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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로저 오스본 지음, 최완규 옮김 / 시공사 / 2012년 6월
평점 :
절판
"100% 완벽한 선거는 없다", '선거 불완전론' 레토릭의 위험성
최근 새누리당 정두언 의원 체포동의안 부결안을 놓고 당내에서 내홍의 사태가 번지면 번질수록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김재연 의원 제명 결과 여부에 대한 화제가 살짝 묻힌 감이 있다. 이번 주 월요일에 현장투표와 모바일투표를 벌였고 오늘 실시하는 미투표자를 대상으로 한 모바일 투표 결과를 합산하여 통합진보당의 차기 대표가 선출된다. 대표 경선은 구당권파의 지원을 받는 강병기 후보와 신당권파의 강기갑 후보의 양자 대결로 펼쳐지고 있어 선거 결과에 따라 당의 쇄신 방향뿐만 아니라 이석기, 김재연 의원의 제명이 결정될 것이다.
이석기 의원은 올해 상반기동안 수많은 정치적 논란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명언들(?)을 남겼다. 애국가를 부정하는 발언으로 인해서 정계, 대중, 여론으로부터 '종북주의자'라는 비난의 뭇매를 받았지만 좀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비난대상이 되고 있었던 자신의 정치적 가치관과 그간의 행적들에 대해서 자기합리화하는 발언도 있었다. 4.11 대선이 끝난 이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선거 의혹이 거론되면서부터 그 문제적 이슈 한가운데에 이석기 의원이 있었다. 자신을 둘러싼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의혹에 대해서 비난의 강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이 의원은 tvN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에 출연하여 당내 부정선거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이 의원은 진상조사위원회의 결과 발표에 대해 "일부 부실이나 부정은 있을 수 있다"라고 인정하면서도, "이번 사태는 전체 선거를 부정할 만큼의 사안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번 경선을 '총체적 부정선거'로 매도하는 것은 정치적인 폭력"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전 세계 어느 나라에도 100% 완벽한 선거는 없다. 진보정당은 천상의 정당이 아니다. 진보정당이기 때문에 100%여야 한다는 건 대단히 무서운 논리"라며 당 안팎의 비난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일부 부정을 인정한 점 그리고 완벽한 선거가 없다는 그의 주장을 통해서 당내 비례대표가 부정적인 과정을 통해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이 의원 본인이 스스로 시인하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비례대표로 선출할 수 있게 만든 부정적인 과정들이 정당한 행위였음을 뻔뻔하게 자기합리화하고 있다.
그런데 '선거의 불완전함'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이 의원의 레토릭(Rhetoric)은 논리성이 부실하면서도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기도 하다. '선거'(選擧)는 국민에게 정치참여의 기회와 통로를 제공하여 여러 형태의 정치참여 중 가장 일반적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참여하여 주권을 행사하도록 기능한다. 이 의원의 '선거 불완전론'은 선거의 정치적 참여기능적 의미를 부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의 문제점 또한 강조하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1987년 6.29 선언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민주화 사회로 이행될 수 있었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난 일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비민주적인 정치과정은 국민들에게 정치불신과 함께 정치적 소외의식을 불러일으켜 '정치적 무관심'(Political apathy)을 낳게 만든다. H.D. 라스웰(H.D. Lasswell)과 M.A. 캐플런(M.A. Kaplan)은 현대의 정치적 무관심을 '탈(脫)정치적, 무(無)정치적, 반(反)정치적' 이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하고 있다. 탈정치적 무관심은 권력의 행사에 의한 자신의 요구 충족에 실패하여 권력에 환멸을 느끼고 후퇴하는 심리에서 비롯된다. 무정치적 무관심은 예술 등 정치 이외의 가치에 극단적으로 기울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 현상이다. 마지막으로 반정치적 무관심은 아나키스트(Anarchist)나 종교적 원리주의자 등 자신이 갖는 가치가 본질적으로 정치와 충돌한 상태를 말한다. 우리나라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정치적 무관심은 탈정치적 유형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전혀 민주적이지 않고 자신이 요구하는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하고 허술한 정치권력의 행보에 대해서 국민들은 실망을 넘어서 불신에 이르게 된다. 정치에 대한 불신의 폭이 깊어지면 깊을수록 국민들은 정치상황에 대한 관심이나 참여의 정도가 낮게 되며 정치과정에 대해서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체제에서 드러나는 현실적인 문제점에만 강하게 인식하게 된다면 자칫 '민주주의'를 현실적인 문제와 동떨어진 그저 '민주적 원리만을 강조하는 이론'으로 인식하게 된다.
