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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59
조리스-카를 위스망스 지음, 유진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2월
평점 :
컬트(Cult)는 특정 인물이나 사물에 대한 광적인 호응을 의미하는 단어다. 소수의 팬을 형성하고 있는 독특한 문화를 말할 때 쓰인다. 사실 컬트 문화의 정의는 모호하며 그 범주를 한정 짓기도 어렵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컬트 문화는 ‘세속적인 주류에 향한 반기’를 목표로 정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컬트’가 들어간 작품 대부분은 난해하고, 재미가 없다. (예외로 재미 있어서 대중의 인기를 받는 컬트물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록키 호러 쇼') 컬트 문화는 기존 사회의 관념과 가치를 뒤엎으면서 전통적인 서술 구조를 깨뜨린다. 황당한 상황 전개와 예상할 수 없는 결말이 있는 컬트영화 근저에 반체제, 반권위와 같은 가치 전복의 비수가 감춰져 있다. 소수의 독자가 인정하는 소설은 ‘컬트 소설’로 분류된다.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Joris-Karl Huysmans)의 《거꾸로》(문학과지성사, 2007)는 ‘컬트 소설’로 불릴 만하다.
데 제쎙트(Des Esseintes)는 세상에 유행하는 문화나 취향에 염증을 느낀 젊은 귀족이다. 그는 솟구치는 욕망 · 열정을 지녔으나 분출구가 막혀버린 소외된 변두리 인생의 ‘난쟁이’다. 변두리 인생이 현실을 탈출하는 방법은 현실과의 정면 대결이 아니라 환상으로의 도피다. 데 제쎙트는 약 1년간 자신이 만든 별장(인공 낙원)에서 생활한다. 《거꾸로》는 ‘낡은 세계’로 상징되는 19세기 말 시대를 더 이상 투쟁으로 개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을 환기한다. “자! 무너져라, 사회여! 제발 죽어라, 낡은 세계여!”라는 데 제쎙트의 절규는 소설의 핵심 메시지다.
《거꾸로》 출간 당시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분노했고, 데 제쎙트를 ‘별난 편집증 환자’로 취급했다. 《거꾸로》는 초현실주의적 환상과 독창적인 감각이 넘치는 실험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1884년에 나온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시계 부품으로 조립된 인조 물고기가 헤엄치는 수족관, 알록달록한 보석이 박힌 ‘금박 거북이’, 여러 가지 종류의 술통으로 이루어진 ‘미각 오르간’ 등이 눈에 띈다. 데 제쎙트의 꿈에 등장한 여성들이 예사롭지 않다. 끔찍한 몰골을 한 매독의 여신, 몸에 식물이 자라나는 꽃의 여신에 대한 묘사를 보노라면 작가가 무슨 의도로 이런 가상 인물을 창조했는지 궁금하게 느껴질 정도다. ‘엽기’라는 말이 유행하기 전에 만들어졌지만, 난해한 광기로 가득한, 조금 엽기적이고 현대적인 소설이다.
작가는 데 제쎙트가 겪게 된 일과 그가 느끼는 다양한 생각들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현실과 환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기존 소설 서사 구조를 부쉈다. 독자들이 《거꾸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길어진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세기말을 궤도로 삼아 해석 불가능한 몽상의 향연이 펼쳐지지만, 댄디즘(dandyism: 타인에게 정신적 우월감을 표출하는 태도), 보들레르(Baudelaire),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등 상징주의를 표상하는 문학적 요소와 이미지도 풍성하다. 데 제쎙트의 독서 편력과 미적 취향은 기존 사회와 기성세대의 관습 혹은 가치관으로부터 일탈한 하위문화(counter-culture)에 가깝다. 보들레르, 포, 르동 작품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주제는 일상의 규칙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분방함과 이채로운 것을 탐닉하는 것이다. 기존 질서를 부정하는 살인 · 광기 · 환상 등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소재를 스스럼없이 취한다. 일반 독자들이 상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가치와는 다른 소재들이다.
데 제쎙트가 지향하는 세계는 타인과 구별되는 자기만의 정체성을 설정 가능한 자유로운 사회이다. 따라서 ‘상식적인’ 타인들로부터 인정받기에는 무리가 있다. 세상의 논리와 도덕률에 어울리지 않는다. 작가도 데 제쎙트의 한계를 이해하고 있다. 아무리 난쟁이가 대중적인 관심을 받는 유행 문화를 멸시하고, 거금을 들이면서 ‘인공 낙원’을 꾸며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저항은 ‘절망’에 이르는 자해일 뿐이다. 그럴 때 데 제쎙트와 같은 상황에 부닥친 소수의 난쟁이에게 환상을 꿈꿀 권리라도 있어야 한다. 상상력은 치유를 위한 것이다. 상상력은 몸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마약이 아니다. 상상력은 현실에 갇힌 진짜 의식을 깨우는 약이다. 상상력이 현실을 견뎌내는 힘이라고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