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에 도서관 세 군데를 돌아다녔다. 도서관에 가서 빌린 책은 이미 번역된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의 단편소설 <감정의 혼란><체스 이야기>.




































[대구 독서 모임 <읽어서 세계문학 속으로> 첫 번째 선정 도서]

* 슈테판 츠바이크, 정상원 옮김 감정의 혼란》 (하영북스, 2024)


* 슈테판 츠바이크, 김선형 옮김 감정의 혼란》 (세창미디어, 2022)

 

* 슈테판 츠바이크, 서정일 옮김 감정의 혼란: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녹색광선, 2019)

 

* 슈테판 츠바이크, 박찬기 옮김 사랑을 묻다사랑의 본질에 관한 4가지 질문》 (깊은샘, 2020)


[구판 절판] 슈테판 츠바이크, 박찬기 옮김 《감정의 혼란》 (깊은샘, 1996)




<감정의 혼란> 번역본은 총 네 권이다. 최근에 새로 번역된 <감정의 혼란>이 수록된 번역본(하영북스)이 나왔다<감정의 혼란>의 분량이 길지 않아서 도서관 대출 도서인 세 권의 번역본(세창미디어, 녹색광선, 깊은샘)을 하루 만에 다 읽었다. 네 편의 <감정의 혼란> 번역문을 대조하면서 읽어 보니의미가 다른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 정상원 옮김(하영북스), 70

 

 딱 한 번 그녀가 얼결에 말을 내뱉을 뻔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받아쓴 내용을 선생님께 건네면서 나는 말로를 묘사한 부분이 얼마나 감동적이었는지를 열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전히 감탄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나는 찬사를 덧붙였다.

 “그 누구도 말로를 이처럼 거장다운 솜씨로 그려내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홱 몸을 돌리며 입술을 깨물더니 정서한 종이를 팽개치며 한심하다는 어조로 뇌까리셨다. “그따위 바보 소리는 하지 말게! 자네는 거장다운 솜씨에 대해 아는 게 대체 뭔가?”



* 김선형 옮김(세창미디어), 123~124


 단 한 번 나는 그녀가 말을 하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 그날 나는 내가 받아 적은 것을 아침에 넘겨주면서, 그 표현이(말로우의 비유였다)[역자 주] 나는 대단히 감동시켰다며 나의 스승에게 감격하여 이야기하였다. 감정이 복받쳐 열렬하게 그 누구도 그렇게 탁월한 성격묘사를 기록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때 그는 갑자기 몸을 돌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원고를 던지고 경멸하듯 중얼거렸다.

 “그런 바보 같은 말은 하지 말아요. 당신은 대가(大家)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 줄 알고 있나요?”



[역자 주] 어둠의 심장(Heart of Darkness, 1899)은 영국 작가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의 작품으로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킨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는 콘래드의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찰스 말로우(Charles Marlow)가 등장하는데, 작가는 어둠의 심장에서 당시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 지배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츠바이크가 말로우의 비유라고 표현할 만큼 콘래드의 어둠의 심장은 성격 묘사가 탁월한 것으로 평가된다. 작품 속에 주인공이 탁월한 성격 묘사를 언급한 것으로 보면 말로우의 비유는 바로 어둠의 심장이라 유추해 볼 수 있다.



* 서정일 옮김(녹색광선), 112~113


 그녀에게서 이야기를 들을 뻔한 기회가 딱 한 번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받아 쓴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선생님의 서재로 갔을 때, 그 표현(그것은 말로의 비유였습니다)을 보고 나도 모르게 너무 감격해서, 내가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선생님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쁨에 들떠 경탄하면서 어느 작가도 말로처럼 거장다운 성격 묘사를 쓸 수는 없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차갑게 몸을 돌리면서 입술을 꽉 깨물고 내가 필기한 종이를 던져버리며 업신여기는 말투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그런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말게! 자네가 거장다운 내용인지 아닌지 뭘 안다고 그러는가?”



* 박찬기 옮김(깊은샘-개정판), 99

 

 언젠가 딱 한 번 진정으로 그녀의 얘기를 들을 뻔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필기한 것을 가지고 선생님께 갔을 때, 말로의 초상에 대한 표현에 내가 얼마나 감동했는지를 말했습니다. 진심으로 그림을 그린 사람을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외면을 하여, 입술을 깨물고 종잇조각을 내버리면서, 경멸의 말을 중얼거렸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말을 하지 말게! 자네가 뭘 안다고 훌륭하니 훌륭하지 않니 하고 비평을 하나?”



