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의 무정한 세계 - 우리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과학사
정인경 지음 / 돌베개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그들의 죄악은 나날이 커지리라. 시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어리석게 살도록 그들을 내버려두자꾸나. 내가 주인임을 그들이 모르게 하라.”
 “주인님의 계획은 감미롭습니다.”

 

(허버트 조지 웰스 『모로 박사의 섬』에서, 문예출판사)

 

 

모로 박사는 자신이 만든 이상한 피조물을 지배하는 신이 되고 싶어 한다. 동물 인간들의 야생 본능을 억누르기 위해 법을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은밀히 피 맛을 느껴버린 동물 인간들은 신이라고 여긴 모로 박사를 습격하여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이 지옥 같은 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는 에드워드 프렌틱. 그 곁에는 자신을 따르는 개 인간만 있을 뿐이다. 개 인간은 프렌틱을 주인이라 믿고 따른다. 프렌틱을 돕는 개 인간도 언젠가는 동물 인간들에게 공격받을 수 있는 상황. 동물 인간들의 공격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프렌틱은 자신을 믿는 개 인간만 남겨두고 모조리 죽이겠다고 약속한다. 그가 동물 인간들을 향한 반격에 성공하면 모로 박사처럼 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피조물의 신이 된 모로 박사를 비난했던 프렌틱도 개 인간 앞에서 신처럼 행동한다.

 

그러나 수적 열세에 처한 프렌틱은 자신의 약속을 지켜내지 못했다. 아니, 절대로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다. 프렌틱은 이 섬에서 신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섬에서 탈출하는 것이 목표이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동물 인간과의 교섭이 가능한 개 인간을 이용했을 뿐이다. 개 인간은 인간을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여전히 자신 같은 피조물을 만든 인간을 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프렌틱은 비정하다. 개 인간을 방패막이로 하여 동물 인간의 공격을 막고자 했다. 동물 인간들에게 외면 받았고, 인간에게 이용당하는 개 인간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그에게 이 섬은 무정한 세계다.

 

웰스『모로 박사의 섬』을 집필하고 있을 당시 유럽은 눈부실 정도로 서양 근대 과학이 발전하고 있었다.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새로운 이론들을 발견해내는 데 성공하는 유럽인들은 승승장구했다. 진보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과학의 진보에 한껏 고무되어 자연을 지배하고 싶었다. 여기서 그들이 지배하고 싶었던 자연이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식민지를 말한다. 과학기술은 식민지를 무력화시켜 지배할 수 있는 위력적인 무기로 변질한다. 유럽 열강은 자신들이 만든 증기선, 소총, 대포 등을 총동원하여 힘없는 식민지를 공격하고 교역을 맺도록 강요한다. 열강 유럽의 습격으로 식민지에 서양문화가 유입되었고, 강제적으로 이식되었다. 유럽인들은 어리석은 식민지를 지배하는 것이 자신들이 이룩한 진보의 위대함을 확인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에 의해 ‘야만인’, ‘비문명인’으로 규정된 피식민지인은 과학기술을 두려워했다. 두려움에 떠는 피식민지인들 앞에서 유럽인들은 전지전능한 신처럼 행동했다. 무기로 내세운 과학기술 앞에 처참히 짓밟힌 고국의 현실을 눈앞에서 지켜본 식민지 지식인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과학기술을 수용하는 일이야말로 침체한 나라를 회복할 수 있는 선결적 과제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지식인들은 서양 과학을 제대로 전수받지 못했다. 우리 정서를 고려하지 않은 채 강제적으로 서양 과학을 받아들였다. 과학만 확실하게 안다면 유럽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문명에 대한 열등감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는 감미로운 약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약을 무조건 건강에 좋다고 믿고 한꺼번에 들이 삼키면 부작용이 생긴다. 체질에 맞지 않은 서양 과학을 받아들인 우리나라는 잘못된 과학 지식을 터득하게 되었고, 지금도 과학을 어려운 학문으로 여긴다. 

 

저자는 우리나라가 과학 공부를 어렵게 생각하는 원인을 일제 강점기의 역사에서 찾는다. 근대 과학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는 이 시기에 조선의 지식인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과학을 배우기 시작한다. 이광수의 소설 『무정』에 나오는 형식처럼  “과학! 과학!”하고 외쳐보지만, 정작 자신들이 알아야 할 과학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들이 알고 있던 과학은 그저 자신들의 정신적 고통을 달래주는 아편에 불과했다.

