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열일곱 살의 인생론 - 성장을 위한 철학 에세이
안광복 지음 / 사계절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영원히 풀 수가 없었던 시험문제
나는 어느 학교의 교실에 앉아 있었다.
내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칠판, 그리고 회색빛 교탁과 수많은 책상들.
확실하지는 않지만 몇 년 전에 졸업한 고등학교 교실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고등학교 교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걸까?
갑자기 교실에 중년의 남자가 들어왔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의 한 손에는 하얀 종이 뭉치가 들려져 있었다.
선생님은 하얀 종이 뭉치를 내려놓으면서
아무 말 없이 하얀 분필을 잡아 칠판에 크게 ' 시험 ' 이라고 썼다.
그러고는 맨 앞에 있는 학생에게 자신이 가져온 하얀 종이를 전달하였다.
' 아 . . . 이것은 시험인가 보다. '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도 갑자기 이 곳에 있는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잠시,
아무런 예고 없이 시험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니 두려움이 엄습 해왔다.
하지만 어느새 내가 앉아 있는 책상 위에 시험지 한 장이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내 손에는 샤프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고등학교 때 배운 내용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한 상황이면서도
이상하게도 나는 어떻게든 책상 위에 놓인 시험지의 문제를 풀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시험지에는 알아보기 힘든 문자와 기호들이 뒤죽박죽 나열되어 있었다.
도저히 풀 수가 없는 문제들이었다.
시험지가 잘못 인쇄된 줄 알고 나는 손을 번쩍 들었지만
칠판 앞에 서 있는 선생님은 시험을 치고 있는 학생들을 멀뚱히 쳐다볼 뿐 어떠한 미동도 없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선생님의 행동.
나는 어떻게든 시험 문제를 풀어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시험시간임에도 소리를 질렀다.
" 이거 시험지가 잘못 나왔어요. 빨리 다른 시험지 주세요.
지금 시험문제 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요! "
소리라도 질러봤지만 여전히 선생님은 팔짱만 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부터 시험문제를 풀고 있던 학생들 몇 몇이
갑자기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외친 소리가 그들의 귀에는 들렸는가보다.
그런데, 나를 쳐다보는 학생들의 얼굴들이 무척 낯이 익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 공부 잘 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녀석들인 것이었다.
고등학교 교실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만나던 친구들이 한자리에 앉아 있다니 , , ,
친숙한 얼굴들을 본 순간, 그들에게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시험감독인 선생님이고 뭐고, 자리에 벌떡 일어나 친구 한 명 곁으로 다가갔다.
중학교 때 내신 상위권에 있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으며
나와 같은 반이 되면서 친했던 친구였다.
나는 그 친구가 풀고 있는 시험지를 봤다.
하지만, 그 친구가 풀고 있는 시험지 역시 오류투성이었다.
무엇보다도 신기한 것은 내 눈에는 알 수 없는 문자와 기호로 나열된
시험문제를 그 친구는 일말의 생각도 없이 풀어내고 있었다.
친구는 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시험문제 푸는데 여념이 없었다.
시험을 치고 있는 친구들이나 선생님이나
교실 속에 있는 이들은 나의 말, 아니 나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딩동, 딩동, 딩동
갑자기 교실 안에서 스피커에서 나오는 종소리가 울러 퍼졌다.
이는 분명 시험시간이 마감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종소리였다.
선생님은 종소리가 나오자마자
학생들이 풀고 있던 시험지를 재빠르게 거둬들이고 있었다.
빈 자리의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아무것도 풀지 못한 시험지마저도 . . .
나는 그런 모습을 서서 지켜만 보고 있어야 했었다.
