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 벨라스케스 『어릿광대 파블로 데 바야돌리드』 (1635년경)
“저기에 어릿광대 파블로 데 바야돌리드가 양감을 지닌 채 공간 속에서 서있습니다. 그런데 바닥은 어디에 있고 벽은 어디에 있습니까?” (필립 드 몬테벨로 & 마틴 게이퍼드 《예술이 되는 순간》 중에서, 151쪽)
에두아르 마네는 화가가 되기 전에 스페인 프라도 미술관을 드나들면서 대가들의 걸작을 모사했다. 그러다가 그곳에 걸린 벨라스케스의 어릿광대 그림을 발견하게 된다. 마네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장 필립 드 몬테벨로처럼 그림에 바닥과 벽이 없다는 사실에 놀라웠을 것이다. 훗날 마네는 동료 화가인 팡탱 라투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벨라스케스를 ‘최고의 대가’라고 극찬했다. 그러면서 원본의 아우라를 이렇게 표현했다. “배경은 사라지고 그 사람을 둘러싼 공기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는 온통 검은색이지만 살아 있는 듯합니다.”
『풀밭 위에서의 점심 식사』 (1863년)
『올랭피아』 (1863년)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1881~1882년)
이때부터 마네는 벨라스케스를 오마주의 대상으로 정하여 본격적으로 붓을 들기 시작했다. 벨라스케스의 표현 기법에 영감을 얻어 제작한 그림이 바로 1866년 작 『피리 부는 소년』이다. 그런데 『피리 부는 소년』는 마네의 대표작으로 거론되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파리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풀밭 위에서의 점심 식사』(1863년)와 『올랭피아』(1863년) 그리고 마네의 ‘스완 송’이 된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1881~1882년)에 비하면 예술적 가치가 덜 알려진 것 같다.
『피리 부는 소년』의 첫인상이 단순하다. 『풀밭 위에서의 점심 식사』, 『올랭피아』,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과 같은 마네의 유명한 그림들을 먼저 본 사람들은 『피리 부는 소년』에 감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그림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풀밭 위에서의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처럼 비평가들로부터 비난의 뭇매를 맞았다. 이로 인해 『피리 부는 소년』은 살롱전에 낙선하고 말았다. 당시 비평가들도 배경이 없는 그림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그림에 바닥은 어디 있고 벽은 어디에 있습니까?” 마네가 궁지에 몰리게 되자 인상주의 화가들의 든든한 지원자 역할을 해주었던 소설가 에밀 졸라가 나서서 살롱의 비평가들과 맞섰다.
『피리 부는 소년』 (1866년)
“누가 뭐래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올해의 낙선작 『피리 부는 소년』이다, 마네의 그림은 꾸밈이 없다. 부분들에 괘념치 않을 뿐 아니라, 인물에 불필요한 덧칠을 하지 않는다.” (에밀 졸라, 《마네 : 이미지가 그리는 진실》 69쪽)
그림이 단순하게 보여도 한 번 봐도 잊히지 않는다. 관객을 향해 정면으로 지긋이 바라보면서 피리를 부는 소년의 자세가 안정적이다. 안정적인 자세는 관객을 편안하게 만들고, 몰입도를 높여준다. 관객은 피리 부는 소년의 눈을 마주치면서 이제 곧 피리에서 울러 퍼지게 될 멜로디를 들으려고 할 것이다. 한쪽 발에 무게를 둔 완벽한 콘트라포스토의 자세다. 어떤 대상을 아름답게 보이려 애쓰는 것이 ‘꾸밈’이라면 잘 드러날 수 있게 노력하는 것이 ‘보임’이다. 마네는 『피리 부는 소년』을 그리기 위해서 후자를 선택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참고했으며 고대 그리스 조각의 특징인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도입했다. 마네는 근대 모더니즘 회화의 시작을 알린 개방적인 화가로 알려졌다. 비평가들은 마네의 묘사를 시대의 조류를 거스른다고 봤다. 하지만 마네는 고전적 전통을 완전히 단절하지는 않았다. 벨라스케스와 콘트라포스토의 장점을 조합하여 균형 잡힌 신체를 선보였다. 『피리 부는 소년』은 ‘보임’의 결정체다. 마네는 과한 덧칠 없어도 자신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