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잠 삶의 시선 17
송경동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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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하기 참 힘들다, 노동자들의 비참한 일상을...

 

 어제 서울 역삼동에서 건물붕괴 현장에서 매몰됐던 인부 한 명이 끝내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는 비보를 접했다. 건물 바닥을 철거하는 리모델링 공사를 하다가 건물이 무너져버리는 바람에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던 것이다.

 박웅현<책은 도끼다>라는 책에서 본 내용이었는데 마르셀 프루스트는 신문 읽기를 '가증스럽고 음란한 행위'라고 말함으르써 혐오했다고 한다. 24시간 동안에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 사고 등과 같은 불행한 일들을 신문 독자들로 하여금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오락거리'로 변형시키고 있다고 봤다. 

 무엇보다도 프루스트가 신문기사를 싫어했던 것은 특정 사건에 대해서 '모든 문맥을 빼버리고 말하는' 방식의 문제점에 있다. 사건이 발생하는 발단, 과정 그리고 결과를 단 몇 줄로 압축시켜버리는 신문 기사의 내용이 독자들을 무감정적으로 변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모닝커피를 음미하면서 소파에 앉아 읽으면서 몇 만 명이 죽은 테러 사건을 보면서 희희낙락하거나 둔감한 반응을 보이는 우리 '위선적인' 독자를 프루스트는 싫어했다.

 

 일반 독자들보다 문학적인 감수성이 깊었고 압축적인 내용의 신문기사를 싫어했다던 프루스트라면 송경동 시인의 '설명하기 참 힘들다' 라는 시를 읽고 찬사를 보냈을지도 모른다.

 

 

 

 설명하기 참 힘들다 - 어느 지하생활자의 보고

 

 

 지하 토목공사 때 파 들어갈 땅 주변 붕괴를 막기 위해 수직 H형 철골빔들을 박는다. 이것을 파일이라 한다. 땅을 파 들어가며 이 파일들이 주변의 지압을 견디게 하기 위해 다시 철골빔을 마주본 파일 사이사이에 수평으로 대준다. 이것을 버팀목이라고 한다. 20~30m짜리 버팀목은 없어 두 토막 내지 세 토막을 이어야 하는데, 이 연결 마디의 꺾임을 막기 위해 두 버팀목이 맞닿는 부위에 패드처럼 쇠판을 얹는다. 이것을 연결판이라고 한다. 연결판은 서른 두개의 볼트로 두 토막을 이어 휨을 방지해 준다. 이때 볼트 구멍을 꼭 드릴를 사용해 뚫어야 한다. 산소절단기를 댈 경우 열변형으로 버팀 강도 저하가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꼭 산소절단기를 이요해 그 구멍을 뚫었다. 붙잡을 것 하나 없는 허공에서 폭 30cm짜리 빔을 딛고 30kg이 넘는 핸드드릴을 사용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만 작업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버팀부 주위에 전등을 많이 달지 않는 것도 이곳이 안전계단으로 다니는 감리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그곳에서 오늘 유씨가 떨어져 죽었다. 재수가 없거나 발을 헛디뎠을 뿐이다. (pp 19)

 

 

  

 

 건축 공사 현장에서 노동 경험이 많은 시인답게 그의 시에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공사 관련 용어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수직 H형 철골빔', '연결판', '산소절단기' 등 건축 및 토목공사를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봄직한 단어들이다. 시의 중반부까지는 토목공사의 전체적인 장면이 설명되다가 마지막에서야 단 두 문장으로 토목공사에 참여한 인부의 이야기가 언급된다. 

