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노 열린책들 세계문학 27
에드몽 로스탕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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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화

이 이야기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그 당시, 나는 밥과 책, 이 두 존재 없이는 살 수 없었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좋은 대학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장밋빛 인생을 위해서 학교 공부에 죽어라 매달렸다.  

집안 형편도 그렇게 넉넉하지가 않아서 남들이 다 가는 입시학원을 못 다녔고 고액 과외도 꿈도 못 꾸었다. 하지만 ‘ 노력만이 살 길이다’ 라는 막연한 마음을 품은 채 학교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나는 밤 10시가 되어도 귀가하기보다는 깜깜한 골목길을 지나서 독서실로 향했다.  

그리고 또 앉아서 공부했다. 몇 몇 사람들은 공부만 하는 학창 시절은 너무 재미없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 입으로 내 학창 시절, 재미없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물론, 학창 시절에 공부만 한다면 재미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미건조한 학창 시절에 즐거움의 단비도 있었다. 공부하다가 지루하면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학생 때는 학교생활이 주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는 대체로 친구들과 어울려서 놀이공원에 간다거나 부모님 몰래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하지만 남들과 어울려 노는 것보다는 혼자서 책 읽는 것이 좋았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냥 책 읽는 게 좋았다. 이런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게 된 것도 학교 환경도 영향이 컸다. 중학생 3년, 고등학교 1학년. 총 4년을 남학생들과 부대끼는 생활을 해왔었다. 

그러다가 나의 인생을 바꾸게 되는 시기가 찾아왔다. 2학년에는 남녀공학 교실로 배정받게 되었던 것이다. 교실 총원 30명, 그 중에 여학생이 20명. 남학생보다 10명 보다 많았다. 우스갯소리로 한 교실에 남학생과 여학생이 생활하게 되면 남학생은 평소에 예쁘지 않던 동급 여학생을 예쁘게 보인다는 속설이 있다. 속설이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나도 남자이다 보니 모든 여학생이 예뻐 보일 수 밖에 없었으며 이성에 대한 솟구치는 관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런 공부와 책 밖에 몰랐던 필자가 큐피드는 너무 딱해보였는지 나에게 사랑의 화살을 쏘았는가 보다. 그것도 강렬한 사랑에 취하도록 만든 화살을.

결국에는 같은 교실의 여학생 K를 좋아하고 말았다.  

하지만 내심 좋아한다고 직접적으로 고백할 자신이 없었다. K가 공부 밖에 모르는 사랑의 백면서생인 나를 좋아할까? 몸도 비쩍 마르고, 이마도 넓어서 내 얼굴이 그렇게 잘 생긴 것도 아닌데 K가 내 고백을 받아줄까?  

나는 내성적인 성격인 반면에 K는 명랑하고 털털한 성격이었다. 괜스레 성격이 맞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퇴짜 맞을까봐 걱정하기도 했다. 그래서 같은 교실 친구이며 연애 고수인 A에게 나의 고충을 털어놓았다.  

A는 나보다 잘 생겼으며(당시 나를 포함한 10명의 남학생 중에서 그나마 잘 생겼다) 연애 경험도 풍부했다. 사실은 연애 비법을 전수받고자 해서 속마음을 A에게 털어놓았던 것이다. 나름 도움이 되고 희망적인 내용을 얻기를 바랬건만, 막상 연애 고수 A가 추천하는 비법은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A의 여심을 사로잡는 비법은 이렇다. 먼저 K에게 주말을 잡아 단 둘이 놀자고 제안한다. 만약에 K와의 즐거운 시간이 확정되면 나는 하루동안 놀아야 할 일정을 정하고, 당일에는 멋진 옷을 입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놀 때는 놀이공원에서 놀고, 식사는 외식 전문 식당에서 해야 한다. 그리고 감정이 무르익었다면 고백하라는 것이다. 연애에 젬병이었던 필자는 A의 비법을 100% 믿지 않았다. 그리고 A가 말한 대로 실천하는 것도 두려웠다. K가 흔쾌히 승낙해줄 건지 미지수이며, 재미있게 노는 경험이 전혀 없었던 필자에게는 막상 그렇게 말할 자신도 없었다. 필자는 너무나 동떨어진 현실을 스스로 인식하고 그냥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으로 접어야만 했다. 그리고 원래의 생활로 돌아왔다. 책상에 앉아서 손 때 묻은 거무칙칙한 수학의 정석을 끼적거렸다.  