하영북스판본은 말로를 묘사한 부분’, ‘깊은샘판본은 말로의 초상에 대한 표현이라고 적혀 있다. 인용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면 <감정의 혼란>의 주인공 롤란트(Roland)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에게 많은 영향을 준 영국의 극작가 크리스토퍼 말로(Christopher Marlowe)를 묘사한 것(하영북스) 또는 초상화(깊은샘)에 감동한 상태다. 롤란트는 자신의 들뜬 감정을 교수에게 솔직하게 말하는데, 교수는 셰익스피어를 좋아한다. 교수는 말로를 거장으로 칭송하는 롤란트를 꾸짖는다.





















* 조셉 콘래드, 이석구 옮김 《어둠의 심연》 (을유문화사, 2008)


* 조셉 콘래드, 이상옥 옮김 《암흑의 핵심》 (민음사, 1998)




세창미디어판본과 녹색광선판본에서 롤란트가 감동한 것은 말로가 비유한 표현이다. 롤란트는 말로의 희곡에 나온 표현에 감동했고, 인상 깊은 구절을 교수에게 말했다. 반면 세창미디어판본의 역자는 본문 밑에 달아놓은 주석석에 말로’가 영국의 소설가 조셉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장에 나오는 찰스 말로우라고 주장한다.


번역문들이 너무 달라서 <감정의 혼란> 독일어 원문을 찾아서 확인해 봤다.



 Nur ein einziges Mal war ich nahe, ihr das Wort zu entreißen. Ich hatte morgens, als ich das Diktat überbrachte, nicht umhin können, meinem Lehrer begeistert zu erzählen, wie sehr mich gerade diese Darstellung (es war Marlowes Bildnis) erschüttert habe. Und heiß noch von meinem Überschwang, fügte ich bewundernd hinzu, niemand schreibe ihm ein derart meisterliches Porträt nach; da biß er, schroff sich abkehrend, die Lippe, warf das Blatt hin und murrte verächtlich: “Reden Sie nicht solchen Unsinn! Was verstehen Sie denn schon von Meisterschaft.”



독일어를 몰라서 인터넷 독일어 사전에 단어를 입력해서 뜻을 확인했다‘Darstellung’의 뜻은 표현또는 묘사. ‘Bildnis’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초상화비유따라서 ‘Marlowes Bildnis’말로의 비유로 번역할 수 있으며 ‘말로의 초상화’로 번역할 수 있다


둘 중 어느 번역이 맞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둘 중 하나가 옳은 번역이라고 판단할 능력이 없다. ‘Marlowes Bildnis’괄호 안에 넣고, 더 이상 판단하는 것을 중지(epoche, 에포케)’하겠다.


<감정의 혼란> 액자식 소설이다. 소설 주인공이자 화자인 롤란트는 예순 살에 접어든 영문학 교수. 그는 40년 전인 20대로 되돌아가 자신이 숭배했던 교수를 회상한다. <감정의 혼란>1927에 발표되었다. 이 해를 시점으로 40년 전이면 1887, 19세기 후반이다. <감정의 혼란> 발표 연도와 소설 속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시간적 배경이 무조건 같다고 볼 수 없다오류일 가능성이 높지만일단은 이렇게 추정해 본다. 조셉 콘래드가 정식으로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해는 1895이다. <어둠의 심장>1899년에 발표된 소설이다. 1880년대에 20대였던 롤란트가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장>에 나온 찰스 말로의 비유를 보고 감동했다는 내용은 부자연스럽다.


