되었을 정도다.

 

도쿄대 강상중 교수는 “한국사회는 학력이나 자산, 소득이나 지위의 극단적인 격차와 함께 행복과 불행의 차가 역력하여 과거 어느 때보다 사회 안에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이 깊이 퍼져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말했다. 이렇듯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사회를 향한 일종의 패배주의적 분노는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다’고 분노에 가까운 아우성이 울려 퍼지고 있다.

 

 

 

 ♣ 비협동적 자아의 등장

 

불평등이나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없다. 사회 대부분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격차는 좁혀지기는커녕 더 벌어지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협력보다는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구조를 가지게 된 것이 원인 중 하나다. 선점하지 않으면 상대가 가진다. 지고 나면 재기가 어렵다. 이 같은 사회 시스템은 경쟁만 더욱 강화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회에 협력의 미덕이 완전히 상실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협력을 통해 문제점을 해결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다만 협력에 참여하지 않은 사회 구성원의 등장이 문제다.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오늘날 사회에 ‘비협동적인 자아’를 가진 유형이 출현했다고 분석한다. 무엇을 하라고 요구하는 게 많은 복잡한 사회를 감당하지 못해 움츠러든다. 경쟁에서 자발적으로 뒤로 물러서면서 차이를 느낀다. 여기서 오는 불안감을 줄이기 위해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관심해진다.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그것은 타인의 일일 뿐이다. 이런 상황인데 과연 서로 협력할 수 있을까?

 

‘협력’은 공동체 최고의 에너지이기도 하다. 삶의 현장에서는 자연스럽게 경쟁의 논리가 개입된다. 거기에는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존재한다. 문제는 승자가 모든 시간과 공간을 독식하는 현상이다. 패자가 다시 경쟁할 수 있는 기회가 없으면 패자는 영원히 절망의 공간에서 시간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 결국 패자는 패자끼리, 승자는 승자끼리 연대하는 갈등관계가 조성된다. 세넷은 그러한 ‘연대’가 오히려 협력을 방해했다고 단언한다. 일반적으로 ‘연대’와 ‘협력’은 동등한 의미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연대’라는 말은 묘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일상적으로 쉽게 접하는 광고로 ‘연대’의 의미를 설명할 수 있다. 상품을 홍보하는 광고에 유명한 연예인이 모델로 등장한다. 광고 속 연예인은 상품을 사용한다. 이 상품이 좋으니까 구입하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지만 광고가 나간 이후 상품이 불티나게 팔려 나간다. 광고에서 사용한 방법이 바로 '연대'다. 광고의 진실은 ‘이 상품을 사용해야 유명 연예인의 팬이다’를 넘어서 ‘상품을 사용하지 않으면 연예인의 팬은 아니다’는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다. 팬클럽이 지니고 있는 연대는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라 그 스타와 라이벌 관계에 있는 다른 스타에 대한 적대감을 동시에 내포한다.

 

사회 구성원들에게 존재하는 연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공동체가 연대를 한다는 것은 다른 공동체와의 경쟁이라는 전제와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오히려 연대는 경쟁의 조건이 되면서 협력은 밀려난다. 더욱이 다른 공동체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같은 공동체 안에서도 끊임없는 경쟁과 갈등이 일어날 소지가 크다. 특히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가면을 쓴 부족주의가 만연된 사회일수록 자신과 다른 성향의 사회 구성원과 어울리지 않고 갈등을 야기한다. 그리고 승자 독식을 부추기는 신자유주의 사회는 남을 짓밟아서라도 더 앞서 나가려는 경쟁을 유도한다.

 

 

“협력은 우리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지만 판에 박힌 행위에 붙들려 있을 수는 없다. 그것은 개발되고 심화되어야 한다. 특히 우리 자신과는 여러모로 다른 사람들을 상대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런 사람들과 협력한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세넷은 인간에게 협력 유전자가 ‘본성’으로 각인돼 있지만 이를 함께 행동하기 위해서 서로를 이해하고 응답하는 기술로 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협력을 단순한 윤리적 가치로 간주하기보다 실생활에서 쓰는 실기(實技, craft)로 보는 것이다.

