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두꺼운 책 두 권이 있다. 이번달 신간평가 선정도서인 <반자본 발전사전>과 작년 말에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한하운 전집>이다. 

이번 달 신간평가 선정도서는 분량면이나 내용면이나 어메이징하다.  지금도 [인문/사회] 평가단원분들은 합치면 벽돌 두 개만한 무게의 책 두 권을 마감기한 내까지 읽고 리뷰를 쓰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닐 것이다.  나 역시 압박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반자본 발전사전> 리뷰만 올리면 되는데 며칠전에 서재 블로그에 글을 쓰다가 그만 썼던 글들이 한순간에 날라가버린 좌절감에 가까운 일을 겪어야했다.  한참 잘 쓰다가 컴퓨터가 갑자기 꺼져버린 것이다.  컴퓨터가 날려버린 잃어버린 내용들의 파편을 찾느라고 요 며칠 내 개고생이다.  600페이지에 가까운 책을 재독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기에는 적지 않은 분량을 다시 읽기에는 시간상 너무 아깝기만 하다.   그래서 이 책만 보면 저절로 짜증이 나기도 한다.  

 

봄이 되면 잃어버린 입맛을 되찾기 위해서 새콤하면서도 알싸한 봄 나물 무침을 먹는다. 입 안에 감도는 향긋한 봄 나물의 맛이 우리의 미각을 자극하듯이 요즘과 같이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에는 간결하고 감동의 여운이 감도는 시를 읽으면 감성이 자극 되어서 좋다. 

그래서 나름 시를 읽어보려고 <한하운 전집>을 골랐는데 <반 자본 발전사전>보다 분량이 더 많다.  <한하운 전집>은 무려 800페이지 정도나 된다. 이미 <리영희 평전>을 읽어서 망정이지 만약에 이 책마저 안 읽었다면,,,    생각하기도 싫다.  

<한하운 전집>도 읽게 되면 마음이 심란해지기도 한다. 문둥병 환자로써 살아야했던 한하운 시인의 삶은 그가 쓴 시 못지 않게 안타까우면서도 애처롭기만 하다. 특히 R양과의 러브 스토리는...   

봄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시작하는 시기이면서도 우리의 감성을 포근하게 해주는 계절이다. 행복의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봄 바람을 한하운 시인에게는 자신의 피부를 따끔거리게 하는 무더운 여름 햇볕이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조금씩 문둥병 증상이 오고 있음을 인지한 한하운 시인은 그 이후로부터 하루하루를 절망과 비탄의 시간을 보내야했다.  특히 무서운 증상을 발견하기 전까지 짝사랑하고 있었던 R양과의 관계가 무너질까봐 두려웠다.    

그러나 한하운 시인은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무릅쓰고 R양에게 당당히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R이야말로 자신의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진 삶을 구원할 수 있는 애인이라고 고백하였고 그동안 마음 속에 억누르고 있었던 회한의 감정을 시로 읊었다. 

 

외톨리 푸른 잎 하나가
심산벽수 시냇물 흰 구름 위로 떠나갑니다.
어느 사랑의 찢어진 화전이라 할까.

천도(天桃)빛 꽃송이 하나가
검은 밤 시냇물에 별 사이로 흘러갑니다.
어느 실연의 주검이 떠나는 것이라 할까.
  

- 한하운 <낙화유수>, 시인이 중학생 때 쓴 시 -


그러나 시인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시인의 고백과 시를 묵묵히 듣고 있던 R은 오히려 그의 진심 어린 사랑을 알아주었다.   시인은 시를 통해서 자신을 ' 외톨리 푸른 잎 하나 ' 와 ' 천도빛 꽃송이 하나 ' 로 비유하여 문둥이로 살아야하는 자신의 심적 고통과 R를 향한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절실히 표현하고 있다.

 

"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저를 그렇게 생각하시면 저는 슬퍼져요.

저는 H씨는 일생의 '허즈' 로서 언약한 이상 H씨가 불운에 처했다고 버리고 가는

그런 값싼 여자가 아닙니다. "
 

(중략)
 

R은 사람의 일생이란 똑같은 과정을 가는 것이 아닌가고 - 다만 자기가 그리워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 - 또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하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참된 행복된 삶이 아닌가고 나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 <한하운 전집> [나의 슬픈 반생기] p 228 -

  

이 때부터 한하운 시인과 R은 연인 관계로 발전했으며 문둥병을 고치기 위해서 시인이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 가장 큰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 바로 R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존재가 있었기에 한하운 시인은 수시로 자신을 덮쳐온 자살이라는 그림자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한하운 시인에게 R양은 생(生)의 의지와 재생의 용기를 북돋아준 동시에 수많은 작품을 탄생하게 해준 뮤즈(Muse)였던 것이다.  

