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동의 수필집 문주반생기(최측의농간, 2017) 193쪽에 보면 눈에 띄는 표시가 있다. 젊은 독자들의 눈에는 잘못 인쇄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중장년층 독자는 이 표시가 무슨 의미인지 알 것이다. (? 그렇다면 이걸 아는 나도 중장년층 독자란 말인가?)

 

 

 

 

 

 

 

 

 

 

 

 

 

 

 

 

 

 

 

* 양주동 문주반생기(최측의농간, 2017)

* 최남선 백팔번뇌(태학사, 2006)

   

 

주지하듯이 백팔번뇌는 그때 그가 조선이란 에게 바친 뜨거운, 뿌리 깊은 사랑괴로움의 노래로서, 그의 대표적 시조집으로, 조그만 책자이나 시조사상의 한 중흥 기념탑이 될 만한 역작이다. 거기는 춘원, , 위당 등 당시 문단 거벽들의 서(), ()이 즐비 되어 있고, 끝에 석전 박한영 사()의 한시 명작 제사(題詞)가 실려 있다.

 

 

 

백팔번뇌육당 최남선1926년에 발표한 시조집이다. 이 책이 우리나라 최초의 시조집으로 잘못 알려지는 바람에 육당은 국내 시조 역사의 시작점에 놓인 인물로 '과대 평가'를 받았다. 정확하게 바로 잡으면 백팔번뇌우리나라 최초 근대 시조집이라 해야 한다.

 

 

 

 

 

 

 

 

 

 

 

 

 

 

 

 

 

 

* 최남선, 황충기 해제 육당본 청구영언(푸른사상, 2013)

 

 

 

우리나라 최초의 시조집은 1728김천택이 편찬한 청구영언이다. 청구영언은 총 7종의 이본(異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한 권이 육당의 손을 거친 육당본이다. 백팔번뇌서문에 육당은 1904년에 자신이 시조를 쓴 사실을 언급했다. 이 문장을 근거로 연구가들은 육당이 최초로 현대 시조를 썼다고 주장하지만, 이 작품의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다. 1906721일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대구여사(大丘女史, 필명만 알려졌을 뿐 정확히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혈죽가(血竹歌)를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 시조로 보고 있으며 이 시조가 발표된 721일을 기념해 시조의 날로 제정되었다.[1]

 

각설하고, 책 속 본문에 있는 표시를 주목해보자. 본문에 가 있다. 어떻게 읽어야 할까? 벽원? 벽 동그라미? 내가 추측하건데, ‘벽초 홍명희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육당, 춘원 이광수와 더불어 조선 3대 천재(동경삼재, 東京三才)’로 이름을 날렸다.

 

벽초가 쓴 임꺽정은 일제강점기 최대의 대하소설로 손꼽힌다. 이 작품은 1928년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일제 탄압으로 조선일보가 강제로 폐간된 1939년에 연재가 중단되었다. 임꺽정1940년 월간지 <조광>에 옮겨 다시 연재되었으나 끝내 미완성으로 남았다. 벽초는 월북하여 김일성의 공산당 정권 수립을 돕는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북한에서의 행적 때문에 벽초는 남한에서 불순한 월북 작가로 낙인찍혔고, 임꺽정은 금서로 지정되었다.

 

분단 이후로 반공 정책이 더욱 강하되어 월북 작가 및 예술가들은 완전히 잊혀졌다. 심지어 그들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그래서 월북 작가의 이름이 인쇄물에 찍히면 이름 가운데 글자가 있는 자리에 ‘O’ 또는 ‘X’ 표시를 했다. 문주반생기가 발표된 해는 1960년이다. 냉전 반공체제를 유지했던 이승만 정권 시절이다. 그런데 6·25전쟁 당시 월북한 춘원의 이름은 멀쩡하게 나와 있다. 사실 춘원은 자발적으로 북한으로 간 것이 아니라 북한 인민군에게 끌려갔다. 이 시기의 춘원은 병으로 심신이 쇠약한 상태였고 전란이 한창이던 1950년에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 권영민 엮음 정지용 전집 1~3(민음사, 2016)

 

 

 

그런데 내가 봐도 월북 인사 이름 언급의 기준이 모호하다. 아니, 너무 불공평하고 억지스럽다. 반공 정부는 월북 인사의 행방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무조건 북한으로 건너간 인사들을 친북 인사로 규정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시인 정지용이다. 1988년에 월북 작가 및 예술가 해금 조치가 내리기 전까지 정지용은 잊힌 이름이었고, 어정쩡하게 X으로 알려졌다. 정지용의 시가 수능 시험 지문으로 출제되는 지금의 상황을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 김진송 이쾌대(열화당, 1996)

* 국립현대미술관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돌베개, 2015)

 

 

 

최근 재조명받고 있는 화가 이쾌대도 분단의 비극에 희생당한 불운한 인물이다. 이쾌대는 뛰어난 서양화가로 인정받았으나 여러 복잡한 사정 때문에 월북을 선택했다. 남한에서 그의 이름은 였다. 1991년에 그의 이름을 내건 전시회가 열렸다. 이쾌대는 경북 칠곡 출신이며 1928년 서울의 휘문고보(휘문고등학교 전신)에 진학할 때까지 대구에 거주했다. 이쾌대의 형 이여성은 대구에서 항일운동을 한 공산주의자이며 동생처럼 그림을 출품한 적이 있는 화가이다. 그도 월북하여 북한에서 학자 생활을 했으나 숙청당했다.