 

심지어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의도적으로 과학을 편집, 왜곡했다. 국력이 강한 나라가 되어야 식민지 지배를 받지 않는다. 식민지 지식인들은 ‘적자생존’을 강조하는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회진화론은 다윈 진화론과 전혀 다른 사상이다. 순수 과학이라고 할 수 없다. 다윈 진화론을 알지 못한 채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지식인들은 진화론에 ‘적자생존’, ‘약육강식’ 개념을 결부했다. 과학적 다윈 이론을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조선 지식인들의 오류는 지금도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있다. 다윈과 진화론, 둘 중 하나라도 언급하면 벌써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이 있다. 강자의 힘을 정당화하는 이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회진화론을 전파한 조선 지식인들은 강자의 힘에 매료되어 강자 앞에서 굴복하는 의식에 젖어든다. 이는 곧 인종적 열악함을 자인하고, 패배감을 표출하는 것이다. 과학의 진보를 믿었던 이광수는 『무정』을 발표한 지 5년 뒤에 ‘민족개조론’이라는 논설을 써서 일본에게 지배당하는 조선의 민족성을 비판하기에 이른다.

 

서양 제국주의자들은 식민지에 과학을 폭력적이고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데 성공했다. 과학에 무지한 피식민지인들은 서양을 ‘주인'처럼 우러러 보게 된다. 서양 제국주의자들은 진보의 힘을 믿고 식민지에서 똑똑한 주인으로 행세하며 자부심을 확인했다. 과학 중심의 왜곡된 계몽주의를 내세운 조선 지식인들은 미몽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서양 근대과학은 전 세계 누구나 보편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진리로 굳어졌다. 이 진리를 터득하려면 그 속에 내포된 서양인의 사고방식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과학이라 할 수 없다. 과학이 세상을 계몽하는 데 유용하다고 믿는 것은 과학주의다. 여기에 진보와 야만, 문명인과 비문명인으로 규정하는 제국주의적 시선이 작용한다. 안타깝지만, 식민지를 경험한 우리는 미몽에 가까운 애국적 계몽사상이 빚어낸 비극을 여전히 상연하고 있다. 과학과 과학주의를 구별하지 못한 상황에서 서양인들의 입맛에만 맞는 과학 아닌 과학을 배우면서 자랐다. 과학을 제대로 알지 못한 우리는 아이들에게 진짜 과학을 돌려주도록 도와줄 수 있는 자격이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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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4-12-31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의 과학 현실이 서양 근대화에 불과하다는 부분이 참 인상적이였네요. 저는 과학을 잘 아는 편도 아니고, 또 역사적인 부분도 부족하지만, 이 책안에는 역사와 정치 과학을 다루는것 같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정말 글도 잘 쓰시고 독서량이 상당하시네요^^ 놀랍고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cyrus 2014-12-31 18:55   좋아요 0 | URL
이 책 추천하고 싶어요. `과학 상식(특히 뉴턴 물리학과 진화론) 한국문학(이광수, 염상섭, 이상) 한국근대사`가 적절히 조합된 책입니다. 저자가 글을 어렵지 않게 풀어썼어요.

읽고 쓰는 일이 그냥 좋아서 일기처럼 쓰는 편입니다. 놀라는 일이 아니에요. 저보다 많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분들이 알라딘에 많으니까요. ^^

바람돌이 2015-01-01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국주의의 침략이 과학을 앞세워 식민지인들을 야만인으로 취급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이 식민지에서 단순한 열등감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관철되는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항상 궁금했는데 이 책이 그 궁금증을 어느정도 해소해줄 수 있을 듯하네요. 덕분에 좋은 책 담아갑니다. 다음에 읽을 책 리스트에 살짝 꽂아갑니다.

cyrus 2015-01-01 19:20   좋아요 0 | URL
저자의 주장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근대 문학 작품을 인용해서 설명하는 과정이 재미있어요. 꼭 읽어보셔요. ^^

yamoo 2015-01-01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이 책이 땡기는군요~ㅎ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사이러스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좋은 책 소개도 많이 많이 해 주시길~!

cyrus 2015-01-01 22:51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야무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야무님께서 직접 추천하는 책 소개 페이지도 많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