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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남성성 ㅣ 이매진 컨텍스트 52
주디스 핼버스탬 지음, 유강은 옮김 / 이매진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나는 미니애폴리스에 강연을 하러 가는 길에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비행기를 갈아탄 일이 있다. 나는 과감하게 여자 화장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내가 칸을 찾아 들어가자마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 열어요, 경비원 여기요!” 금세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있었다. 이번에도 어떤 여자가 나를 남자나 소년으로 오인하고 경비원을 부른 것이었다. 내가 입을 열자마자 문 앞에 있던 두 경비원은 실수를 깨닫고 우물우물 사과를 하고는 자리를 떴다.[1]
이 황당한 사연의 주인공은 퀴어 이론(queer theory: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섹슈얼 등 성 소수자 중심의 담론을 연구하는 학문)을 연구하는 주디스 핼버스탬(Judith Halberstam)이다. 현재 그의 이름은 ‘잭(Jack) 핼버스탬’이다. 핼버스탬은 ‘남자 같은 여자’다. 그의 남자 같은 외모 때문에 여자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변태 취급을 당해 쫓겨날 뻔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화장실을 성별 이분법으로 나눴을 때 성 소수자들은 난감한 상황에 부닥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상황에 심각하게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의 성 정체성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충분히 여성스럽다고, 혹은 남성답다고 여길 것이며 어떻게 하면 자신의 남성성을 혹은 여성성을 더 드러나게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게 보통의 우리다.
하지만 잭 핼버스탬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정말 여성이라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남성이라고 생각하나요? 몸은 여성인데 성 정체성은 남성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어떤 이는 그의 질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성 소수자는 여전히 이해받지 못한다. 남성도 여성이 아닌, 제3의 성(Third gender)[2]을 가진 이들에 대해 우리는 아직도 낯설고, 특이한 존재로 바라본다.
《여성의 남성성(famale masculinity)》(이매진, 2015)은 성 이분법을 깨뜨리는 퀴어 담론을 통해 대중문화 속 ‘여성의 남성성’을 분석한 책이다. 퀴어 이론이 낯선 독자라면 이 책에 나오는 퀴어 용어와 퀴어 문화를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책의 옮긴이가 친절하게 주를 달아 설명하고 있지만, 방대한 내용을 수월하게 따라가기 위해선 이 책을 읽기 전에 기본적인 퀴어 용어를 숙지하는 것이 낫다.
퀴어(Queer)의 사전적 의미는 ‘기묘한, 이상한, 괴상한’이다. 처음에는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뜻으로 사용됐지만 1980년대 이후 동성애 운동가들에 의해 긍정적으로 수용된 단어이다. 여성 역할을 하는 게이를 보텀(Bottom), 남성 역할의 게이를 톱(Top)이라 부른다. 레즈비언 남성 역할은 부치(Butch), 여성 역할은 펨(Femme)이라 칭한다. 그러나 이는 동성애를 이성애 규범성(heteronormativity)으로 본 것이고, 동성애를 성애의 역할에 한정시킨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드랙 킹(Drag King)과 드랙 퀸(Drag Queen)은 각각 단순하게 번역하면 남장 여자, 여장 남자다. 이들은 공연 행위를 통해 반대의 성이 되거나 중간자적 성의 경계를 즐긴다. 트리바드(tribade)는 레즈비언의 동의어이며 레즈비언 간의 비삽입 성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트랜스젠더(Transgender)와 트랜스섹슈얼(transsexual)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지만 조금씩 다르다. 먼저 트랜스섹슈얼은 정신적인 성에 육체적인 성을 일치시키려는 사람, 즉 성호르몬 투여와 성전환수술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트랜스젠더는 꼭 수술이나 성호르몬을 투여하진 않더라도 한 사회에서 요구하는 젠더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포괄하는 의미로 폭넓게 사용된다. MTF(male-to-female) 트랜스여성은 남성에서 여성의 몸으로 전환한 트랜스젠더, FTM(female-to-male) 트랜스남성은 여성에서 남성의 몸으로 전환한 트랜스젠더이다.
핼버스탬은 생물학적 특징에 따라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남성성-여성성’ 등 삶의 형태를 억압적으로 작동시키는 젠더 이분법을 해체하면서 성 소수자들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 역사적 담론에 대한 심층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성 정체성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다. 사회적 약자인 이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지 못하는 분위기는 여전하다. 이렇다 보니 자신들이 차별받는 상황에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할 수 있는 담론이 형성되지 못했다. 그리고 성 소수자 문제는 페미니스트들이 손쓰기 어려운 딜레마가 된다. 페미니스트들(레즈비언 페미니스트도 포함됨)은 FTM을 ‘남성 진영으로 넘어간 여성 운동의 배신자’로 본다. 페미니스트의 공격을 ‘성차별’로 인식하는 FTM은 레즈비언와 페미니스트들을 남성처럼 흉내 내면서도 남성 전체를 악마로 매도하는 부정 세력으로 생각한다. FTM은 ‘여성’ 혹은 ‘레즈비언’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남성성이 돋보이는 복장을 착용한다. 핼버스탬은 FTM과 부치 동성애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이성애 규범성 형성에 기여하게 되고, ‘혐오’에 이르는 성 소수자 차별로 변질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개인의 성 정체성은 인구의 수만큼 다양하다. 그런데 억지로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면 편견이 생기고, 차별과 혐오가 양산된다. 동성애 코드를 시종 무겁게 다루던 TV와 같은 주류 매체가 성 소수자의 문제를 세련되게 풀어가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개방적으로 되었다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 속 동성애를 용인하는 것과 현실의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 대중문화 속 동성애는 한 가지 측면만 보여줄 뿐 실제 그들의 삶을 다루고 있지 못하다. 동성애자들에게 이성애자들과 같은 고정된 성 역할을 강요하고 동성 간의 사랑은 대개 비극적 사랑으로 왜곡된다. 성 소수자의 목소리를 당사자들이 직접 표출하려는 욕망은 진작부터 강했다. 성 소수자는 우리 사회 문화지형에서 투명인간으로 치부되거나 드러나는 경우라도 피해야 할 존재 또는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묘사돼온 탓이다. 성 소수자 혐오와 차별은 오래된 문제지만, 최근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극우 세력이 늘면서 혐오 발언이나 행위가 더 만연한 상황이다. 성 소수자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가 오려면 페미니스트들의 참여를 통한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여성의 남성성》을 읽기 바란다. 성 소수자들을 외면하든 지지하든 우리 사회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남자가 되고 싶은 여자’ 또는 몸과 마음이 남자로 바뀐 사람을 법률상 여자로 계속 묶어두는 것은 성 소수자에 대한 ‘다수의 억압’이 아닌지 따져볼 일이다.
[1] 주디스 잭 핼버스탬 《여성의 남성성》, 49~50쪽
[2] 《여성의 남성성》 49쪽에 ‘제3의 성’의 원어를 ‘thirdness’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나는 ‘제3의 성’을 영어로 표기할 때 ‘thirdness’보다는 ‘Third gender’로 쓰고 싶다. ‘Third gender’는 영어사전에 등재된 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