 

 

 

 ♣ '비협동적 자아'가 많은 아마추어 사회

 

그렇다면 우리는 협력을 기술을 어떻게 배워야하는가? 세넷은 물건을 만들거나 수리를 하는 장인들이 몸을 통해 기술을 ‘체화’하듯 사회적 관계의 기술 역시 그 리듬을 몸으로 익힐 수 있다고 말한다. 세넷이 기획중인 ‘호모 파베르 프로젝트’(Homo faber project) 1부작인 <장인>에 보면 장인은 그 어떤 보상과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자기 일에서 스스로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그들에게 도구는 작품을 창작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신과 이미 한 몸이다. 한 몸이 된 도구는 자신의 정신이요 신체다. 니체는 철학을 하기 위해서 망치를 들었는데 협력의 기술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손에는 무엇을 쥐어야 하는가? 특별히 협력을 위해 도구를 들 필요는 없다. 장인 정신처럼 자기를 희생하고 타인을 위해 이익을 포기할 수 있는 지속적인 헌신을 경험하면 된다.

 

세넷의 생각은 실질적인 협력의 본질을 잃은 채 ‘공감’, '연대‘만 강조했던 우리 사회에 새로운 대안이 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기술을 제대로 체득하기 위해서는 장기간동안 반복되어야 한다. 이미 <장인>에서도 밝혔지만 세넷은 장인적 지속성을 강조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정의한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액체 근대’ 사회 속에서 협력의 기술을 지속적으로 체득할 수 있는 여유의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생각은 실행하지 않으면 무용적인 담론으로만 남을 뿐이다. 헌신의 원리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반세기동안 좌우 이념 대립의 갈등 골이 깊어진 우리 사회에 장인적 협력의 토양이 그 간극을 메울 수 있을지 책을 덮고 난 뒤에도 의구심이 생긴다. 특히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주종 관계로 따지는 갑과 을(甲乙)의 갈등은 지속적인 헌신의 체득을 어렵게 만드는 환경이 될 수 있다. 김홍중 <문학동네> 편집위원은 「함께 읽기: 연대를 넘어 협력으로 - ‘사회학적인 것’의 재구성」에서 세넷의 협력 정신은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는 샹향식 변화 모델이라고 평가한다. 갑을 관계의 갈등이 지속되고 고착화된다면 상향식 변화의 협력은 기대할 수 없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고, 장인은 연장 탓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 사회에는 ‘비협동적 자아’를 가진 아마추어가 너무 많다. 아직 협력의 정신을 지닌 장인이 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연대’, ‘공감’이라는 본질 없는 공허한 단어만 있는 쓸모없는 연장을 손에 쥔 채 협력 부재의 원인을 그 연장 탓만 하고 있을지 모른다. ‘헌신’의 연장이 우리 손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우리를 둘러싼 사회적 여건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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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지음, 서복경 옮김 / 후마니타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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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0년대 미국에 불기 시작한 '정부재창조' 바람 

 

 

 

 

 

 

미국 연방정부의 구조는 198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환경의 변화로 과거와는 다른 관점에서 주된 초점으로 정부 운용의 변화를 시도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신보수주의의 물결로 인해, 미국 연방정부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정부 기능의 민영화, 정부지출 삭감, 지방정부 간 관계 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정부의 노력은 클린턴-고어 행정부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났다. 클린턴-고어 행정부는 출범 초기인 1993년 범정부적인 연방 정부 성과 평가 위원회(NPR : National Performance Review)을 마련, 관리통제 위주의 업무 직위를 줄이고 능률향상을 통한 ‘일 잘하고 비용이 적게 드는(Works better and Costs less) 정부’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앨 고어의 MPR은1998년 두남이라는 출판사에서 '기업형 정부 재창조'라는 제목으로 번역 발간되었다) 이를 위해 1993년 NPR 보고서를 통해 5년간 연방공무원 25만개 직위를 폐지를 권고했다. 이후 대대적인 인원감축에 들어가 공무원의 수를 클린턴 행정부 출범 초기의 218만 8천 647명에서 집권 말기인 2000년 12월에는 176만 1천 376명으로 42만 7천여명, 19%를 줄였다. 그리고 클린턴 행정부는 백악관 조직도 대대적으로 감축을 시도했다. 과거 30년간 600여명으로 유지돼오던 백악관 인력을 25% 감축, 500명 선으로 줄였다. 앨 고어 당시 부통령은 이러한 개혁프로그램을 주도하기 위해 신설한 정부혁신사업단을 직접 이끌면서 정부실적 및 결과에 관한 법과 정보기술개혁법 등을 제정하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앨 고어가 주도한 연방 정부 성과 평가 위원회의 중요한 의의는 인사행정 개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규제 완화, 민영화를 통한 정부 부문의 독점성을 파괴함으로써 시민을 위한 공공 서비스 공급자의 역할로 전환할 것을 강조한다. 1992년에 집필한 오스본과 게블러의 <정부재창조: 기업가적 정신이 공공 부문을 어떻게 전환시키는가>는 고어의 NPR 실행에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다. 오스본과 게블러는 정부를 기존의 행정 관료제적 접근이 아닌 기업가적 접근이라는 새로운 유형을 제시했다. 기업가적 정부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중점적으로 축약할 수 있다. ① 정부는 과거처럼 노를 젓기보다는 방향을 잡아 주어야(Steering) 한다. ② 정부의 활동으로서 서비스의 독점보다는 서비스 제공에 경쟁 개념을 도입한다. 시장 지향적 정부로 변모해야 한다. ③ 고객(국민)이 원하는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도록 낭비를 줄이고 고객의 참여를 유도한다. 오스본과 게블러가 주창한 ‘정부재창조론’은 이듬해 클린턴-고어 행정부의 기업가 정신을 통한 정부혁신을 주도하는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기업가적 정부가 참여민주주의를 지향한다고?

