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프리젠테이션 발표를 했다.
지난 주에 작성한 '진보와 보수 관점에서 바라본 한국정부사' 라는 과제였다. 과제 관련 수업은 한국정부론이었는데 이번 주 월요일에 발표를 했었다.
처음에 작성했을 때는 논란이 많은 이승만 정부와 박정희 정부를 중심으로 비교, 정리를 했었는데 발표를 위해서 제1공화국부터 현 이명박 정부까지 모조리 조사하게 되었다.
사연은 이렇다. 지난 주 토요일, 집에서 주말을 잘 보내고 있던 중에 교수님께서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말에 그것도 한밤중에 교수님이 나에게 전화를 걸다니... 처음에는 전화의 목적을 알지 못했다. 교수님이 나에게 전화를 했던 이유는 월요일에 과제 발표를 할 터이니 내용을 좀 더 보충하라는 것이었다. 교수님의 요청에 너무 쉽게 동의는 했지만 주말동안 과제를 보충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주말에는 시험 공부를 할려고 했었다.
토요일, 일요일. 단 이틀동안 내용 보충에다가 발표를 위한 프리젠테이션까지 준비를 해야만 했다. 이틀동안 잠 한 번 제대로 자지 못한채 과제 발표 준비에만 몰두하였다.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완성하고 난 뒤에 발표할 때 내용을 수월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일종의 발표문을 따로 정리하였다. 발표문을 작성하고 나니 한국정부사와 관련된 주요 내용은 알게 되었다. 덕분에 제대로 한국정부사를 공부한 셈인 것이다.
과제를 완성하고 나서 발표 준비 연습도 해보게 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처음으로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발표를 하는데도 전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80명의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발표를 해야되는데 말이다. 오히려 발표가 잘 될 것 같다는 긍정적인 기대감만 들었을 뿐이었다. ^^;;
그런 긍정적인 마음 덕분이었을까...?
어쩌면 발표문을 완벽하게 준비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애초부터 준비했던 발표문 그대로 읽으려고 작정했었기 때문이다.
막상 강단에 오르고 나니 오히려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준비했던 모든 것들을 교수님과 많은 학생들에게 어필하고 싶은 마음이 느껴졌다.
비록 발표 시간은 30분 정도 걸렸던 것 그리고 발표 준비를 많이 하지 못해서 따로 준비한 발표문에 너무 의지한 채 발표했던 점만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나의 발표에 대해서 교수님과 학생들의 평이 좋았다. 아무래도 내가 준비한 과제의 주제와 프리젠테이션 자료가 그 날 나와 같이 발표했던 학생들과는 다르게 참신했기 때문에 좋은 평을 받을 수 있었던거 같다.
처음으로 파워포인트 발표를 하면서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프리젠테이션 발표에 대한 자신감이 더 생겼을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훌륭한 프리젠테이션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번 학기에 듣고 있는 수업들 중에는 조별 발표가 많이 있는 편이다. 두 세번 정도 발표에 참여하게 될거 같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이번 중간고사 끝나고 난 뒤에는 프리젠테이션 스킬에 대해서 따로 공부를 할 예정이다.
프리젠테이션 스킬 공부하랴, 과제 준비하랴 그나마 한가할 것만 같았던 11월도 바빠질거 같다.
덤으로 프리젠테이션 발표문을 올려본다. 내용은 10월 1일에 블로그에 작성했던 내용을 좀 더 수정, 내용을 첨가한 것이다. 갑작스런 발표 일정 때문에 이틀동안 부랴부랴 자료를 찾아 정리한 것이다. 재1공화국에서 현재 이명박 정부까지 역사순으로 배열하여 정리하였지만 발표 시간 한계상 한국정부사에 관련된 주요 내용을 제외했고 잘못된 부분도 있을 수 있다.
한국정부사와 관련하여 좀 더 보충해야 할 내용 또는 참고하면 좋은 자료와 내용이 있다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하나의 나라, 두 개의 역사
제가 발표하려는 내용은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두 개의 한국정부의 역사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언급한 두 개의 역사라는 것은 북한과 남한처럼 하나의 땅덩어리에 갈라진 두 나라의 역사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 즉 남한에서 알려져 있는 역사를 뜻하는 것입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정부를 바라보는 시각은 정권에 따라 변화해왔습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까지만 해도 반공 이데올로기 시각에서 현대사를 이해했지만,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변화면서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다양한 역사적 관점이 제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관점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현대사는 크게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는 쟁점이 되어버렸습니다.
