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짓기 - 생명진화의 은밀한 기원 EBS 다큐프라임 <생명, 40억년의 비밀> 2
김시준.김현우,박재용 외 지음 / Mid(엠아이디)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바나나는 남녀노소가 좋아하는 과일이다. 그런데 이 바나나가 미래에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놀랍게도 바나나의 멸종위기설이 이미 수년째부터 제기되어 왔다. 세계 최대 바나나 수출지역인 중남미 지역에 곰팡이 질병이 점차 퍼져나가고 있다. 농부들은 바나나를 비닐포장지로 감싸고 해충 제를 뿌리는 등의 조처를 하고 있지만 확실한 해결책은 없는 상태다. 바나나 멸종위험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야생 상태의 바나나 역시 곰팡이 질병에 시달렸다. 1950년대에 바나나가 수출할 수 없을 정도로 생산율이 저하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개량 품종이 캐번디시다. 지금 우리가 먹고 있는 바나나 품종이 캐번디시다. 캐번디시는 야생 바나나보다 맛과 향이 좋다. 그러나 캐번디시 바나나도 곰팡이 질병에 취약했다. 이 곰팡이 질병은 야생 바나나를 공격했던 곰팡이와 다른 새로운 형태다. 바나나가 멸종위험에 쉽게 처하게 되는 이유는 ‘인간의 탐욕’에 있다. 인간은 맛 좋은 바나나를 얻기 위해 정상적인 바나나의 번식에 의도적으로 손댔다. 오늘날의 바나나는 유성생식(암수 개체의 생식 세포를 결합하여 자손을 번식시키는 방식)을 하지 못한다. 바나나는 씨가 없다. 오직 꺾꽂이 방식으로만 재배된다. 결국, 전 세계 모든 바나나는 유전적 다양성이 없는 한 바나나의 복제품이다.

 

유전적으로 같은 바나나만 재배할 경우 급격한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러면 바나나 개체가 모두 사라질 수 있다. 아무리 강하고 유전조건이 우수한 바나나라 할지라도 복제품만 존재할 경우 새로운 질병에 적응할 짝이 없어서 생존할 수 없다. 따라서 다양한 품종을 유지하고 교배시키는 자연스러운 방법이 바나나를 보존하는 제일 나은 방법이다. 이처럼 생물 다양성의 파괴가 인간에게 주는 교훈과 사례는 한두 개가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1845년 아일랜드 대기근 사태.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생산성을 높이려고 유전적으로 균일한 씨감자를 밭에 심었다. 이 감자에 잎마름병이 침입해 감자가 전멸하면서 100만 명 이상이 기아로 사망했다. 이 최악의 사태로 인해 아일랜드인들이 고향을 떠나기 시작했다. 미국에 아일랜드계 이민이 많아지게 된 이유다. 잎마름병은 살균제로 해결됐으나 1980년대 중반부터 살균제에 내성이 있는 균주가 생겨나 1990년대 전 세계 감자 수확량이 15%나 감소하였다. 이래도 생물 하나쯤의 멸종이 인간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동물들도 환경 조건에 따라서 살아가기 위한 나름의 방식이 있다. 이들은 유전자의 발현을 달리하는 유연성을 보여준다. 10주 이상 교미하는 대벌레, 여왕벌의 몸에 자신의 정자를 뿌려놓고 죽는 수벌들, 암컷의 배에 뾰족한 생식기를 찔러 정자를 주입하는 수컷 빈대. 짝을 찾고 번식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물들도 있다. 수컷 공작의 화려한 깃털, 개미의 페로몬, 수컷 유럽풍선파리가 암컷에게 주는 선물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짝을 유혹한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번거로운 유혹부터 시작해 기묘한 짝짓기를 하면서까지 고통을 감수할까. 대답은 간단하다. 새로운 유전자 조합을 위한 개체 창조의 몸부림이다. 유전자 다양성은 동물의 진화에 있어 필요한 요소다. 대다수 동물은 유혹과 짝짓기라는 피곤한 행위를 선택했다. 짝짓기를 통해 서로의 유전자를 섞어 환경의 변화에 더욱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적응 방식을 찾지 못하거나 인간의 손에 의해 번식하는 종은 절멸된다. 조류인플루엔자는 인간이 유전적 다양성의 섭리에 도전해 자초한 재앙이다. 산란이든 고기용이든 돈 버는 축산은 닭을 생명체로 여기질 않는다. 그저 돈벌이 수단일 뿐이다. 현대축산은 유전적 다양성을 거부한다. 오로지 단일품종만 키우기 때문에 다양성 결여로 역병에 매우 취약하다. 공장식 축사에 조류인플루엔자가 돌면 닭들은 삽시간에 전염돼 죽게 된다.