 

오스본 & 게블러의 정부재창조 그리고 앨 고어의 정부혁신은 경영에서 볼 수 있는 ‘다운사이징’(Downsizing)과 비슷하다. 다운사이징은 조직을 야위게 만드는 경영 기법을 말하는 것으로, 슬림화를 통해 능률의 증진을 추구한다. 기업체의 관료화에 따른 불필요한 낭비조직을 제거하는 것이다. 기구를 단순화하여 의사소통을 원활화하여 신속한 의사결정을 도모할 수 있다. 오스본 & 게블러가 주장한 새로운 정부 형태 또한 마찬가지다. 지역사회를 위해 더 많은 정책을 담당하며 제도를 움직이는 정부의 역할은 무조건 시민에게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에게 더 많은 공공 서비스 권한을 이양하는 쪽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관심은 시민 스스로 지역사회의 발전에 많은 관심을 둘 수 있으며 자신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공공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촉진한다. 이는 곧 참여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내용이 행정학 전공에서 배우고 있는 정부재창조론의 장점이다. 공무원 시험 문제에도 출제될 정도로 정부재창조론은 지금까지도 행정 이론의 발달에 중요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필자는 정부재창조론 도입에 비롯되는 장점을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인 2007년에 행정학 전공 기초 강의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전에 이미 미국의 정부재창조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책이 나왔을 줄이야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그 책을 읽게 될 줄이야. 그 책은 바로 매튜 A. 크렌슨과 벤저민 긴스버그가 함께 쓴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두 정치학자는 시민의 정치 참여를 중요시하는 미국의 민주주의마저 정부재창조, 정부 혁신 때문에 ‘다운사이징’되었다고 비판한다. 기업가적 정부의 역할이 참여민주주의 실현을 가능케 한다는 오스본의 주장과 상반되는 입장이다.

 

 

 

 시민의 정치 역할이 축소되는 개인민주주의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다수 시민의 의사에 배치되는 통치행위를 할 때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에서는 통치자의 임기를 매우 짧게 하고, 추첨의 방법으로 선발과 교체를 빈번하게 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통치자의 전횡 기회를 최대한 억제하려 한 것이다. 근대에 들어와 통치자의 책임은 사회계약론으로 설명되었다. 통치자와 시민 사이의 신뢰가 깨지면 시민은 저항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통치자와 시민 간 계약의 실증적 기초도 없고, 통치자에 대한 시민의 선출권이 전제된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것은 소극적 권리 이상일 수 없었다.

