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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 우리가 놓치고 있던 이슬람과 중동 문제의 모든 것
서정민 지음 / 시공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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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나라에 와서 일하는 많은 이주 노동자들의 나라를 보면 이슬람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많다. 특히 대구북부정류장 인근에 가면 방글라데시, 터키, 이란, 파키스탄 등에서 온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유동 외국인만 해도 하루에 수백 명에 달한다. 염색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북부정류장에 들어선 식당 또는 식료품 가게를 많이 찾는다. 이곳이 이들의 주된 생활공간. 어려운 현실이지만 강한 유대감으로 대구의 한쪽에서 터전을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겪는 어려움은 정작 돈이 아니다. 생활하며 겪는 어려움이 더 크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슬람’ 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대부분 부정적 이미지다. '테러 집단'과 거의 유사한 뜻으로 이해한다.
이슬람이란 아랍어는 원래 ‘평화’의 뜻을 담고 있다. 인간이 알라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진정한 평화에 도달할 수 있다는 종교적 의미를 포함한다. 그런데 오늘날 이슬람 국가들이 나오는 화면은 늘 화약 냄새가 가득하고, 사람들의 비명이 넘친다. 우리는 화면에 비친 이슬람을 자주 보면서 저곳은 테러리스트가 판치는 아수라장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과격 이슬람 무장단체 IS(이슬람 국가)의 위협과 공격 수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미국이 IS를 비롯한 테러 단체와 전면전에 나선 이후로 전 세계 곳곳에서 반 무슬림 정서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한 손에 칼, 한 손에는 꾸란’, 이슬람의 폭력성을 말할 때 흔히 이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이 말은 이슬람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13세기 기독교의 십자군이 중동 원정에서 이슬람군에 패배하자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슬람에 대한 공포증을 심어주기 위해 처음 한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이슬람 세계에 대해 잘 모르거나 왜곡된 개념으로 알고 있는 것이 많다. 우리가 지금껏 이슬람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은 그 모든 것이 현재의 중동 분쟁을 만든 이슬람과 적대적 이해국인 서구의 시선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의 미디어는 ‘이슬람=테러’라는 생각을 전 세계 사람들이 갖게 하였다.
이슬람주의의 요체는 정치, 경제 등 모든 영역에서 이슬람 정신으로 돌아가 샤리아(이슬람법)로 통치하는 나라를 세우자는 것이다. 대표적 이슬람주의 단체인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의 창시자 하산 알 반나는 서구의 가치들이 무슬림들에게 조화와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무슬림형제단은 초기엔 온건한 사회운동을 펼쳤으나, 주요 이론가였던 사이드 쿠틉 등 많은 조직원이 정치적 탄압을 받으면서 급진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이드 쿠틉은 이슬람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응징하는 성전을 옹호한 과격 이슬람주의의 아버지다.
이슬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슬람교와 과격 이슬람주의, 두 개념의 차이를 구분해야 한다. 이슬람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무슬림들을 모조리 과격한 사람으로 봐선 안 된다. 이슬람교는 무슬림의 생활양식과 세계관을 규정하는 문화적, 종교적 제도를 의미하지만, 과격 이슬람주의는 이슬람교를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해석한다. IS는 자신들의 테러를 정당화하기 위해 쿠란의 일부 구절을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테러 행위를 위대한 ‘성전(聖戰, 지하드)’이라고 표현하는데, 여기서 성전을 원래 적에게 향한 공격을 정당화하는 의미가 아니다. 알라의 존재성을 부정하는 불신자의 공격에 대응하는 방어적인 성격을 가진다. 이슬람을 지키기 위해 알라의 이름으로 행하는 정의로운 전쟁이다. 또 이슬람 교리에 따르면 자살은 금기사항이다. 무장 세력들이 무슬림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지하드를 선포하고 자살테러를 시키는데, 정치적 수단일 뿐 종교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다.
IS는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수니파와 시아파 간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 테러를 감행해 존재감을 확산시키고 수니파 과격세력을 결집한다. 그러므로 중동이 혼란에 빠진 원인을 그저 종파적 갈등으로만 보는 건 분명 한계가 있다. 종파 갈등 이면엔 정치적 목적과 이득을 위해 종파 간 대립을 조장한 집단이 있다. 서방국도 중파 갈등을 부추긴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미국과 러시아도 냉전 시대부터 중동과 아랍권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종파 간 갈등을 이용했고,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을 때 미국이 지원한 무장 세력 단체가 바로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끌었던 알 카에다였다. 이런 사실로 비춰볼 때, 수니와 시아의 반목은, 서구 강대국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갈등 조장이 원인이며, 지금의 유혈충돌로 이어졌다.
이 책의 저자는 과격 세력들이 행하는 테러를 ‘테러리즘미즈(Terrorism+ism)’와 ‘알 카에디즘(Al-Qaeda + ism)’의 대결 구도로 보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테러리즘미즈’는 미국이나 서방국이 중동의 테러를 ‘적의 소행’으로 바라보는 인식을 뜻한다면(예를 들면, 이란과 이라크를 ‘악의 축’이라고 규정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중동 인식), ‘알 카에디즘’은 IS처럼 자생적으로 세력을 확산하고, 테러를 꾸미는 무장단체를 총체적으로 의미한다. 아마도 이 두 단어는 저자가 직접 만들었을 것이다. 이슬람을 무조건 적대적으로 보는 편견을 표현하기 위해서 굳이 ‘테러리즘’에 ‘ism’이 더 붙는 단어를 만들 필요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의미상 이런 단어는 성립할 수 없다. 학계에서 공인된 단어가 아니라 저자가 만든 것이라면 이 사실을 본문에 명시해줘야 한다. IS 관련 소식 이후로 이슬람 관련 서적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이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도 출판 열풍 속에 나온 신간이다. 분량이 제법 두꺼운 책을 원하지 않는다면, 이 책을 읽는 것이 좋다. 과격 이슬람주의 형성의 역사에서 오늘날 IS에 관한 최신 정보까지 소개하고 있다. 다만, 중동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연표가 없다는 점이 아쉽다.
아랍인들은 이슬람 이전의 시대를 자힐리야(Jahiliyya), 즉 무지의 시대라고 말한다. 알라에게 복종하지 않는 중동의 상황은 자힐리야다. 권력투쟁의 수단으로 이용된 종파 분쟁이 이제는 목적과 이유는 사라진 채 오로지 반목과 갈등, 대립을 위한 존재로 남아 있다. 그들이 꿈꾸는 평화로운 이슬람 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은 ‘한 손에 폭탄을, 한 손에는 총’이 더 어울린다.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수니와 시아파는 지금 자신들이 왜 서로를 죽이려 하는 지, 그 이유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 그들이 믿는 신은 잘 알고 있을 텐데.
※ “결국 당시 수상이었던 마흐무드 알 누크라시 파샤가 무슬림형제단 조직원에 의해 됐다” (86쪽) → ‘살해’가 빠진 채 인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