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가 등장하기 전 이탈리안 반도에 에트루리아인이 살고 있었다. 에트루리아(Etruria)는 이탈리아 중부에 있던 고대 국가다. 에트루리아인의 역사를 알려줄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서 그들의 기원을 놓고 다양한 주장이 나왔다.
* 헤로도토스, 천병희 역 《역사》 (도서출판 숲, 2009)
* 헤로도토스, 김봉쳘 역 《역사》 (길, 2016)
헤로도토스(Herodotus)는 에트루리아인의 선조가 소아시아(아나톨리아 반도)의 고대 왕국 리디아(Lydia)인이라고 주장했다. 2007년에 유전자 DNA 검사 결과 헤로도토스의 견해가 사실임이 확인되었다.[1]
*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1》 (푸른역사, 2013)
*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2》 (푸른역사, 2014)
테오도르 몸젠(Theodor Mommsen)은 이탈리아 초기 민족을 ‘이아퓌기아인’, ‘에트루리아인’, ‘이탈리아인’으로 분류했다. 로마에 에트루리아의 문화 및 관습을 전파한 로마의 전설적인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Tarquinius Priscus)는 에트루리아인으로 알려졌는데, 몸젠은 이 전설적인 내용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트루리아인에 대한 몸젠의 평가가 야박하다.
몸젠의 역사관은 실증주의 역사학이다.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가 이끈 실증주의 역사학은 객관적으로 증명 가능한 사료에 주목한다. 랑케는 오로지 실재했던 사실만을 기술하고자 했다. 사료에 대한 비판적 검증을 통해 그는 문헌 안에서 역사적 사실만을 가려내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랑케의 후계자들은 실증주의 역사관을 교묘히 이용하여 애국심을 강요하는 민족주의를 표방했다. 몸젠은 실증주의에 입각해 로마의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술했지만, 역사적 상상력이 반영된 전설이 연구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몸젠은 ‘그리스 정신을 이어받아 발전한 로마’를 치켜세우는 반면 에트루리아를 ‘그리스 정신을 어설프게 흉내 내는 2% 부족한 나라’로 평가했다. 그는 ‘실증주의’라는 학문적 외피를 쓴 채 로마 문명의 우월성을 부각하기 위해서 결과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에트루리아 문화를 저평가했다.
* 미르치아 엘리아데 《세계종교사상사 1》 (이학사, 2005)
* 미르치아 엘리아데 《세계종교사상사 2》 (이학사, 2005)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종교가 있었고, 주술적 성격을 갖는 종교의식이 성행했다. 고대 그리스 도시 엘레우시스 주민들은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Demeter)를 숭배했고, 1년에 두 번씩 여신을 숭배하는 축제를 벌였다.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그리스인들의 관심은 ‘엘레우시스 비의(Eleusinian Mysteries)’라는 비밀종교를 탄생했다. 로마에는 주신(酒神) 바쿠스(Bacchus,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에 해당)를 숭배하는 밀교가 유행했다. 바쿠스는 이탈리아 남부와 로마 및 에트루리아 등의 이탈리아 전반에서 널리 숭배되었다.
에트루리아 인들은 전조와 기적을 해석하는 데 몰두했다. 번개 해석법과 내장 해석법 등 비의(悲意) 해석법이 생겨났으며, 이런 것들에서 우리는 복채를 뜯어내려는 욕심을 엿볼 수 있다. (1권 제12장 258~259쪽)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인간이 하나의 존재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종교 행위’라고 말했다. 고대의 종교 제의는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겨내고 풍요로운 희망을 꿈꾸는 염원이 담겨 있다. 에트루리아의 주술 문화를 ‘인간의 욕심’이 만들어 낸 부정적인 문화로 보는 것은 부당하다.
