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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된 사나이 - 새번역판 ㅣ 그리폰 북스 6
알프레드 베스터 지음, 김선형 옮김 / 시공사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연애를 하려면 ‘썸’ 타는 법을 배워야 하는 시대다. 연애에 감을 잡지 못하는 모태솔로는 썸에 대한 푸념으로 시작해 한탄으로 끝이 난다. 상대방의 마음을 뜨겁게 불 지를 수 있는 사랑의 불꽃이 일어나기는커녕 당사자는 상대방 마음을 몰라 애만 태운다. 만남은 상대에게 조심스럽게 손을 내미는 것과 같다. 내민 손을 잡는 것은 마음을 나누는 것이며 따뜻한 온기를 통해 마음을 확인하게 된다. 흔한 우리네 사랑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서로를 알아가면서 점차 사랑을 느끼는 단계를 밟는다. 하지만 썸은 이러한 단계보다도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에 감정에 머문다. 썸을 탈 때 밀당의 기술은 필수이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에게 카톡으로 밀당을 한다. 본인도 상대방이 마음에 들지만, 카톡을 받는 즉시 응답하면 괜히 내 마음을 다 보여주는 것 같아서 바로바로 카톡에 답하지 않는다. ‘난 쉬운 여자가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좋으면 네 진심을 더 보여줘’라는 기대 심리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단계가 너무 길어지면 남녀 간 마음의 거리를 좁혀나가기가 쉽지 않다. 두세 달을 만나도 깊은 사랑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언저리에서 맴돌다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렇다 보니, ‘사랑’이란 감정에 기초해야 하는 연애를 기술로만 접근해 습득하려는 성향이 많아졌다. 호감 있는 상대 이성의 SNS나 카톡 같은 메신저 내용을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상대 이성의 말 속에 숨겨진 의미를 간파해야 상대의 진심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알고 보면, 별 뜻은 없는데 상대 이상의 카톡 상태 한 줄 때문에 스마트폰만 바라보면서 전전긍긍한다.
연애하는 데 있어서 문자나 메신저를 통한 대화가 중요해졌다. ‘사랑해’라는 말도 문자로 전할 수 있다. 그런데 관계가 아닌 감정 상황에 초점을 맞추는 썸이 우리네 사랑을 이상하게 만들어버렸다. 말로 하지 않아도 남자가 내 마음을 알 수 있다고 믿는다. ‘그걸 꼭 말로 해야 해?’ ‘말 안 해도 내 맘 알지?’ 남녀가 사귈 때 여자들이 하는 말의 숨은 의미를 풀이한 ‘여자어 사전’이라는 것도 있다. 남자가 이런 말을 눈곱만큼 알아채지 못하면 여성은 토라진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느냐고 불만을 쏟아낸다. 사소한 오해가 갈등의 씨앗을 낳는다. 그걸 알아내지 못한다고 해서 당신을 향한 남자의 사랑이 식은 것이 아니니까. 그래도 원한다면 독심사를 만나시든가.
혹시 여전히 말 안 해도 알아서 척척 진심을 이해해주는 남자야말로 나 자신을 진정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믿는 여자가 있다면 앨프레드 베스터의 《파괴된 사나이》에 나오는 1급 에스퍼(Esper) 링컨 파웰을 소개해주고 싶다. 텔레파시로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심지어 말을 안 해도 마음만으로 대화할 수 있다. 나이는 삼십대 후반이지만 훤칠한 키에 직업이 경찰 국장이다. 그런데 만남 조건이 있다. 이런 남자를 만나려면 당신도 에스퍼 자격이 있어야 한다. 아무나 에스퍼가 되는 것이 아니다. 에스퍼는 총 세 개의 급으로 분류되어 활동하고 있는데 1급 에스퍼가 되면 깊숙한 무의식의 심층까지 들어가 알아볼 수 있다. 1급 에스퍼 수가 많지 않다. 제일 낮은 에스퍼가 3급이다. 사람의 의식만 읽는 수준으로 한정되어 있다. 파웰은 3급 에스퍼를 상대해주지 않는다. 당신이 3급 에스퍼라고 해도 폭풍 같은 속도로 텔레파시로 대화를 주고받는 에스퍼 수다에 끼어들 자리가 없다. 또 그의 약점도 이해해줘야 한다. 그의 마음속에 또 다른 존재가 있다.