갑자기 재발한 마음의 상처
내년에 복학을 앞두고 있는, 요즘 잠을 자게 되면 가끔씩 꾸게 되는 꿈이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밤과 낮의 생활이 반대인 지금, 아침에 퇴근하여 집에 오게 되면 낮에는 잠만 자게 된다. 그런데 낮잠에도 기억이 또렷한 꿈을 꿀 수 있는가 보다. 잠을 깨고 난 뒤에도 꿈 속 장면들이 기억이 날 정도 꾼 것은 이례적이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요즘에는 자주 예전에 다녔던 고등학교 교실에 앉아 시험을 보는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항상 시험문제들을 풀지 못한 채 꿈에서 깨고 만다. 자다가 꿈에서 깨고 나면 시험문제를 풀지 못하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생기게 되지만 얼마 안 가 ' 아, 이것은 꿈이구나 ' 하고 뒤늦게 생각하게 된다. 고등학교도 졸업한 상태인데도 꿈 속 고등학교 시험문제에 얽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면 나 자신 스스로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그냥 가볍게 웃음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그런 꿈이 아니었다. 꿈은 살아가면서 겪어가는 경험들, 그리고 느끼게 되는 감정과 의식들을 상징, 형상화되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경험한 일이 꿈에 나타나는 현상을 심리학적 용어로 타게스레스트(Tagesrest)라고 한다. 프로이트는 경험과 감정, 의식에 대한 억압적 욕망이나 불안이 변형되어 나타난 것이 꿈이라고 정의하였다. 자의적으로 꿈을 풀이해본다면 스스로 감추고 억압했던 고등학생 시절의 불안정한 감정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4년이 지나서야 꿈 속에서나마 등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중고등학생 때만 해도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위해서 죽어라 공부했었다. 특히 고등학교 3년은 오직 '수능' 이라는 목표를 내다보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10분이 주어지는 쉬는 시간에도 나는 책상에 앉아서 <수학의 정석>에 있는 문제들을 풀곤 하였다. 수학은 다른 과목보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유독 성적이 썩 좋게 나오지 못했던 과목이였기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몇 몇 주위 친구들의 시선에는 나의 이런 모습이 못마땅하였을 것이다. 지금도 그 때 친구들의 농담이 생각이 난다.
" <수학의 정석> 책만 보다가는 진짜 책에 구멍 나겠다. "
" 공부하는 자세랑 시간만큼은 정말 넌 전교 1등감이다. "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던 친구들과 만나 술잔을 기울이면 가끔 이렇게 말하곤 한다.
" 아, 나도 고등학생 때 너처럼 그렇게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공부했었더라면
지금보다 더 좋은 대학 갈 수 있었을텐데, , , "
성적은 공부의 양만큼 좋게 나오지 못했지만, 모든 학생들은 그런 공부하는 모습을 부러워하면서도 은근히 시기를 하기도 했었다. 좋은 의도인지 나쁜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나보다 공부 잘 하는 친구들은 나의 공부하는 모습을 칭찬 일색으로 치켜세우기도 했었다. 그러면서도 꼭 이런 말도 했었다.
" 너무 열심히 하는거 아니야? 그러다가 쓰러지겠다. "
그들이 친구로써 나를 위해 진심어린 말을 했었지만 듣는 나를 속으로는 무척 가슴이 쓰리듯이 언짢았다. ' 너네들이 뭘 안다고,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야.'
그들의 칭찬과 위로가 죽도록 공부해도 성적이 좋지 않았던 나를 은근히 비웃는거 같았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공부하다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살갑게 물어보곤 했었지만 마음 속에 조금씩 열등감이 쌓아져 갔다. 처음에는 성적 결과에 대한 열등감이 시간이 지날수록 나라는 존재에 대한 열등감으로 커져만 갔다.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고, 이성 친구를 사귀는 '멀티 플레이어' 친구를 보면 무척 부럽기도 하였다.
