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인의 반란자들 -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
사비 아옌 지음, 정창 옮김, 킴 만레사 사진 / 스테이지팩토리(테이스트팩토리) / 2011년 12월
품절


그 친구가 나를 책벌레라고 불렀을 때, 불쑥 솟아오르던 분노의 순간을 다시 살(生) 수 있다면! 나는 그 순간 내가 살아오던 인생이 그 말로 집약되어 버린 데 몹시 화를 내지 않았던가? 인생을 그토록 사랑하던 내가 어쩌자고 책 나부랭이와 잉크로 더렵혀진 종이에다 그토록 오랫동안 내박쳐둘 수 있었단 말인가! 그 이별의 날, 내 친구는 내가 나 자신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게 해 준 셈이었다. 속이 후련했다. (중략) 그의 표정이 내 내부에 조용한 혁명을 일으켰던 셈이다. 나는 내 원고 나부랭이를 팽개치고 행동하는 인생으로 뛰어들 구실을 찾았다. 나는 이 새로운 인생에 책 부스러기를 동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 인 조르바』pp 14, 열린책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그리스 인 조르바』에서 시인인 '나'는 자유로운 인간 알렉시스 조르바를 만나고 난 후부터 자신의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하나의 글을 완성하기 위해서 미완성인 채 수없이 원고 뭉치를 만지작거렸던 시인은 그동안의 글쓰기 인생에 대해서 회의를 품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조르바와 동행함으로써 책에만 골몰하게 파묻혔던 '책벌레' 생활을 청산하고 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자유의 바다에 뛰어 들어가게 된다.

여기서 조르바는 시인을 처음 만나 인사를 나눌 때 그를 '책벌레'라고 부른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만 표현할 줄 밖에 모르는, 거대한 사회에 직접 부딪혀 행동하지 못한 사회적 숙맥을 비아냥거렸던 것이다. 하지만 세상만사 다 겪어 본 천하의 조르바도 제대로 모르는 사실이 있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줄 알고 책만 읽는 사람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르바처럼 자신의 생각을 몸소 행동으로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은 문학을 소홀히 하거나 낮추어 보지 않았다.




- 장 코르미에 『체 게바라 평전』(실천문학사) 중에서 -


혁명가와 운동가로만 알려진 체 게바라가 시를 썼다는 사실은 그 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르헨티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체 게바라는 프랑스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소포클레스, 랭보, 세익스피어에 심취할 정도로 문학을 좋아했던 '열혈남아'였다. 쿠바로 건너가 게릴라로 혁명운동에 동참한 그는 목숨을 건 전투중에도 괴테, 보들레르 등의 책을 베낭속에 갖고 다녔다. 적군의 총알이 자신의 심장을 뚫릴지도 모르는 전장 한가운데서 늦은 밤에 등불의 기름을 낭비하면서까지 괴테 전기를 읽고 있는 체 게바라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혁명가의 색다른 면모이다.

일기에는 수많은 전투기록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간결한 시 같은 글들이 적지 않았다. 그가 쓴 시에는 일찍부터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혁명가의 진지한 내면고백이 담겨 있다.


내 나이 열 다섯 살때
나는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를 놓고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그 죽음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이상을 찾게 된다면
나는 비로소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

(체 게바라 '나의 삶' 중에서, 『먼 저편』(문화산책) 수록)



