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시대의 과학 읽기 - 과학과 사회를 관통하는 생각의 힘을 찾다!
김동광 외 지음 / 궁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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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미래’를 불확실성의 영역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미래’라고 하면 어두운 불안보다는 무엇인가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희망을 떠올린다. 현재는 비록 어둡고 괴롭더라도 언젠가 가능성의 미래가 있기에 참고 이겨나가는 것이 인간사가 아니던가. 과학은 세상의 바람직하지 못한 상태를 좀 더 바람직한 상태로 변화시키는 과정에 기여한다.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과학은 세상을 분명한 것으로 그려냈다.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에 해당하는 결과가 나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과학은 언제 어디서 ‘불확실성’이라는 괴물로 변할지 모른다. 아무리 과학기술을 잘 활용하여 변화를 촉발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변화가 우리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에 어떠한 결과와 영향을 가져올지 명확하게 예측하기 매우 어렵다. 그 이유는 사회 현상을 일으키는 복잡한 인과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과학 지식을 우리가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은 불확실성으로 충만해 있다. 따라서 정부 관료나 과학자 등 권위를 가진 전문가들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내놓거나 정책을 입안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며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시민과학센터’에 소속된 총 여덟 명의 과학기술 사회학(science technology & society, STS) 연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민주적 논의와 토론’을 강조한다. 《불확실한 시대의 과학 읽기》(궁리, 2017)는 해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여덟 가지 사회 문제(구제역, 변형 조류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유전자변형식품 논란, 화학물질 규제, 우울증 치료법, 핵발전소의 안정성, 고준위 핵폐기물 관리, 기후 변화 대응 방안)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진지한 생각 거리를 던져준다.

 

구제역은 전염성이 강해 세계동물보건기구가 인정한 가장 위험한 A급 질병으로 분류되어 있다. 구제역은 일단 발병하면 불가항력적이다. 정부는 전염병 확진 판정이 난 농장은 물론 주변의 돼지와 소, 염소, 양, 사슴을 모두 살처분한다. 2010년 최악의 구제역 사태 당시, 살처분에 참여한 공무원의 70% 이상이 환청이나 불면증 등 정신적 후유증을 겪었다. 정부가 할 수 있는 대응은 극히 제한적이다. 정부의 조치는 소독과 이동제한, 살처분이 고작이다. 무자비한 가축 살처분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김동광 고려대학교 과학기술학연구소 연구원은 구제역의 피해에 대한 판단을 독점하고, 가축 방역에 대한 낮은 의식을 가진 정부의 자세를 비판한다. 가축전염병으로 인해 수조 원의 피해가 발생했지만 가축방역 전담조직은 미미하다. 체계적인 방역 장비 및 시스템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있다. 정부는 ‘구제역 청정국’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언 발에 오줌 누는’ 수준의 대책을 내놓는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건 큰 문제다.

 

김병수 시민과학센터 부소장의 글은 유전자변형식품을 둘러싼 찬반 입장이 균형 있게 정리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요즘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 GM 어류에 내용이 나온다. 생명공학 기술을 이용, 유전자를 조작시킨 식품개발이 활발히 이뤄지면서 이의 유해성에 관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문제는 유전자변형식품이 인체 내에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가 과학적으로 검증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연식품의 경우 인간이 오랫동안 섭취해온 것이라 인체가 완벽히 적응된 상태다. 그러나 유전자변형식품은 인체로서는 전혀 접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것이어서 인체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다는 게 과학자들의 지적이다. 외국의 경우를 보면 유전자농작물로 만들어진 가공식품에 유전자조작 여부를 표시하도록 하고 있으며 일부 국가에서는 유전자농작물의 수입, 판매를 금지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유전자변형식품 표시제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다. 소비자의 알 권리를 크게 제한할 소지가 있다.

