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의 시 질투는 나의 힘의 한 구절이다. 이때 시인이 말한 질투는 부질없는 짝사랑이요, ‘나의 힘이란 헛된 열망을 품은 어리석은 용기이다. 시인이 그렇게나 미친 듯이 찾고 싶었던 사랑은 젊은 날의 상처 같은 기억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기형도가 스스로 내적 상처를 분석하여 거기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한 시인이라고 평했다. [참고1] 역량이 부족한 시인은 자신의 감정적 상처를 과장되게 표현한다. 김현은 그런 시인들을 힘겨운 감상의 망토라고 표현했다. 이 구절은 기형도의 또 다른 시 비가 2 붉은 달(입 속의 검은 잎수록)에 있다. 기형도는 거추장스러운 감상의 망토를 벗어내는 데 성공했다.

 

시인 여림(본명 여영진)질투는 나의 힘같은 시를 읽고 무슨 느낌이 들었을까? 시 속에 있는 나의 생이 마치 자신의 자화상처럼 여겼을 것이다. 빨간 망토는 기형도를 오마주한 시가 분명하다.

 

 

빨간망토가 들어온다.

기형도는 어디에 있는 섬인가요

망연자실한 나를 버리고 빨간

망토는 유유히 망토 자락을 날리며 사라진다.

 

기형도는 어디에 쓰는 칼인가요

기형도는 무엇에 쓰는 지도인가요

 

그렇다

이 지상에 없는 너는

찾을 수 없는 섬이었고

써힐[참고2] 수 없는 칼이었고

나침반을 들고서도 찾을 수 없는 지도였다.

마치 어린 왕자에 나오는 장미꽃처럼

호랑이 발톱같은 가시 네 개를 보여 주며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 말했을 뿐.

 

(여림 빨간 망토,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150)

 

 

빨간 망토는 시인의 분신이다. 여림은 자기 자신을 힘겨운 감상의 망토를 쓰고 있는 시인으로 여긴다. ‘빨간 망토를 쓴 시인은 자신에게 영감을 준 기형도를 찾으려고 한다. 허나 이 지상에 없는시인을 만나는 일은 불가능하다. 나를 포함해서 시를 좋아하는 독자들은 기형도의 시를 내가 좋아하는 시에 포함해 요란하게 소개한다. 하지만 기형도의 시는 어두컴컴하고 차갑다. 자기 연민이 점철된 서늘한 문장은 예민한 자의식이 아니고서는 쉽게 포착할 수 없는 정서다. 망토 자락을 날린 채 기형도를 찾아 헤매는 여림은 좋은 시인이 아닌 상태다. 그가 지금까지 써왔던 시들은 호랑이 발톱 같은 가시 네 개를 보여 주며내적 상처를 과장하고 있다. 젊은 시절의 여림은 어설픈 망토를 벗고, ‘기형도같은 시인이 되고자 하는 헛된 열망이 있었다. 그렇지만 여림은 자신이 쓴 것들이 오로지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여림의 질투는 시인으로서의 자존감을 보호하기 위한 유일한 무기다.

 

여림은 끝끝내 질투를 힘으로 변용시켜 힘겨운 감상의 망토를 벗었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시를 써야 하는지 깨닫게 된다. 기형도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운명 속에 살다가 떠났지만, 여림은 운명에 대한 사랑을 충실히 느꼈다.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아모르 파티’(Amore Fati). 운명에 대한 사랑이란 단순히 체념을 뜻하는 게 아니라 내 운명이라면 당당히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어떤 고난이 닥쳤을 때 이게 내 운명이야.’라며 체념하는 것과 이것이 내 운명이라면 나라도 사랑하겠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여림은 어디에 쓰는 칼무엇에 쓰는 지도를 찾지 못했지만, ‘시원한 그늘이 드리우는 수풀()’이 되었다. ‘빨간 망토를 쓴 여영진에서 망토를 벗은 시인 여림으로 한 단계 성장하는 극적인 순간이다. 이 환희의 순간을 담담하게 노래한 시가 마음속의 나무.

 

 

혼자 히죽히죽 웃음을 흘릴 때가 있다.

, 내가 살아 있었구나, 하는 안도감과 불현듯 이

그제서야 혼자 깨어 있다는 뜻모를 우울함에 젖어서 말이다.

모두가 잠든 밤에 홀로 깨어 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내 자신의 치장하지 않은 내면세계와 정면으로 마주 앉아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단서도 붙이지 않고 아무런 치장도 하지 않은 마음.

살아오면서 마음밭에 어떤 시를 뿌리고 어떤 열매를 맺어 왔을까.