보다 잘 사는 세상에 대한 간절한 꿈은 문학을 좋아했던 남미의 혁명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문학 관련 상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노벨문학상, 그 영예를 차지했던 문학의 거장들도 사회에 대한 깊은 관심과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 출신 문학전문기자인 사비 아옌과 스페인 출신 사진기자 킴 만레사는 3년여 동안 세계 곳곳에 살고 있는 16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들과의 인터뷰를 하게 되었는데 그 대담들을 모은 책의 제목이 『16인의 반란자들』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의 작품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읽기 수월한 책이 많지 않다. 작품을 읽어보지 않아도 그들의 가벼운 인터뷰를 먼저 접함으로써 이들에 대한 문학 세계를 이해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이들 사이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잘못된 정치이든 폭력적인 민족주의든 어떤 형태로든 권위에 저항을 한다. 부당한 권위 앞에 맞서서 '펜'이라는 훌륭한 무기에서 비롯되는 문장의 힘도 지니고 있지만 대부분 작가들은 망명이나 이민 등을 선택해 직접 행동으로 나서는 반란자가 되기도 한다. 문학이 아닌 다른 어떤 이유로 사회에 참여하고 있고 사회에서 소외된 것들과 그 사회의 지배 논리로부터 거리를 두고 맞서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올바른 의식은 기득권자들로부터 외면당하거나 폄하당하기도 한다. 1995년 수상자인 포르투갈의 주제 사라마구는 점점 부당한 권위 앞에서 시들어져만 가는 포르투갈인들의 정신을 염려스러워한다. 하지만 그의 조국은 그의 문학과 생각을 환영하지 않았다. 그를 '공산주의자'로 규정해버린 것이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이라도 '좌파'의 논리라고 규정짓는 우리나라 사회처럼 우리보다 좀 더 성숙한 사회의식을 형성한 서구 역시 이데올로기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이들은 내 책들이 지나치게 이데올로기라고 지적해요. 그들은 나만 이데올로기적이고 자기들은 아니라는 거요. 그들은 나만 이데올로기적이고 자기들은 아니라는 거요. 그들은 가톨릭은 그렇지 않다고, 급진적 신념이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어요. 나는 오로지 이데올로기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마르크스주의자거나 공산당이라는 거요. 그런 그들에게 나는 할 말이 있어요. 삼라만상에는 거의 자라지 않는 나무도 있는데, 그건 그 나무가 이질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아, 그렇다고 해서 세쿼이아가 올리브나무보다 낫다는 건 아니오. 그 반대도 아니고."
(주제 사라마구, pp 30)

1997년 수상자인 이탈리아의 다리오 포는 권력에 맞서기 위한 강력하면서도 효과적인 무기로 '풍자와 웃음'을 택했다. 고위층의 권위의식을 신랄한 말투로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희곡을 쓴 작가답다. 현재 그는 이탈리아의 민주화 운동에 힘쓰고 있으며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풍자는 권력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요. 광대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화형에 처해졌어요. 권력은 유머를 견디지 못해요. 하물며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는 통치자들조차 마찬가지요. 웃음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줘요." (다리오 포, pp 87)


다리오 포만큼이나 터키의 오르한 파묵 역시 특유의 유머로 오만한 엘리트들에 대한 조롱과 비판을 할 수 있는 무기를 장착하고 있다. 터키 극우주의자들로부터 암살 위협을 받을 정도로 경호원의 동행이 필요한 생활임에도 불구하고 사진 속 호탕하게 웃고 있는 모습은 평소에도 그가 긍정적인 마음과 유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유머와 웃음 속에는 세상에 대한 직설적이고도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숨겨져 있다.





"또한 나는 경박한 자들을, 저 위에서 종교와 문화적 신념과 특권층이 아닌 계층들을 경멸의 눈으로 내려다보는 상류층을 증오해요. 나는 엘리트들의 오만함에 분노해요. 그들은 교만과 자존심으로 이 나라를 다스리고 민주주의와 문화를 파괴하고 있어요. 그건 서양이 이라크나 다른 나라들에게 저질렀던 어리석은 짓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어요. 세계를 지배하는 자들의 오만하고 천박한 행위 역시 마찬가지요." (오르한 파묵, pp 104)


1999년 수상자 귄터 그라스는 정작 참된 세상의 발전을 방해하는 적을 99%의 세계를 지배하는 1%의 존재, 즉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마당에서 자신의 텃세인마냥 휘젓고 다니는 자본가들과 그들과 결탁한 정치권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최근에 사회 불평등 구조에 대한 세계적인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는 지금, 그라스의 생각은 세계인들을 향한 일종의 경고처럼 들려진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소. 민주주의의 적은 극우와 극좌, 이슬람주의자들이라고..... 하지만 정작 우리로부터 자유의 내용물을 비워내고 있는 것은 거대기업과 은행들, 입법권을 쥐고 흔드는 정치권력이란 게 증명되고 있어요. 우리를 쫓아내는 기업들은 자기들의 주가가 오르는 동안, 모두한테 익숙해진 파렴치한 타락행위를 일삼고 있어요. (생략) " (귄터 그라스, pp 210)