 

 

또 다른 접근은 국가권력을 분할하는 방식이었다. 미국 헌법 제정자들에 의해 실현된 삼권 분립이 대표적이다. 이 제도가 분할된 국가권력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발전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시민의 통제권이 확대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회와 행정부는 서로의 권력을 경쟁적으로 확대했다. 두 권력 기구의 갈등 사이에서 사법부의 힘 역시 커졌다. 이러한 권력 확대의 과정에서 정부 권력을 상호 견제할 수 있는 시민의 정치 참여의 범위가 다시 축소되기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참여민주주의가 축소된 결정적인 계기가 클린턴 행정부 때 실행된 앨 고어의 NPR이다. 저자 크렌슨과 긴스버그는 정부 혹은 정치 엘리트들은 더 이상 능동적이고 대중적인 시민의 지지에 의존하지 않고도 권력을 유지,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변화의 경향을 설명하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두 가지의 형태로 구분한다. 대중민주주의(popular democracy)와 개인민주주의(personal democracy). 대중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대중의 능동적인 정치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는 참된 민주주의다. 정치 엘리트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비(非) 엘리트, 즉 시민의 정치 참여를 종용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의 민주주의는 대중민주주의가 아니라 개인민주주의로 변했다. 종래 대중이라는 하나의 집단을 통해 공론의 장을 형성하던 대중민주주의와는 다르게 사익(私益)을 위해 정치에 참여하는 형태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정부재창조’, ‘정부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미국 연방 정부의 변화는 민주주의를 집단으로서의 대중이 아니라 개인들의 사익을 위한 참여 범위로 제한을 두는 꼴이 되었다. 정부는 고객이라는 시민에게 공공 서비스 선택의 기회를 하나의 유인으로 제공한다. 고객은 자신의 공공 서비스 선택 및 참여가 정치적 권한을 정부로부터 부여받았다고 인식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시민의 도움 없이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정치 엘리트의 새로운 기술을 그동안 오해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대중의 능동적 정치 참여를 수용할 수 있는 정부의 능력이 축소된 것이다. 사실 기업가적 정부 모형을 기반을 둔 정부재창조론은 정부의 목적을 격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러나 정부의 목적만 격하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의 정치 참여 목적 또한 점점 격화되고 있다.

 

 

 

 시민의 참여가 제한된 정부 혁신은 반쪽짜리 성공

 

책은 주기적 선거만으로 정부에 대한 시민의 통제권으로 행사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시민의 투표율이 점점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이 단지 시민의 정치적 무관심에서 기인한 심각한 문제로 볼 수 없다. 공익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정부를 견제하는 대중민주주의의 해체에서 비롯된 개인민주주의의 문제를 보여주는 심각한 단면으로 볼 수 있다. 민주주의가 발전되기 위해서는 시민이 주도적으로 정치적으로 조직되고 대표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민주주의는 잘못된 통치의 책임을 일상적으로 추궁하고 실질적으로 더 나은 정부로 재창조할 수 있는 전망을 갖게 된다.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민주주의는 ‘지루한 성공’만을 허용한다고 말한 바 있다. 매 정부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정부 혁신이 관료제적 정부를 변화시키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을지 몰라도 시민의 정치적 행사를 축소하고 정치 엘리트들이 시민의 힘을 도외시한다면 지루한 성공이 아니라 반은 실패한 반쪽짜리 성공이다. 오늘 당장은 잘못된 통치를 비판하고 저항해야 하겠지만, 결국엔 힘을 조직하고 대안을 형성하는 시민의 결속력이 없으면 민주주의는 존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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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경제학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영욱 외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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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의 세계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게 할까?

 

세계화란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국가 간 교류가 증대하여 개인과 사회집단이 갈수록 하나의 세계 안에서 삶을 영위해 가는 과정을 말한다. 국제화가 국민국가 간의 교류가 양적으로 증대되는 현상을 말한다면, 세계화는 양적 교류의 확대를 넘어서 현대 사회생활이 새롭게 재구성됨으로써 세계사회가 독자적인 차원을 획득하는 과정을 뜻한다.

 

『오래된 미래』『행복의 경제학』의 저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세계화의 역사를 3단계로 보고 있다. 초기 단계는 제국주의적 식민지화 시기에서 시작해서 두 번째 단계는 식민지 독립 이후 서구화된 신흥 국가의 등장이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에서 세계화는 경제, 정치, 문화 세 수준에서 동시적으로 그리고 상호연관을 이루면서 진행됐다. 경제적 수준에서 세계화는 교역·투자·통신 등이 확대되어 국가 간 상호의존이 증대하고 지구적으로 다자간의 협의·조정·협력 등이 강화되는 현상을 뜻한다. 경제의 세계화는 오늘날 세계화를 추동하는 기본 동력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제의 세계화 경향은 최근 더욱 두드러졌는데, 세계무역의 완전자유화를 주장하는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과 초국적 기업의 활동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여기서 전후 세계화를 주도한 주체로서 초국적 기업의 활동은 생산부문을 지구적으로 재배치하는 신국제분업을 통해 기존 국경의 의미를 축소시켜 왔다.

