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뭉크 다빈치 art 1
에드바르드 뭉크 지음, 이충순 옮김 / 다빈치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살면서 우리는 많은 것에 욕심을 부린다. 부, 명예, 건강 그리고 행복한 삶 등 여러 가지를 누리고 싶어 하고 그것에 집착한다. 사람 욕심은 한없지만, 그중 가장 큰 욕심은 무병장수. 인간의 가장 큰 소망이 건강이다 보니 의학 수준은 높아졌다. 그렇다고 모든 질병으로부터 인간이 해방된 것은 아니다. 소음과 공해 그리고 전자파가 가득한 도시에 질병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이 늘어난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질병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평소에 건강관리를 잘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인간은 태곳적부터 본능적으로 많은 두려움 속에 살고 있다. 기아와 질병 또는 전쟁의 공포 속에서 살아왔다. 지금 우리에게 기아와 전쟁의 두려움보다는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건강에 대한 불안에서 매 순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뭉크의 그림은 무의식 속에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현대인의 불안과 고뇌를 현실보다 어두운 색채 속에 일그러진 선으로 그렸다. 뭉크의 예술 세계에는 항상 불행했던 기억으로 가득하다. 그림이 바로 일기이며, 자전이고 삶의 고백이다. 뭉크는 노르웨이에서 군의관 아버지와 독실한 신앙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다섯 살 때 어머니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크게 의지가 되었던 누이마저 잃게 되자 자신도 늘 죽음의 환각에 시달렸다. 그 자신 어린 시절을 병과 정신착란,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로 가득 찼었다고 회상했을 정도였으니, 그의 그림의 중심주제가 죽음이었다는 해석도 일리가 있다.

 

뭉크는 미술의 길에서 자기를 발견했고, 자신의 불행한 심정을 가장 진실하게 그려냄으로써 역으로 새로운 삶의 통로를 찾았다. 그러나 불행은 그를 떠나지 않았으니 그의 그림이 과격하다 하여 전시장이 폐쇄되기도 했고 알코올 중독과 정신 착란으로 치료까지 받아야 했다. 뭉크의 삶은 끊임없는 의문과 불안의 연속이었다. 미술이 유일한 위안일 뿐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편안함을 얻지 못했다. 아버지 역시 종교에 지나치게 심취한 성격이상자였다. 애증이 엇갈리는 이들 부자의 관계는 불행하게도 아버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뭉크는 아버지의 자살로 우울증에 빠져 괴로워한다. 아버지 사망 소식을 알게 된 날에 쓰인 뭉크의 일기에 당시 심란했던 뭉크의 정신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뭉크의 정신 상태는 길에 지나가는 늙은 남자를 죽은 아버지와 닮았다고 착각할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에드바르트 뭉크  「담배를 들고 있는 자화상」 1895년 

 

 

내가 집으로 돌아가면 항상 책상 옆에 앉아 있던, 입 언저리의 담뱃대에서 회색 연기를 뿜어내고, 등은 굽고 낡은 잠옷 차림이던, 사람들이 말을 건네면 항상 친절한 미소를 보내던 그가. 짙은 담배연기 사이로 미소를 짓던 바로 그가. 다시는 그 미소를 볼 수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44쪽)

 

 

뭉크 연구가들은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이 상처받은 유년기의 기억이 되었고, 뭉크 예술세계의 우울한 색조를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렇지만, 뭉크가 프랑스에 체류하면서 쓴 미공개 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아버지의 죽음 역시 정신적으로 연약한 뭉크를 괴롭히게 한 불행한 기억이었을 것이다. 뭉크는 반으로 갈라져 버린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할 기회가 자신의 주변을 끊임없이 맴돌던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버려 상실되었다는 사실에 더욱더 고통스러웠다. 뭉크는 늘 죽음이 자신 곁에 있다고 믿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에 뭉크는 「담배를 들고 있는 자화상」을 통해 회색 연기가 나는 담배를 피웠던 아버지의 영혼을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인 캔버스에 잠시 불러들인다. 아직도 아버지의 표정을 잊지 못한 것일까. 죽은 아버지를 떠올릴수록 뭉크는 극심한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죽음의 얼굴은 미소 짓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가장하여 뭉크 앞에 나타난다. 어두컴컴한 배경에 시나브로 사라지는 담배연기를 눈으로 따라가면 무언가를 주시한 채 불안감에 떠는 뭉크의 동공을 마주친다. 틀림없이 뭉크가 두려움 짙은 눈으로 바라본 것은 죽음의 얼굴이었으리라.