 

유전적 다양성은 지구 상 모든 생물들(인간도 포함)에게 보이지 않는 많은 혜택을 주고 있지만, 인간은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진화의 다양성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젠더 역할을 이분법적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동물, 인간을 포함한 이 세계에는 암컷과 수컷의 짝짓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제3의 성도 있다. 성 소수자 차별은 진화에 관한 무지와 편견에 의해 지탱된다. 진화는 단순히 강한 생물체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이 아니다. 즉, 힘이 있고 우수한 것만 살아남는다는 학설이 아니다. 블루길은 큰 수컷, 중간 크기의 수컷, 작은 수컷, 암컷 네 가지 형태를 보인다. 이중 중간 크기의 수컷은 큰 수컷의 영역에 접근해 구애 행동 후 함께 산다. 암컷이 함께 있을 때는 셋이 함께 구애 행동과 짝짓기를 하기도 하며 영역을 공유한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영장류 중 하나인 보노보는 동성애를 한다. 동물의 동성애는 서로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무리의 혜택을 공유하며 더 잘 생존한다. 이렇게 되면 성 선택 이론을 제시한 찰스 다윈의 입장이 곤란해진다. 다윈은 동물과 인간이 짝을 얻어야 건강한 형질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자연에는 다양한 동성애 관계가 있다. 그리고 상어, 코모도도마뱀처럼 수컷 없이도 처녀생식을 하기도 한다. 다윈의 성 선택 이론에 따르면 이런 동물들은 도태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다양한 젠더의 등장은 돌연변이나 기형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다양성의 한 일부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성별에 대한 이분법으로 성 소수자들을 기형이나 변태로 생각한다. 어느 집단은 동성결혼 합법화가 이루어지면 인간과 세상이 망한다고 하더라. (그렇다면 동성애를 반대하는 우익들이 사랑하는 천조국은 망하겠군) 인간 역사가 대단할 것 같지만 길게 잡아 300만 년이다. 그중에 원인에서 현생 인류로 진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만 년에 불과하다. 지구 나이 46억 년과 우주 나이 150억 년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다. 다른 생명체들을 인정하면서 좀 더 겸손해져야 할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누가 더 잘 사고 생존에 강한지 비교우위를 따지면서까지 서로 으르렁거릴 필요가 없다. 인간만이 지구의 주인이라는 오만한 생각은 모든 존재의 파멸을 초래한다.

 

 

 

 

 딴지걸기

 


※ 주변 환경과 경쟁 대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어떤 대상이 변화를 시도해도 상대적으로 뒤처지거나 제자리에 머무는 현상을 ‘붉은 여왕 가설’이라고 한다. 책에서는 가설을 제안한 사람을 ‘윌리엄 해밀턴’으로 적혀 있다(30쪽). 해밀턴이 붉은 여왕 가설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한 사람은 맞다. 하지만, 이 가설을 가장 먼저 생각했고, 루이스 캐럴의 소설 속 인물 이름을 빌려서 '붉은 여왕 가설'이라고 처음으로 말한 사람은 리 반 베일른이라는 진화학자다.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 《사랑, 그 혼란스러운》 참조)

 

※ 115쪽에 동영상 커뮤니티 사이트를 ‘유투브’라고 썼다. 외래어 표기 규정에 따르면 ‘유튜브’라고 써야 한다.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디오니소스의 어머니 이름은 세멜레(Semele)다. 책에서는 ‘세밀레’로 되어 있다. (162쪽)

 

※ 사약의 재료로 쓰였던 천남성이라는 식물이 있다. 181쪽에 천남성의 모습이 있는 사진이 있다. 사진 하단에 천남성을 알리는 문장이 있는데 ‘천남생’으로 잘못 적혀 있다.

 

※ ‘교미 기회 얻고’ (227쪽, 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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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5-12-30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명의 그 다양성을 아직 -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지나도 - 이해하고 또 존중하기에는 많이 이른 것 같습니다. :-)
갑자기 바나나 먹기가 좀 지루해지려고해요. ㅎㅎㅎ

cyrus 2015-12-31 13:20   좋아요 0 | URL
그 부분에 대해서 알아야 할 현상들이 너무 많아서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릴 듯합니다. ^^

해피북 2015-12-30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예전에 책에서 바나나 위기설을 읽은 적 있는데 바나나가 없는 세상은 너무 슬플 것 같아요. 그리고 딴지걸기를 읽으며 생각한건데...정말 대단하세요 ㅎㅎ

cyrus 2015-12-31 13:23   좋아요 0 | URL
이 책을 만든 출판사가 서평 이벤트를 자주 해요. 신간도서가 나오면 이 책의 서평을 써줄 독자를 선정합니다. 저도 이 책을 신청하려다가 안 했어요. 만약에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이 글을 썼으면 제 글을 읽은 출판사 직원은 당황했을 겁니다. ^^

마립간 2015-12-31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나리도 바나나와 같은 상황이죠.

cyrus 2015-12-31 13:25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