 

근대 경제학에서 전제해온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는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개인이다. 국제시장에서 한 국가의 국부(國富)를 평가할 때도 경제성장률과 GDP는 핵심도구로 사용됐다. 통상적인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행복 계산법은 단순하다. 소득이 높고 부를 많이 축적할수록 그 사람은 많은 이익을 얻고 더 행복해진다는 논리다. 소득이 높으면 직장과 사회에서 더 나은 지위와 위치를 차지할 기회가 많아져 삶에 대한 만족도가 더 높아진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통신기술의 발달은 경제활동의 범위를 지역에서 세계로 확장시켰다. 자립적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은 초국가적인 거대 기업과의 경쟁에서 밀려나 도시 빈민노동자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강대국들은 세계화를 빌미로 자유무역협정(FTA)을 강요하며 규제 완화를 요구한다.

 

세계화가 가져온 또 다른 폐해는 천연자원의 고갈과 환경오염이다. 수입과 수출, 생산과 소비의 과정에서 오염물질과 쓰레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환경 파괴는 가속도가 붙는다. 오염은 기후 변화를 가져오고 생태계를 파괴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세계화라는 명목으로 파괴의 속도전을 벌이는 기업과 정부가 있다.

 

이처럼 그동안의 경제의 세계화는 행복의 개념과 이익의 개념을 맞바꾸면서 경제와 행복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됐지만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세계화의 한계에 대한 논의가 국제적으로 매우 활발해지고 있다. 특히 세계화의 빠른 물결은 갈수록 심해질수록 빈부격차는 곳곳에서 사회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나의 행복을 위한 지역화 중심의 경제학

 

한 걸음 물러서 볼 때, 세계화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모두 가진 양면적인 과정이다. 세계화는 전지구적 불평등을 강화시키는 위기인 동시에 경제·문화적 삶을 향상할 새로운 기회다. 중요한 것은 세계화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갈수록 증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는 경쟁적으로 세계화를 외치며 정부는 개인이 당장 불행하고 힘들어도 국가의 경제성장을 위해 생산성 향상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논리를 당연하게 이해시켜 왔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과연 성장 중심의 세계화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의 문제다. 따라서 세계화에 대한 더욱 포괄적이고 깊이 있는 이해가 요청되며, 경제의 세계화가 낳은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더욱 적극적이고 다각적인 대응 전략 또한 모색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세계화' 외에는 다른 경제성장의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경제성장의 대안은 분명히 존재하며, 그것은 바로 '지역화'이다.

그가 주장하는 '지역화'란 자연과 사회를 파괴하고 있는 경제적 논리들을 반대방향으로 되돌리는 것으로, 경제활동을 인간적, 생태학적 요구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거대 기업에서 운영하는 대형 마트에서 소비하지 말고 지역의 소규모 시장에서 지역 상인에게 물건을 소비하면 상품의 이동으로 인해 발생하게 될 배기가스 같은 오염도 줄일 수 있다. 상품 변질을 막기 위해 사용되는 농약이나 방부제 사용도 피할 수 있어 소비자는 건강한 먹을거리를 더 싸게 얻고, 지역 생산자는 이익을 지역 발전에 환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태양열과 풍력을 이용한 에너지를 쓰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에 정부는 개발비를 더 많이 투자하고 다양한 형태로 지원해야 한다. 즉 한정된 자원을 써버리고 없애는 경제논리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형태로 재생산되는 소비활동을 하자는 것이다.

 

지역화 중심의 경제학은 '파괴의 소비'를 멈추고 지역이 주체가 되는 경제활동이다. 각각의 문화에서 다양성을 찾고 그 고유한 문화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면 '나'로 살아가는 게 행복해지는 것이 바로 '행복의 경제학'의 핵심이다. 다시 말하자면 ‘행복의 경제학’은 자연과 사람, 지역과 사람, 사람과 사람,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시작된다. 경제활동의 목적은 행복한 삶을 실현하는 것이며 목적을 상실한 채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국제적인 협력보다는 지역화 활성이 우선이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세계화 위기의 시대를 탈출할 수 있는 전략으로 WTO를 뛰어넘어 WEO(세계환경기구, World Environment Organization)을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제안한 WEO의 주요 원칙은 다음과 같다.