 하지만 인부는 공사 현장에서 실족사하고 만다. 그리고 '재수가 없거나 발을 헛디뎠을 뿐이다'라고 서술하면서 시가 마무리되고 있다. 토목공사 노동자가 아니라면 직접 목격할 수 없는 불행한 사고를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기에 독자들은 토목공사 노동자들이 겪게 되는 실상을 시를 통해서 생생하게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시의 부제는 '어느 지하생활자의 보고' 이다. '설명하기 참 힘들다'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인의 입장에서는 토목공사 노동 경험에 전무한 독자들에게 지하생활자들의 일상을 보고한다는 게 힘들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자들은 '노동'은 신체를 고되게 하고 힘든 행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삶과 관련이 없는 '노동자'의 고통스러운 일상과 슬픈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연애, 폭력, 부정부패. 가십거리 등과 같은 자극적이면서도 감각적인 기사만 제공하는 TV와 언론은 노동자의 추락사만 짤막하게 압축, 언급할 뿐 노동자들이 겪게 되는 작업환경을 나열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지상의 공간 속에 살면서도 경제적인 능력이 상실되었고 심지어 지상의 인간들에게 눈에 띄지 못하는 '지하생활자'인 것이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노동자'는 죽어서 보험금을 남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낸 '지하생활자'들이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게 되고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계기가 아이러니하게도 죽고 난 이후부터이다. 안타까운 것은 짧으면서도 한 번뿐인 인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채 노동현장에서 불귀객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신문 지면을 통해서 노동현장에서 불귀객이 된 사연을 알게 된다. 그것도 하루 아침에 수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이승에서 잠시나마.

 

 

 뒷빽

 

 

 김씨가 H빔에서 떨어져 죽고 나서야
 나는 깜짝 놀랐다
 고작 시급 3천 원에 목메던 그의 몸값이
 1억이 넘는다니 도대체 이해가 안 됐다

 

 그 후 나 역시 자본주의를 우습게 아는
 든든한 빽을 가졌다
 김씨가 산 것은 50년이지만
 죽은 순간은 5초도 안 된다

 

 여차하면 죽어버리자
 내 삶의 짧은 5초도
 최소한 1억쯤은 된다는 것을 알려주자
 그간 내가 몇백 번의 죽음을 경혐했는지도
 말해주자

 

 (pp 90)

 

 

 

 노동자들은 죽어서 신문 지면상에 이름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매겨진 보험금도 남겨진다. 살아 생전 쥐꼬리만한 시급을 받으면서도 일상을 연명해오던 그들이 죽고 나서야 평생 모으기도 힘든 1억의 보험금을 받는 인생의 한 장면. 수십 년동안 돈을 벌어도 1억을 만들기 어려운 시대에 단 5초라는 죽음의 과정만 거치면 손에 쥐어보지 못한 채 얻는 보험금. 시인은 노동자들의 삶이 경제적으로 보장받지 못하는 자본주의의 현실을 냉소적으로 조롱하고 있다.

 

 

 

 

 처절한 노동작업 속에 발견한 희망과 연대

 

 송경동 시인의 시 속에는 사회로부터 외면받고 핍박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참한 일상과 남몰래 삼켜야만했던 사회에 대한 울분이 담긴 목소리가 담겨져 있다. 시라는 것은 프루스트가 혐오했던 압축적인 내용의 신문기사보다 시인이 바라보는 장면을 단 몇 줄로 표현해야 하며 이에 대한 감정도 절제하듯이 문장 속에 숨길 수 있는 특수한 글이다.

 하지만 송경동 시인의 시는 내용이 길지 않으면서도 노동자들의 고통스로운 감정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들이 경험할 수 없는 처절한 노동작업이 이루어지는 '지하생활자'들의 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백무산 시인이 말처럼 그의 시는 '바보스러우면서도 정직하다'

 

  하지만 시인은 노동자들의 고된 일상만 바라본 것은 아니다. 힘들고 처절한 노동현장 속에서도 삶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노동자들의 공동체적 연대감을 정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쇠밥

 

 

 흙먼지에 섞어 먹는 밥 
 싱거우면 녹가루에 비벼 먹고 
 석면가루도 흩뿌려 먹는 밥

 

 체인블록으로 땡겨야 제 맛인 밥
 찰진 맛 좋으면 오함마로 떡쳐 먹고
 일 없으면 고층 빔 위에 혼자라도 서서 먹는 밥

 

 시큼한 게 좋으면 오수관 때우면 먹고 
 새콤한 게 좋으면 가스관 때우면 먹고 
 연장이 모자라면 이빨로 물어뜯어서라도 먹어야하는 밥


 무엇보다 나눠 먹는 밥


 1톤짜리 앵글 져다 공평하게 나눠 먹고 
 크레인 포클레인 지게차 기사도 불러 
 함께 비지땀 흘리며 먹는 밥

 