.

그리고 2주 뒤에 연애 고수 A와 여학생 K는 핑크빛이 우러나오는 교내 커플이 되었다. 
 

   

  

 

 

  사랑도 모르고 표현할 줄도 모르는 남자  

 

 

 

 

작년에 개봉했던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의 원작이라는 것도 있었고, 나름 연애에 대한 비법(?)을 얻을 수 있을까하는 반신반의로 에드몽 로스탕의『시라노』을 읽었건만... 역시 읽고나서 얻은 건 이야기의 재미였을 뿐 정작 얻고자하는 소득은 없었다.

‘사랑을 모르지만 표현하는 일을 하는 남자’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사랑은 알지만 표현할 줄 모르는 남자’ 크리스티앙이라면

나는 ‘사랑도 모르고 표현할 줄도 모르는 남자’ 였다.

『시라노』를 읽기 전에는 나는 크리스티앙형인줄 알았는데 읽고 나니 그게 아니었다.  

 

시라노는 남들보다 큰 코라는 자신의 약점 때문에 사랑의 감정을 얻지 못했음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남들과의 미움의 벽을 쌓아야 했다. 그러나 묵묵히 록산에 대한 사랑을 자신의 마음속에 꾹 눌러 지켜나갔다. 사실, 뼈아픈 짝사랑의 실패 이후 나도 시라노처럼 괜히 여학생들에게 무뚝뚝하면서도 냉정하게 대하곤 했었다. 사랑의 감정을 제대로 고백하지도 못하는 소심남 주제에 한 번 겪은 사랑의 실패 원인을 나 자신이라는 것을 일부러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었다. 왜곡된 마음이 삐딱한 시선으로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다. 연애 비법을 찾는답시고 책을 읽었다가 도리어 지금까지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음을 깨닫는 동시에 내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내 인생에 찾아온 짝사랑의 기회를 스스로 인고하면서 쉽게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뒤늦은 후회감도 들었다. 

   

 

 

  '사랑 고백 조작단 ' 되기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이른 아침 감은 눈을 억지그레 떠야하는 피곤한 마음속에도
나른함속에 파묻힌 채 허덕이는 오후의 앳된 심정 속에도
당신의 그 사랑스러운 모습은 담겨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층층계단을 오르내리며 느껴지는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의 물결속에도
십년이 휠씬 넘은 그래서 이제는 삐걱대기까지 하는 낡은 피아노
그 앞에서 지친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 내눈속에도
당신의 사랑스러운 마음은 담겨 있습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당신도 느낄 수 있겠죠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당신도 느낄 수 있겠죠
비록 그날이 우리가 이마를 맞댄채 입맞춤을 나누는
아름다운 날이 아닌 서로의 다른 곳을 바라보며
잊혀져 가게 될 각자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그런 슬픈 날이라 하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내가 당신을 얼마만큼 사랑하는지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건 당신께 사랑을 받기 위함이 아닌
사랑을 느끼는 그대로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 유영석 <사랑 그대로의 사랑> 전문 -

 

케이블 방송에서 S 방송국 심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가수 유영석 씨가 출연했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유영석 씨가 미모의 미스코리아 부인을 둔 자신만의 비법(?)을 공개했다. 평소에 ‘사랑’에 대한 감정을 틈틈이 글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영석 씨는 많고 많은 미완의 글을 갈고 닦아서 ‘사랑 그대로의 사랑’ 이라는 노래를 탄생시켰다.    

 

사랑의 감정을 시적으로 표현한 가사와 피아노 건반에서 울려나오는 잔잔한 멜로디는 유영석 씨 본인이 꼽는 최고의 자작곡인 동시에 지금도 연인들이 고백할 때 사용하는 음악이다. 그리고 유영석 씨 본인도 부인에게 이 노래로 고백을 했다고 한다. 사실, 까놓고 말하면 유영석 씨는 잘 생긴 외모와 거리가 먼 평범한 얼굴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외모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오히려 타고난 음악적 재능과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적극적인 태도를 동시에 살려서 아리따운 피앙세를 얻었던 것이다.  


