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T. 캐롤의 《회의주의자 사전》(잎파랑이, 2007년)은 대체의학, 뉴에이지, UFO, 심령 등 400항목이 넘는 초자연적이고 초과학적인 문제들에 대한 설명과 상식에 근거한 비판을 사전 형태로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인터넷사이트 ‘스켑딕(skepdic)’의 운영자로 여기에 올렸던 글을 선별해 《회의주의자 사전》을 펴냈다. 과학적 회의주의자는 엄밀한 과학적 실험과 조사로 규명되지 않은 채 과학으로 행세하는 현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회의주의자 사전》의 항목 중에 ‘속독’이 포함되어 있다. 혹시 속독법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이 책 675쪽을 보면 된다. 속독법을 어린이와 성인들을 위한 학습법으로 강조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대부분 이렇다. 속독법은 책 읽는 속도가 느린 사람을 단시간만에 ‘책읽기 천재’로 만들 수 있다고 자부한다. 속독법을 익히면 짧은 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책을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책을 빨리 읽으면 ‘천재’가 될 수 있을까? 정말 속독법 하나로 천재가 되려면 책의 내용을 모두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과학자들은 속독법의 효과에 회의적으로 생각한다. 소위 분당 1만 개의 단어를 읽는 사람들은 문장 하나하나 빨리 읽는 것이 아니다. 글을 읽는 게 아니라 훑어본다. 이들은 읽는 문장 속 단어와 표현을 이해하는 능력이 보통 사람보다 더 높다. 속독법을 배워도 어휘 독해력이 부족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보통 사람이 글을 제대로 이해하면서 빠르게 읽으면 분당 250~300개 단어 정도 속도로 읽을 수 있다. 이게 최대 속도다.
킴 피크라는 사람은 7천 권이 넘는 책을 전부 기억하면서 빨리 읽는 능력을 보유했다. 그런데 그는 선천적으로 좌우의 대뇌반구를 연결하는 뇌량(腦梁, 뇌들보)가 없다. 킴 피크처럼 뇌량 없는 사람은 실독증이 나타날 수 있다. 실독증은 시각 능력이 정상이어도 글자를 읽지 못하는 증상이다. 킴 피크의 속독 능력은 정말 확률적으로 나오기 힘든 희귀한 사례이다.
* 다치바나 다카시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청어람미디어, 2001년)
다치바나 다카시는 독서를 두 가지 종류로 나눈다. 하나는 책 읽는 자체를 즐거워하는 ‘목적으로서의 독서’와 다른 하나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책을 읽는 ‘수단으로서의 독서’이다. 후자의 독서를 하려면 속독법을 활용해야 한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신문에 연재되는 서평 작성이나 취재 준비 그리고 책을 집필하기 위해서 책을 빨리 읽는다. 그는 바쁜 상황 속에 책을 읽는 방법으로 속독 능력을 갖출 것을 강조하면서도 자신만의 속독법이 ‘대충 훑어본 것’과 똑같다고 말한다.
책을 엄청 많이 읽고, 가장 똑똑하다던 다치바나 다카시도 속독을 ‘훑어보기’와 동일한 의미로 언급했다. 속독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다가 내가 알고 싶지 않거나 한두 번 봐도 모르는 내용을 만난다. 이럴 때 과감히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는 것이 낫다. 비록 대충 넘긴 쪽수가 많더라도 책의 핵심 내용이나 가능한 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읽었다면, 책의 절반을 읽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게 바로 대충 훑어보는 속독법이다.
그런데 일부 다독가와 속독 학습법을 개발한 교육 전문가들은 속독이 천재들이 가진 남다른 습관이며 일반인도 속독법을 훈련하면 천재처럼 속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속독법이 잠재적인 천재성을 끄집어낸다는 말을 믿고, 꽤 적지 않은 수강료를 내면서 속독법을 배운다. 확실히 검증되지 않은 속독법 교육에 투자하는 건 돈 낭비다. 특히 ‘과학적’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으며 분당 1천 개 이상 단어를 읽는 능력을 만들어주는 속독법이라고 과장 홍보하면 그냥 무시하는 것이 좋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책과 담 쌓은 사람이 검증되지 않은 속독법에 돈을 쳐바르거나 그거 하나쯤 익혔다고 은근히 우월감을 과시하는 경우이다. ‘목적으로서의 독서’를 하는 사람은 정독을 선호한다. 속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은 정독의 가치를 낮게 본다. 심지어 정독하기에 적합한 책으로 문학 작품을 예로 들면서 문학 작품을 재미로 읽는 독자들을 한심한 존재로 여긴다. 여기서부터 지적 우월감이 드러내는 지점이다. 애서가의 지적 우월감은 책 읽는 사람들 간의 정서적 위화감을 만들어낸다. 책 읽는 권수나 독서 능력, 심지어 관심 있는 책의 분야마저 하나의 경쟁 대상이 되어 우열을 가리려고 한다. 천재들의 속독법대로 책을 읽었는데도 천재가 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잘못은 독자의 책임이 아니다. 독서 자체를 좋아한다면, 그냥 완독하는 데 오래 걸리든 말든 속 편하게 책을 읽으면 된다. 내가 생각하는 속독은 ‘속 편하게 읽는 독서’이다.
독서로 천재가 되는 법은 아주 간단하다. ‘책 읽는 척’하면 된다. 자신이 일 년에 책 1천 권을 독파했으며 오래전부터 알려진 온갖 독서법의 에센스만 가려 뽑아서 ‘천재 속독법’을 만든다. 어때요, 참 쉽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