진보와 보수
그렇다면 여기서 제가 언급한 진보와 보수는 무엇일까요? 진보와 보수를 또 다른 말로 좌파와 우파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쉽게 말하면 진보는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고 이와는 반대로 보수는 새로운 변화를 반대하고 전통적인 것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래도 분단의 역사를 경험했기 때문에 진보와 보수 간의 대립이 다른 나라에 비해 갈등이 치열합니다. 진영진보 좌파를 친북 인사(북한 정권 체제를 따르는 인사) 또는 속된 말로 빨갱이로 비하되기도 하며 보수 우파는 변화를 거부하기만 하는 머리가 나쁜, 즉 꼴통 보수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초창기 이명박 정부 시절에 정부 부처와 민간단체들이 고등학생들이 배우는 한국 근. 현대사 교과서의 ‘좌파적’ 내용을 수정해달라고 교육과학기술부에 건의해,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 이념 논쟁이 불거진 적이 있었습니다. 보수적인 입장의 여당인 한나라당은 근. 현대사 교과서가 대한민국 건국 과정과 산업화, 경제 발전, 민주주의 확립 등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묘사하면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적 정체성을 훼손하고 있고, 청소년들에게 부정적인 역사관을 심어준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진보적인 입장의 야당인 민주당은 현행 역사 교과서는 역사학계 등의 검증을 통해 확인된 내용으로써, 전체적으로 균형을 갖추고 있다고 반박했습니다.
뉴라이트의 실체 역사를 둘러싼 보수와 진보 간의 대립은 자신들의 역사적 관점을 반영한 교과서를 출간하게 되면서 대립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이 주축이 된 교과서포럼에서 출간된 대안교과서입니다.
뉴라이트는 말 그래도 직역하면 ‘신우익, 신보수주의’ 입니다. 20세기 중후반에 나타난 새로운 성향의 보수를 뜻합니다. 뉴라이트의 기원에는 1980년대에 등장한 신자유주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영국의 대처 여사나 미국이 레이건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경제 성장을 우선적인 목표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PPT 바탕화면에 있는 커다란 마크가 뉴라이트전국연합 로고입니다. 뉴라이트전국연합은 보수 진영 인사들로 구성된 대표적인 사회단체입니다.
그래서 제가 뉴라이트, 즉 보수 진영의 역사학자들이 바라보고 있는 한국정부의 역사를 진보 진영의 관점을 비교해서 정부가 수립된 제1공화국부터 노무현 정부까지 역사적 순서대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제1공화국 (이승만, 1948~1960)
며칠 전에 KBS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생애를 소개한 특별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의 과오를 덮어주거나 4.19 혁명의 의미를 왜곡된 내용을 소개해서 다큐멘터리의 공정성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습니다. 특히 진보 진영의 학자들이 다큐멘터리의 내용에 대해서 문제점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진보 입장에서 이승만 정권은 남북 분단의 원인을 초래했으며 경제적 빈곤에 시달린 독재정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이 대체적으로 많은 편입니다. 12년 간 이어진 정권 유지로 인해 민주주의의 발전을 더디게 했다고 보고 있으며 정권 인사 편성에 친일파를 등용해서 정치적으로 큰 오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보수 입장에서는 이승만 정권을 두둔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정권 때 실시한 농지분배 덕분에 남한이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던 계기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단독 정부 수립을 통한 한미 동맹 강화 덕분에 한반도가 안정적인 안보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승만 정부가 친일파 청산을 위한 반민족특위를 해산시켰으음에도 불구하고 KBS 이승만 다큐멘터리에서는 친일파 청산을 하기 위한 인재 부족을 이유 때문에 하지 못했다고 이승만 정권을 변호하는 입장으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제2공화국 (장면 내각, 1960~1961)
윤보선 제2대 대통령(左)와 장면 국무총리(右)
화면에 서로 악수를 하고 있는, 왼쪽에 있는 사람이 제2대 대통령 윤보선입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 장면 국무총리입니다. 일반적으로 제2공화국을 국무총리 이름을 따서 장면 내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서 내각이란 내각책임제를 말합니다. 내각책임제는 대통령은 의례적으로(형식상으로는) 국가의 우두머리이지만 실질적으로 국무총리가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정권 체제입니다.