 

  ◉ 환경보호를 위한 법률을 만든다.

  ◉ 환경비용을 ‘내부화’ 한다.

  ◉ 사회적 외부성을 처리한다.

  ◉ 무역 문제에서 최종 결정권을 갖는 것은 기업이 아니라 주권 국가들이다.

  ◉ 다국적 기업이 지역에 기반을 두거나 지역화하도록 규제한다.

  ◉ 국제법을 만들어 작동시킨다.

  ◉ 갈등 해결 과정을 향상시킨다.

  ◉ 자본 흐름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p 262)

 

 

세계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국제적인 협력이 필요하지만, 일부 선진국의 WTO 체제 유지와 개별 국가 간의 이해관계 등의 문제를 고려하면 실현성이 그리 높지 않다. 호지는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군대 없는 코스타리카, 국민총행복 지수가 가장 높은 부탄, 생태마을운동을 지지하고 있는 세네갈 등을 WEO 가입 가능성 높은 국가로 꼽고 있다. 하지만 이들 국가가 힘을 모아 주도적으로 WEO를 창설한다 해도 이들 국가의 정치 지도력으로는 WTO 체제에 익숙해진 국가들을 WEO에 가입하게 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호지의 '행복의 경제학'이 이론적 대안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협력보다는 지역경제 발전이 우선되어야 한다. 지구를 보지 말고, 지역을 봐야 하는 것이다. 경제성장 일변도이고 국가주도적인 발전행정의 폐해를 극복하면서 지역화를 활성하는 전략이 수립되어야 한다.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삶의 방식을 덜 소비하고 덜 파괴하는 방법으로 바꿔야 하며 이를 위해 올바른 교육이 지속해야 한다. 즉, 생산과 소비의 균형, 지방과 도시의 균형, 사람과 자연이 공존을 이루는 삶을 영위해야 한다. 지역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 지역 중심의 경제활동으로 하나라는 연결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 행복한 경제를 만들고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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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창 - 대한민국은 청춘을 위로할 자격이 없다
임지선 지음, 이부록 그림 / 알마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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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시궁창`의 준말이다. 미국의 유명 래퍼 에미넴이 주연한 영화 <8마일>에 나온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라는 대사에서 유래했다. 현시창’. 갈 곳 잃은 현대 젊은이의 좌절과 체념을 적절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꿈도 많고 이루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일도 많지만 꿈을 이루기는 힘들고 앞에 놓인 현실은 보잘것없다는 대조와 격차가 느껴진다.

 

우리 부모 세대는 열악한 현실 속에서 꿈의 크기마저 제한되는 삶을 살면서도 사회가 급성장하면서 기대 이상으로 성장하는 사례가 많았다. 반면에 부모 세대의 자녀인 우리 청년 세대는 유례없는 풍요 속에 살지만 꿈을 이뤄가기엔 사회의 꽉 짜인 틀이 무겁게 느껴진다. 격심한 스펙 경쟁에서 살아남아도 크게 나아질 것이 있는지조차 의문이 든다.

 

누구나 계급 상승을 위해 악착같이 뛰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특히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우리 청년 세대들은 고액의 대학등록금, 좁은 취업의 문으로 인해 낭만적인 대학 생활 대신 아르바이트에, 외국어와 공모전 같은 스펙 쌓기로 내몰린다. 그것도 모자라 사회생활을 학자금 대출의 빚더미에서 시작하고, 취업준비생으로 몇 년을 보내기 일쑤다. 취업을 해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계약직이나 비정규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출판가에는 청춘 마케팅이 대세다. 청춘의 절반은 월 평균 88만원을 받는 비정규직이며 고용불안과 조기 퇴직 등 앞 세대가 겪었던 불행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이 불행이 능력이 없거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88만원 세대를 한 번 더 절망케 한다. 청춘 마케팅의 핵심은 위로 마케팅이다. 위로는 '희망 없음'이라는 88만원 세대의 불치병을 달래주는 진통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구조적인 성찰 없는 위로가 근본적인 방향을 제시해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프니까가 청춘이다'라고 그 현란한 수사로 위로하기에는 한국의 청춘들이 너무나 지쳐있고 좌절의 심연이 너무 깊다. 독일의 문학가 괴테는 눈물 섞인 빵 한 조각을 먹어보지 못한 자는 인생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 임지선 한겨레 기자가 발견한 스물네 편의 사연 속에 등장하는 젊은 얼굴들은 고상한 청춘의 번뇌, 고민, 방황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아픈 청춘들이다.