중국 출신의 가오싱젠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권력이 있으면 자유는 없다. 민주주의 체제도 마찬가지다. 나는 좌파니 우파니 하는 우스꽝스러운 차별성 너머에 존재한다"고 말해 정치권력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고 있다. 그는 권력에 직접 맞서기보다는 망명을 선택함으로써 인간적인 존재를 위한 기본 조건마저 허락하지 않는 절대 권력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서 창작을 위한 삶을 살고 있다.


"나는 나약해요. 반면에 정치권력은 아무 때나 마음만 먹으면 나를 짓밟을 수 있어요. 내가 계속해서 글을 쓰는 유일한 희망은 도피요. 나는 도망자이지, 영웅이 아니오. 도피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나를 바퀴벌레처럼 짓밟았을 거요. 나를 체제에서 벗어난 탈퇴자로 만드는 건 쉬운 일이지만, 나는 탈퇴자가 아니며 정치적으로 맞서지 않았어요. 나는 단순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수행하는 자유인으로서의 작가이며, 내가 거부했던 권력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들마저 불허하는 절대권력에서 벗어나고자 도망쳐야 했어요, 언제나 권력으로부터 멀어져야 했고, 창작을 위해서 망명을 해야 힜어요. (생략)" (가오싱젠, pp 170)




주제 사라마구 부부


다리오 포 부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부부



새로운 사회개혁을 꿈꾸는 혁명가 또는 반란자들에게는 그들의 의지를 꺾으려고 하는 적대 세력이 존재하지만 이에 맞서 저항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든든한 지원자 또는 조언자가 있기 마련이다. 『16인의 반란자들』의 인터뷰는 단순히 16인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활동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다. 항상 그들을 오랫동안 바라 봤고 지켜 본 인생의 동반자들 덕분에 16인의 작가들이 저항의식을 갖춘 반란자가 될 수 있었다. 렌즈 속에 담겨진 몇 몇 작가들 부부의 사진은 흐뭇하게 느껴진다. 오랜 세월동안 이어진 끈끈한 작가들의 부부애를 느낄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작은 볼거리 중 하나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소설이 단지 하나의 문학 작품이 아니라 작가가 삶에 대해 느끼는 문제에 대해 싸워 나가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학은 사상이나 인간의 감정을 언어로 구축한 허구적인 세계로 이루어진 장르가 아니다. 그 속에는 우리 삶을 둘러싸 일어나고 있는 실제 세계의 모습도 있다. 그리고 사회 문제가 해결하기 위한 돌파구로써 문학의 힘,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있듯이 글은 현실의 가려진 허위를 벗겨내 진실을 알리는 파급 효과를 지니고 있다. 세상이 혼란스러워질수록 문학에 좀 더 가까워져야 한다. 살면서 부딪힐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에게 멘토를 구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노벨상 수상 작가들의 작품을 읽지 않았더라도 이 책을 통해 다양한 나라의 지성과 먼저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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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3-16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내 맘대로 좋은 책 탑5안에 드는 책이다.ㅋㅋ

cyrus 2012-03-16 22:09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좋았어요, 이 책 덕분에 작가들의 소설들이
얽어보고 섶어졌여요. ^^

잘잘라 2012-03-16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어엇! 이 책.. 포기했었는데.. 결국.. 다시 보관함으로~~~ ㅋㅎ

cyrus 2012-03-17 12:48   좋아요 0 | URL
네, 꼭 읽어보셔요. 위에 스텔라님도 말씀하셨지만 정말 좋은 책이에요 ^^

감은빛 2012-03-22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관심갖고 있는 책입니다.
시루스님의 멋진 소개 덕분에 조만간 장바구니에 담게 될 듯 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