장면 내각은 빈곤한 국가의 형편을 극복하기 위해서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워 이승만 독재정권으로 인해 시들어진 민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경제개발5개년계획안을 완성하게 되었는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경제개발계획이 박정희 정권이 제일 먼저 계획을 구상하고 실시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것은 잘못된 사실입니다. 박정희 정권이 계획을 추진한 것은 맞지만 계획안을 제일 먼저 구상한 것은 장면 내각부터 입니다. 장면 내각이 경제개발을 추진하지 못했던 것은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었기 때문입니다. 장면 내각은 이를 추진하기 위한 경제적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 미국의 원조에 기대려고 하였지만 미국 측에서 반대하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장면 내각은 이승만 정권 및 부정선거 처리문제 등 독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는데 해결하지 못하고 맙니다.
그래서 진보, 보수 진영의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실질적인 집권자나 다름없는 장면 총리의 리더십을 비판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수 진영 학자들은 경제개발5개년계획안 추친 실패를 4.19 혁명 이후 정치적 갈등(집권당 민주당 내 신. 구파 간의 갈등)과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어 실현되지 못했다고 국내적인 요인만 설명하고 있을 뿐, 계획 추친하는데 실패하게 만든 외부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반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장면 내각은 미숙한 국정 운영을 거듭하다가 1961년 5월 16일, 한 무리의 군인들이 총과 탱크를 앞세우고 수도 서울을 한순간에 장악해버리고 맙니다.
제3공화국 (박정희, 1963~1972)
그들이 바로 당시 육군사관학교 소장이었던 박정희의 주도로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 군인들이 군사력으로 정권을 장악해버리고 맙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5.16 군사정변을 실질적으로는 군사력을 동원한 불법적인 정권 장악, 즉 쿠데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에 장면 내각에 대해서도 설명했듯이 박정희 정권의 경제계발계획은 장면 내각 때 수립된 것을 그저 모방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경제성장 이후에도 빈부 격차는 여전했고, 정계 내 정격 유착 등의 부작용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베트남 파병 결정은 실제로는 전쟁에 참정하는 국제적 명분의 설득력이 없었으며 ‘미국의 용병’ 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보수 진영의 역사학자들은 5.16 쿠데타는 무능한 국가권력을 장악한 근대화 혁명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은 박정희 소장이 자신이 일으킨 쿠데타를 군사혁명으로 포장하기 위해서 내세운 혁명공약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혁명공약에는 총 6개의 조항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그 속에는 이전 정권의 부패와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서 반공을 국시로 삼는 정부를 만들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1963년에 박정희 소장이 실질적으로 정권을 잡게 되면서 실시한 경제개발은 경제 성장으로 인한 국가의 발전을 가능할 수 있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특히 베트남 전쟁 파병 이후로 경제적 이익을 획득할 수 있었으며 이는 곧 경제개발계획 추진을 위한 재원이 될 수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제4공화국 (유신체제, 박정희, 1972~1979)
박정희 정권의 유지는 유신체제가 성립된 제4공화국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진보 입장에서는 유신체제는 집권 능률의 극대화라는 명분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무려 18년 동안 절대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국정원에 해당되는 국가정보원을 기반으로 야당과 당파 저항세력에 대해서 24시간 감시하고 통제했습니다. 이 때문에 박정희 체제의 통치방식을 ‘정보정치’ 또는 ‘공작정치’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수 입장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단순히 개인적 권력욕 때문에 유신체제를 허용한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유신체제가 단행된 1960년대 후반에는 남한에 대한 북한의 군사적 공세가 강화되었고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와 상의 없이 주한 미국군의 3분의 1를 철군할 계획을 발표했었기에 박정희 정권이 급변한 국제정세에 대응하기 위해서 자주국방 체제, 즉 유신체제를 선포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비록 대의제적 민주주의 정치 원리는 소멸되었지만 권위주의적 통치 덕분에 냉전 시대동안 국가 안보가 유지될 수 있었으며 이를 기회삼아 대한민국이 경제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979년 10월 26일 자신의 동지나 다름없었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암살당함으로써 종신권력의 꿈은 사라지는 동시에 18년이라는 박정희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제5공화국 (전두환, 1981~1987)