요즘 학교 교실에 있는 꿈을 꾸고나니 마음이 뒤숭숭하기도 했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에도 불구하고 가슴 속에 묵혀왔던 열등감과 분노가 나의 심기를 툭툭 건드렸던 것이다. 사춘기 시절도 지났건만 별 이상한 내용의 꿈 하나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니 , , ,
열일곱살이 된 철학교사 안광복
이런 불안의 나날을 겪고 있는 속에 때마침 철학교사 안광복 씨가 쓴 <열일곱 살의 인생론>이라는 얇은 책을 접하게 되었다. 책의 프롤로그를 읽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자신이 꿨던 꿈을 이야기해주면서 자신의 학창시절동안 겪은 사춘기로서 형성하게 되는 열등감이나 그 때의 고민들을 거리낌없이 털어놓고 있었다. 학창시절에 자신보다 잘난 친구들을 보면 열등감이 생겼으며 그 때의 괴로움을 치유하지 못했다고 저자 스스스로 밝히고 있다. 마음 속에 생긴 감정의 상처들을 독자들 앞에서 고백하기기 쉽지 않았을텐데 어린 독자들을 위해서 서슴없이 고백하는 모습이 존경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보다 어린 학생들의 말할 수 없는 속내들을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었다. 사춘기 시절에 한번쯤 마주치게 되는 ' 돈, 열등감, 사랑, 인생, 가치관 ' 등에 관한 문제에 대해 인문학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책의 부제를 ' 성장을 위한 철학 에세이' 라고 하는 것을 보면 무척 딱딱하고 어렵게 여기기 쉽상이다.
하지만, 안광복 씨의 글은 어렵게 쓰지 않았으며 그렇게 '철학적' 이지가 않았다. 학창시절의 기억과 경험을 인용하여 저자 자신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고 있는 학생들과 함께 사춘기의 고민거리와 각종 문제들을 함께 공유하고 성찰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 마흔 살의 안광복은 23년 전으로 돌아가 열일곱살의 안광복이 되어 있었다. 철학교사답게 철학자들의 지혜를 빌려 청소년 시절에 겪게 되는 고민과 생각의 문제들을 스스로 성찰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유도해주고 있다.
열등감을 열등감으로 극복하기
열등감에 대한 그의 입장과 극복 방안은 독특하다. 열등감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의 독을 오히려 인생의 성장을 위한 약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열등감이 크면 클수록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하고 있다. 처음에 그의 주장이 깊게 와닿지는 않았다. 고등학생 3년동안 줄곧 열심히 공부만 했는데도 이에 비례하는 성과가 나오지 않았음을 물론이고 오히려 열등감 때문에 자신의 감정이 짓눌려 스스로 괴롭게 된다.
하지만 저자는 인간이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 곧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평상시에 느끼는 열등감의 원인에는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구와 남이 자신보다 잘하면 생기는 질투 때문이라고 말한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남들보다 뛰어나면 주위 시선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보다 못한 상대방 역시 나 자신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게 되고 미워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살면서 생기는 열등감이라는 감정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순간적인 욕심에 의해 만들어진 나쁜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지난 과거의 열등감에 대해서도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야할 현재의 삶에 발목을 잡고 있는 부정적인 요인이다.
성숙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학창시절에 생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살아온 나로써 2010년이 저물어가고 있는 끝자락에서야 이 책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반갑고 무척 고마웠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 어느새 나도 열일곱살이 되어 있었다. 저자가 풀어내는 학창시절의 경험들이 나 역시 겪어본 일이었기 무척 공감이 갔었다.
피부의 상처나 염증을 오래 방치하게 되면 피부조직이 썩어 누런 고름이 생기게 된다. 과거의 쓰라린 감정의 상처 역시 그래도 놔두게 되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감정의 상처는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 괴로움에 살아야하며 30대, 40대, 50대, 60대가 되어서 성숙되지 못한 채 정서의 성장은 저하될 것이다. 몸은 어른이며서도 마음은 청소년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저자는 어른 독자들에게 철학적인 물음을 통해서 스스로 10대와 '직면' 해 보라고 권하고 있다. 이게 저자가 권하고 있는 '직면' 의 방법인지 모르겠지만, 책을 다 읽고 난 뒤 그동안 마음 속에 굳어져 있었던 학창시절의 열등감 응어리를 감상문에서 낱낱이 밝혔다.
글을 쓰고나니 책을 다 읽고 난 뒤보다 속이 후련하다. 이번 글쓰기는 내 마음 속에 숨어있던 못된 감정들의 기(氣)를 풀어 없애는 살풀이가 되었다. 영원히 풀 수 없는 시험지를 푸는 꿈을 꾸지 않게 된다면 이번 살풀이는 성공인 것이다. 과연 성찰적(?) 살풀이가 먹혔을지 앞으로 잠 잘 때 두고봐야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