민주주의, 정말로 최악의 정치 체제인가?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민주주의는 우리가 여태껏 채택했던 모든 제도를 제외하면 최악의 정치 체제'라고 말했다. 만약 '정치적 무관심'이 만들어 낸 패배주의적 감정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어리석은 대중이 처칠이 한 말 그대로의 의미를 받아들인다면 민주주의 체제의 모순과 문제점을 옹호하기 위한 레토릭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민주주의는 완벽하지 않은 인류가 만들어 낸 최악의 정치 체제란 말인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즉, 완전히 맞다고 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해서 완전히 틀렸다고도 볼 수 없다. 민주주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최악의 정치 체제이면서도 동시에 인류의 삶에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킨 최고의 정치 체제다. 처칠 특유의 냉소적이면서도 역설적 표현이 구사된 영국식 유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보지 못하게 된다.
로저 오스본이 펴낸『처음 만나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본다면 고대 아테네에서 처음 등장한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닌 민주주의 체제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완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부터 시작해서 입헌군주제가 탄생하게 만든 영국의 명예혁명, 유럽 정치사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운동의 과정 등 이름만 들어도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왜 처칠이 민주주의를 '최악의 정치 제체'라고 말했는지 독자들은 고개를 자연스럽게 끄덕이게 것이다.
말도 많고 탈이 많았던 민주주의의 역사
민주주의의 개념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democratos(국민의 지배)'라는 말이 나왔듯이 그리스에서 기원하였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발전한 민주주의는 단순한 직접민주주의에 그쳤다. 모든 시민들이 '입법의원'이 되어 직접 참여하였다. 이때의 여성들은 선거권이 없었고, 노예제도가 존속하고 있었다. 물론, 고대사회의 민주제도에서도 평등원칙이 존중되기는 하였으나 보편성에 입각한 만인의 평등사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시민의 정치적 참여 형태를 유지하면서 이러한 원칙을 최초로 문서화하여 선보인 곳이 오늘날 스위스 알프스에 위치하고 있는 그라우뷘덴이다. 1499년 그라우뷘덴 주는 신성로마제국에서 독립해 자유국가임을 선언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민중을 중심으로 한 주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투표제도 또한 실시했는데 국정 운영을 담당하는 지도자를 선출하는 오늘날의 국민투표제의 형태라기보다는 주의 지도자가 제안한 정책사안에 대해서 마을 주민 전체의 합의를 도출하는 공동체적 측면이 강한 투표제였다.
이렇다보니 공동체주의적 의사결정 방식을 강조하는 그라우뷘덴의 정치형태에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었다. 오직 공동체주의에 입각한 공동체적 삶에 익숙한 주민들은 자아의 주관적 의식을 배제한 채 정책결정에 참여하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그라우뷘덴의 통치 기구들의 권한은 그리 강하지 않았으며 집단적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강력하고 독립적인 사법 기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치명적 약점이었다.
민중이 완전한 자주권을 쥔 상황에서 그 힘에 대한 견제가 부족하다면 제멋대로 행동하기 마련이다. 나름대로 만들어놓은 법을 마을 전체가 통째로 위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735년 한 사내가 반역 혐의를 받은 사건이 터졌다. 용의자의 집은 약탈당했고, 추종자는 돌 세계를 맞았다. 한 마을 주민은 "합당한 왕국"에 의뢰해 재판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우리가 곧 당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p 133)
1688년에 발생한 영국의 명예혁명은 단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은 채 왕권 정치에 종지부를 찍고 의회정치 발달의 기초를 확립했다고 역사 시간을 통해서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명예혁명 이후에도 영국의 의회정치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민주적이지 않았다. 정말 문자 그대로 '의회'만이 주권을 가진 의회정치였을 뿐 실질적으로 국민이 주권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의회에 입성하기 위한 의원들을 선출하는 선거가 실시되었지만 혈연 중심으로 유권자를 내세운다거나 매수, 부정부패가 만연했던 비민주적인 귀족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정치 체제 속에서 인민의 대표로써 책임을 다하는 민주적인 '정치인'이 나올 리가 없었다.