 석양에 노을이 질 때면
 아내와 아이도 모두 사이좋게 앉아 먹는
 그 쇠밥

 

  (pp 26~27) 

  

 

 

 흙먼지, 녹가루, 석면가루 등 몸에 좋지 않은 유해한 먼지가 묻은 밥이라도 노동자들에게는 힘든 노동 뒤에 먹는 밥은 꿀맛이다. 특히 3연 중에 '연장이 모자라면 이빨로 물어뜯어서라도 먹어야하는 밥'이라는 구절에서는 고된 작업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노동자 특유의 굳센 근성을 볼 수 있다.

 

 

 꿀잠

 


 전남 여천군 쌍봉면 주삼리 끝자락
 남해화학 보수공사현장 가면 지금도
 식판 가득 고봉으로 머슴밥 먹고 
 유류탱크 및 그늘에 누워 선잠 든 사람 있으리

 

 이삼십 분 눈 붙임이지만 그 맛
 간밤 갈대밭 우그러뜨리던 그 짓보다 찰져
 신문쪼가리 석면쪼가리 
 깔기도 전에 몰려들던 몽환

 

 필사적으로 필사적으로 
 꿈자락 붙들고 늘어지다가도 
 소혀처럼 따가운 햇볕이 날름 이마를 훑으면
 비실비실 눈감은 채로 
 남은 그늘 찾아 옮기던 순한 행렬  

 

 (pp 54)

 

 

 힘든 노동작업을 하고 난 뒤에 먹는 쇠밥이 '꿀맛'이라면 이삼십 분 새우잠은 '꿀잠'이다. 독자들에게는 지나치기 쉽고 외면해버리는 시간들이지만 이들에게는 고된 노동을 잠시나마 잊혀지게 만드는 달콤한 시간이다. 노동을 해보지 않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다. 노동자들에게 '꿀잠'은 신체적, 정신적인 휴식의 과정이 아니라 가난한 일상 속에서도 그들이 소망하는 희망의 삶을 꿈꾸게 만드는 행복한 망중한이다. '꿀밥'과 '꿀잠'이 있기에 노동자들은 남들보다 먼저 일찍 일어나 남들보다 더 힘든 일을,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윤과 생산을 더 많이 창출하도록 더욱 박차를 가하는 바쁜 자본주의의 일상이 노동자들에게는 삶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긍정적 자기위안의 기회마저 사라지게끔 만들고 있다. 

 전국의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추운 날씨 속에서도 투쟁을 하는 것은 단지 자신들의 경제적 지위만 되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꿀밥'을 먹을 수 있으며 '꿀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일만 하는 노동자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원한다.

 

 

싸우려면 끝까지 싸워야지
도중에 그만두면 영원히 찌그러진다는 것

 

 - 송경동「마음의 창살」중에서, pp 55 -

 

 

 

 시인이 쓴 저 구절처럼 노동자들은 잃어버린 생존권을 찾기 위해서 오늘도 자본가에 맞서 싸우고 있다. 경제적 자립성과 생존권은 이미 자본가들과 전경의 구둣발에 찌그러질대로 찌그러졌지만 남은 인생동안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는 희망의 기대감만큼은 그들에 의해 찌그러지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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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1-12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가 정말 말은 잘했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사람을 편협하게 만들고 오만하게 만들지.
신문나 뉴스 한번 본 걸 가지고 전체를 본듯 착각하게 만드는 거.
책은 도끼다. 제목이 특이한데 왜 그런 제목을 썼을지 궁금하긴 하다.
시집에 대해 얘기 안하고 엄한 책이 꽂히다니 나도 참...ㅠ

cyrus 2012-01-12 23:10   좋아요 0 | URL
한 번 읽어보세요, 책에 소개된 박웅현씨의 독서법도 좋고요..
책 속에 좋은 구절도 많이 볼 수 있답니다. 덕분에 이 책을 통해서
김훈과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어보려고 해요. ^^

차트랑 2012-01-12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적 가치의 최고봉이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이 노동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적 가치를 창출해내는 노동자들은 정작 그에 알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아니, 대우해주지 않는 사회입니다.

