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주 가는 도서관은 교보문고 매장과 가깝다. 오전에 공부하고 난 뒤에 교보문고 매장으로 향했다. 이번에 나온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를 사기 위해서다.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는 것은 책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일상다반이다. 서점에 가서 양손으로 책을 만져보고, 두 눈으로 종이 한 장씩 훑어보는 독자들도 있다. 하지만 간편한 결제가 이루어지고, 밖에 나가지 않고도 집에서 책을 받을 수 있는 인터넷 주문이 편하다. 이렇다 보니 동네서점은 점점 쇠퇴의 길을 걷고, 대형서점을 찾는 사람들도 그렇게 많지 않다.

 

수요일에 올재 클래식스 열네 번째 시리즈가 오전부터 교보문고 홈페이지와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출고되었다. 어제 정오에 인터넷 교보문고에 검색해봤는데 생각했던 것과 달리 영업점별 재고가 꽤 많이 남아 있었다. 늦어도 내일 완전히 매진될 것으로 보인다. 나는 손과 눈으로 책을 느껴보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 올재 클래식스를 살 땐 무조건 교보문고 매장을 방문한다. 어제 오전에 해야 할 일을 다 끝내고 점심을 먹은 뒤에 교보문고 매장에 갔는데 이때 시간은 1시 조금 넘었다. 늦게 가도 올재 클래식스 시리즈를 살 수 있다. 또 느긋하게 책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쥘 르나르의 《박물지》에 《일기》도 같이 수록된 사실을 알았다.

 

헌책방 한 곳에 가서 책을 몇 권 샀는데도 그 옆에 있는 다른 헌책방도 꼭 들러봐야만 직성이 풀린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보문고를 다 둘러봤으면 다음 목적지로 발길을 돌린다. 책이 많은 곳이면 된다. 교보문고와 아주 가까운 위치에 있는 알라딘 중고매장, 대구시청 주변이나 태평상가 건너편에 밀집된 헌책방들 그리고 조금만 더 걸으면 대구역 지하차도(‘굴다리’라고도 한다)에 있는 헌책방과 남문시장 주변에 있는 헌책방 골목도 있다. 특별히 순서를 정해서 가기보다는 기분 내키는 대로 가는 편이다. 책을 살 수 있는 비용과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어서 하루에 네 곳을 다녀본 적은 없다. 하지만 두 곳은 꼭 간다. 알라딘 중고매장 안에 있는 손님들이 너무 많은 탓에 책을 읽을 분위기가 나지 않거나 읽을 만한 책이 없으면 무조건 헌책방에 간다. 그곳에 가면 일단 조용해서 좋다. 또 귀중한 금맥 같은 절판 본을 발견할 수 있다. 내 머릿속엔 ‘책, 헌책방, 성공적’이라는 좋은 기억이 남아 있다. 알라딘 중고샵에서 비싼 가격에 매겨진 책을 헌책방에서 싼 가격으로 샀던 경험이 많다. 

 

햇빛으로 비타민 D를 공급받을 겸해서 대구역 지하차도로 걸어갔다. 작년 12월에 처음 지하차도 헌책방을 가게 되었는데 ‘가나헌책방’이라는 곳에 두 번 간 것이 전부다. 이번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헌책방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영광도서’라는 간판을 단 헌책방에 갔다. 역시 ‘가나헌책방’처럼 가게 전체 내부가 좁았다. 책장이 가게 내부 중앙에 있어서 그런지 가게가 더 좁아 보였다. 가게 안에 두 사람이 들어갈 수가 없다. 손님 한 사람이 가게 안에 있으면 다른 손님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없다. 하지만 나는 이런 좁은 공간의 헌책방도 좋다. 헌책방의 책들은 애서가를 유혹하기 위해 둘러싼다. 대형서점에서 책을 읽는 기분과 완전히 다르다. 좁은 규모의 헌책방은 독자와 책과의 거리를 더욱 가깝게 해주는 최적의 장소이다. 책을 꼼꼼하게 확인하려는 몰입도도 높아진다. 기차가 ‘덜커덩’거리면 지나가는 소리는 헌책방 내부의 고요한 정적을 방해하지만, 책에 완전히 현혹된 애서가의 최면은 절대로 깨뜨리지 못한다. 오히려 기차 소리가 낭만적으로 들린다. 군상의 잡담이 사방에 메아리처럼 울려대는 대형서점에 비하면 대구역 지하차도 헌책방이 비교적 조용한 편이다. 

 

쪼그려 앉으면서까지 바닥에 있는 책들도 꼼꼼하게 살핀다. 연세가 많은 영광도서 주인장은 젊은 손님이 책을 살피는 모습이 신기한 듯 유심히 지켜본다. 주인장의 시선이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책을 고르는 데 큰 방해가 되지 않았다. 30여 분 동안 눈알을 여러 번 굴린 끝에 손님의 눈길이 가지 않은 곳에 아주 귀중한 책을 발견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다. 가게 입구 근처에 이 책이 있을 줄이야.