1715년에서 1831년 사이, 스카버러 구에서만 서른여섯 번의 정기선거과 보궐선거가 치러졌지만 여러 후보가 경쟁한 것은 고작 일곱번 뿐이었다. ... 중앙정부가 적어도 의석 하나를 수중에 넣거나 아예 두 의석 모두 독차지하기 일쑤였다.
(중략)
개인과 가문의 경쟁 구도가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 진정으로 치우침이 없는 후보는 극히 드물었다. (p 169)
비단 명예혁명을 이룩한 영국에서만 비민주적인 정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시민혁명의 전형이라고 알려져 있는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프랑스 또한 혁명 성취 이후 지금의 민주주의 체제로 온전하게 확립되기까지 수많은 진통을 겪어야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선거 투표율을 기록한 오늘날 현존하고 있는 사료에 의하면 1791년 당시 파리에는 대략 8만 명의 유권자가 있었지만 이 중에서 투표에 참여한 사람은 1만 7천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대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입후보한 총 946명의 선거인단 중에서 고작 200명만 당선되었을 뿐이다. 프랑스 혁명 헌법에서는 인민들의 투표권을 강조했지만 그것이 곧 실제 선거 투표 참여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프랑스 시민들이 투표를 행사하기에는 여전히 미흡한 면이 있었다. 그리고 선거인단 사이에서도 자신들의 당선을 위해서 부패와 사기, 협박, 폭력이 은밀하게 자행되었다. 심지어 비밀투표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정파의 후보의 추종자들은 버젓이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투표할 정도였다.
학식이 높은 토머스 제퍼슨의 펜 끝에서 주로 다듬어진 독립선언문은
장엄하고 화려한 수사학의 극치를 드러내는 이념적 문헌이라 할 만하지만,
헌법은 넉 달 동안이나 논쟁과 줄다리기, 타협을 거듭하며 도출해낸 실용 문건이었다. (p 188)
존 트럼벌 「1776년 4월, 필라델피아에서의 미합중국 독립선언」 1820년
인류 최초로 삼권분립을 명시하였으며 자유민주제도를 성문화하는 등 근대 민주주의 정치 제도를 확립한 미국의 민주주의의 역사는 곧 권력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대립과 권모술수가 펼쳐진 미국 정치판의 역사이기도 하다. 독립혁명(1775~1776) 승리 이후 1776년 7월 4일 독립선언문이 채택되기에 이르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의 과정들을 깊숙하게 들여다보면 미국의 민주주의가 순전히 평화적으로 이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시계방향 순으로 왼쪽 위에서부터 토머스 제퍼슨(1743~1826, 제3대 대통령), 존 애덤스((1735~1826, 제2대 대통령),
애런 버(1756~1836. 제퍼슨 행정부의 부통령), 알렉산더 해밀턴(1755/1757~1804, 연방주의자),
제퍼슨, 애덤스, 해밀턴 이 세 사람은 공통적으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조지 워싱턴과 함께 미국 헌법 제정을 위해 이바지를 한 '동지'였으나 얽키고 설킨 상반된 정치적 이해관계로 인해 서로 등을 돌려야하는 '적'이 되고 말았다.
토머스 제퍼슨은 1790년에 조지 워싱턴 행정부의 초대 국무장관에 취임했지만 강력한 중앙정부를 주장하는 연방주의자 알렉산더 해밀턴과의 정책대립으로 1793년에 사임하였다. 그리고 제퍼슨과 해밀턴을 주축으로 한 반 연방주의자와 연방주의자 간의 대립은 1796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어졌다. 제퍼슨은 해밀턴과 같은 연방 당에 소속된 존 애덤스와 경쟁을 벌였지만 결과는 존 애덤스의 승리로 돌아갔다. 선거에 배패한 제퍼슨은 부통령에 만족해야만 했지만 두 사람의 대립은 1800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재현되었다. 이번에는 제퍼슨이 애덤스를 물리치고 제3대 대통령으로 올랐다. 재미있게도 제퍼슨의 승리에는 정적 해밀턴의 도움이 있었다. 해밀턴이 정적을 도와주게 되는 배경의 이유에는 자신의 또 다른 정적 애런 버의 정치적 진출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선거에 패배한 애런 버는 부통령으로 임명하게 되며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애런 버는 자신과 비슷한 정치관을 지닌 반 연방주의자인 제퍼슨 대통령과 갈라서게 된다. 애런 버의 분노는 1804년 해밀턴과의 결투를 성사하게 만들었는데 해밀턴은 결투 끝에 심한 상처를 입게 되어 사망하게 된다. 미국 건국을 위해 큰 공로를 기여를 한 정치인들의 복잡한 정파 경쟁은 오늘날의 미국 특유의 정당정치 체제를 완성해주었지만 그 기나긴 역사적 과정 속에는 피를 부를 정도로 치열한 대립이 있었다. 이들은 정당의 이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치적 이념에 반하는 숙적과의 대립은 불가피했다. 인신공격은 기본이며 해밀턴과 애런 버의 결투처럼 서로 간에 총부리를 겨누게 되는 극단적인 상황은 그 당시로서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정치적 이념에만 초점을 둔 정파 경쟁은 '정부는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효과적으로 도모하여야 한다고' 천명한 독립선언문의 내용이 무색하게 할 정도로 장기적으로 지속되었다.
