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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추방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평점 :
개인이나 집단이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개인이나 집단에 따라 관심사, 의견, 표현 방식이 다르다. 대화도 ‘차이’에서 출발한다. 진정한 의사소통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성숙한 의사소통에 임하는 사람들은 타자와의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충돌은 어떤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감정의 원천이다. 선입견과 아집은 그냥 물러서지 않는다. 새로운 의견과의 충돌을 일으켜야 그 모습을 감춘다.
소통에 관계된 자들 사이의 차이는 대화의 전제이자 본질적 계기이다. 이 전제가 없으면 대화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왜냐하면, 서로 같은 것 사이의 대화란 본래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이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여 나의 뜻대로 따르게 하는 것, 즉 타자를 동화 혹은 동일화할수록 그 사회는 안정된다. 그곳에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사회구성원끼리 서로 싸울 일이 없다. 그러나 유일 진리와 절대 합의를 상정함으로써 타자의 존재나 대화의 가능성을 지워버리면 결국은 파국을 초래한다.
한병철은 ‘성과사회’의 폐해를 날카롭게 분석한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에서 한국 사회가 자아와 타자 사이의 부정성이 제거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했다. 《피로사회》가 타자의 부정성 대신 긍정성이 강조되는 신자유주의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상징적 시도라면, 《타자의 추방》(문학과지성사, 2017)은 과잉 긍정성만 내세우는 ‘피로사회’, ‘성과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생산적인 문제 해결을 제시한다. 한병철은 《타자의 추방》에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화두를 던진다.
첫째, 진정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제기한다. 다툼과 오해가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입장 바꾸어 생각해 보는 일이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져 갈등 양상이 지속될수록 누구나 ‘소통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진짜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화 참여에 소극적인 사람은 자기 생각과 다른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닫으며 그들에게 사회를 교란하는 ‘불순세력’ 딱지를 붙인다. 타자의 부정성을 거부하는 신자유주의는 기존 사회 체제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확인하고, 배제한다. 한병철은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의 ‘판옵티콘(panopticon)’이 현대 사회에서 ‘반옵티콘(banopticon)’으로 변화한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통치술’(《심리정치》, 문학과지성사, 2015)이다.
누구나 SNS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며 ‘좋아요’를 눌러 개인적 선호를 밝힌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자아를 노출할수록 ‘같은 것의 창궐’(《타자의 추방》 9쪽)이 일어난다.
오늘날 우리는 이방인의 부정성이 제거된 안락함의 지대에서 산다. 좋아요가 이곳의 구호다. 디지털 화면은 점점 더 우리를 낯선 것, 섬뜩한 것의 부정성으로부터 차단한다. (61쪽)
페이스북, 그리고 북플은 ‘좋아요’의 공동체이다. ‘좋아요’의 긍정성은 아무 구별도 없이 모든 것을 환영한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늘 바라왔던 민주적이고 자유로우며 평화스러운 풍경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표피적 양상으로만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갈등에 대한 이해를 봉쇄하는 전략이 된다. 차이와 갈등을 사회구성원 모두를 고통스럽게 하는 상황으로 인식한다. 담론이 불가능한 사회가 훨씬 더 불안하다.
둘째,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경청’이라는 자세로 소통할 것을 요청한다. 소통의 시작은 경청이다. 경청이 이루어지려면 우선 나와 의견이 다른 상대를 인정하고,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한다. 여기서 한병철이 말하는 ‘경청’은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한병철의 ‘경청’은 귀로 타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뿐만 아니라 그 목소리를 자유롭게 낼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한병철은 ‘타인들과 이야기하고, 타인들을 경청하는 공간’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적 차원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심리정치》에서 한병철은 ‘반옵티콘’에 탈출하기 위해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한 ‘바보’가 되라고 주문했다.
바보는 ‘소통하지’ 않는다. 바보는 소통 불가능한 것으로 소통한다. 그는 침묵의 장막 속으로 들어간다. 바보짓을 통해 침묵과 고요, 고독이 있는 자유로운 공간, 정말 말해질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심리정치》 114쪽)
침묵이 능사는 아니다. 개인이 침묵을 선택해도 그 자체로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고 있다. ‘소통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불의의 상황을 침묵하는 것은 결국 그 불의를 방조하는 공범자가 된다.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정치적 입장과 가치관을 견지한다. 그래서 우린 끊임없이 논쟁하고 싸운다. 사실 우리가 서로의 입장을 진정 이해하기는 어렵다. 우리 모두는 타자들의 입장을 전부 알 수 없다. 그래서 타자들의 입장에 귀 기울여야 하고 그들 각자 나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너와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구나!’라는 태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서로를 진정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바틀비(Bartelby)처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prefer not to)’[1]라고 말하는 바보가 되기보다는 반대로 ‘소통하는 편’을 택하는 경청자로 살고 싶다.
[1]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문학동네,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