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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적 인생의 권유 - 최재천 교수가 제안하는 희망 어젠다 ㅣ 최재천 스타일 2
최재천 지음 / 명진출판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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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인과 과학자, 두 사람이 함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길옆에는 풀을 뜯는 염소 떼들이 ‘음매~’하며 울었다. 시인은 “저 풀밭에 새끼 염소가 엄마를 찾느라 구슬프게 울어대고 있어”라고 말했다. 길을 걸으면서 생각에 잠겨있던 과학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염소라고? 자네, 지금 CI를 말했는가?”
두 사람의 대화가 이상하게 느껴졌는가? 시인은 가축 동물인 염소를 말한 건데, 과학자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과학자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CI는 염소의 원소 기호이다. 과학자가 언급한 염소는 가축 동물이 아니라 살균제의 주성분이다. 경영학을 공부한 사람은 CI를 염소로 생각하지 않는다. 경영학에서의 CI는 ‘Corporate Identity’의 준말, 즉 기업의 이미지를 하나로 통합하는 경영전략을 말한다.
‘염소’라는 단어 하나에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시인과 과학자, 그리고 경영자는 ‘염소’와 ‘CI’를 다르게 바라본다. 문학, 과학, 경영 이 세 가지 분야가 서로 만나면 ‘융합(convergence)’을 시도할 수 있다. 서로 다르다고 생각했던 학문 분야들이 뭉치면 창의적인 사회를 이끌어 가는데 필요한 원동력이 생긴다. 그래서 지금도 학자와 경영자 들은 어떻게 하면 융합을 이룰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또 융합사회에 어울리는 인재를 키우기 위한 노력도 한다.
융합이라는 개념은 처음에 ‘통섭(consilience)’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통섭’은 미국의 저명한 생물학자 에드워드 오즈번 윌슨(Edward Osborne Wilson)이 제시했다. 윌슨은 통섭을 통해 서로 다른 학문 간의 경계를 제거하려 했다. 그러면 학자 간의 단절된 관계를 극복하여 지식의 대통합을 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융합과 통섭 문화가 완전히 정착하는 데는 시일이 좀 걸릴 것 같다. 명실상부한 학문적 융합이 이루어지기 위해 해결해야 할 현실적 과제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윌슨의 제자인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융합과 통섭을 인간 지성의 위대한 과업으로 생각하는 학자다. 그는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 통섭의 개념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 융합과 통섭, 한 번 들어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단어를 접한 사람이라면 학자들이 시도해야 할 과업이 우리 삶과 관련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최 교수는 융합과 통섭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삶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최 교수는 글 잘 쓰는 과학자로 유명하다. 그의 글을 읽으면 딱딱하고 어려운 개념의 의미가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최 교수가 펴낸 《통섭적 인생의 권유》는 융합과 통섭의 문화에 접근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그가 말하는 ‘통섭적 인생’이란 과연 무엇일까? 최 교수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통섭적 인생이 대체 무엇이냐고요? 그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삶의 태도입니다. 첫째는 ‘받은 만큼 돌려주는’ 자연의 법칙대로 사는 태도입니다. 제가 사람들에게 자연을 이야기하고 환경을 이야기하는 속내에는 바로 이러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도 결국 지구 위의 작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다른 동물도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겸허한 자세로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진정 아름다운 삶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피카소’처럼 사는 태도입니다. 피카소는 엄청난 다작을 통해 천재성을 발휘했습니다. 이를테면 공이 날아올 때마다 너무 재지 않고 방망이를 휘두르다 보면 단타도 치고 때로는 만루 홈런도 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시도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만의 세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의외의 말이다. 최 교수는 통섭의 삶을 살아가려는 방법으로 인문학과 과학을 공부하라는 뻔한 제안을 하지 않았다. 최 교수가 애초에 다양한 학문을 이해할 수 있도록 지식의 양을 늘리는 공부를 제안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면, 우리는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 인간이 자연의 이치를 모르면 자연 앞에 겸손할 줄 모른다. 우리의 이기심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소중한 자연을 파괴한다. 겸손과 배려가 묻어난 융합 문화는 여러 사람이 함께해야 형성될 수 있다. 그래야 우리가 만드는 재앙을 피할 수 있다. 겸손한 자세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추구해야 할 아름다운 삶의 연장선이다.
통섭적 인생은 ‘천재’가 되기 위한 특별한 삶의 길이 아니다. 피카소는 노력파다. 그것도 즐기는 노력파다. 그는 익숙한 것과 결별을 시도했다. 그래서 새로운 시도에 두려워하지 않았고, 실패를 겪어도 붓을 굽히지 않았다. 자신이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데 실패한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인간의 수명은 길어져 이제는 무료한 일상에서 벗어나 이곳저곳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져볼 기회가 충분히 있다. 인생의 후반전은 전반전 못지않게 중요하다. 전반전이 부진하더라도 후반전에 충분히 만회하면 된다. 전반전보다 더 나은 성과를 낸다면 인생 전체를 승리로 이끌 수 있다. 인생의 후반전은 진정한 삶을 찾을 수 있는 새로운 인생이다.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찾을 수 있다. 그 일이 예전에 내가 알지 못했던 낯선 분야일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만들어 놓은 사고의 경계를 제거해야 한다. 이 칸막이를 제거하는 순간, 여러분은 융합과 통섭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통섭적 인생의 권유》를 읽는 시간이 바로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하프타임(half time)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