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 미국 인디언 멸망사
디 브라운 지음, 최준석 옮김 / 길(도서출판) / 201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미국인들의 유별난 총기 애호는 미국의 역사와 전통적 자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총기 사건이 일어날 때면 많은 이들이 고통과 비탄에 잠긴 채 총기 규제 문제에 대한 논란을 벌이지만, 지식인 중 누구도 나서서 규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대다수 미국인은 총기소지가 허용 돼야 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이들은 영국의 식민통치에 이어 인디언의 투쟁 과정 중 총의 힘으로 조국을 건설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을 보통 ‘인디언(Indian)’이라 부른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로 착각하는 바람에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인도인이 아니란 걸 알게 됐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인디언이라고 부른다. 아메리카는 유럽인의 입장에서는 ‘신대륙’이지만,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는 오랜 보금자리였으며, 결코 새로울 것이 없는 땅이었다. 평화롭게 잘살고 있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쫓아내고, 남의 둥지에 깃들면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온 미국도 결코 새로울 것 없는 바탕에서 발전했다. 분명한 것은 한때 세계를 주름잡았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에 대한 달콤한 시대의 꿈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팍스 아메리카나의 위상 이면에는 ‘내가 곧 정의’라는 미국의 독선과 오만이 깔렸다. 미국인들의 의기양양한 태도는 아메리카 원주민 멸망사 곳곳에 발견된다.
아메리카에 정착한 백인들은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하려고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단어를 내세운다. 이 단어의 의미가 참으로 억지스럽기 짝이 없다. 백인들은 자신이 신대륙을 지배하는 명백한 운명을 가졌기 때문에 당연히 원주민의 땅을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인들이 흔히 내세우는 ‘프런티어 정신’은 백인 입장에서는 모험과 용기, 인내를 의미하는 진취적 이념이었지만,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땅과 목숨을 빼앗아가는 파괴와 탐욕의 정신이었다. 백인들은 야만적이고 비열한 방법으로 원주민의 땅을 강탈했다. 그 비참한 억압에 쫓겨 밀려난 원주민들은 사람이 살기 힘든 척박한 땅으로 이동했다. ‘가장 문명화한 부족’으로 알려진 체로키족 역시 강제 추방령이 담긴 인디언 이주법의 영향을 피할 수 없었다. 체로키족을 포함한 미국 남부의 원주민 부족은 땅을 잃고 서부로 이동하는 ‘눈물의 행렬’이 시작되었다. 강제추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서부 개발이 시작되며 백인들은 야생들소를 멸종시키며 인디언의 식량 공급원을 차단해 추방했던 땅까지 빼앗았다.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을 지휘한 찰스 노드스트롬 중위는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다”라고 말했다. 백인들은 그토록 아메리카 원주민을 멸시했다. 그리고 그 어떤 영화에서도 볼 수 없을 만큼 잔악한 학살을 자행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짓이지만 이처럼 야만적이고 이기적인 모습이 미국의 진짜 얼굴일지도 모른다. 아메리카 원주민을 학살하고 피로 얼룩진 대지 위에 세워진 나라. 허상의 실체가 드러나면 권위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과거는 ‘묻지 마세요’라고 해서 물어지지 않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과거는 그것이 어떤 과거이든 사라지지 않는다. 역사의 진실이 있다고 하지만 해석에 따라 어떤 것은 전면에 나서기도 하고 어떤 것은 전면에서 뒷면으로 물러서기도 한다. 체로키족은 백인들처럼 흑인 노예를 부린 적이 있다. 한때 순혈주의를 주장하는 체로키족이 흑인의 피가 섞인 혼혈 출신 사람들을 부족 혈통에 제외해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흑인의 관점에서는 체로키족도 인종차별의 가해자로 볼 수 있다.
기억해서 좋은 것이 있고, 잊어야 좋은 것도 있다. 수치스럽고 굴욕적이며 아픈 과거일수록 그렇다. 어느 나라 역사든 영광으로 가득 차 있는 역사는 없다. 자랑스러운 것과 부끄러운 것, 선과 악,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