이상하게도 두껍기만한 <한하운 전집>을 틈틈이 읽게 되면 유독 p 228를 자주 들춰 보게 된다.  자기가 그리워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R양의 말을 보면서 한 사람에 대한 지고지순한 그녀의 사랑이 한편으로는 부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랑의 힘을 통해서 R이 인생의 나락으로 빠져 들어가던 시인의 삶을 구원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대단하다. 

요즘 무척 바쁘다보니 시인과 R양의 러브 스토리의 피날레는 아직 보지 못했다. 아무래도 슬픈 피날레로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그들의 사랑극이 막을 내릴 거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결말이 좋든 안 좋든 간에 한하운 시인의 글이 읽고 싶어진다.  당분간 봄 기운이 가득한 3월달에는 두꺼운 <한하운 전집>이나 끼고 살아야될거 같다.

  

  

 

 

 

 

 

 

 

 

 

 

P.S> 요즘 봄이 되어서 그런지 단테<새로운 탄생>도 읽고 싶어진다. 작년에 읽었을 때도 단테가 쓴 소네트 구절이 참 좋았는데 시간이 있으면 이번에도 또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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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2-26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저런 사랑이 있군요.
저도 R양인데 (아니. 이니셜은 그런데 '양'은 아니군요.ㅎㅎ)
저 같은 사람은 꿈도 못 꿀 용기와 사랑이네요.
그나저나 신간평가단 책이 그렇게 두껍고 저렇게 어려운 책이라면(!!)
신간평가단 하시는 분들은 다가오고 있는 봄도 못 즐기고 계시는거 아니예요! 책 읽느라.

cyrus 2011-02-27 18:59   좋아요 0 | URL
그래서 다음달 마지막 선정도서가 분량이 얇았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이번에도 적지 않은 분량의 책이 될거 같은 불길한 생각이 드네요^^;;

마녀고양이 2011-02-26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흑, 컴퓨터 날아가면 정말 화나죠, 그걸 다시 쓰려고 하면.. ㅠㅠ
그런데 신간 평가단의 책들이 장난 아니네요, 저는 평생 꿈도 안 꿀랍니다...
아냐아냐, 그러나 사이러스님과 히어나우님을 뵈면 막 욕심이.. 인문쪽으로.. ^^

서정적인 사랑 이야기네요. 나두 그런 책 하나 골라 읽을까..
갑자기 가슴이 흘러내리려는데,, 책임지세요!

cyrus 2011-02-27 19:00   좋아요 0 | URL
신청해보세요. 마고님은 선정될 가능성이 높을거 같습니다.
음,, 서정적인 사랑 이야기는 맞는데,, 엄청난 분량의 양을 감당하셔야
됩니다. ^^;;

꽃도둑 2011-02-26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다가 왜 웃음이 나는거죠? 남의 불행에 너무 행복(?)해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이번에 받은 책 두 권이 어메이징하다는 표현 재밌어요, 거기다가 800쪽에 이르는 한하운 전집까증? 벽돌 세 장이네요...ㅎㅎ

저도 시 참 좋아하는데...그 생각도 했어요. 서재를 관리할 시간이 된다면 '내 맘대로 시 읽기' 코너를 만들어야지...이긍 리뷰 쓰기도 바쁜 이 망할넘의 생활....ㅜ.ㅜ
사이러스님 덕분에 이 봄, 생의 환희를 느끼게 해 줄 시집을 찾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cyrus 2011-02-27 19:01   좋아요 0 | URL
내일이면 본격적으로 대학생의 삶을 시작하는데 아무래도 예전처럼
책을 많이 못 읽을거 같으니 이번 기회에 시집이라도 읽어볼까 생각중이에요.
시간과 내용에 부담없이 읽을 수 있으니까요. ^^

양철나무꾼 2011-02-28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언젠가 한번 신간평가단 신청했다가 물먹었었는데...물 먹기를 다행이다 싶네요.
진짜 어메이징하군요~^^
근데 한하운 전집은 심히 땡기네요~

cyrus 2011-03-01 12:34   좋아요 0 | URL
다음 기수 때 나무꾼님이 신청하신다면 당연히 되실거 같아요. 특히 소설, 비문야, 실용/취미 분야에 신청하시면요 ^^

2011-03-02 0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