『시라노』에는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은 서로의 장점을 보완하여 록산에게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시라노는 이성을 유혹하게 하는 달콤한 화술, 크리스티앙은 멋진 외모를 가지고 있다. 시라노는 크리스티앙 뒤에 숨어서 그의 목소리를 대변하여 록산을 유혹하게 한다. 크리스티앙은 그냥 시라노의 말에 입만 뻥긋거리면 되었다. 두 사람이 스스로 ‘사랑 고백 조작단’이 된 것이다. 간혹 이 둘의 행동이 맞지 않아 록산이 의심하는 장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조마조마하게 만들면서도 익살스럽게 느껴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잘 생긴 외모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성격이 착해서 이성이 좋아할 수도 있으며 유재석 씨처럼 재치있는 말솜씨와 편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다. 각자 나름의 장점을 살려서 이성에게 어필할 수가 있다. 그러나 제대로 어필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얼마나 좋아하느냐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용기 있게 표현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시라노와 크리스티앙, 그리고 유영석 씨처럼 이성을 사로잡는 자신만의 사랑 고백 조작만이 커플이라는 꿈의 등급으로 상승(?)될 수 있는 비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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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1-06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영석님의 <사랑 그대로의 사랑> 이 곡 너무 좋죠.
음악에 깔려서 나직한 목소리로 읽어가는 시.....

남녀간의 사랑이란게 밀고 땡기기를 잘해야 한다는건 농담이 아닌듯 해요. 지금 바라봤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진실과 성실인데도, 그 시점에 호르몬의 영향을 무시 못 한단 말이죠. 사람은 자기 손에 닿을 듯 말 듯한 사람을 제일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요. 나 없이도 잘 살거 같은 사람이 꼭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거죠... 이건, 아마도 그런 사람을 소유함으로서 내 가치가 올라갈 것 같은 환상 때문일까요? ㅎㅎ.

cyrus 2011-01-06 15:26   좋아요 0 | URL
제가 컴맹이라 동영상을 올리지 못했네요. ^^;;
아직 저에게는 사랑이란 정말 어려운 단어인거 같아요.

stella.K 2011-01-06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 책 덕분에 시루스님의 쓴 첫 사랑 이야기도 알게 됐군요.
K 양이 털털하다면 무난히 시루스님을 받아줬을지도 모르는데 넘 소극적이었던 건
아닙니까?ㅋ 하긴 지난 일인걸요. 어쨌든 누구나 첫 사랑은 실패한다지 않습니까?
저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시루스님 나름 알찬 청소년기를 보내셨군요. 저도 청소년기를 다시 산다면
시루스님 같이 살아보고 싶은데, 문제는 인생을 다시 살아도 청소년기만큼은
절대 노라는 거죠.ㅎㅎ

cyrus 2011-01-06 15:28   좋아요 0 | URL
가끔 고등학생 동창회로 만나게 되면 항상 나오는게 실연 이야기랍니다.^^;;
막상 이야기가 나오게되면 창피스럽기도 하지만, 스텔라님 말씀대로
청소년 때 내가 헛으로 살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하지만 저도 그 때로 돌아가기 싫어요. 군대 또 가야되잖아요^^:;

감은빛 2011-01-07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첫사랑!
저는 사실 친구 A와 비슷한 경험은 있습니다.(조금 다릅니다!)
정말 쑥맥이었던 친구녀석이 전화번호를 하나 갖고 와서,
전화를 해서 말을 좀 걸어달라고 해서,
실컷 물밑 작업을 해주고, 녀석에게 직접 전화하고 만나라고 했는데,
이 녀석이 도저히 못하겠다고 그냥 포기해버리는 겁니다.
덕분에 내가 전화를 계속 하다가 만나게 되고,
결국 사귀게 된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고딩이었고, 여자애는 중딩이었어요.
나름 재밌었습니다.
아, 써놓고 보니 자랑처럼 들린다거나,
기분나빠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
절대 자랑하려거나, 기분 나빠하시라고 쓴 건 아닙니다. 아시죠 ^^

cyrus 2011-01-07 12:37   좋아요 0 | URL
아니요, 오히려 감은빛님의 러브스토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는데요. ^^ 용감한 사람만이 사랑을 얻을 수 있다는
옛날부터 전해내려온 진리가 맞는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