 

《뭉크뭉크》는 미공개 일기와 자신을 후원해준 구스타프 쉬플러에게 보낸 편지들 그리고 뭉크가 직접 쓰고, 삽화가 있는 짤막한 이야기 세 편이 담겨 있다. 회화, 드로잉, 판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표현방식을 이용하여 주로 자신이 지나온 과거의 흔적들과 아픔을 그대로 작품으로 표현하는데, 그와 같은 형상을 좀 더 사실적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설명적인 텍스트를 작품에 덧붙이기도 한다. ‘자유도시의 사랑’과 아담과 하와를 패러디한 ‘알파와 오메가’는 분열증에 가까운 뭉크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특히 뭉크는 ‘알파와 오메가’에서 오메가를 뱀의 유혹에 굴복하는 하와보다 더 악랄한 여자로 묘사했다. 오메가는 알파 몰래 짐승들과 부정한 관계를 맺는다. 여성들과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켜 고뇌에 시달렸던 뭉크는 여성에 대한 악의적 감정을 ‘알파와 오메가’에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뭉크는 죽음 다음으로 여성을 두려운 존재라고 봤다.

 

뭉크의 일기는 뭉크의 내면에 투영된 불안과 절망, 자연의 절규 자체다. “핏빛으로 물드는 하늘 아래 검푸른 해변과 도시에는 불로 된 피와 혀가 걸려 있었다”는 저 유명한 「절규」의 착상 이미지뿐만 아니라 일기 속에서도 온통 기괴한 비명으로 넘쳐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언젠가 덮쳐올 죽음의 거대한 손길에 대한 예견이라고나 할까. 앙드레 말로는 “예술엔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덧없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영원한 삶에 대한 열망을 담아낸 게 예술이라는 얘기다. 따라서 예술가는 가도 예술은 살아남아 언제까지나 그 영혼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뭉크는 살아 있는 영혼을 그대로 캔버스에 가두는 데 성공했다. “내가 그리는 그림은 살아 있는 생생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 숨 쉬고, 느끼고, 아파하고, 사랑하는 그런 모습의 사람들이어야 한다.” 뭉크는 사랑, 죽음, 고통, 불안 등의 감정을 거친 붓질로 그린다. 그것은 불행한 개인사에 기초한, 뼈아픈 영혼의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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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물감 2015-03-10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뭉크는 그림이 의외로 익숙(?)해서 관심이 많이 가는 화가예요.불행한 개인사라... 읽어보고싶습니다

cyrus 2015-03-11 16:14   좋아요 0 | URL
혹시 익숙한 그림이라면 ‘절규’를 말씀하시는 거겠죠? ^^ 저는 처음에 ‘절규’ 같은 뭉크의 그림을 봤을 때 불쾌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뭉크의 생애를 알게 되었고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어요. 그림이 어두워서 여러 번 볼수록 슬픈 느낌도 나요.

붉은돼지 2015-03-11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정일의 아담이 눈 뜰때의 주인공이 가지고 싶어한 물건이 아마 턴테이블, 타자기 그리고 뭉크화집이 아니었던가요

cyrus 2015-03-11 22:29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저는 이 주인공을 보면서 화보, 타자기, 절판본을 갖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

나와같다면 2015-05-17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뭉크의 `절규`를 보면 그가 느낀 극한의 공포. 공황상태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것 같아요. 그 작품은 극 사실주의 작품으로 느껴집니다. 그는 분명히 그 하늘 색을 봤고.. 그 적멸감을 느꼈을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