아니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가 되어 그들의 곤한 몸을 편히 쉬게 했을까.

모두가 잠든 사이, 홀로 깨어 있는 사람은 넓고 지순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그 맑고 지순한 영혼의 물소리로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깨우고

노래를 한다.

삶이 답답하고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 어두울수록 그의 노래는 더욱 깊이를 더한다.

 

(여림 마음속의 나무중에서,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79~80)

    

    

 

혼자 깨어 있는 나무의 모습은 차라투스트라를 떠올리게 한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긍정하는 삶의 지혜를 찾으려 평생을 헤맨 존재였다.

 

 

 

 

 

 

 

 

 

 

 

 

 

 

 

 

 

 

 

 

시인은 차라투스트라처럼 비탄과 불행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 앉아 바라보는 삶의 긍정을 꿈꾼다. 운명애는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창조하는 삶의 태도다. 운명애는 시인에게 스스로 보편적 의미를 부여하게끔 하였다. 여림은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를 생각했다. [참고3] 여림의 시는 고단한 일상에 눌려 있던 독자들의 영혼을 깨운다. 시를 좋아하는 독자님들, 이제부터 기형도가 어디 있는지 찾지 말자. 여림이 어디에 있는 나무()인지 물어보자. 그가 어디에 있다고? 찾기 쉽다. 신기하게도 기형도의 시 속에 여림과 닮은 존재가 있다. 그는 살아 있다. 그는 노래를 부른다.

 

 

나무가 서 있다. 자라는 나무가 서 있다. 나무가 혼자 서 있다. 조용한 나무가 혼자 서 있다. 아니다. 잎을 달고 서 있다. 나무가 바람을 기다린다. 자유롭게 춤추기를 기다린다. 나무가 우수수 웃을 채비를 한다. 천천히 피부를 닦는다. 노래를 부른다.

 

나는 살아 있다. 해영(解永)의 강과 얼음산 속을 오가며 살아 있다.

 

(기형도 . . 바람 속에서중에서, 기형도 전집142)

    

 

    

 

 

[참고1] 김현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 입 속의 검은 잎137

[참고2] 시집에 실린 원문에는 '써힐'로 인쇄되어 있다. 문맥상으로 봐서는 '썩힐 수 없는'으로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인쇄 오자인지 아닌지 해당 출판사에게 직접 메일로 보내서 확인할 예정이다.  

[참고3] 여림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비 고인 하늘을 밟고 가는 일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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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2016-08-30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무 데나 펼쳐도 마음에 드는 시집 찾기가 쉽지 않은데, <입 속의 검은 잎>은 제게 그런 시집 중 하나입니다. 아직 다 읽진 못하고 군데군데 읽은 상태지만.. 아모르 파티의 태도가 마음에 드는데요. 백석의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도 생각나고..ㅎㅎ

cyrus 2016-08-31 16:21   좋아요 0 | URL
생각날 때마다 읽고 싶고, 읽을 때 마다 느낌이 다른 시집이 좋은 것 같습니다. ^^

yureka01 2016-08-30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근자에 들어 시집 리뷰로는 느낌이 푹 절여지는 기분....기형도 전집과 일전에 소개해준 여림의 유고시집 읽다 말다 또 읽다말다...흐물흐물해지더라구요....이달의 리뷰당선작 추가요^^.

cyrus 2016-08-31 16:22   좋아요 1 | URL
잘 쓴 글이라고 칭찬하면 반대 결과가 나오는 징크스가 있습니다. 이번 달은 당선작에 안 뽑힐 것 같군요. ㅎㅎㅎ

또 봄. 2016-08-31 00: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림 유고 전집을 받긴 했는데, 선뜻 못 읽겠어요.
집에 있는 술이 모자랄까봐요. --;;

cyrus 2016-08-31 16:23   좋아요 0 | URL
시집은 생각날 때마다 읽으면 됩니다. ^^

yamoo 2016-09-01 11: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빨강 망토.....하니 빨강 망토 차차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욤?? 흐미~

그나저나 저도 저 기형도 전집 갖고 있어요. 생각 날 때 가끔 펴서 몇 페이지 읽는데, 시가 참으로 좋다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아, 제가 잘 읽는 거였군요. 생각날 때마다 가끔씩 펴 읽으니...ㅎㅎ

cyrus 2016-09-01 13:18   좋아요 0 | URL
`빨간 망토`하면 그림형제 우화가 먼저 떠올려야 하는데, 이제는 만화가 생각납니다. 차차 유명하죠. ㅎㅎㅎ

기형도 전집에 있는 미발표 시가 엄청 좋았습니다. 기형도 전집을 사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