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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시 삼백수 - 스님들의 붓끝이 들려주는 청담을 읽는다
정민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월
평점 :
귀로 사물 바라보고 눈으로는 들으니
마음 들음 어이해 귀뿌리를 쓰겠는가?
모름지기 두 귀 먼 것 안타까워하지 말라
소리란 원래부터 듣는 데서 현혹되니.
(허응 보우 『의옥 스님에게 보이다. 의옥은 귀가 먹어 주눅이 들었다[示義玉禪人, 玉以耳聾爲屈]』, 136쪽)
귀로 듣는 것이 무조건 믿어야할 실체가 아닐 수 있다. 과거에는 출처 불분명한 ‘악성 루머’가 심각했었다면, 요즘 기승부리는 부정적 대상이 ‘가짜 뉴스’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가짜 뉴스’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일반 대중은 가짜 뉴스와 악성 루머로 인해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쉽다. 특히 인터넷의 발달로 가짜 뉴스와 악성 루머는 빛의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전달되어 군중들의 두려움과 망상을 부추긴다. 특히 박사모와 극우 세력들은 특정 대상을 비난의 표적으로 삼기 위해 악의적인 의도로 거짓을 퍼뜨린다. 가짜 뉴스가 많이 퍼지고, 대중이 여기에 쉽게 현혹될수록 사회 전체가 흔들린다. 그뿐만 아니라 가짜 뉴스로 인해 깊이 파인 심리적 외상까지 치유해야 하는 문제도 남는다.
평생을 부끄럽게 입으로만 나불대다
끝판에 와 깨달으니 백억(百億)의 말 저편일세.
말을 해도 옳지 않고 말 없어도 안 된다면
사람들 모름지기 자각하길 청하노라.
(정관 일선 『임종게[臨終偈]』, 178쪽)
불교에서 고승들이 입적할 때 평생 수행에서 얻은 깨달음을 전하는 마지막 말이나 글을 임종게(臨終偈)라 한다. 일선 스님이 남긴 임종게는 최후의 반성이다. 스님 역시 평생 입으로 나불대는 속세의 인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자신이 뒤늦게 깨달은 것을 산 자의 몫으로 남겼다. ‘가짜 뉴스’에 의지하는 박사모와 극우 세력들은 그것이 마치 진실인 마냥 입으로 나불댄다. 과연 그들이 일선 스님처럼 죽기 전에 자신을 ‘자각(自覺)’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도 여전히 ‘가짜 뉴스’에 속아 넘어가 현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설정한 ‘가상의 적’에 대항하려고 든다. 자신들이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연령에 상관없이 현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귀머거리다. 그들이 알아서 뭘 잘못했는지 자각하기가 상당히 힘들어 보인다.
그대를 만나서 막야검을 건네주니
칼날에 푸른 이끼 끼지 않게 하시게.
오온산 앞에서 도적을 보게 되면
한 번씩 휘둘러서 하나하나 베시게나.
(벽송 지엄 『범준 선백에게 보이다[示法俊禪伯]』, 92쪽)
* 오온산(五蘊山) : 현상 세계 전체
막야검(鏌鎁釼)은 지혜를 상징하는 전설의 검이다. 정신을 옭아매는 아집(我執)을 한 번에 뎅겅 잘라버릴 수 있는, 막야검이 실제로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다. 막야검만 있으면 국민의 정신에 해로운 국가의 도적들을 하나하나 벨 수 있다. 막야검의 주인은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영웅이 된다. 한편 반대로 생각해보면, 막야검은 이 세상에 없는 게 낫다. 막야검의 칼날에 조금이라도 녹슬지 않으려면 검의 주인은 끊임없이 자기 수양에 힘써야 한다. 훌륭한 검을 가질 만한 자격을 갖추는 것이 남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겠지만, 검의 주인에게는 평생 부담을 짊고 가야하는 일이다. 만약 막야검이 주인을 잘못 만나게 되면, 검의 용도가 배움의 목적을 남에게 과시하는 위인지학(爲人之學)으로 변질한다.
뜬 인생 참으로 쏜살같이 지나가니
얻고 잃음 슬픔 기쁨 어이 족히 헤아리랴.
그대 보라 귀천(貴賤)과 현우(賢愚)를 가리잖고
마침내는 똑같이 무덤 흙이 되는 것을.
(원감 충지 『사람에게 보이다[示人]』, 34쪽)
* 현우(賢愚) : 어진 자와 어리석은 자
지금까지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교훈적인 선시(禪詩) 세 편을 골라봤다. 이 글의 마지막을 장식한 선시는 특별하다. 인생의 허무함을 강조하는 충지 스님의 선시를 고른 이유가 있다. 생의 끝자락에 서면, 권력과 명예와 부를 누리며 충분히 산 삶이나, 언제나 초름한 결핍으로 산 삶이나 도긴개긴이다. 삶이란 참으로 덧없이 왔다 떠나는 뜬구름 같은 것이다. 가장 불행한 삶의 비극은 죽음이 아니다. 불교에서 인간은 본래 고요하고 청정한 물결과 같은 ‘청정심(淸淨心)’을 갖춰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푸르른 물결에 욕심과 집착의 바람이 몰아닥치면 번뇌와 고통의 파도가 된다. 커다란 파도에 떠밀리면, 원래 이전의 고요한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아웅다웅 싸우다가 결국 허무하게 죽어가는 것, 전체적으로 보면 그런 삶이야말로 불행한 비극이다. 이 세상에 상이한 이해와 갈등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패거리를 지어서 아귀다툼하며,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처절한 혼전을 계속하고 있다. 알고 보면 우리 삶은 아름답고도 살아내기 힘든 시간의 연속이다. 그리고 생각보다 쏜살같이 지나간다. 이 귀한 하루하루를 소중히 생각하면서 갈무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