대중들이여, 민주주의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지어다
시중에 민주주의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설명하는 서적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로저 오스본의『처음 만나는 민주주의의 역사』와 같이 정말 지극히 '현실적인' 민주주의의 역사를 상세하게 소개하는 책이 과연 몇 권이나 있을까? 고대 그리스부터 스위스 알프스, 영국, 미국,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공산주의가 무너져 냉전 시대의 종말을 고하게 되는 현대까지 민주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면 민주주의 체제가 인류의 투쟁과 타협이 반복되어 만들어 낸 고귀한 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투쟁'의 의미에는 단순히 민주주의에 반하는 부당 세력에 맞서 자신들의 주권을 찾으려고 하는 인민들의 혁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둘러싼 정치인들 간의 대립 역시 포함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민들의 주권 확립과 거리가 먼 정치인들 간의 정치적 대립이 민주주의 체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주주의 역사 속의 투쟁들을 보게 되면 대한민국 정치사를 보는 듯한 데자뷰를 불러일으킨다. 영국 명예혁명과 프랑스 혁명 이후의 역사를 보라. 1960년 4.19 혁명 이후의 대한민국의 정치적 상황을 연상케 한다. 민주주의 토착화를 위한 불가피한 진통과 자기투쟁이라는 획기적인 일대사건이었지만 4.19 혁명의 민주이념은 그 후의 정권담당세력의 무능과 경제, 사회적 기반의 취약성으로 미완(未完)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한 모습의 과정이 영국과 미국의 사례와 흡사한 면이 있다. 그리고 독립전쟁 이후 미국 내의 정파 경쟁은 정당이 내세우는 이념과 가치관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정당 내부의 대립을 마다하지 않는 최근 여.야당의 행보를 보는 듯하다.
다만 적나라할 정도로 벌거벗은 민주주의의 역사만 가지고 여전히 민주주의를 '최악'의 체제라고 이해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이상형에 사로잡힌 채 현실적인 정치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정치적 무관심의 또 하나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투쟁'과 '타협'의 과정들은 결국 민주주의가 그 시대상의 유동적인 변화에 따라서 끊임없이 적응하기 위한 과정의 흔적들이다. 그리고 저자의 말처럼 민주주의 사회는 '수많은 삶의 표현'이며 최종적으로 달성되는 단일적인 체제가 아니라 늘 변화가 이루어지는 '현재 진행형'이다. (P 497) 변화가 잦고 불확실한 사회체제의 변화 과정 속에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부당한 간섭과 부정부패들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해법을 확답을 한다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선례를 통해서 찾을 수 있다. 부당한 반민주적 거대 세력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을 도출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이들 앞에서 굴복한다는 것은 곧 민주주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감에 빠진 채 왜곡된 정치적 무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대중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곳에서 채택된 정체는 민주주의다. 우리는 해외의 적들이 극렬하게 매도했던 이 단어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 형제들이여, 민주주의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지어다. (1809년 영국의 언론인 겸 목사 알라이어스 스미스의 말, P 193)
정치적 무관심의 왜곡된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대중들 그리고 민주주의 원리의 문제점만 부각시켜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여 '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 사회의 국론을 분열시키는데 조장하고 우둔한 대중들을 현혹하는 시정잡배들에게 일독할 것을 권하고 싶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내부의 적들이 부정적으로 매도하고 있는 이 단어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완벽한 이상형'이라는 환상적인 옷을 입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민주주의의 역사를 제대로 한 번 보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그 역사를 보면서 민주주의에 대해서 절대로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바로 지구상 '최악'이면서도 '최고'의 정치 체제. 진짜 '민주주의'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