 

 

 

 

 

지금까지 헌책방을 여러 번 방문하면서 읽고 싶은 절판 본을 운 좋게 찾아봤지만, 오늘은 대박에 가까운 날로 기억될 것이다. 아서 C. 클라크의 《라마》 (고려원, 1994) 1권부터 6권까지 책장에 꽂혀 있었다. 책장 맨 아래에 있어서 쪼그려 앉아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7권이 없다. 혹시 7권이 어디선가 따로 꽂혀 있을 거라는 생각에 책장 주변을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7권 모두 발견했더라면 올해 헌책방 탐방 중 최고의 날이 될 수 있었다. 원래 혼자서 책을 잘 찾는 편이라서 찾기 힘든 책도 끝까지 찾고 마는 집요한 성격이라서 웬만하면 주인장에게 책을 찾아달라고 부탁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오늘 영광도서를 방문한 것이 처음이라서 주인장의 도움이 필요했다. 라마 7권을 찾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인장도 라마 7권을 찾지 못했다.

 

아서 C. 클라크는 로버트 하인라인, 아이작 아시모프와 함께 과학 소설계의 3대 거장으로 손꼽힌다. 최고의 과학 소설가에게 수여하는 4대 과학 소설 문학상(휴고상, 네뷸러상, 존 캠벨 기념상, 주피터상)을 전부 수상했는데 과학 소설 문단을 뒤흔든 작품이 바로 1973년에 발표한 라마 1권인 《라마와의 랑데부》이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제작한 영화로도 잘 알려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황금가지, 2004)다. 그는 뛰어난 과학 소설가이지만 미래학자로서의 업적 또한 상당하다. 통신위성의 기본적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제시했다. 클라크가 남긴 수많은 과학 소설들은 후대의 과학 소설가들뿐만 아니라 과학자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라마와의 랑데부》는 직경 수십 킬로미터의 거대한 천체가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것에서 시작한다. 놀랍게도 이 구조물의 정체는 우주선 라마 호. 인류가 외계문명과 조우하는 이야기의 발상은 훗날 과학 소설의 주요 플롯이 되었다. 15년 뒤에 클라크는 미국 NASA 주임 연구원으로 활동했고, 칼 세이건과 함께 유명한 과학 다큐멘터리 ‘코스모스’를 기획한 젠트리 리와 함께 라마 후속작을 쓰기 시작한다. 2편 《Rama II》(1989년), 3편 《The Garden of Rama》(1991년), 4편 《Rama Revealed》(1994년)가 발표되었다. 국내에 번역된 라마 시리즈의 원서 구성은 다음과 같다.

 

2권 ‘위험한 탐사’ & 3권 ‘의문의 궤도 수정’ : 《Rama II》
4권 ‘남겨진 지구인’ & 5권 ‘새 에덴 동산’ : 《The Garden of Rama》
6권 ‘외계인의 도시로’ & 7권 ‘밝혀지는 라마’ : 《Rama Revealed》

 

《라마와의 랑데부》는 국내 과학 소설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과학 소설의 최고봉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젠트리 리와 함께 쓴 라마 후속작은 최악의 작품으로 평가한다. 독자 서평들을 참고하면 후속작이 전작 《라마와의 랑데부》의 명성에 따라가지 못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젠트리 리가 대작을 망쳤다는 시선도 많다. 심지어 7권까지 읽는 일은 시간 낭비라고 단호하게 경고하는 서평도 있었다. 아직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작품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다. 라마 시리즈를 읽기보다는 아서 C. 클라크의 작품 세계를 알아보는 차원에서 단편 전집과 장편소설을 먼저 읽어볼 생각이다. 

 

 

 

 

 

 

 

 

 

 

 

 

 

 

 

 

 

라마 시리즈 6권을 총 9000원에 샀다. 한 권당 1500원. 뜻밖의 발견에 이은 뜻밖의 가격이다. 고려원에서 펴낸 라마 시리즈는 현재 아서 C. 클라크 번역본 중에서 가장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 10년 전에 복간되었으나 절판된 《라마와의 랑데부》(옹기장이, 2005)도 마찬가지다. 최상급 상태일수록 가격이 높다. 참고로 내가 찾지 못한 라마 7권은 알라딘 중고샵에서는 6만 원으로 책정되었다. 이걸 사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된다. 나는 악서(惡書)도 희귀한 가치가 충분히 있고, 이제는 구하기 힘들다면 일단 소장해보는 성격이다. 그렇지만 과학 소설 마니아라면 나에게 비싼 돈을 주면서까지 책을 사지 말라고 충고했을 것이다.  