누군가는 "당신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라고 했다는데....
정녕 아름답게 생각하지 않는 사회는 도대체 어떤 사회란 말인가요...
가치관과 행동관이 일치하지 않는 사회에게 우리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하는 것인가요...

글을 읽다보니 이런 생각이 들어 마음이 몹시 무겁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글을 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습니다.
고맙습니다..

cyrus 2012-01-12 23:14   좋아요 0 | URL
아니에요. 저도 아무 것도 몰랐던 어렸을 때에는 노동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이 무척 강했어요. 요즘 저 같은 젊은 세대들도
막노동을 힘들고 더럽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는 식으로 인식하듯이 말이죠.
하지만 송경동 시인의 시를 읽고나니 노동이라는 것도 무조건 힘든 일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상 속에서도
삶의 희망을 찾고 비록 짧지만 휴식을 통해서 행복을 얻는 모습들이
노동을 접하지 못한 저로써는 무척 새로웠습니다.
요즘 이 분의 산문집이 많이 읽혀지고 있는데 독자들이 시집들도
많이 읽혀졌으면 좋겠어요. 송경동 시인의 시 속에서는 정말
우리가 몰랐던 노동자들의 삶을 볼 수 있거든요 ^^

잘잘라 2012-01-13 0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과 1년도 안 된 얼마 전까지 건축 공사 현장 감리를 했고 또 봄이면 그 일을 시작할 예정이라 이건 꼭 얘기를 하고 싶어요.

'재수가 없거나 발을 헛디뎠을 뿐이다'라는 말을 공사 관리 감독관 처럼 얘기했다고 하셨는데, 그건 그렇지 않거든요. 감리자가 제일 신경쓰는게 안전 관리예요. 안전모, 안전띠 착용, 안전판 설치.. 물론 공사 규모에 따라 감리자가 상주하는 현장도 있고 그렇지 않은 현장도 있지만 아무튼 현장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제일 먼저 조사 대상이 되는 사람이 바로 감리자거든요. 물론 감리자가 할 일 중에 부실공사를 막는 것도 큰 일이지만 그보다는 안전 공사를 하는데 더 큰 역할을 해야 해요.

말씀하신 것처럼 공사현장은 항상 공기(공사기간)에 쫓기기 때문에 시공사는 안전에 소흘하기 쉬워요. 그러나 감리자는 감리자의 업무 중에 안전관리가 들어있기때문에 공사현장에서 그나마 공기보다 안전을 우선 순위에 둘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감리자예요. 감리자와 별도로 감독관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일하는 분도 있어요. 제 느낌에는 cyrus님이 얘기하신 '공사 관리 감독관'이란 아마도 '현장 소장'을 얘기하시는 것 같아요.

감리자든 감독관이든 현장소장이든 아무튼 현장에서 사망 사고가 났는데 저렇게 태평스런 얘기를 하는 경우는 없어요. 소속은 달라도 모두가 피고용인이라는 입장은 같은 것이고 맡은 업무에 따라 현장에서 발생한 사고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사람들인데 저렇게 간단히 남 일 처럼 얘기할 수는 없지요.

저도 송경동 시인의 책 읽고 있는데 많은 부분 공감하는 부분도 있는 반면 너무 노동자를 별개로 격리된 존재로 부각시키는 면도 있다고 생각해요. 댓글이 너무 길어지네요. 리뷰 쓰면서 제 생각을 더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cyrus 2012-01-13 10:47   좋아요 0 | URL
제가 노동 경험이 없어서 모르고 있었어요. 공사 관리 감독관이라는 것도
있고 현장 소장이라는 직책도 있었군요. 포핀스님의 지적이 아니었다면
제 글 때문에 공사 관리 감독관이라는 직업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비춰질 우려가 있었어요. 문제가 되는 내용을 수정해야겠어요.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

그런데 건축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신다니 다치지 않도록
몸 조심하셨으면 해요 ^^

차트랑 2012-01-13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리 포핀스님은 모르시는게 도대체 무엇인가요??
매우 해박하시다보니 감탄스러워서 건방지게 리플을 달았습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