앨프레드 베스터의 《파괴된 사나이》는 SF 장르로서 첫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한 해 동안 뛰어난 SF 작품을 선정하는 휴고 상을 받았다. 놀랍게도 쟁쟁한 선배 작가 후보에 있었던 아서 C. 클라크를 제친 영광스러운 1회 수상작이다. 영화 <인셉션>이 꿈을 침입하여 마음을 조종하는 미래를 선보였다면, 이보다 먼저 베스터가 창조한 미래에 마음을 읽는 능력을 넘어서서 무의식까지 꿰뚫을 수 있는 전문 독심사 에스퍼가 활동하고 있다. 언어 대 언어가 아닌 마음 대 마음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미래. 상대방의 마음을 다 읽을 수 있는 독심사가 되면 이제 썸을 탈 필요가 없다. 상대가 말을 안 해도 네 목소리가 들리니까.
그러나 베스터는 우리의 기대와 달리 세상을 아름답게 그리지 않았다. 독심사가 사는 세상은 음모와 범죄가 난무하며 파괴의 종말을 향해 폭주하는 시대이다. 여기에 탐욕 덩어리 마너크 그룹의 벤 라이히 회장이 범죄 계획을 꾸미면서 파괴로 치닫는 어둠의 하모니는 시작된다. 자신의 합병 제안을 거절한 드코트니를 암살하기 위해 1급 에스퍼 오거스터스 테이트를 끌어들여 엄청난 음모를 꾸민다. 악마 같은 라이히가 독심사 테이트에게 유혹의 손길을 내민다는 것은 독심사 세계에 갈등을 조장하는 일이다. 이에 맞서기 위해 링컨 파웰이 나선다. 파웰은 라이히가 실질적으로 범죄를 일으킨 사실을 확증하는 결정적 단서를 찾기 위해 드코트니 암살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자 드코트니의 딸인 바버라의 무의식에 침투한다. 암살 사건의 전말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파웰과 그의 수사망을 요리조리 피하는 라이히 간의 쫓고 쫓기는 대결이 스피디하게 전개된다. 여기에 악의 에너지를 과다하게 표출하는 라이히가 파멸의 수렴으로 향하는 과정도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흡입력 높은 베스터의 문체를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것이 바로 베스터의 소설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파멸의 징조를 예고하는 폭발음 팡파레가 멈추고, 현실과 환상이 마구 뒤섞인 의식 터널에 빠져나오면서 영화 같은 소설은 끝이 난다. 임무를 완수한 파웰은 에스퍼가 아닌 인간 독자를 향해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에스퍼가 아니라는 사실을 감사하게 여기세요. 인간의 외면밖에 볼 수 없다는 사실에도 감사하십시오. 인간의 수많은 격정, 증오, 질투, 악의, 병폐를 결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고맙게 여기세요...... 인간의 무시무시한 진실을 보는 일이 흔치 않다는 사실에 감사하고요. 모두가 독심사이고 전부 균형 잡힌 심리를 갖고 있다면, 아마 세상은 훌륭한 곳이 되겠지만...... 그때까지는, 눈멀었다는 사실에 감사하세요." (《파괴된 사나이》 중에서, 377쪽)
파웰은 자신의 천직이 굉장하면서도 끔찍스럽다고 말한다. 그가 지금까지 여러 사람의 의식 터널에서 본 것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 채 그대로 응고되어 남아있는 인간의 또 다른 이면, 바로 끔찍한 악의 목소리였다. 라이히는 자신이 만들어 낸 악마 '얼굴 없는 사나이'와의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이처럼 파웰은 1급 독심사로서 자신의 무의식 안에 있는 악마와 비슷한, 아니 그보다 더 센 놈을 만났다. 정말 우리가 상대방의 마음을 훤히 볼 수 있다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둠의 진실까지 알게 된다. 심지어 상대가 드러나기를 원하지 않는 끔찍한 기억마저도 본다. 숨기고 싶은 내 의식의 치부를 누군가가 알고 있고, 자신의 의도를 무시한 채 공공연히 그걸 밖으로 드러낸다면 정신이 산산이 부서질 각오를 해야 한다. 1급 에스퍼처럼 마음을 차폐하는 기능이 있다고 해도 내가 보고 싶은 진실만 밝혀서 볼 수 없다. 지옥 같은 세상에 더 지옥 같은 마음조차 읽는다면 정말 주옥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니 제발 사랑이라는 이름 가지고 상대방의 마음을 읽으려고 하거나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지 마라.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의 치부를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알면서도 눈 감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 나오는 잘생기고 멋진 독심사 같은 남자가 만나고 싶은 그 꿈 좀 깨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