10.26 사태
제6공화국 (노태우, 1988~1993)
하지만 전두환 정권도 시민들의 민주화 바람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제5공화국 헌법을 고수하여 정권의 연장을 획책하려는 정권에 대항하여 대다수 시민들이 6월 항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대통령직선제 개헌 등이 포함된 6·29 선언을 하게 됨으로써 제5공화국 종식의 계기를 마련하였고 처음으로 여야합의에 따라 대통령직선제, 5년 단임제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국민투표에 의해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 역시 12.12 사태에 참여한 신군부 세력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다음에 노태우라는 또 다른 신군부 출신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총선에 맞붙게 될 야권의 3후보인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이 후보단일화가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어쨌든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는 국민들의 민주화 열풍을 인식했는지 과거 신군부의 행적 처벌과 5.18 광주민중항쟁 진상규명을 위한 5공청문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민주화를 촉진시키는 데 기여를 했지만, 신군부 비리의 진상을 완전히 규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사실 보수 진영에서도 노태우 정권이 신군부 세력을 계승했다는 사실을 인정은 하고 있습니다만, 뉴라이트 대안 교과서에는 5공청문회에 대한 내용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문민의 정부 (김영삼, 1993~1998)
문민의 정부라고 불리기도 하는 김영삼 정부는 과감히 개혁정잭을 폈습니다. 공직자 재산등록 의무화와 금융실명제(금융기관에서 거래를 실명으로 해야함)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방자치선거를 실시하게 됨으로써 민주화에 기여했습니다.
신군부의 핵심이었던 하나회 소속 군인들을 숙정하기 시작하였고 그 일환으로 전두환, 노태우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을 광주항쟁 내란 목적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유신체제에 대해서만큼은 전혀 단죄하지 않았고 여전히 광주학살, 12.12 사태 관련 진상 규명도 미흡했습니다. 결국 무거운 징역형을 선고받은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은 1997년 12월 대통령 선거 직후 석방되었습니다.
김영삼 정부는 후반기로 갈수록 실정을 거듭하게 됩니다.
김영삼 정권 하의 최대 비리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한보철강 부도사태는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이 관련되어 있어서 정부의 권위가 급격히 추락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한보철강 부도 이후 대기업들이 연쇄적으로 부도를 맞게 되면서 외환위기까지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무기징역,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징역 17년형에 처해졌음에도 석방되었듯이 김영삼 정부가 군부 내의 정치 세력을 완전히 청산했을지는 몰라도 과거 행적에 대한 확실한 진상 규명과 처벌을 제대로 이루었다고 평가하기에는 논란이 있는 부분입니다. 더욱이 외환위기를 오게 한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한보철강 부도사태에 대한 내용이 누락된 점에서는 보수 진영의 역사 기록의 옥의 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국민의 정부 (김대중, 1998~2003)
김대중 정부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노벨 평화상과 그리고 햇볕정책입니다. 그 중에 햇볕정책은 처음 도입된 김대중 정부 시절 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정책의 실효성을 둘러싸고 호불호의 반응으로 엇갈리고 있습니다.
진보 진영에서는 햇볕정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햇볕정책은 남북한 사이의 긴장관계를 완화시켰으며 화해와 포용을 통해 북한을 개혁, 개방으로 유도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가 남긴 잊어서는 안 될 또 다른 공적은 재정 및 금융 긴축을 통한 경제개혁을 단행한 끝에 IMF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한 것입니다.