 

막대한 건설비, 안전성, 핵폐기물 처리 문제 등을 둘러싸고 원전의 안전성과 장래에 대해 끊임없이 논란이 일고 있지만, 원전은 지금까지 인류가 개발한 전원(電源) 중에서 효율성과 경제성이 가장 뛰어나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에너지 자원이 없다시피 한 우리나라로서는 원전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박진희 시민과학센터 소장과 이영희 가톨릭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한계와 필요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원전 딜레마’를 풀기 위해서는 원자력을 다루는 사회적 합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정-발표’로 이어지는 정부의 권위주의적 방식을 버리고, 시민 사회와 정부, 원자력 사업자가 함께 원전 문제 및 탈핵 대안을 결정하고 추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불확실한 시대의 과학 읽기》는 과학 논리만으로 다 해명되지 않는 과학 안의 갈등, 논쟁, 권위 같은 사회적 요소들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과학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과학지식의 절대적 권위에 익숙하고, 과학기술을 마치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예상 가능한 확실성으로 착각하는 이들에겐 낯설기까지 하다.

 

정치 세력 혹은 정치적 이념이 과학에 의지하면 돈 혹은 명예를 누리려는 기회주의자들이 빌붙게 마련이다. 이런 세력이 퍼뜨리는 거짓 정보에 속지 않으려면 과학을 공부해야 한다. 무지가 낳은 편견은 어떤 자기 검열 과정을 무시하고 거짓과 교만을 먹이 삼아 자란다. 집단적 편견이 지배 담론으로 일방적으로 행세하는 사회가 되면 사회 문제에 대한 공론화를 활성화하지 못한다. 사회적 갈등에 대해서는 그 갈등을 야기한 쟁점을 충분히 공론화해서 이해당사자들뿐 아니라 사회 각계에서 숙의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숙의란 깊이 생각하여 충분히 의논하는 자세이다. 다시 말해서 다양한 논의와 사회적 학습이 중요하다. ‘확실한 해답’만 찾으려는 논쟁은 타협할 수 있는 값진 학습기회를 포기하는 일이다. 그 결과 사회의 불확실성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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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09-14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주적 논의와 토론’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죠.

cyrus 2017-09-14 19:09   좋아요 0 | URL
당연한 건데, 우리 사회의 현 상황을 봐서는 힘들어 보입니다. ^^;;

표맥(漂麥) 2017-09-14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때 ‘미래’는 밝음이었지만... 지금은 우울할수도 있겠다는 ‘불안‘이 항상 한 귀퉁이를 붙들고 있습니다... 과학을 공부하면 불안이 좀 줄어들까요? ^^

cyrus 2017-09-14 21:00   좋아요 0 | URL
과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미래에 대한 불안이 줄어들지 않을 겁니다. 아직 과학이 풀지 못한 현상이 많습니다. 그리고 과학이 ‘만능 열쇠‘가 될 수 없습니다. ^^

감은빛 2017-09-15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 책 읽어봐야겠네요.

과학자 혹은 전문가에게만 맡겨서는 절대 안된다는 걸
황우석 사태 때 뼈저리게 느꼈을텐데,
지금 핵마피아들은 또 똑같은 말들을 반복하고 있네요.
그들이 소위 전문가라면,
탐욕에 눈이 멀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스스로 깨우쳐야 하지 않을까요?

cyrus 2017-09-15 22:45   좋아요 0 | URL
이 책에 ‘원전’, ‘핵폐기물 처리’ 문제를 다룬 두 편의 글이 나옵니다. 그런데 탈핵 문제를 심도 있게 접근하는 감은빛님의 수준을 생각하면 아주 기본적인 내용만 소개하는 글로 보일 수 있습니다. 기대에 못 미칠 수 있어요. ^^;;

sprenown 2017-09-15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고로, [과학의 조직된 회의주의 정신은] 과학이 다른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것에 대한 저항의 원천이 된다. 종교계 쪽에서의 저항은 경제나 정치적 그룹의 저항에 비해서 이제 덜 중요해졌다. 최근 저항들은 과학의 특정한 발견이 종교, 경제, 정치의 영역에서의 도그마를 부인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저항과는 거리가 멀다. 반대로 최근의 저항들은 과학의 회의주의가 기존 권력의 분배를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나타나는 상당히 모호하지만 넓게 확산되어 있는 양상을 띤다. 머튼, 「과학의 규범적 구조」 (1942) 중에서

cyrus 2017-09-15 22:48   좋아요 0 | URL
지나친 회의주의는 과학을 냉소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학문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저는 과학의 회의주의가 삶을 즐겁게 해주는 상상력까지 제한하는 것에 반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