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드라마나 영화 속에는 하는 일마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캐릭터가 있다. 이들을 ‘민폐 캐릭터’라고 한다. 본인들은 정작 순진한 얼굴을 하고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아 얄밉기까지 하다. 심지어 자신이 남에게 피해를 줬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가만히 있기만 해준다면 고마울 지경이다.

《아라비안나이트》에도 민폐 캐릭터가 나온다. 책 속에 나오는 대사로 민폐 캐릭터를 소개해본다.
“나는 어젯밤에는 모술의 상인이었지만, 지금은 영광스러운 압바스 왕조의 일곱 번째 칼리프이며, 위대한 예언자 무함마드의 자리를 계승한 하룬알라시드요!” (앙투안 갈랑 《천일야화》 1권 296쪽)
잠깐만! 여기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오류 두 가지가 있다. 《천일야화》는 하룬 알 라시드(Hārūn al-Rashīd)를 ‘하룬알라시드’로 붙여 썼다. 역자가 칼리프의 이름을 왜 붙여 썼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칼리프는 자신을 ‘아바스 왕조의 일곱 번째 칼리프’라고 잘못 소개했다. 하룬 알 라시드는 아바스 왕조의 다섯 번째 칼리프다. 그의 아버지 알 마흐디는 제3대 칼리프이며, 알 라시드의 형이 칼리프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알 라시드가 즉위했다(786년).
하룬 알 라시드는 셰헤라자드, 알라딘, 신드바드, 알리바바와 함께 아라비안나이트에서 비중 있게 등장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알 라시드가 등장하는 이야기의 시대적 배경이 바그다드의 전성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알 라시드와 함께 등장하는 대재상 자파르와 왕궁 호위대 대장 메스루르도 실존 인물이다. 아라비안나이트가 어린이용 동화로 축약되는 과정에 알라딘, 신드바드 등의 캐릭터가 점차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하룬 알 라시드의 존재가 잊혔다. 축약본 아라비안나이트를 기억하는 독자는 당연히 하룬 알 라시드가 누군지도 모른다. 어쩌면 여러분이 읽었던 축약본에 이름 없는 ‘왕’과 재상이 나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면, 그 왕이 하룬 알 라시드다.
열린책들 출판사의 《천일야화》에 알 라시드가 나오는 이야기가 많지 않다. 1권 「왕의 아들 세 탁발승과 바그다드의 다섯 아가씨 이야기」, 2권 「세 개의 사과」 이야기, 3권 「알리 이븐 베카르와 하룬 알 라시드의 총비 솀셀니하르의 이야기」, 4권 「눈 뜬 채 꿈꾼 아부 하산 이야기」, 5권 「하룬 알 라시드의 모험」이 전부다. 사실 프랜시스 버턴의 무삭제판에는 알 라시드가 등장한 이야기가 많다.
알 라시드는 성격이 조급하다. 그리고 호기심이 쓸데없이 많다. 그는 민심을 살펴보기 위해서 귀족으로 분장하여 바그다드 시내를 돌아다닌다. 칼리프가 외출하는 날에 재상 자파르와 호위대장 메스루드를 동행한다. 밤에 거리를 걷다가 칼리프는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집을 발견했다. 집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정체가 궁금한 칼리프는 나그네인 척하고 문제의 집을 방문했다. 재상은 칼리프의 호기심을 막으려고 했지만, 왕명을 어길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 집에는 조베이드와 아민느라는 자매가 살고 있었다. 자매는 칼리프 일행을 극진하게 대접했다. 마침 집 안에는 세 명의 탁발승도 머물고 있었다. 그녀는 칼리프 일행과 세 명의 탁발승에게 자신에 관해서 궁금하더라도 절대로 묻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이 눈치 없는 칼리프는 자매의 정체가 궁금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눈치 빠른 재상은 칼리프를 차분하게 타이른다. “폐하, 몹시 궁금하더라도 저 여자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만일 이를 어기면 우리들의 정체가 탄로 나는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칼리프는 자신의 신변을 끝까지 보호하려는 재상의 진심을 몰랐다. 끝내 호기심을 누르지 못해 조베이드와 재상의 뒤통수를 아주 시원하게 쳤다. 분노한 조베이드는 약속을 어긴 대가로 그 자리에 칼리프 일행과 탁발승 일행을 죽이려고 했다. 칼리프의 경솔한 호기심 때문에 한참 잘 먹고 푹 쉬던 사람들 모두 목숨이 잃을 상황에 부닥쳤다. 다행히 세 명의 탁발승들이 자신들의 기구한 사연을 이야기한 덕분에 칼리프 일행은 살아남았다. 조베이드의 분노가 거의 사라지자 알라시드는 자신은 상인이 아니라 위대한 칼리프라고 떳떳하게 고백했다. 그래서 세 탁발승 이야기는 칼리프로 시작해서 칼리프로 끝난다.
알 라시드는 80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랍 제국을 지배했다. 그가 제국을 다스리던 시기는 바그다드의 황금기로 알려졌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아바스 왕조를 엎으려는 반대파들의 음모가 사그라지지 않았고, 복잡한 분쟁 해결을 거의 재상 자파르에게 맡겼다. 사실 자파르가 제국을 통치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알 라시드는 시를 쓰고, 술을 즐기면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그런데 알 라시드는 갑자기 자파르와 그의 일가들 모조리 죽여 버렸다. 공교롭게도 재상의 처형을 담당한 사람은 호위대장 메스루르였다. 칼리프가 무슨 이유로 재상을 제거했는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일설에 따르면 칼리프가 재상을 질투해서 죽였다는 설이 있고, 자파르 일가(바르마크 가문)가 오랫동안 권세를 누린 것이 멸족의 화근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자파르가 처형당한 이후 알 라시드 혼자 정세를 살피게 되었다. 오히려 이때부터 반대파들의 불만이 거세졌다. 자파르의 부재가 너무 컸다. 알 라시드가 사망한 후, 그의 세 아들이 칼리프 자리를 둘러싼 권력 투쟁에 휘말렸다.

《천일야화》 2권 「세 개의 사과」 편에 보면 재상을 향한 칼리프의 본심이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칼리프가 참혹하게 살해된 여인의 시체를 보고 재상에게 벌컥 화를 낸다. 무엇보다도 웃긴 것은 재상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고 호통 치는 칼리프의 모습이다. 여인을 살해한 범인을 잡지 못하면 재상과 마흔 명의 일족들을 처형한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칼리프는 정말 재상이 마음에 안 들어 했던 것일까? 알 라시드는 놀고먹고 지내느라 나라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면서 자신의 잘못을 재상에게 덮어씌웠다. 이쯤 되면 알 라시드는 진짜 민폐 캐릭터다. (우리나라에도 나라에 문제가 생기면 측근들 탓으로 돌리고, 측근들이 대신 대국민 사과하게 만드는 민폐 캐릭터 ‘그분’이 있다. 그분은 외국에 돌아다니느라 여념이 없다)
버턴 무삭제판 《아라비안나이트》를 읽을 때 알 라시드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유심히 지켜보시라. 다만 그의 행동을 보다가 짜증을 유발할 수도 있다. 주변 사람들의 앞날을 꼬이게 하는 엄청난 민폐력 덕분에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하룬 알 라시드. 그는 좋은 민폐 캐릭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