 

대형 철강회사에서 근무하던 29세의 젊은 청년이, 5m 높이의 용광로 위에서 고철을 녹이는 작업을 하던 중 1600의 용광로에 추락하여 사망하는 너무나 안타깝고 슬픈 일이 있었다. 당시 인터넷 게시판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한 누리꾼이 쓴 조시가 그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다. 끝내 동상은 세워지지 않았지만, 수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리며 열악한 3D 작업환경 속에서 일하는 청년 노동자의 고달픈 삶을 생각하게 하는 시였다.

 

광온(狂溫)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도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못을 만들지도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모두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 '그 쇳물 쓰지 마라' 중에서 (p 22~23) -

 

카이스트에서 일어난 학생 4명의 자살은 '경쟁'이라는 벼랑 끝에 내몰린 청년 세대의 현실을 보여주었다. 카이스트에 들어가는 건 쉽지 않다. 이곳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이미 오랜 동안 경쟁을 해 왔다. 그렇다보니 이곳에서의 경쟁도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학생들도 상당수일 것이다. 십수 년을 경쟁만 하고 살아 온 이들에게 경쟁은 어찌보면 인생에서 필수적인 항목일수 밖에 없다. 그러나 동기부여를 위해 경쟁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연이어 터진 심각한 사고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공짜는 없다"고 말하는 카이스트 전 총장의 강경한 입장은 무섭게 느껴진다. 한 마디로 현 사회에서 경쟁은 성공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 설사 이로 인해 누군가가 불미스러운 일을 당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더 무서운 사실은 전 카이스트 총장의 반응이 아니라 이 사건을 바라보는 대중의 반응이다. 카이스트 자살 사건으로 인해 한 때 경쟁중심주의 교육의 문제점을 이슈화했지만, 그것도 잠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미친듯이 경쟁을 부채질하는 '정상적인 삶'으로 돌와왔다.

 

『현시창』속 스물네 편의 사연은 절망적이면서도 우울하다. 노동, 돈, 경쟁의 프리즘으로  청춘의 어두운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희망적인 위로 한 마디도 없다. 저자는 위로 대신에 '현시창'을 "현실(現)을 직시(視)하고, 청년 세대에게 우울한 미래를 안겨다 주는 나쁜 사회와 싸우기 위해 창(槍)을 들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선동적인 문구만 가지고 '청춘이 절망하는 나쁜 사회'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다. 이제는 절판이 된 우석훈 교수의 『88만원 세대』을 꽤 인상 깊게 읽은 독자라면 이 문구를 기억할 것이다. '토플 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라'. 우 교수는 『88만원 세대』절판을 선언하면서  "죽어도 바리케이트를 치지는 못하겠다는 20대만 더 많아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청춘이여, 정신 좀 차려라"고 말하며 청년 세대를 향한 일갈도 덧붙였다. 청년 세대의 얌전한 모습에 적잖이 실망한 나머지 『88만원 세대』의 저자는 청년들이 짱돌을 들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고 절판까지 언급했다. 
 
나쁜 사회에 맞설 수 있는 창과 짱돌을 들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88만원 세대가 청년 담론을 제기한 지도 5년이 지났다. 가야 할 길을 찾기 위해 길 주변을 확인해야하듯이 청년 세대가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나아갈 길을 찾으려면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내가 가는 길을 막는 '나쁜 사회'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창과 짱돌을 손에 쥐고 있어도 무슨 소용이랴. 

 

청년 세대가 착취를 당한다고 해서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로지 돈을 목표로 안정만 추구하는 영악한 젊은이',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인간', '나약한 세대'. 지금의 30~40대, 소위 '386 세대'가 말하는 '88만원 세대'는 이렇다. 이러한 기성세대의 지적에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고 반박할 수 있겠다. 하지만 청년 세대 중에서도 자신이 처한 암담한 현실을 모를뿐더러 정말 자신보다 '현실이 시궁창'인 청년들의 분노에 귀담아 듣고 공감하는 이가 아직은 드물다. 그저 자신과 관련 없는 남 이야기로 치부한다.  