하지만 보수 진영에서는 지금까지도 김대중 정부에 대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햇볕정책을 통해 실시한 대북 원조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부 시절이었던 1999년과 2002년 두 차례나 연평해전 발발 그리고 북측에 5억 달러가 송금된 대북 송금 사건 논란으로 인해 정책의 목적인 북한 개혁, 개방 유도는 실패였음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지 얼마 안 된 1998년에 일본이 기존의 한일어업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자 정부는 일본의 입장을 수용한 새로운 한일어업협정을 맺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보수 진영 학자들은 이 협정으로 인해 한일 간의 독도 영유권 문제를 야기시켰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참여정부 (노무현, 2003~2008)
노무현 대통령은 인터넷 선거 혁명을 통해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고, 참여정부를 표방한 노무현 정부에 있어 ‘온라인 국민 참여 포털’ 구축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김대중의 뒤를 이어 햇볕 정책에 이은 대북 포용 정책을 계승하여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2000년 6.15 공동선언을 계승한 10.4 선언을 이끌어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전시 작전 통제권 환수를 추진하여 2012년 4월 17일에 환수받기로 했습니다. 이는 한국 전쟁 이후 군사 작전 통제권을 전적으로 행사하지 못하여 자주 국가로서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온 것을 시정하게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임기중 대통령 선거에서 공약으로 내세웠던 '신행정수도 이전' 에 대하여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내림으로써 타격을 입게 됩니다. 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여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으며, 유력 일간신문을 비롯한 언론과 대립하여 임기 내내 언론으로부터 호의적 반응을 얻지 못하는 등 보수 진영으로부터는 친북 좌파라는 비난을, 진보 진영으로부터는 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보수 진영에서는 노무현 정부의 권력 기반이 취약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북한 문제를 외교적으로 잘 관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 반면에 일각에서는 대북 저자세 외교에 대한 비판이 있습니다. 민간 차원의 북한 반대 운동을 탄압하여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였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보수 성향 민간단체의 인공기 소각 퍼포먼스에 대해 대통령이 직접 북한에 사과한 것에 대해서도 대북 굴종 외교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전시작전통제권을 단독으로 행사한다는 것은 오랫동안 이어진 한미 동맹 파기를 의미하며 북한에게 군사력으로 흡수통일 될 우려를 표하기도 합니다.
현재 이명박 정부는...
그러면 마지막이자 현재 두 진영이 바라보는 이명박 정부의 모습에 대해서 남았는데요....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상반된 입장으로 충돌되고 있는 최대의 논점이라면 아무래도 4대강 사업일 겁니다. 진보 진영에서는 국민들의 세금만 축내고 있는 4대강 사업을 반대하고 있고요... 정부의 미디어 및 언론통제에 대해서는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현 정부에서의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 간의 대립이 팽팽한데요...
최근에 정부 부처와 보수 진영 민간단체들이 고등학생들이 배우고 있는 한국 근. 현대사 교과서에 ‘민주주의’ 를 ‘자유민주주의’ 로 수정해달라고 교육과학기술부에 건의해,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이념 논쟁 중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자유민주주의’ 라는 용어의 의미에 대해서도 지금도 상당한 정치적 논란을 불러오고 있습니다. 이는 과거 군사독재 정권이 권위주의적 반공주의를 미화하기 위해 이와 같은 단어를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래서 진보 진영에서는 일부 보수 진영이 쓰는 '자유민주주의' 라는 단어에 지금도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냥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일부 보수 진영에서는 대한민국 정체성을 이유로 ‘자유민주주의’ 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 만화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손에 쥐고 있는 것이 뉴라이트 역사 교과서입니다. 뉴라이트 교과서들을 담은 꾸러미에는 임시정부 법통 무시, 독재 미화, 이명박 치적 홍보 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뉴라이트 역사 교과서에 실려 있는 것들이며 훗날 미래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 뉴라이트 교과서에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만 소개될 수도 있습니다.
끝나지 않은 이념 대립
지난 10년간 교과서가 바뀔 때마다 정권의 ‘이념적 성향’ 에 맞는 내용을 넣기 위해 각자 목소리를 높이며 충돌했습니다. 편향 교과서를 비판하겠다는 교과서포럼은 대안 교과서를 출판했지만 편향 논란을 극복하겠다는 의도를 부합시키지 못했습니다. 제가 한국정부사를 조사하고 공부하면서 교과서포럼에서 만든 역사교과서를 쭉 훑어보면서...