 

 

 

 

 

 

 

 

 

 

 

 

 

 

 

 

 

* 김상숙 10월 항쟁(돌베개, 2016)

 

 

 

현재의 경북, 대구는 반공 우파의 성지로 알려졌지만, 일제 강점기 대구는 좌파의 성지였다. 1946‘10월 항쟁은 미 군정의 식량 정책, 친일 인사 등용 등에 항의한 좌파 독립운동가와 민중들이 일으킨 대규모 무장 시위였다.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항쟁에 가담한 독립운동가와 민간인들이 사망했으며 남로당(남조선노동당) 간부 박상희도 경찰의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박상희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형이다. ‘빨갱이를 무서워하는 어르신들은 대구 경북이 자랑하는 뛰어난 월북 화가가 있다는 사실을 아시려나? 이쾌대가 누군지 모를 수 있다. 하지만 단지 북한에 건너갔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욕할 수 없다. 씁쓸하지만 아직도 과거의 이념에 갇힌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월북 인사들의 이름조차 입에 담기 싫어할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을 좋아하는 어르신들은 죽은 형의 복수를 위해 남로당에 가입했고, 국군 내 남로당 프락치로 활동한 군인 박정희를 아시려나? ‘빨갱이를 엄청 싫어하는 그분들의 단순한 기준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활동한 적이 있는 박정희 대통령도 빨갱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역사를 철저히 숨기고, 모른 쇠하는 민족 역시 미래는 없다. 아니, 답이 없다.

 

 

 

 

 

[1] [721일은 시조의 날현대시조 100주년 맞아 선포] 국민일보, 2006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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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맥(漂麥) 2017-12-28 1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중장년층 독자’가 되고 마는군요...^^

cyrus 2017-12-28 17:39   좋아요 1 | URL
저는 아재 독자입니다... 요즘 젊은 독자들이 선호하는 젊은 작가들이 누구 있는지 잘 몰라요.. ㅎㅎㅎ

[그장소] 2017-12-28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책이 자꾸 보인다 싶었는데 개정판으로 다시 나왔군요! 범우사 ㅡ 책으로 알고 있었는데!!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 ~ 가 힙했다면 과거엔 양주동 님의 문주반생기도 만만찮죠!!

cyrus 2017-12-28 17:41   좋아요 1 | URL
초판본의 옛 글자를 고치지 않고, 그대로 살려서 나왔습니다. 이해 안 되는 단어를 설명하는 각주가 있지만, 조금 읽기 힘들었어요. <안녕 주정뱅이>는 제목만 들어봤습니다. 제가 젊은 저자나 작가의 책을 잘 안 읽는 편이에요. ^^;;

[그장소] 2017-12-28 17:46   좋아요 1 | URL
권여선 작가는 젊은 ( 등단 10년정도를 기준이라고 하면) 작가보단 중견 작가에 가까운 듯 싶지만 , 취향이겠죠 ..아마도~
멋진 작가입니다 . 이 권여선 작품들도 ..
개정판이 표지도 그렇고 큰 변화가 느껴지지 않아요 . 아마 그걸 노린 마케팅 같기도 하네요. ^^

레삭매냐 2017-12-28 1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해방 공간에서 대구가 한 때 동양의 모스크바
로 불린 적도 있다고 하네요.

지금 한창 읽고 있는 <조선공산당 평전>을 보
니 안동 풍산 소비에트에 대해서도 나오고요.

반공 보수우파의 성지가 된 모습과는 격세지감
을 느낀다고나 할까요.

cyrus 2017-12-28 17:45   좋아요 1 | URL
대구에서 가장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는 합동북이라는 헌책방에 가면 8, 90년대에 나온 마르크스, 레닌 관련 서적들을 많이 볼 수 있어요. 사회주의 관련 출판물이 한창 나왔던 시절에 대구에서도 사회주의에 관심 많은 독자들이 많았을 거예요.

지금행복하자 2017-12-28 14: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르는저는 청년? 아니죠~ 지식이 짧은거라죠~^^

cyrus 2017-12-28 17:53   좋아요 1 | URL
지식의 범위보다는 세대 차이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

2017-12-28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28 17:49   좋아요 1 | URL
대구는 서울과 비교하면 문화적, 경제적 면으로 뒤쳐져 있어요. 이런 열악한 곳에 대구 출신 문인들의 모임, 일반인들의 독서 모임이 이루어지는 서점 등이 생겨서 위안이 되긴 합니다만 그래도 현실은 시궁창입니다... ^^;;

이하라 2017-12-28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중장년층 독자 안하겠습니다--; 초보 독자로 남을래요^^;;

cyrus 2017-12-29 08:04   좋아요 0 | URL
나이가 들어서도 스펀지로 흡수하는 것처럼 신선한 지식을 흡수할 줄 아는 젊은 독자가 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