원문에 나온 Marlowes’영국 극작가의 성()이다. <어둠의 심장>에 나온 말로는 알파벳 ‘e’가 빠진 ‘Marlow’을 쓴다. 따라서 나는 롤란트가 말한 말로는 영국의 극작가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보는 누군가는 내게 뭘 안다고 번역이 이상하다면서 따지느냐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말해도 된다. 내가 틀릴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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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6-05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선택의 폭이 넓어 좋구만. 왜 출판계가 츠바이크에 꽂혔는지 모르겠다만 난 고른다면 저 보라 책을 고르겠어. 딴뜻은 없고 예쁘잖아. ㅋ

cyrus 2024-06-06 11:39   좋아요 2 | URL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잘 표현되어 있어요. 이런 흥미진진한 내용의 단편이라면 금방 읽을 수 있어요. <감정의 혼란> 번역본 중에 실물이 좋은 건 누님이 고른 보라색 표지 번역본이에요. ^^

서니데이 2024-06-06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 책은 오래전부터 우리 나라에 번역 출간되었겠지만, 최근에 새로 출간되는 책도 많은 것 같아요. 소개해주신 책들도 날짜가 최근 몇 년 사이 출간된 책이네요.
cyrus님 현충일 휴일 잘 보내셨나요. 날씨가 많이 더워집니다.
더운 날씨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shinski 2024-06-18 15: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처남이 오래 전 읽고 감명 받았다던 책을 몇 권 추천해 주었는데 그 책들은 모리악의 <나환자에게 보내는 키스>, 츠바이크의 <감정의 혼란> 및 <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 및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이었습니다. 그 중 츠바이크의 단편은 간헐적으로 읽어 그 내용이 정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아 이번에 한번 정리도 할 겸 그의 단편을 손에 잡히는 대로 읽고 있습니다.
<체스>와 <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나 <불타는 비밀>처럼 예전에 읽었던 작품은 놔 두고 찾다보니 <어느 여인의 불안>, <어느 여인의 24시간>, <보이지 않는 소장품>, <감정의 혼란>, <황혼의 이야기>, <달빛의 뒷골목>등이 눈에 띄어 요 며칠 사이 계속 읽고 있습니다. 이번에 확인한건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어느 여인의 불안>과 <달빛의 뒷골목>은 한번 읽었던 작품이었으며 반면에 읽은줄만 알았던 <감정의 혼란> 및 <황혼의 이야기>는 처음 읽는 작품으로 밝혀져 많이 놀랐습니다.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선생의 비밀이 소설의 주제인 <감정의 혼란>은 읽은지 며칠 되었지만 계속 기억속에 남아있네요. 그나저나 위의 작품 이외에도 그의 작품 중 읽을 단편이 꽤 남아있으니 6~7월은 계속 독서로 무더위를 날려보려고 합니다.

추신 : <감정의 혼란>에 나오는 말로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극작가였던 크리스토퍼 말로우가 맞습니다. 당시 즉 셰익스피어 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활약한 극작가들로 벤 존슨,필립 시드니 등이 있는데 말로우도 이들 중 1인으로 <파우스트>나 <말타의 유대인>등을 쓴 극작가 입니다. 요행히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세창출판사에서 <어둠의 심연>이나 <로드짐>에 등장하는 말로를 <감정의 혼란>속의 말로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문맥을 무시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엘리자베스 시대 연극과 셰익스피어 얘기 가운데 갑자기 20세기 초의 소설가 콘래드의 말로를 등장시키는 것은 좀 지나친 넌센스로 볼수 있습니다. 다만, 소설에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번역가 또는 편집자가 주를 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는 데는 박수를 보냅니다.

레인보우 2024-08-25 15: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cyrus 님, 글 잘 읽었습니다. ‘말로‘에 관한 논의는 하영북스 역자의 해설(350-351쪽)에 답이 있다고 저는 봅니다.
˝동성애자임을 숨기고 사는 교수는 말로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그려내었기에˝ 롤란트가 자신의 글을 칭찬하자 ˝마치 자신의 실체가 누설되는 듯 느꼈을 것˝이고 그래서 뜬금없이 화를 냈다고 추측됩니다.
크리스토퍼 말로는 동성애자였고 타인의 이목을 두려워하지 않는 스캔들메이커이며 막장 삶을 사는 걸로 악명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해설에는 플라톤의 ‘심포지온‘과의 상호텍스트성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것 또한 흥미롭습니다.

저는 하영북스 책이 롤란트의 회상을 ˝...입니다˝(녹색광선이나 박찬기 번역)가 아닌 ˝... 이다˝로 옮긴 게 마음에 듭니다. 롤란트는 자신의 사적인 부분을 일반에 공개할 생각이 없고 이 소설의 부제가 ‘개인 기록‘인 만큼 마치 청자 내지 독자를 직접 상대하듯 ‘...입니다‘라는 어미를 쓰는 게 어색해 보입니다.