역사적으로 맞는 내용도 있었지만 제가 보기에도 확실하게 검증이 되지 않는, 좀 애매모호한 내용도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학술적으로 논쟁이 될 정도로 결론이 나지 않은 내용은 다양한 관점을 같이 비교, 소개했으면 좋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내용의 관점을 인식하고 이해하면 좋을텐데 보수, 진보 이 두 진영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신념을 그대로 유지하고 고수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각과 다른 입장을 전혀 알아보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말이 무조건 맞다면서 상대방을 무시하고 헐뜯고 욕하기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보수는 진보에게 북한에 넘어가서 아부나 떨 줄 아는 빨갱이라고 부르고 진보는 또 보수에게 앞뒤 꽉 막힌 꼴통이라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저는 끝이 보이지 않는 이념 간의 대립은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지금도 좌. 우 이념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에 갇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자가 나름대로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고정적이면서도 자신에게는 익숙한 현상에만 주목하고 그것만 가지고 사회를 인식하려고 합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새는 좌우의 날개가 아니라 온몸으로 난다.
모든 생명은 저마다 온전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철수 作)
이제 한국정부사를 조사하면서 느낀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밝히면서 발표를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독수리에게 한 쪽 날개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결국, 한 쪽 날개가 없는 독수리는 제대로 하늘을 날지 못한 채 땅바닥으로 추락하고 맙니다.
작년에 돌아가신 리영희 한양대 교수는 진보와 보수 이념의 틀에 갇힌 지식인과 시민들에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
즉, 이 말 속에는 세상을 균형 잡힌 시각을 바라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 쪽 날개가 없는 새는 하늘을 제대로 날 수가 없듯이 인간 역시 한 쪽 시선에만 바라볼 줄 아는 외눈박이가 된다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역사를 둘러싼 이념 논쟁은 끝낼 수 있는 것은 역사를 기록하는 객관적인 역사적 소명의식을 가져야하는 역사가의 임무도 중요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기록된 역사를 바라보고 공부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태도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정부론 1주차 수업 시간에 교수님께서도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는 것' 만이 힘이 아니라 '진실을 왜곡하지 않은 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 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요구되고 있는 힘입니다. 저는 지금과 같은 우리 사회에 필요하는 힘이라는 것이 이념으로 덧칠된 역사를 제대로 알고 볼 줄 아는 균형적인 시각을 가진 안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부족한 자료에다가 긴 시간의 발표임에도 끝까지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후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 자격으로 얻게 되었고 그 해에 바로 정식으로 제 10대 대통령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하지만 최규하 대통령의 권한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노태우 9사단장을 주축으로 한
하나회라는 신군부 세력이 일명
12.12 사태를 일으켜 군사력을 장악하고 맙니다. 이렇다보니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 세력에 의해서 제대로 된 권한 한 번도 행사하지 못한 채 이듬해 1981년에 역대 가장 짧은 임기 기간(약 8개월 정도)이라는 기록을 남긴 채 사임하게 됩니다. 정식으로 사임하기 전까지는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 세력에게 휘둘린 그저 허수아비 대통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군부, 즉 군인들이 주축이 된 세력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면 박정희 대통령의 5.16 군사정변과 유사하면서도 전두환 정부는 유신체제를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경제성장을 최우선 정책으로 추구한 점이 유사했으며 반대 정치세력을 탄압했고 저항하는 광주 시민의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5.18 광주민중항쟁은 민주화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수 입장에서는 유신체제의 연장은 전두환 정권의 원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원집정제를 시도한 최규하 대통령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식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원집정제란 대통령 중심제와 의원내각제의 요소를 절충한 정부형태를 말합니다. 대통령은 국방과 외교에 관한 권한을, 총리는 내정에 관한 권한을 나누어 가지다가 국가 비상시가 되면 대통령이 모든 권한을 장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두환 정권 시절 때 이루어진 시민, 학생 주도의 민주화 운동들은 급진적 좌파 세력이 참여, 주도했고 이를 계기로 독자적 정치 세력으로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