청년 세대가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보는 차별의 창(窓)을 부수는 것이 중요하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속한 청년 세대에 대한 역지사지, 나아가 감정이입의 노력이 중요하다. 정말 고통 받는 청년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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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 공지영의 첫 르포르타주, 쌍용자동차 이야기
공지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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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뺏기 놀이’라는 게임이 있다. 사회자가 신호를 보내면 즐겁게 춤추며 돌던 놀이의 참가자들은 개수가 하나 모자란 의자로 달려가 앉아야 한다. 의자는 하나씩 줄어들고, 결국 둘이서 하나의 의자를 차지해야 하는 순간이 오게 된다. 거기서 즐거운 춤추기는 끝난다. 어릴 적 즐거웠던 의자 뺏기 놀이가 어른이 되면서 '경쟁'으로 인식된다. 마지막 의자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경쟁의 상대'로 봐야하는 것을, 어린 시절엔 미처 알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부터 시작된 쌍용자동차 노조의 ‘의자 뺏기 놀이’는 끝났다. 그러나 너무나도 길었던 의자놀이에 최후의 승자는 없다.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 모두 잔인한 상처만 남았을 뿐이다.

 

지난 2009년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벌어진 77일간의 옥쇄파업은 경찰의 강제 진압을 거쳐 노사가 해고자 일부를 무급휴직으로 돌리는 데 합의하면서 상황은 마무리됐다. 쌍용차 사태의 개요다. 시간이 3년 넘게 흐르면서 잊힌 기억을 되살린 건 ‘죽음 행렬’이다. 그 기간 쌍용차 관련자 중 22명이 사망했고, 그 중 12명은 자살했다. 파업의 후유증은 현재진행형이다.

 

정리해고란 경영이 악화한 기업이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구조조정을 할 때 종업원을 해고할 수 있는 합법적인 제도다. 하지만 기업들이 아무 때나 정리해고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생존을 위해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있을 때에만 정리해고를 단행할 수 있다. 정리해고하려면 사전에 근로자들에게 충분히 상황을 설명하고 공정한 기준에 따라 대상자를 선정해야 하며, 해고 50일 전에 해당자에게 알리고 고용노동부에도 신고해야 한다. 노동법은 근로자들에게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 노동 3권을 보장하는 대신 사측엔 정리해고나 직장폐쇄 등의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정리해고에 대해 노동단체 등은 ‘해고는 일종의 살인’이라며 강하게 반대한다. 이에 대해 기업 측에선 정리해고해서라도 경쟁력을 높이지 않으면 결국은 회사가 망해 모두가 피해를 본다고 주장한다.

 

쌍용차 문제는 근로자들의 삶의 터전이고 대한민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쌍용자동차 회사와 그 종업원, 그리고 이 회사에 투자한 주주, 채권자들의 시각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이라도 쌍용차는 노사합의 사항을 이행하고, 적반하장격의 노조와해 시도를 멈춰야 한다.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입힌 것에 대해서도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적극적인 치유책을 마련해야 한다. 기업의 경쟁력은 경영진에만 달린 게 아니다. 노사가 신뢰와 타협의 토대 위에서 힘을 합쳐 피와 땀을 흘려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말고 고통을 함께 나누자’는 따뜻한 연대의 손길을 노동자들에게 내미는 일이다.

 

그리고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진행된 ‘의자놀이’를 대중과 언론은 더는 방관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의 처절한 목소리를 우리는 그냥 무심코 지나치고 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쌍용차 출신’이라는 낙인이 워낙 강해서 일자리를 가질 수 없도록 이미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일자리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대기업에서 추락했다는 무기력증과 사회적으로 봉쇄됐다는 생각 등이 겹치면서 해고노동자들에게 이중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현존 국가와 자본의 구조가 갖는 폭력성과 그 비인간성도 문제이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이미 공감의 능력과 감수성을 잃어버린 우리 사회, 그리고 그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다. 쌍용차 사태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죽음에 대해 안타깝게만 여긴다고 해서 공감이라고 할 수 없다. 감성에 매몰된 대중과 정치의 관심은 눈물 언저리만 맴도는 공감을 가장한 방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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