 

 

 

 

 

※ 사진출처 : 황금가지 출판사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

 

 

   

라마 시리즈와 더불어서 가장 비싼 아서 C. 클라크 작품 번역본으로는 모노리스 3부작 시리즈다. 1부는 쉽게 구할 수 있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다. 2부 《2010: Odyssey Two》(1982)와 3부 《2061: Odyssey Three》(1987)는 1980년대부터 모음사라는 출판사에서 나왔으나 절판되었다. 4부 《3001: The Final Odyssey》(1997)는 정식으로 출간되지 않았으나 1990년대 후반부터 과학 소설 독자가 천리안에서 번역한 글을 2006년에 과학 소설 독자들을 위해서 제본 형태로 100부를 제작했다고 한다. ‘3001 최후의 오디세이’라고 검색을 하면 전설의 희귀본이 된 4부의 책 표지를 확인할 수 있다. 아무튼, 1부를 제외하면 2, 3, 4부가 3만 원 이상 넘는 비싼 책이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 또한 라마 시리즈처럼 후속작에 대한 평이 좋지 않다. 거장도 전작의 명성을 뛰어넘기가 쉽지 않다. 터무니없는 가격 앞에서 그저 군침만 흐르는 독자들이 있다면 조금만 더 인내심을 가져보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황금가지 출판사가 올해 4분기에 스페이스 오디세이 완전판 출간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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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5-04-10 0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경사가!!! 축하드립니다. 저도 한국에 살았더라면 자주 비슷한 내용의 포스팅을 올렸을 듯 합니다. 너무 부럽습니다.ㅎ 그나저나 `성공`이라는 표현은 이산타 아저씨 이후로는 완전히 다르게 다가오네요.ㅎㅎㅎㅎㅎ

cyrus 2015-04-10 23:45   좋아요 0 | URL
헌책방에서 책을 고를 때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운이 따라줬던 상황일 겁니다. 이런 소소한 행복을 느낄 때가 제일 기분이 좋습니다. ^^

해피북 2015-04-10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득템 하셨네요 ㅎ 축하드려요 그리구 소개해주시는 책방들 대구에 들러 쭉 투어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가 저는 아직 헌책방가도 책을 고를 안목이 없어서 가봐도 별소용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cyrus님의 오랜시간의 독서편력도 느껴지면서 부러운 마음 한가득 놓고 갑니다 ㅎㅎ

cyrus 2015-04-10 23:48   좋아요 0 | URL
헌책방에서 책을 고르는 데 안목은 필요하지 않아요. 천천히 읽어보고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면 됩니다. 대구에 남아있는 헌책방에 많지 않지만, 다 둘러보고 나서 대구 헌책방 위치를 알 수 있는 약도를 만들려고 합니다. ^^

붉은돼지 2015-04-10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축하드립니다. 저는 라마시리즈는 금시에 초문입니다. 견문 일천한 소생 많이 배웁니다. ^^
중앙도서관에 자주 가시는 군요...저도 옛날엔 많이 갔었습니다. ㅎㅎㅎ

cyrus 2015-04-10 23:51   좋아요 0 | URL
역시 붉은돼지님은 단번에 아시는군요. ㅎㅎㅎ 저도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아기 수준인데요. 저는 클라크의 대표작을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만 알고 있었어요. 과학 소설 마니아의 블로그를 알게 되고 난 이후부터 과학 소설이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에이바 2015-04-10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득템 축하드려요! <라마>는 처음 듣는데요, <스페이스 오디세이> 출간 소식까지 오늘도 좋은 소식 알게 되었네요. 7권 가격이 무지 쎄네요. 너무 비싸니 원서(?)는 어떠실런지... 올재 클래식스 사셨나요? 전 <박물지>랑 <산해경> 샀는데요. 르나르 글과 그림이 참 귀엽고 좋아요. 일기도 진솔하고요. 몇 장은 사진도 찍어놨어요. ㅎㅎ <산해경>은... 삽화를 보니 기분이 아스트랄해져서 시간을 갖고 읽으려 합니다.

cyrus 2015-04-10 23:54   좋아요 0 | URL
어제 조금씩 <산해경>을 읽었는데, 진짜 황당하더군요. 생각보다 텍스트가 단순해서 일주일 안에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비로그인 2015-04-17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구역 지하도옆에 헌책방집을 예전에 학교 다닐때 부지런히 드나들었지요.
그 덕에 저는 헌책은 빌려보기도 싫더라구요.

헌책방집의 좋은 점은 구하기 어려운 책들을 거기서는 볼 수 있다는 매력이 있지요.
헌책방집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cyrus 2015-04-19 17:3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동네서점보다 제일 열악한 상황에 처한 곳이 헌책방이에요. 헌책방을 운영하시는 분들 대다수가 연세가 꽤 많고, 혼자서 가계를 책임지고 있다보니 얼마 못 가서 폐점하는 경우가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