무역과 해적질로 일찍이 커다란 부를 축적한 에트루리아에서만 오직 예술이, 혹은 그렇게 부르길 원한다면 기술이 일찍이 뿌리내렸다. (1권 제15장 336쪽)
에트루리아 인들의 작품은 라티움이나 사비눔 사람들에 비해서 그 합목적성이나 실용성뿐만 아니라 내면성과 아름다움에 있어서도 크게 뒤떨어진다. 에트루리아 사람들은 희랍의 호화 건축을 모방했으되 저열한 수준이었다. 에트루리아 예술은 수공업적 훈련과 적응의 숙련도를 보여주는 주목할 만한 증거일 뿐, 중국 사람들처럼 천재적 수용의 증거라고 할 수는 없다. 이탈리아 예술의 역사에서 에트루리아를 맨 앞자리에서 맨 뒷자리로 밀어내 버릴 것을 단호하게 결심해야 할 것이다. (1권 제15장 339~340쪽)
에트루리아 예술 작품의 일반적 성격은 재료와 양식에 있어 일정하게 나타나는 지나친 천박함과 내적 발전의 완전한 결여다. 희랍 장인이 대강 소묘한 곳에 에트루리아의 제자는 학생다운 땀을 쏟았던 것이다. 희랍 작품들의 가벼운 재료와 절제된 비례 대신 에트루리아 작품들에선 과시적 크기와 사치스러움 혹은 단순한 진기함만이 강조된다. (2권 360쪽)
몸젠은 에트루리아 미술을 로마 미술보다 뒤떨어진 것으로 취급했다. 특히 《로마사 1》에서 몸젠은 에트루리아 미술을 이탈리아 예술사의 뒷자리로 밀어내려는 단호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의 견해만 보고 에트루리아 미술을 후진적 문화로 평가해선 안 된다. 에트루리아 미술은 그리스 미술에 바탕을 두었지만, 그리스 미술을 로마에게 전해준 에트루리아 미술의 영향력를 무시할 수 없다.
* 낸시 H. 래미지, 앤드류 래미지 《로마 미술》 (예경, 2004)
* 토마스 R. 호프만 《로마 미술, 어떻게 이해할까?》 (미술문화, 2008)
몇몇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들과 무역을 한 에트루리아는 그리스 문화를 영향을 받을 수 있었고, 축적한 부를 통해 사치스러운 예술품 또는 장신구를 제작했다. 하지만 에트루리아 미술은 그리스 미술을 어설프게 모방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리스에 대리석과 석회암이 풍부했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보존성이 뛰어난 훌륭한 건축물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에트루리아는 대리석과 석회암처럼 단단한 재질의 암석이 부족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흙벽돌과 목재를 건축물 재료로 사용했다. 그래서 온전한 형태의 에트루리아 시대 건축물이 남아 있지 않고, 겨우 파편만 남아 있을 뿐이다. 만약에 에트루리아가 대리석과 석회암 지대였다면 그리스와 로마 중심으로 서술된 고대 미술사의 내용이 달라졌을 것이다. 에트루리아의 조각 예술은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표현과 양식을 발전시켰다. 에트루리아 등신상은 그리스 등신상보다 생동감이 느껴진다.
에트루리아 미술이 로마 미술의 발전 양상에 영향을 끼쳤는지는 더 많은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출토된 유물을 토대로 에트루리아 미술의 수준을 확인해보면 에트루리아 미술과 로마 미술은 같은 뿌리에서 나왔음을 추정할 수 있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 나름의 고유한 가치와 역할과 개성이 있다. 그러므로 어떤 한 시대에 등장한 예술은 그 시대가 갖고 있는 독자적인 개성에 대한 이해이며, 그 시대의 예술에 대한 평가는 그 시대의 가치에 기초해서 이뤄져야 한다. 몸젠은 사실과 해석이 공존하는 절충주의 방식으로 에트루리아 미술을 평가했으나 자신의 감상에 치중한 주관적 견해에 머무르고 말았다.
[1] [伊연구팀 “결국 헤로도투스 견해가 맞았다”] 연합뉴스, 2007년 6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